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4)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4화(504/817)
EP.504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6)
* * *
***
“….”
살로메는 눈을 떴다. 한참 동안 뒤척인 탓인지 침대 위 이불이 구겨진 교복처럼 구겨져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뒤척였건만, 하늘은 아직도 검게 물들어 있었다.
쌀쌀하고 습한 공기, 고개를 숨긴 달빛, 그리고 희미한 달빛 아래 반짝이는 검은 지팡이.
그녀는 천천히 지팡이를 훑었다.
검은 용의 뼈를 통째로 가공해서 만들어진 지팡이는 어느 마법사라도 부러워할 만큼 강력하고, 아름다웠다. 세계수 결정이 통째로 박혀있는 엘프 공주님의 지팡이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살로메가 마탑 보물 창고에서 저 지팡이를 발견했을 때, 어째서 저만한 지팡이가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궁금증을 느꼈다.
그리고 직접 써본 뒤에는? 마탑 노인네들이 멍청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몇 시간 전 여명의 입에서 진실을, 그러니까 그저 익살스러운 전설이라고만 생각한 이야기가 진실임을 확인 받은 뒤에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옛 마탑주가 용에게 원나잇을 대가로 받아온 뼈와 그 뼈로 만든 지팡이라니.
양식 있는 마법사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탑주가 용박이라니.
아니, 이 경우에는 인간박이인가?
대가를 지불한 건 용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역시 용사의 혈통들은 음흉…
‘…그리고 그 녀석도 용사 혈통이지.’
갑자기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살로메는 움찔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건 그녀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아니, 목소리라기보단 ‘찌꺼기’였다. 이미 반쯤 소화된 음식만도 못한 찌꺼기.
‘오, 나의 릴리 마를렌. 여자가 셋이나 있는 릴리 마를렌. 나는 그대의 가로등이 보고 싶다네.’
살로메는 그게 자신이 소화한 마왕의 흔적일지, 아니면 원래 자신의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오늘 밤 잠들기는 글렀다는 것.
살로메는 입술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옷을 갈아 입고 지팡이를 챙긴 그녀는 조용히 투명 마법을 펼쳤다.
‘훈련이나 하자.’
그래, 잡념을 털어버리기엔 훈련 만한 게 없었다. 카레닌과 마탑주도 그렇게 조언하지 않았나.
그녀의 힘이 강해질수록 봉인 또한 마왕을 빠르게 소화할 거라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기숙사를 빠져나간 그녀는 곧바로 지하 해저터널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하수도를 달려 용의 둥지에 도착하자, 32개의 콜라 잔을 늘어놓은 용이 그녀를 반겼다.
[여어, 꼴찌.]“…응?”
[흐흐, 무슨 소리인지 모르면 됐… 웩, 시발 이거 무슨 맛이야. 김치맛?]또 평소처럼 바보 병이 도진 건가? 살로메는 오만상을 찌푸린 용에게 물었다.
“마하간 지금 여기 있어요?”
[물론 있지. 근데 네가 원하는 게 나올지는 모르겠네.]“…?”
[일단 계단으로 가보면 알 거야.]뭐라는 거지? 살로메는 용을 뒤로 한 채 해저터널로 향했다. 늘상 다른 사람과 함께 오던 길을 홀로 걸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특히 꿈의 시련을 지날 때는 지팡이를 꽉 쥐고 뜀박질을 해야 할 정도였다.
‘용사는 변태가 아니고, 나는 총통이 아니다….’
남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꿈을 삼키며 터널을 가로지르길 잠시.
이윽고 계단에 도착한 살로메는 라날… 아니, 빌어먹을 파충류 자식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성불하고 싶어요? 응? 진짜 성불하고 싶냐고!”
손에 축복을 머금은 채 유령의 멱살을 잡은 성녀와, “마하간, 알잖아요. 우리는 그냥 여명이 했던 수련을 똑같이 해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 옆에서 종알거리는 홍세티, 그리고…
[엘프, 너마저?]모든 걸 방관하는 엘프까지.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본 살로메는 그냥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혼자서 뒤처지는 건 꿈의 시련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일부러 크게 발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요?”
의외로 그녀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성녀는 오히려 ‘올 줄 알았다’ 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면 몰라?”
“…보고도 안 믿겨서 그래요.”
성녀가 유령을 협박하는 광경이라니. 사진으로 찍어 올려도 합성 소리부터 듣게 되리라.
