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1)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1화(501/817)
EP.501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3)
* * *
***
추기경 정도 되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좋든 싫든 어떤 ‘눈’을 기르게 된다.
사람의 추함을, 탐욕을, 열망을, 그리고 진심을 꿰뚫어 보는 눈.
신을 섬기는 자로써 타인의 몸과 마음을 훔쳐보는 게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으나, 마달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주한 청년을 보며 오랜만에 그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천여명, 성녀의 사랑을 받는 자.
호아나는 그를 볼 때마다 젊은 변경백이 떠오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더랬다.
그래, 확실히 둘의 외모가 비슷하긴 했다. 같은 혈통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지만 추기경은 반대로 그에게서 다른 점을 봤다.
섬뜩함.
성녀를 강탈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진심으로 고민하는 모습이라니. 그건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의무를 택한 변경백과는 전혀 다른 점이었다.
사실, 그것뿐이라면 넘어갈 수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하지만 저자는…
이어지는 생각을 끊은 추기경은 여명에게 다가갔다.
걱정 가득한 성녀와 달리 그는 공손한 자세로 추기경을 맞이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사랑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이 그렇지 못하다는 건 신께서도, 당신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추기경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묻건대,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으신 게지요?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습니다.”
“마달!”
발끈하는 성녀와 달리, 상대는 공손히 대답했다.
“네. 여기서 멈출 거라면 시작도 안 했을 겁니다.”
이런 제안에 익숙한 걸까, 아니면 워낙 어른에게 공손한 걸까?
의문의 답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상대는 제2의 변경백이 아니고, 그렇게 될 생각도 없다는 것.
마달 추기경은 인자한 미소로 깨달음을 가린 뒤, 짧은 시간 속에서 무수한 고민을 떠올렸다.
다행히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곧 그는 품에서 준비해 온 물건 중 하나를 꺼냈다.
동전. 정확히는 장례의 검은 신 모르닥의 상징이 새겨진 거무튀튀한 동전 한 닢이었다.
“어?!”
물건을 알아본 성녀와 호아나가 동시에 경악하건 말건, 마달은 여명에게 동전을 내밀었다.
“저, 이것은…?”
“추기경, 정확히는 제 인장입니다.”
성물과 달리 신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성물보다도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모르닥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표이자, 추기경의 대리인이라는 증표입니다.”
“….”
“앞으로 만나는 사제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면, 저와 똑같은 대우를 받고, 똑같은 권리를 휘두를 수 있을 겁니다. 간단히 말해, 이것만 있으면 성도의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설사 그게 중앙 신전의 가장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움찔, 여명이 놀라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추기경은 그의 손에 직접 인장을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과 성녀님을 지지한다는 증표이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길.”
동전을 쥔 그는 잠시 인장을 바라보다가, 추기경을 향해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라뇨. 오히려 저는 이거밖에 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마달 추기경님….”
“감동한 척하시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성녀님.”
“….”
추기경은 입술을 삐죽 내미는 성녀와 여명에게 한 번 더 미소를 지어준 뒤 그대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벌써요?”
사랑을 알게 된 탓일까, 성녀의 반응은 그가 알던 시절보다 훨씬 생동감 넘쳤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예, 마음 같아선 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추기경이란 자리가 얼마나 바쁜지 아시잖습니까. 아카데미까지 와서 직접 얼굴을 보고 인장을 전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욕심을 부린 겁니다.”
추기경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성녀도 더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성녀님, 그리고… 천여명.”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추기경은 그대로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바스락거리는 풀을 밟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성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시점에서, 호아나가 물었다.
“전하, 인장을 내어주시다뇨? 왜 갑자기 계획을 바꾸신 겁니까? 원래 계획은 그에게 임시 성기사 서임을 해주시는….”
당황이 가득한 그녀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추기경이 먼저 말을 끊었다.
“호아나.”
“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이리 영악하게 굴 줄이야….”
복잡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 추기경은 걸음을 멈추고 호아나를 바라봤다.
“전하, 그게 무슨…?”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기경은 가증스러운 표정을 치우라고 말하는 대신, 종교인답게 에둘러 질문을 꺼냈다.
“만약 내일, 카를로스 피노체트가 성도를 습격하면, 교인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되겠는가?”
“….”
호아나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카를로스 피노체트라니. 스스로 칠레의 악명높은 독재자 피노체트의 핏줄이라 주장하는 남미의 광인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대답해 보게. 피노체트, 스스로 11강이라 떠드는 그 미치광이가 성도를 습격하면 사상자가 얼마나 나올 것 같나?”
