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3)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3화(503/817)
EP.503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5)
* * *
***
전대 성녀님이 연기처럼 사라진 직후.
[쿨럭!]계단 사이에서 마하간이 튀어나왔다.
환상을 유지하는 게 어지간히도 힘들었는지, 그는 마치 산 사람처럼 바닥을 짚고 숨을 헐떡였다.
다가오는 일행들과 그를 번갈아 본 여명이 말했다.
“대단한 마법이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그래, 이놈아, 내가 이 나이… 아니, 죽어서까지 이런 고생을 할 줄은 몰랐다.]후욱, 후욱 잠시 숨을 고른 마하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환상으로 무얼 봤느냐?]은근한 눈빛과 말투. 마하간은 주욱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혹시… 그놈을 봤느냐?]전대 성녀님은 마하간이 모를 거라고 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죽어도 대마법사는 대마법사였다.
단지, 대마법사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나왔을 뿐.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른 분과 만났습니다.”
[뭐어? 변경백이 아니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보기에 이건 분명 부자상….]그때,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내려온 성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 천여명! 방금 그 여자 누구야!?”
[여자? 여자가 나왔다고?]동시에 얼굴을 들이미는 두 사람. 여명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전대 성녀님과 만났습니다.”
직후, 마하간의 머리 위로는 물음표가, 성녀의 머리 위로는 느낌표가 떠올랐다.
[뭐? 그건… 흠, 아니…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가…]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혼자서 뭔가를 납득하는 마하간과 달리, 성녀는 당황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 진짜 전대 성녀님이었어?”
“진짜는 아니고 환상이지.”
“뭐든 간에! 왜 그렇게 젊은 모습으로 나오신 거래?”
“그건 나도 모르지. 제작자는 아시려나?”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마자 마하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나는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고, 그 사실에 당당하다. 여자의 마음을 묻고 싶으면 나 말고 바이콘한테 물어라.]“….”
마하간이 헛소리로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걸 느낀 여명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녀가 그의 어깨를 확 잡아 끌었다.
“저, 저기… 내가 한 말 들으셨을까? 응?”
“…당연히 들었지. 계단을 쩌렁쩌렁 울렸는데.”
“아….”
성녀는 신음과 함께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 난 몰라… 최악의 첫인상이잖아….”
또 왜 이러는 거야. 여명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뭘 그런 걸 신경 써?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전대 성녀님하고 가장 인연이 깊은 건 너인데.”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인연이 깊은 건 나이 드셨을 때 이야기고… 젊은 시절 성녀님은 내가 누군지도 모를 거 아니야.”
“…뭐 어때? 어차피 환상인데.”
“환상이라도, 시어머님이잖아!”
“….”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나, 난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단 말이야!”
좋은 며느리? 그건 이미 늦은 거 아닌가?
여명이 꿀꺽 속마음을 삼키고 마하간이 ‘다섯 신은 취향이 좀 이상하다’ 라고 그에게 귓속말하는 사이, 나머지 파티원들이 도착했다.
“좋은 며느리라. 재밌는 대화 중이었네.”
세티는 가타부타 질문도 없이 팔짱부터 꼈다.
어딘가 서늘한 그녀의 분위기를 읽은 마하간은 곧바로 모습을 감췄고 유령처럼 도망갈 수 없었던 성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따, 딱히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연락도 없이 국회의원을 죽이고, 빨갱이 연기하다 온 누구 씨 이야기보단 훨씬 재밌는 거 같은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여명?”
세티의 차가운 눈동자가 여명을 향했으나, 그는 능청스럽게 시선을 넘겨버렸다.
“…마침 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딱 맞춰 왔네.”
“처제랑 놀아줄 시간에 해줬으면 더 좋았을 거 같은데.”
“문자가 아니라, 직접 얼굴 보고 말해주려고 했지.”
“….”
“보고 싶지 않았어? 난 보고 싶었는데.”
듣고 있던 살로메가 ‘어우, 진짜’ 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세티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말솜씨만 늘어 가지고.”
“겪은 일이 워낙 많아야지. 응? 겪은 일을 다 설명하려면 말솜씨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어.”
마지막 한마디조차 되받아친 여명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일본 공산당과 검은 용, 용사 혈통, 그리고 계단에서 만난 어머니까지.
단 하나의 숨김도 없이.
***
푸르스름한 하늘 사이로 여명이 떠오르는 시간.
가장 먼저 새벽이 맞이한 건 드높은 산과 그 위에 쌓인 새하얀 눈이었다.
따스한 빛을 따라 밤새 얼어 있던 눈들이 서서히 빛을 반사하고, 산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조용히 볼을 붉혔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지난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간 자연이 반복해 온 순수한 아름다움.
그러나 옛 철학자 중 아무개가 이르길, 매일 보는 모든 것들은 그저 일상에 불과한 법이라 했으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이 산에 사는 생물 중 그 누구도 이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했으니까.
눈 아래에 잠든 별부리미 꽃도, 지구인들이 번식에 실패한 프로방스 밀랍 벌도, 그리고…
산 아래를 보며 이를 드러내는 괴수들도.
그들은 모두 일상이란 이름의 생존 투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꽃은 햇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밀랍 벌들은 다음 세대에게 먹일 꿀을 찾아 산맥 사이를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괴수들은…
여명과 함께 움직이는 사냥꾼을 피해 어둠 사이로 숨어들었다.