어쨌거나, 성녀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우리도 여명이 받았던 계승 좀 해보고 싶다는데, 마하간이 싫다고 버티잖아.”
[아니, 버티는 게 아니라, 나도 정말 힘들어서 그런 거라니까?]마하간이 항변했으나, 성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미 죽었는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요? 이참에 성불할 정도로 쥐어짜요.”
[…내 평생 성녀만 둘을 만났는데, 둘 다 미친년이로구나. 내가 이래서 다섯 신을 안 믿는다.]그렇게 마하간이 매를 벌고, 성녀가 기꺼이 매를 때리길 잠시.
파티원들을 지켜보던 살로메는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저, 혹시… 시어머니 보려고 그러는 거 아니죠?”
성녀와 엘프는 거의 동시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 밤 중에 시, 시어머니 이야기가 왜 나와?”
“….”
정곡을 찔렀구만. 살로메가 속으로 용사 파티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세티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시어머니는 무슨, 계승은 가장 필요한 파티원이 나온다고 했어. 성녀말고 전대 성녀님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우리는 진짜로 계승을 경험해 보고 싶을 뿐이야. 너도 그래서 온 거 아니야?”
아니, 저도 용사의 어머니를 보고 싶긴 한데요… 라고 말할 수 없던 살로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도 그런 마음이죠. 그런 의미에서… 마하간?”
[살로메, 마저?]“…마탑의 후계자로서 부탁드릴게요.”
마탑 이야기까지 나오자, 마하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용사가 끝난 뒤에 할 수는 없겠느냐?]세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늦어요.”
[아니 아직 솜털도 안 빠진 것들이 뭐가 늦…]“늦어요.”
[….]이쯤 되자, 마하간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이럴 땐 어른이 져줘야겠지. 알겠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너희를 도우마. 하지만….]“하지만?”
[이건 한 번에 한 명만 가능하다. 들어가는 순서는 너희끼리 정하거라.]한 번에 한 명. 용사 파티원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성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여기 도착한 순서대로 할까?”
“…본인이 일등으로 들어가시겠다, 이거죠?”
미리디스가 불만을 제기하자, 성녀는 방향을 바꿨다.
“그럼 바이콘이랑 친해진 순서대로…?”
“…진짜 혼날래요?”
그렇게 엘프와 성녀가 싸우길 잠시. 세티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싸움도 조작도 없는 공평한 제비뽑기.
성녀가 비겁하게 신에게 축복을 빌다가 제지당한 걸 빼면, 일행들은 별 불만 없이 세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행들이 바라고 또 바라던 1번 제비를 뽑은 건…
살로메였다.
“…처녀의 행운?”
헛소리를 하던 성녀가 세티에게 한 대 맞건 말건, 살로메는 엘프의 축하를 받으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게다.]마하간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살로메는 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전대 성녀님이 나타나면 어쩌지? 아들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같은 용사 파티? 아니면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사이?’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긴장 때문에 생각이 헝클어졌다.
‘저, 전대 성녀님 말고, 그, 그냥 마하간이 나오게 해주세요. 그래, 난 마법사니까 당연히 마하간이 나올 거야….’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평소에는 기사단들이 대기했을 계단을 밟았을 때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외곽선을 보니 남자는 아니었다. 설마 전대 성녀님인가? 당첨이야?
“저기….”
살로메가 조심스레 상대를 부르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 두 개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성녀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었다.
“네가 이번 대 용사 파티의 마법사니?”
성녀님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걸걸한 목소리. 살로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저는 살로메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퀴니 코완 교장… 아니, 선배님!”
그녀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소리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젊은 퀴니 코완이 걸어 올라왔다.
얼룩진 판초 우의를 걸치고, 허리에는 거대한 권총을 찬 짧은 단발머리 여성.
퀴니 코완의 외형은 계단의 시련에서 봤던 환상과 똑같았지만, 살로메는 잔뜩 긴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으니까.
한데, 그녀가 꺼낸 첫마디가 좀 이상했다.
“음, 성녀는 여자일 거고, 엘프 공주도 여자, 그리고 마법사까지 여자면… 이번 대 용사 파티는 용사 말고 다 여자인 거니?”
“…네? 네.”
“용사가 여자는 아니지?”
“네, 남자예요.”
대답을 들은 퀴니 코완은 난감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 용사 파티가 아니라 용사 하렘 아닌가?”
“….”