추기경이 재차 질문하자, 호아나는 나름대로 대답을 내놨다.
“최소 수백… 기도회가 있는 날을 노린다면 최대 천 명까지 죽거나 다칠 거라 예상됩니다.”
“최대 천 명이라, 그러면 진짜 10강은 어떤가? 메이커나, 오귀스트가 온다면?”
“…그 이상일 겁니다. 대응이 늦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피해가 늘어나겠지요.”
“그래, 10강 중위권만 해도 그 정도겠지. 그러면 전성기의 변경백이 공격한다면 어떤가?”
“….”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호아나가 입을 다문 사이, 마달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성녀가 성기사단을 끌고 변경백 전쟁에 참여했을 때, 사제단이 어째서 입을 다물었는지 아는가?”
대답을 원하고 꺼낸 질문은 아니었고, 호아나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마달은 스스로 답을 내놨다.
“변경백이 무서워서 그랬네.”
“….”
“그자가 단번에 성도로 달려와 사제단에게 검을 휘두르면 어쩌나, 성녀와 성검을 빼앗아 가면 어쩌나… 다 늙은 사제들이 제 발 저린 도둑마냥 벌벌 떠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지.”
“…변경백은 그런 자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그래, 그는 그런 일을 벌일 자가 아니었지. 하지만 그럴 힘을 가진 것 또한 사실이네. 그리고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건… 그 자체로 큰 위협이지.”
지구의 핵무기가 그러하듯이.
거기까지 말한 추기경은 슬쩍 호아나의 표정을 확인했다. 당황과 곤혹스러움.
아무리 나이를 먹었기로서니, 이렇게 연기가 늘다니. 추기경은 조금 더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호아나. 그대가 아카데미에 도착해서 내게 처음 보낸 보고를 기억하나? 성녀님이 그를 짝사랑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그 이상한 보고서 말일세.”
“…예. 기억납니다.”
“그때는 분명 천여명과 진심으로 싸우면 자네가 이길 수 있다고 적었지.”
“….”
“하지만 오늘 그를 직접 보니… 호아나, 자네는 물론이고 죽은 바라나가 되살아나도 못 이길 것처럼 보였네.”
그러자 움찔, 호아나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 반응을 본 추기경이 생각했다.
‘역시 알고서 부른 거로군.’
이번에는 정말로 정곡을 찌른 모양.
더는 빙빙 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후, 성기사 서임은 무슨… 그렇게도 내게 저 청년의 강함을 보여주고 싶었나? 그래, 저 나이의 변경백도 저리 강하진 않았어. 저리 빨리 강해지지도 않았고.”
“어, 그것이….”
호아나는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저벅, 저벅.
이어지는 두 사람의 발소리와 마찬가지로, 추기경은 복잡한 호아나의 얼굴을 보며 오해 아닌 오해를 이어 나갔다.
“핑계는 됐네. 나도 사제단에 속한 몸이니, 성기사인 자네가 날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네. 아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도 저 나이에 저리 강한 자가 있다는 걸 믿지 못했을 걸세.”
“….”
“인장을 줬으니, 앞으로 성도 입구를 박살 내며 들어올 일은 없겠지. 자네가 원한 게 이거 아니었나?”
똑똑한 자들은 가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진실과 오해 사이에서 고민하던 호아나는, 추기경이 얼굴을 붉힐 진실보다는 납득할 수 있는 오해를 선택했다.
“…너무 정확한 판단이라, 일을 꾸민 입장에서 부끄럽습니다.”
“후우… 내가 자네의 심성을 잘 알고 있어 망정이지. 다른 추기경들이었다면 크게 화를 냈을 걸세. 알겠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게.”
그런 심오한 계획 같은 건 없었고, 천여명의 강함은 상관없이 그냥 성녀님과 알콩달콩한 모습이나 보여주려고 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던 호아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여명이 멀어지는 추기경과 호아나의 등을 바라보던 시점.
만남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이별에 여명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성녀가 대뜸 그의 손을 벌렸다.
여명이 뭐하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여명의 손에서 인장을 낚아챘다.
“와… 진짜 추기경 인장이네.”
“…설마 이런 자리에서 가짜를 주겠냐.”
“그런가? 하지만 진품은 나도 처음 보는 걸.”
처음 보는데 진품인 건 어떻게 알아? 같은 질문은 필요 없었다. 성녀가 동전에 신성을 불어넣기 무섭게, 검은 동전이 다섯 빛으로 번쩍거렸으니까.
“예쁘지?”
