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
을 위한 세계는 없다-5화(5/817)
〈 5화 〉 주인공을 위한 우연
* * *
***
또각, 또각…
무언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지옥의 발소리가 이러할까? 걸음걸이마다 진한 피 냄새와 살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아.’
그것의 발소리가 끊긴 순간, 쇠똥구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정상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깨어나거라.』
그것의 목소리가 울렸다. 달콤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쇠똥구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감옥?’
그러나 피라미드를 올려다본 쇠똥구리는 가장 먼저 감옥을 떠올렸다.
피라미드는 평범한 돌과 흙이 아닌, 쇠창살과 철판으로 지어져 있었으니까.
『쇠똥구리.』
잠시 얼이 빠져있던 사이.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였다.』
쇠똥구리는 고개를 들어 정상을 바라봤다. 쇠창살이 가득한 정상에선, 인간의 형태를 가진 어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귀부인의 그림자처럼 여성스러운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고, 고혹적인 자세로 피라미드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쇠똥구리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에겐 입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허락되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듯, 눈, 코, 귀를 제외한 모든 육체가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여긴… 역시 꿈속인가?’
철창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유혹하듯 차려입은 그것…
모든 게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상상의 그림자요, 기억의 비유였다.
그러나 꿈인 걸 깨달았음에도, 쇠똥구리는 깨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꿈이 아니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허나, 윤허하지 않겠다.』
그것은 쇠똥구리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피라미드가 그것의 웃음소리를 막으려는 듯 거칠게 흔들렸지만, 그것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보고, 듣기만 하라. 그것이 오늘 그대에게 주어진 의무다.』
피라미드의 진동이 더욱더 격렬해졌다.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쇠똥구리조차 골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것이 발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자 피라미드는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나는 기나긴 시간 동안, 그대가 직접 내게 공물을 바칠 날을 기다려왔다.』
그것이 꺼내든 건 두 구의 시체였다. 혀를 빼물고 축 늘어진 시체와 머리가 깨진 시체.
쇠똥구리는 시체를 보며 숨을 삼켰다.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시체들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들인데.
『처음이란 유일무이한 것이니, 나는 기쁘게 오늘을 기념할 것이다.』
그것은 기쁘게 소리치며 들고 있던 시체를 피라미드 아래로 집어 던졌다.
시체들은 쇠창살과 철판 계단을 굴렀다. 터덩, 터덩. 금속이 부르고, 피라미드에 기다란 피의 길이 생겨났다.
그렇게 시체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시체는 마치 그림자처럼 피라미드 아래로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쇠똥구리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봉인되어 있던 그것이 어떻게 꿈속으로 자신을 불러들인 것이며, 어째서 자신이 죽인 청소부들을 공물이라 부르는 건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오, 모른 척하지 말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은 쇠똥구리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속삭였다.
『어떻게,목 잘린 시체가 부활했겠는가?』
『어째서,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총을 맞고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는가? 어째서 그 상태로 기절한 사람을 끌고 수 킬로를 걸어, 창고로 갈 수 있었는가?』
『정답은 오직 하나다. 쇠똥구리.』
피라미드 밑바닥과 꼭대기라는 높이의 차이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것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쇠똥구리의 귓가를 뒤흔들었다.
『나다. 내가 봉인 너머로 손을 뻗어 너를 되살렸다.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 육체를 주었고, 지치지 않는 체력을 선물했다.』
피라미드와 어둠으로 이루어진 꿈속 세상이 전율했다.
그동안 현실에서 들었던 그것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였다면, 지금 들리는 그것의 목소리는 태풍처럼 거대했다.
쇠똥구리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어째서? 나를 죽여 봉인을 푸는 게, 너의 목적 아니었나?’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입이 막혀 있어도, 눈은 움직일 수 있었다. 쇠똥구리는 단어가 되지 못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대체 왜 나를 ?
그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쇠똥구리가 아니라, 그것이 말할 차례였기에.
『즐겁지 않았느냐?』
『동료들을 모욕한 청소부들을 죽이고.』
『널 팔아먹은 소장을 불태울 때.』
쇠똥구리는 바로 어제 벌였던 복수를 떠올렸다. 그곳에 즐거움은 없었다.
복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동료를 잃은 고통, 그리고 원수들의 고통.