“이제와서 혈통을 늘릴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세상일이 참 신기하게도 꼬인단 말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그녀는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담배 냄새를 맡는 것처럼 불쾌한 표정으로 주변을 킁킁거리던 그녀는, 살로메를 보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뭐지? 살로메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직후, 퀴니 코완이 살짝 골때리는 질문을 던졌다.
“너… 독일 출신이니?”
“아, 아뇨? 마탑에서 태어났어요.”
“근데 왜 나치 냄새가 나냐?”
“….”
살로메는 가까스로 비명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나치 잔당을 사냥한 그녀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떠올린 살로메는 꿀꺽, 침을 삼킨 뒤 침착하게 되물었다.
“나, 나치 냄새? 그, 그런 냄새도 있나요?”
“물론이지. 후각이 조금만 좋아도 알 수 있어. 독가스 냄새와 섞인 파시즘 냄새… 이게 워낙 독하거든.”
“….”
짧은 정적.
검색
“야, 하일 히틀러 해봐.”
“…시, 싫은데요?”
“지크 하일은?”
“그게 무슨 뜻인데요?”
“….”
엿 됐다. 살로메가 속으로 총알을 피해 도망갈 최적의 루트를 떠올리는 가운데, 퀴니가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알자스 로렌은 누구 땅?”
“프, 프랑스 땅이죠.”
“단치히는?”
“당연히 폴란드 땅이요….”
“국력은?”
“방어가 아닌 침략에 있….”
아. 살로메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순간, 퀴니 코완이 총을 뽑으며 말했다.
“나치 맞네.”
***
총구를 마주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살로메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마왕 히틀러를 위한 그릇으로 태어났으나, 역으로 히틀러와 잔당들을 처치하고 내부에 히틀러를 봉인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퀴니 코완은 의외로 순순히 그녀의 말을 믿어줬다. 심지어 위로까지 해줬다.
“힘들었겠구나.”
“….”
조금 전까지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민 사람에게 위로받아봤자 별로 기쁘진 않았지만, 살로메는 어느 정도 위안을 느꼈다.
물론, 그 위안은 10초도 가지 못했지만.
“그래서… 너도 용사한테 반했단 거지?”
“….”
살로메는 반박하지 않았다. 퀴니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킬킬 웃었다.
“우리 때랑 성별만 다르지 똑같네.”
“그, 그런 이야기 말고 이제 계승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맞다. 계승.”
퀴니는 그제야 이유가 생각난다는 듯 턱을 쓸었다. 단순한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모습이었다.
“너, 용사한테 계승이 뭔지 들었다고 했지? 그러면 지금 가장 필요한 파티원이 나온다는 것도 알겠네?”
“네. 그렇게 들었어요.”
“그러면 어떤 경우에 내가 나오는지 알고 있니?”
“아뇨, 그거까지는 잘….”
살로메가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퀴니 코완은 히죽 웃었다.
“나는 말이지. 생존력이 부족한 파티원이 들어왔을 때 나온단다.”
“생존력이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 말하는 생존력은 다수와 싸울 때의 생존력이란다. 대충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에게 둘러싸였을 경우를 생각해 봐. 살아날 자신 있니? 없지?”
“….”
용사같은 재생 괴물이 아니고서야, 죽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살로메는 반박을 삼켰다.
상대는 위대한 전대 용사 파티 아닌가. 그녀가 이해 못 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자, 이제 알았으면 ‘계승’을 해보자.”
“예? 어, 어떤 방식으로요?”
퀴니는 대답 대신 손에 들린 총을 흔들었다.
일 대 일이라면 어려울 것 없지. 살로메가 안도의 한숨을 쉰 바로 다음 순간, 계단 사이에서 총으로 무장한 검은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
“환상이라 죽지는 않겠지만, 많이 아플 거야.”
“이, 이런 무식한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무식한 방법이라니? 내 지식이 실시간으로 너에게 전해질 거야. 바깥에서 똑같은 훈련하는 것보다 몇 배는 효과가 좋을걸?”
“아니, 그러면 굳이 총을 맞을 이유가 없는…?”
“책상머리 교육을 받고 싶으면 이 아카데미에 오지 말았어야지. 내가 세운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그것도 몰랐어?”
“….”
살로메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퀴니 코완이 철컥,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자, 이제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볼까? 레이디 총통?”
***
계승 시작 22분 11초 후.
살로메가 계단을 기어 올라왔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처참한 몰골을 본 성녀가 놀라 치유 기적을 사용했지만, 살로메는 ‘퀴니 코완…’ 이란 말만을 남기고 기절해 버렸다.