성녀는 권총을 돌리던 실력을 한껏 발휘해 동전을 요리조리 굴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led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모습.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던 여명은 어느 순간 휙! 동전을 낚아챘다.
“자, 자, 가지고 노는 건 여기까지.”
“에이, 닳는 것도 아닌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녀는 별 불만 없이 히죽 웃었다.
“이걸로 추기경에게 허락도 받았겠다… 아예 대놓고 결혼식 할까?”
“….”
“성녀와 이 시대의 용사. 공개 결혼! 어때?”
여러모로 성녀다운 계획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용사의 혈통을 밝히는 건 안 되겠다.”
“응? 왜?”
“내가 마지막 용사라서.”
“…?”
차마 ‘현재 황족들은 전부 뻐꾸기 새끼들이다’ 라고 말할 수 없었던 여명은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일본 다녀온 사이에 별일 없었지?”
“응, 수련도 착실히 했고, 올림피아 준비도… 아, 맞다. 둔간 중공업 측에서 연락 왔었어.”
“드워프가? 왜?”
“예선전 경기 캔슬된 만큼 스폰서 홍보 기회가 줄었으니까, 그만큼 계약금 뺄 거래. 그리고 앞으로 경기할 때마다 둔간 중공업 로고가 크게 그려진 옷 좀 꼭 입어 달래. 구더기 공주한테 딸려 보냈다는데, 본 적 있어?”
“….”
뭔가 했더니,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이야기였구만. 하긴, 올림피아는 기업에도 중요한 이벤트인 만큼 이해 못 할 부탁은 아니었다.
아무튼,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장을 챙기는 사이.
“근데… 단둘이 된 거 엄청 오랜만이네?”
성녀가 은근슬쩍 그의 품에 안겨 왔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건 덤이었고.
“…나만 콩닥거리는 건가? 응?”
여명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돌아오자마자 꼬시는 거야?”
“아니 뭐, 딱히 꼬시는 건 아니고… 환골탈태한 몸을 확인하고 싶어서?”
“크게 변한 건 없는데.”
“그건 봐야 아는 거지.”
익살스러운 말을 주고받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을 맞춰 교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탱고 춤을 추는 것처럼 느긋하게.
이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여명이 탁자 위에 성녀를 눕힌 순간.
[커흠.]멋쩍은 헛기침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일부러 이런 타이밍만 노리고 오는 건 아니다만… 이거 참.]한동안 잊고 있었던 목소리. 성녀와 여명은 동시에 하늘 위에 떠 있는 마하간을 바라봤다.
“엄청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마하간. 계단 조정은 잘 끝나셨어요?”
애써 웃는 여명과 달리, 성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 성불시켜 버리고 싶네.”
[….]“진심이니까 새겨들어요.”
어떻게 들어도 농담이 아니었기에, 마하간은 애써 성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계단의 시련 조정이 끝나서 온 게다.]“…그거, 성녀의 대업을 방해할 정도로 가치 있는 조정 맞죠?”
성녀의 대업이라니. 피식 웃는 여명과 달리 마하간은 조금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조정이다. 가서 확인해 보면 알 게다. 아니, 이렇게 된 거 당장 가보자꾸나.]뭘 얼마나 바꾼 건지 모르겠지만, 마하간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마법사의 자신감에는 늘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법.
“당장은 무슨… 씨, 한 시간만 늦게 오지.”
그걸 아는 성녀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명은 ‘난 한 시간으론 안 되는데’ 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그녀에게 등짝을 맞았다.
어쨌거나, 대업(?)을 멈춘 두 사람은 마하간을 따라 해저 터널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계단에 도착한 건 여명 혼자였다. 성녀는 세티를 비롯한 나머지 용사 파티를 불러오겠다며 용의 둥지에 남은 까닭이었다.
“…별로 달라진 건 없는데요?”
어둠에 휩싸인 계단을 보며 여명이 중얼거렸다. 마하간은 언제나처럼 계단에 빙의되며 대답했다.
[내려가 보면 차이를 알 수 있을 게다.]대체 뭘 얼마나 바꿨기에 저렇게나 자신만만한 걸까. 여명은 순순히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작 세 걸음을 떼기도 전에, 뭐가 바뀌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대 성녀님?”
그래, 그의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환상은 젊은 시절의 전대 성녀님이었다.
기사단의 환상은 어디 가고 시작부터 용사파티가? 뭐 보스 러시 같은 건가?
게임처럼 생각하는 여명과 달리, 마하간이 준비한 조정은 그 이상이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계단 아래에서 나타나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성. 그건… 아야톨라의 꿈속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생생한 전대 성녀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