‘아니, 난 그런 저열한 감정으로 복수하지 않았어. 나는…’
『즐거웠지?』
그것은 그렇게 말하곤 보란 듯 팔을 휘둘렀다.
그것의 팔을 따라 어둠이 출렁거렸고, 피라미드 아래 감춰져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륵!
불타는 시체 더미.
피라미드 계단 아래, 어마어마한 양의 시체가 타오르며 연기를 내뿜었다.
쇠똥구리는 자신도 모르게 시체들을 살펴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관리소장… 그와 동료들을 팔아먹은 역겨운 인간이 불길 사이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설마, 어젯밤 불태운 창고의 모든 시체가 이 꿈속에 있는 건가?
쇠똥구리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시 피라미드 꼭대기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것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 소리쳤다.
『즐거움.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고, 내가 그대를 간택한 이유다. 나는 그대를 통해 즐거울 것이다.』
『그대가 먹고, 마시고, 얻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함께 즐길 것이고.』
『그대가 죽이고, 파괴한 모든 것을… 공물로 받을 것이다.』
그것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피라미드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대지가 뒤흔들리고, 타오르는 시체들의 아래에서 그림자가 뿜어져 나왔다.
그림자는 악몽 속의 진흙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예외는 없었다. 시체와 불, 그리고 피라미드의 쇠창살까지.
그림자는 범위에 닿는 모든 불과 시체를 집어삼키며 크기를 키웠다.
쿠구궁!
그림자는 어느새 피라미드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두 명의 청소부, 987구의 시체, 그리고 널 저주하며 타 죽은 영혼 하나….』
그것이 한 번 더 손을 휘두르자, 규칙도 없이 부풀어 오르던 그림자가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압도적이고,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져 피라미드를 감싸 안았다.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역류하는 그림자의 모습에선 현실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지잉! 지잉!
그림자에 저항하려는 듯, 피라미드가 결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뱀에게 붙잡힌 먹잇감과 마찬가지로, 피라미드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기쁘게, 그대가 준비한 첫 번째 공물을 받겠다.』
그것이 선언하자, 그림자는 순식간에 그것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콰아아!
그림자는 마치 댐으로 밀려드는 쓰나미와 같았다.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버티고 있던 쇠창살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강철이 부러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쇠창살들은 그림자에 휩쓸려 찌그러지고, 부러지고, 날아갔다.
이윽고 그것이 그림자를 모두 빨아들이자,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포격을 맞은 것처럼 움푹 깎여나갔다.
『아, 이 얼마나 달콤한 죽음들이란 말인가.』
이제는 흔적만 남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그것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대하라. 나의 간택자여. 나는 오직 바라기만 하는 이 세상의 저열한 신들과 다른 존재이니, 모든 공물에는 상응하는 대가를 내려주리라.』
또각, 또각.
그것은 피라미드를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롭게 피라미드의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그것이 계단을 밟을 때마다, 미증유의 힘이 쇠똥구리의 몸을 짓눌렀다.
그리하여 그것이 쇠똥구리의 앞에 섰을 때.
쇠똥구리는 땅에 무릎 꿇고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려 했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건 어둠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자락이 전부였다.
『쇠똥구리, 나의 간택자여.』
그것은 손을 뻗어 쇠똥구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존재의 차이가 너무나 거대했다.
쇠똥구리는 머리를 짓누르는 압박을 버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공물에 대한 대가로,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하사하겠노라.』
직후, 쇠똥구리의 머리로 무언가가 쏟아졌다.
쏴아아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듯한 기이한 소리를 따라,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재능. 어떤 인간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재능을 내리겠노라. 복수를 이루고, 더 많은 생명을 거둘 수 있는 재능을.』
‘그딴, 재능…! 필요… 없어!’
『그대는 내가 하사한 육체와 재능을 무기 삼아, 마음껏 복수하라. 청소부 길드와 네크로멘서, 그리고 플레이어의 생명을… 내게 바치라.』
목소리의 마지막은 속삭임처럼 작게 들렸다. 그것이 속삭여서? 아니, 아니었다.
그건 압박을 이기지 못한 쇠똥구리의 정신이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그대의 시간이 많지 않거늘. 너무 흥을 내버렸구나.』
그것은 머리 위에 있던 손을 더 아래로 내려, 쇠똥구리의 뺨을 쓸었다.
