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0)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0화(500/817)
EP.500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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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는 그 이후로도 아키하바라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좀 신기하다 싶은 가게가 있으면 냉큼 들어가 보고, 냄새가 좋다 싶은 음식이 있으면 전부 사 먹었다. 그 과정에서 구매한 어마어마하게 많은 만화책과 영화 DVD, 각종 게임과 전자기기는 덤이었다.
지갑이 가벼워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으나, 처제의 배경을 아는 여명은 군말 없이 그녀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다. 다행히 그녀는 즐거운 미소와 웃음소리로 보답했다.
어찌나 즐겁게 다니는지, 같이 다니던 알라이 로피가 이런 말을 할 정도.
“조카야, 쟤 평생 어디 갇혀 살았냐? 뭐 볼 게 있다고 저렇게 신났어?”
용의 통찰력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희생양 자매의 운명에 슬퍼해야 할지 몰랐던 여명은 그냥 본심을 꺼냈다.
“소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는 건 좋은 일이죠. 그리고,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보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지 않나요?”
“뭐, 그건 그렇다만… 근데, 그건 처제가 아니라 애인한테나 하는 말 아닌가? 응?”
“….”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참 핑계 대기 좋은 핏줄이란 말이지.”
여명은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반지 받지 말걸.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은 몇 번 더 그를 놀려 먹고 나서야 주제를 바꿨다.
“오늘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갈 건가?”
“예, 어차피 한국 때문에 온 거니까요. 일이 끝났으니 바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알라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담담한 태도를 본 여명이 물었다.
“더 물어보실 건 없습니까? 그, 제가 어떻게 주가시빌리를 익혔는지 뭐 그런 질문이요.”
“물어보면 알려줄 건가?”
“…어느 정도는요?”
그러자 용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 모르는 게 나아.”
“….”
“기업가의 본능이 말하고 있어. 우리 관계는 딱 여기까지가 적당하다고.”
“여기까지요?”
“그래. 서로의 정체를 알지만, 목적은 공유하지 않는 관계.”
용은 혼자서 꼬치구이 가게로 달려가는 시스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엮인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이상 가까워지는 건 서로 피곤해질 거야.”
“….”
“일본과 한국, 자본가와 빨갱이… 서 있는 자리가 너무 달라, 괜히 거리를 좁혀봤자 사고만 나겠지. 그런 걸 감당하기에 난 잃을 것도 많고, 무엇보다 너무 늙었어.”
거기까지 말한 알라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여명의 위아래를 쑥 훑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뭐… 삼촌의 사랑이 필요하다면 생각해보지.”
여명은 대답 대신 오만상을 찌푸렸다.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고, 알라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농담에 너무 정색하는 거 아니냐? 삼촌이라고 해봤자, 촌수도 모르는 잡탕 혈족인데.”
“….”
“뭐, 그래도 굳이 친척 어른으로서 조언해 주자면…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둬. 우리 핏줄이 의외로 씨가 약하거든.”
뭐가 약해? 여명이 한 번 더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용은 ‘연기해도 되겠네’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덧붙였다.
“직계 혈통이 대부분이 끊겨서 하는 말이다. 엘프나 드워프는 물론이고, 오크도 진즉에 다 끊겼고… 그 번식력 좋은 인간도 널 빼면 변경백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
“…잠깐, 하나라뇨?”
제국 황족들도 용사 혈통일 텐데? 여명은 살짝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제국의 황족도 용사의 혈통을….”
“그쪽은 끊긴 지 백 년도 더 됐다.”
“…?”
“그 뭐냐, 왕비가 뻐꾸기 짓을 했거든. 괜히 지구인들이 제국을 남겨 놓고, 변경백 머리 위에 핵을 떨군 게 아니지.”
진실을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나 가벼운 태도였다. 얼마나 가벼운지, 오히려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
“…몰랐다는 표정이군?”
“제가 그런 비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가? 당당하게 용사의 무술을 쓰길래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이거… 콜라도 안 나눠주는 조카에게 공짜로 비싼 정보를 줬구만.”
용은 여전히 장난스레 말했지만, 여명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핏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으니까.
‘…용사의 핏줄을 이어갈 수 있는 마지막 인간.’
용사가 본래 인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지막 순수혈통이라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외로 압박감이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용사의 후손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덕분이기도 했고, 딱히 용사의 업을 짊어질 생각이 없는 까닭이기도 했다.
…씨가 약하다는 건 조금 걱정이었지만.
아무튼, 여명은 시스가 가게 온갖 꼬치를 들고나올 때가 돼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감사에도 용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이럴 때는 그냥 모른 척 받아라.”
“….”
굳이 여기까지 와서 반지를 주고 장난 섞인 말로 정보를 퍼준 이유가 그거였나.
여명이 아주 살짝 감동을 느끼는 순간.
알라이는 시스가 사 온 꼬치 중 하나를 빼앗아 먹으려다가 또다시 찰싹! 손등을 맞았다.
“…이 욕심 많은 년 같으니.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몇 푼 안 하니까 직접 사드세요.”
삐쭉, 혀까지 내민 시스가 꼬치를 들고 여명의 뒤에 숨자마자, 용이 하소연했다.
“조카, 저기 소금 꼬치 하나만 뺏어주게.”
“….”
감동은 무슨. 여명은 처제의 꼬치를 빼앗은 대신, 인벤토리에서 돈을 꺼내며 대답했다.