[그거 봐라. 내가 나중에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뒤늦게 나타난 마하간이 성질을 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멈출 성녀나 엘프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
어느 정도 살로메를 치유한 성녀는 당당히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31분 뒤, 절뚝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왔다.
‘퀴니 코완도 어떻게 보면 시댁 식구 아닐까?’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당한 모양.
그 꼴을 본 쇠미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기어코 계단으로 내려갔다.
“다녀올게요.”
그리고 또 26분 뒤, 그녀는 예쁜 금발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돌아왔다.
“총을 피했더니 발로 머리를 후려 차더라구요….”
그제야 깨어난 살로메가 미리를 위로했으나, 성녀는 자기보다 5분이나 빨리 올라왔다며 엘프를 놀려 댔다.
“허접, 허접이래요.”
저거 성녀 맞아? 살로메와 엘프가 동시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 세티가 숨을 쌕쌕거리는 마하간을 붙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내 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냐?]그렇게 세티가 아래로 내려간 직후, 남은 파티원들은 그녀가 얼마나 버틸지 토론했다.
성녀는 자신과 비슷하게 30분 정도 버틸 거라 예상했고, 살로메와 엘프는 아무리 그래도 40분은 거뜬히 버틸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세티는 불과 5분 만에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마치 뭔가 강력한 것에 맞은 듯 코피를 줄줄 흘리는 상태였는데, 위에 올라오자마자 팽, 코피를 푸는 모습이 여간 터프한 게 아니었다.
“뭐야? 왜 벌써 올라와?”
성녀는 깜짝 놀라 세티에게 달려갔다. 쇠미리는 그녀가 퀴니 코완 말고 다른 용사 파티를 만났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랑 만났어요?”
엘프가 조심스레 물었으나, 세티는 답을 피했다.
“설마… 시어머니한테 뺨 맞은… 악!”
성녀의 헛소리마저 꿀밤으로 제압한 세티는 망치를 내려놓고 마하간을 불렀다.
“마하간.”
[헥, 헥… 왜?]“이 계승… 대체 뭘 위한 거죠? 단순히 수련을 위한 거라면 계단의 시련만으로 충분했을 텐데요.”
마하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거기까지 의문이 닿았느냐?]“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말 못 한다.]“왜죠?”
[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니까. 이미 오래전에 죽은 유령에게 뭘 바라는 것이냐?]“…거짓말.”
세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하간에게 다가갔다. 죽은 대마법사를 보는 그녀의 눈은 평소와 달리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여명은 그냥 넘어갔을지 몰라도, 전 달라요. 이건 아무리 봐도 마왕과 싸우기 위한 수련이 아니잖아요. 이건 마치….”
그때, 해저 터널 저편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발소리였다.
여명의 발소리.
아니 이 시간에 왜?
파티원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보며 당황했고,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동시에 계단 옆 구석으로 숨었다.
그리고 곧, 진짜 여명이 계단 앞에 도착했다.
[이 뭔… 넌 왜 왔느냐?]“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그냥? 이놈아, 네 연인이 몇 명이나 되는데 그런 핑계를 대고 있어? 어른을 불렀으면 솔직히 말해야지.]“그러면… 아까 저녁에 했던 계승 수련, 지금도 할 수 있을까요?”
[…쯧, 네 어미 때문이냐?]“….”
여명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하간은 나머지 파티원들이 숨어든 방향을 힐끗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더 못 본다. 너무 힘들어서 더 하면 진짜 성불할 거 같으니.]“…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마하간을 협박하던 다른 파티원들과 달리, 여명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숨겼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갔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여명은 계단 난간에 털썩 주저 앉아 마하간을 불렀다.
“마하간, 그러면 옛날이야기나 해주세요.”
“전대 용사 파티 이야기요.”
내가 왜? 라고 대답하려던 마하간은, 여명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리움에 물든 눈이었다.
평생 어머니가 누군지도 몰랐던 청년이, 환상으로나마 어머니를 보고 복잡해진 마음을 삼키는 눈.
[그래, 원한다면 그리 해주마.]마하간은 그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청년을 외면하기엔 그는 너무 늙은 까닭이었다.
소녀들이 숨은 장소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노인네 협박하래?
[어디서부터… 그래, 첫 만남부터 이야기해 볼까? 네 어머니가 아직 성녀가 아니던 시절부터.]크흠, 헛기침으로 그녀들을 무시한 마하간은 지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정확히 10분 뒤, 성녀가 화장실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올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