『나의 간택자여,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알려주마. 다음부턴 나를 ‘그것’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라.』
그것의 손길은 녹아내린 설탕처럼 끈적한 어둠이 되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그니움. 그것이 그대가 유일하게 섬겨야 할 나의 이름이다.』
그 말을 끝으로, 쇠똥구리는 기절하듯 꿈에서 깨어났다.
***
인천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맥아더 산 중턱.
우웩.
쇠똥구리는 구역질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에선 헛바람과 위액이 잔뜩 흘러나왔다.
“하아… 하아…”
한참 동안 헛구역질에 시달리고 나서야, 쇠똥구리는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도 몽롱했다.
그는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듯한 감각을 부여잡고, 간신히 주변을 더듬거렸다.
한참을 더듬거린 끝에야, 그는 멀찍이 놓여 있던 물통을 찾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켰다. 식도가 불에 타는 것처럼 쓰라렸다.
“…쓰읍.”
물통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으나, 좀처럼 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육체의 문제 이전에, 정신의 문제였다.
꿈에서 마주한 진실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공물, 간택자, 그리고…
미그니움.
쇠똥구리는 꿈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떠올리곤 물병을 찌그러트렸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던 미그니움이 오히려 자신을 되살렸다는 사실부터가 그의 이해를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었다.
‘대체 왜?’
천사님이 경고했던 재앙이 왜, 자신을… 되살리고, 선택했는가?
동정심이나, 타고난 선량함 때문에? 그럴 리 없었다.
꿈속에서 시체와 영혼을 빨아들이던 미그니움에게선, 단 한 줌의 선의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미그니움은 두말할 것 없는 악이다. 그게 악이 아니라면, 무엇이 악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미그니움이 준 힘을 거부할 이유가 되는가?
사악한 존재들은 이미 지구에는 넘칠 정도로 많이 있지 않은가.
당장 그를 죽음으로 내몬 플레이어가 그러했고, 차원문 너머 알아샤를 착취하는 지구의 기업들, 부패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몸속에 봉인된 미그니움이, 그들보다 더 사악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어쩌면, 천사님이 자신을 속인 걸지도 모른…
‘…그만.’
선을 넘었다고 느낀 쇠똥구리는 거기서 생각을 끊었다. 이런 식의 꼬리물기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혼자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문제야.’
믿음 이전에, 능력의 문제였다.
아무리 의심해봤자, 그에겐 천사님의 진심도, 미그니움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쇠똥구리는 모든 혼란을 생각 뒤편으로 밀어내고, 확고부동한 한 가지 진실만을 생각했다.
복수.
그는 복수를 원했다. 가족이나 다름없던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몬 모든 것에게.
미그니움도, 천사도 상관없었다. 마음속에서 불타는 복수심은 오직 자신만의 것이었다.
동료들을 팔아먹은 청소부 길드, 레벨 업을 위해 칼을 휘두른 플레이어, 그리고 소장이 죽기 전에 밝힌 네크로멘서와 한국 정부.
그들에게 복수하기 전까진 천사님의 당부도, 미그니움의 유혹도… 전부 부차적인 일에 불과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거기까지 생각한 쇠똥구리는 자신의 뺨을 두들긴 뒤, 옆을 바라봤다.
“그렇죠? 형님들.”
그가 누워있던 자리 바로 옆에는 아홉 개의 무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지난 하루, 그가 동료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산속으로 옮겨 만든 무덤들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시체 한 구를 들고 오는 것도 어려웠을 산 중턱까지 아홉 구의 시체를 차례차례 옮기고, 직접 땅을 파고, 봉분을 쌓은 무덤.
장례식도 없이 만든 무덤에는 묘비도, 위패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쇠똥구리만 알고, 쇠똥구리만 기억할 무덤이었다.
그나마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쇠똥구리는 잠시 무덤들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할 것 같았기에.
그는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참으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반드시… 복수한 뒤에 돌아올게요.”
슬픔은 길었으나, 각오는 짧았다.
쇠똥구리는 무덤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으나, 그를 붙잡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빛이 시리게 빛나는 가운데, 아홉 개의 무덤이 쇠똥구리의 등 뒤로 긴 밤그림자를 드리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