산 전체가 괴수의 것이라 믿는 인간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괴수는 개의치 않았다.
12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들은 인간의 평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괴수는 얼마 남지 않은 뇌 조각으로 생각했다. 타인의 평가를 위해 죽음으로 뛰어드는 건 지성을 가진 인간뿐이라고.
고작 이 땅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을-푹.
괴수의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눈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이 그의 목을 베어버린 까닭이었다.
툭, 순록을 닮은 괴수의 얼굴이 눈밭 위로 떨어지며 붉은 꽃을 피웠다. 얼어붙은 피로 만들어진 꽃이었다.
“캬그, 큭.”
괴수는 어마어마한 생명력으로 입을 벙끗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녀석의 눈동자는 그저 자신을 죽인 사냥꾼을 담는 게 전부였다.
두꺼운 괴수의 가죽을 기워 만든 옷에 손에 들린 기다란 장검 한 자루, 그리고 꿀처럼 진한 황금색 눈동자.
중년과 노년 사이 어딘가의 나이로 보이는 그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괴수의 머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들어—
콰직.
괴수의 머리를 짓밟은 그는 머리를 잃은 시체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돌렸다.
새벽빛이 그의 등 뒤로 비추며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냈지만, 그는 묵묵히 눈 덮인 산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불운한 괴수가 열 마리 정도 더 죽고 나서야, 남자는 집에 도착했다.
산장인지 병영인지 알 수 없는 돌무더기를 개조해서 만든 집.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으나, 그래도 사람 사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얼마 전에 수리한 것 같은 지붕과 담장, 그리고 마당에 놓인 양봉용 벌통까지.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저 모든 흔적이 남자와 상관 없다는 사실 정도일까.
“다녀오셨습니까.”
그가 집 문을 열기 무섭게, 한 여인이 인사했다.
그녀는 거의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벽난로와 굴뚝을 수리한 건지, 따스한 불길이 나오는 난로에 장작을 집어넣는 중이었다.
“아직도 안 돌아갔나.”
그걸 본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여인이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데,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여인은 이대로 대화를 이어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남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는 천과 검을 꺼내 칼날에 묻은 괴수의 피를 닦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괴수의 피를 머금은 칼날이 닦이는 소리와 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가 얽히며 기묘한 정적을 만들어 내길 잠시.
난로에 장작을 다 밀어 넣은 여인이 남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당신께선 괜찮으시겠습니까.”
“….”
“아들인지 아닌지… 대답해 주지 않으시니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됐건 그는 마지막 남은 꿀의 혈통입니다.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벌써 수십 번 넘게 반복했을 설득. 남자는 앞선 수십 번과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 현대 성녀의 친모이자 푸른 쥐의 사장인 모리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
?
그때, 남자가 흠칫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프로방스 차원문이 있는 방향으로.
뭐지?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본 모리네는 덩달아 놀랐다. 이곳에 온 이후, 그가 놀라는 모습은커녕 뭔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조차 처음이었으니까.
“왜 그러십니까?”
대체 뭘 느끼신 거지? 모리네가 조심스레 물었으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혹은 그보다 긴 시간 동안 창문 밖을 바라봤다.
이윽고 창문에서 시선을 돌린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모리네. 혹, 동전 가지고 있는 거 있나? 있으면 하나 빌려주게.”
“….”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모리네는 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KGB 휘하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품고 있던, 레닌과 스탈린의 얼굴이 그려진 희귀한 루블화 동전.
눈앞의 남자와 스탈린의 관계를 떠올리자면 조금 부적절한 동전일 수도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동전은 이 뿐이었다.
다행히 남자 또한 신경 쓰지 않는 듯, 덤덤하게 동전을 쥐며 말했다.
“스탈린과 레닌의 얼굴이 그려진 앞면. 혹은 크렘린이 그려진 뒷면. 둘 중 어느 쪽이 나올 것 같나?”
“…예?”
“동전 던지기. 어느 쪽일 것 같나.”
“….”
모리네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냥 묻는 말대로 대답했다.
직후, 마하간의 머리 위로는 물음표가, 성녀의 머리 위로는 느낌표가 떠올랐다.
[뭐? 그건… 흠, 아니…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가…]“뒷면, 크렘린이 나올 것 같습니다.”
직후, 남자는 동전을 튕겼다. 핑그르르-탁! 남자의 손등 위에 떨어진 동전은…
스탈린과 레닌. 앞면이었다.
멍하니 동전을 바라보던 남자는 한 번 더 동전을 던졌다.
핑그르르, 탁. 앞면.
한 번 더. 앞면.
한 번 더. 앞면.
남자는 그렇게 네 명 분의 동전 던지기를 한 후에야 모리네에게 동전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게 뭔가 싶어 눈을 깜빡이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떠날 채비를 하게.”
“예? 떠나… 아니, 어디로 가실 겁니까? 차원문을 넘으실 생각이라면 저희 회사에서 가짜 신분과 얼굴을…”
“아니, 차원문보다 먼저 갈 곳이 생겼네.”
남자, 이름보다 변경백이라는 칭호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차원문 방향이 아닌, 북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