“그냥 제가 하나 사드리겠습니다.”
***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은 평온했다.
붉은 별이 벌인 사건 때문인지 정체 모를 추적자들이 들러붙는 일도, 빨갱이 택시 기사가 일본도를 뽑는 일도 없었다.
공항 노동자가 대뜸 [아시아 혁명 지부 연락망]이란 무시무시한 책을 넘겨주긴 했지만… 뭐, 그건 그거고.
여명과 시스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아카데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디에 가고 싶고, 무얼 먹고 싶은지 종알종알 떠드는 처제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비행하길 한참.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한 로드 하우 아카데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교장도, 성녀도 아니었다.
“…호아나?”
성녀의 호위 겸, 외부 교사로 온 노 성기사. 그녀는 기울어지는 노을을 등진 채 여명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지한 그녀의 표정으로.
여명은 처제에게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전한 뒤 호아나에게 물었다.
“절 기다리신 겁니까?”
그 질문에 대답한 건 호아나가 아닌,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노인이었다.
“맞네, 우리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것도 이틀이나. 설마 정학당한 학생이 외부로 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호아나가 그렇게 덧붙이건 말건, 여명은 살짝 놀란 얼굴로 그녀와 노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노인은 인천의 청소부조차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천여명이 마달 추기경 전하를 뵙습니다.”
여명이 공손하게 인사하자, 다섯 신 교단의 추기경 중 유일하게 지구에 자리 잡은 추기경이 작게 미소 지었다.
“추기경 의복도 없이 이 노구를 알아봐 주다니, 혹, 자네도 교인인가?”
“그런 건 아니옵고, 저를 키워주신 어르신께서 모르닥의 신도셨습니다.”
“독실한 분이셨나 보군.”
짧은 문답을 나눈 마달 추기경은 곧바로 호아나에게 눈짓했다. 곧 호아나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명아, 자리를 옮겨서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겠니?”
“예, 물론이죠. 어디로 모실까요? 카페? 식당? 아니면….”
“그런 곳보다는 자네가 성녀님과 비밀리에 만나는 곳을 보고 싶군. 괜찮겠나?”
“….”
여명이 반응하지 않은 건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한 덕분이었다.
시이나 선배와 싸우지 않았다면, 그래서 교단 성녀를 강제로 불러들이려는 걸 몰랐다면 아마 눈에 띌 정도로 놀랐으리라.
“저, 그게 무슨 소리신지….”
여명이 말꼬리를 돌리려 하자, 호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안 숨겨도 된다. 이분은 우리 편이야.”
“….”
“내 신앙을 걸고 보증하마.”
호아나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인듯했다. 여명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 그게… 성녀와 만나는 곳은 보여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추기경이라도 외부인은 외부인, 지하 용의 둥지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오해한 호아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왜, 교단 사람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만한 곳이라서 그러니?”
“음… 그게 놀랄만한 곳이긴 한데, 생각하신 거랑은 좀 다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성녀님만 만나는 곳이 아니라서요.”
아, 여명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호아나와 달리, 추기경은 살짝 미간을 모았다.
“성녀님만 만나는 게 아니라고?”
“….”
이게 또 그렇게 해석되나? 여명은 완곡하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한 뒤, 용의 둥지가 아닌 교직원 휴게실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가는 길에 성녀를 호출하는 건 덤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세 사람이 1학년 섬 구석에 자리한 교직원 휴게실 앞에 도착한 순간.
“짜잔!”
휴게실 앞 나무 위에서 성녀가 떨어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응? 뉴스 보면서 괜히 걱정했잖아.”
그녀는 곧바로 여명을 꽉 끌어안고는, 부비부비 볼을 비볐다. 평소였다면 여명도 그녀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겠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성녀를 밀어냈다. 평소와 다른 반응을 느낀 성녀는 그제야 그를 따라온 두 사람을 확인했다.
“….”
신성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여명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기 전에, 성녀는 후다닥 옷과 몸을 정리했다.
“…오랜만입니다. 마달 추기경.”
이제와서 경건한 척해도 소용없지 않나? 속으로 태클을 삼키는 여명과 달리, 추기경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
“못 본 사이에 녹색 신의 가르침을 많이 깨달으신 듯합니다.”
여기서 생명과 다산의 신을 언급하다니. 절로 얼굴이 후끈거리는 여명과 달리, 성녀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가르침은 아무리 배워도 모자라는 법이지요. 그보다, 왜 아카데미에 오신 겁니까?”
“아시잖습니까.”
“…총대주교 때문이라면, 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올림피아가 끝난 뒤에 돌아가겠다고 직접 편지를 보냈을 텐데요?”
편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호아나가 얼굴을 쓸어내렸고 마달 추기경 또한 쓴웃음을 지었다.
“총대주교의 명으로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리고 편지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 무슨 소문? 불길함을 느낀 여명이 성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크흠,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소문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찾아온 이유부터 말씀해 주시죠.”
“…대단한 건 아니옵고, 그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추기경의 깊은 눈동자는 여명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말했다.
“그는 제가 상상한 것 이상이군요. 놀랍습니다.”
“…그, 그렇죠? 우리 여명이 대단하긴 해요.”
성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무섭게, 추기경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부족합니다.”
“예?”
“수십억 교인들에게서 성녀를 강탈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
“자네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