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6)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6화(506/817)
EP.506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8)
* * *
***
아카데미 번화가 구석에 숨겨진 한 실험실.
최신 DVD 플레이어가 연결된 커다란 TV 위로, 선명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왕족과 사제들은.]매끄러운 유명 성우의 목소리를 따라, 모래에 파묻힌 거대한 사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저녁마다 신들의 성상이 모셔진 사원에 제물을 바쳤습니다.]살짝 어색한 CG와 함께 모래가 서서히 사라지며 화면이 천천히 줌인 되더니, 멀쩡한 사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번쩍이는 태양 아래, 거대한 신들의 석상이 일렬로 서 있는 웅장한 사원.
사원 중앙에 화려하게 치장한 왕족들과 사제들이 걷고 있었는데, 사제의 손에는 과일과 기름, 그리고 보석이 담긴 쟁반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석상 앞에 쟁반을 내려놓고 뭔가를 기도하는 장면이 천천히 이어지다가,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사원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시민들의 경우, 집집마다 작은 성상을 마련하여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습니다.]조금 전 사원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초라한 집 내부가 비췄다.
그리고 구릿빛 피부의 이집트인이 작고 조잡한 조각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화면이 이어지다가…
삑!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응? 뭐야?”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일행들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짧은 하늘색 머리의 소녀가 놀라서 굳은 모습이 보였다. 아마 움직이다가 실수로 TV 전원 케이블을 밟은 듯했다.
“어….”
소녀, 네티는 발에 걸린 TV 케이블과 일행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누가 실수한 건지 명백한 상황. 그녀는 혼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이, 이단! 이단이다!”
“….”
“이교의 제사로 성녀님의 눈을 더럽히다니!”
그러자 성녀님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진정해. 이건 그냥 다큐일 뿐이야.”
“아니에요! 성녀님! 이건 종교 문제라고요! 저 간악한 이교도가….”
네티의 주접은 거기까지였다. 주접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언니가 주먹 들어서? 아니, 성녀가 더한 말을 꺼냈으므로.
“뭐, 그 이교도 팬티까지 봤는데, 이제 와서 제사쯤이야….”
“…아.”
할 말이 없어진 조용히 네티는 뽑힌 케이블을 다시 꽂았다. 삑-소리와 함께 다시 TV가 켜졌지만, 다큐가 다시 재생되는 일은 없었다.
“응? 더 안 봐?”
성녀는 DVD 플레이어를 정리하는 여명을 향해 물었다. 그는 조심스레 케이스에 DVD를 담으며 대답했다.
“이만하면 됐어. 이미 예전에 다 본 거라서.”
“…이미 본 거라고?”
“응, 이번에는 그냥 확인차 튼 거야.”
“….”
여명의 다큐멘터리 사랑을 익히 알고 있는 성녀는 물론이고, 네티조차 어이가 없어서 어벙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여명은 신경 쓰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지점토 비슷한 뭔가를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성녀가 물었다.
“그건 또 뭐야?”
“배수관이나 건물 보수할 때 쓰는 점토.”
성녀는 그런 건 대체 왜 가지고 다니냐는 상식적인 질문을 꺼내는 대신, 그가 점토를 만지작거리는 걸 조용히 구경했다.
평소 요리 실력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여명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그가 슥슥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점토가 사람 모양으로 변해갔다.
“팔이 너무 얇은데? 조금 더 길게 해야겠다.”
성녀가 훈수를 두고, 뒤에서 눈치를 보던 네티도 합류해서 구경하길 잠시.
이윽고 여명은 꽤나 그럴싸한, 돌의자에 앉은 이집트 석상을 완성했다.
그것도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쇠똥구리가 있는 석상.
이건 설마…
“…케프리야?”
“응. 그럴싸하지?”
이거 때문에 다큐를 본 거구나.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여명은 화염 마법으로 짧게 점토를 구워 마무리했다.
“형부, 그걸로 뭐 하시려고요?”
“케프리에게 제사를 올릴 거야. 기왕 하는 거, 이집트식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오….”
그녀가 감탄하는 사이, 여명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네티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가 뒤늦게 주머니를 열었다.
“청금석이랑 금목걸이 사 오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어요?”
어쩐지, 여자가 이렇게 많은데 하나만 산다 싶었다. 수라장을 기대했던 네티는 속마음을 삼키며 여명에게 청금석과 금목걸이를 건넸다.
보물을 받아 든 여명은 조심스레 석상을 창가로 옮겼다.
햇빛을 받은 석상은 묘하게 신성해 보였다. 어디까지나, 배관용 점토로 만든 것치고는.
“도와줄까?”
여명이 다큐 속 사제들처럼 보석을 올린 쟁반을 석상 앞에 내려놓자, 성녀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아니, 딱히 거절 안 해도 되는데… 너 공양 의식은 할 줄 알아?”
“그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준비했겠어?”
그건 그랬지만, 여전히 의문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집트 제례는 가르쳐주지 않을 텐데? 이미 다 실전된 거 아니었나?
의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여명은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제사를 시작했다.
“삼가, 천여명이 케프리께 제를 올리나이다.”
그런 말을 시작으로 대뜸 절부터 하는 여명.
그건 다섯 신의 방식도 아니었고, 고대 이집트식은 더더욱 아니었다.
“…한국식 제사잖아.”
기가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성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양 의식이 장난도 아니고, 잘못된 제례는 그 자체로 신께 큰 결례였다.
“여명, 멈춰봐. 그러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제대로 도와….”
그때, 대뜸 석상이 빛나며 신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도주는?』
신성을 다룰 수 있는 성녀와 여명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성녀가 황당한 얼굴로 여명과 석상을 번갈아 바라보건 말건,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포도주병을 꺼내 석상 앞에 내려놨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공물을 더 바쳤다. 아샤에서 챙겨온 보석들과 금화, 드워프에게 선물 받은 위스키, 직접 만든 샌드위치 등등.
“여명, 잠깐…!”
그걸 본 성녀가 기겁한 순간, 케프리가 먼저 말했다.
『감히 신에게 선금을 먹이려는 꼴이 참으로 괘씸하나, 샌드위치를 봐서 이번만은 용서하겠다.』
“….”
상식이 파괴되는 광경을 본 사람이 늘 그렇듯, 성녀는 멍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여명이 한 번 더 감사의 절을 올릴 때까지, 계속.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채 10분이 지나기 전에, 성상의 빛이 사그라들며 케프리의 신성 또한 사라졌다.
“….”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성녀는 그냥 아무렇게나 말해버렸다.
“…샌드위치에 대체 뭘 넣은 거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사랑이라고.”
“….”
성녀는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여명은 영적인 본질(?)이 전부 소모된 제물들을 다시 인벤토리로 회수하며 말했다.
“이걸로 제사는 끝났고… 난 이제 수련하러 갈게. 모두 이따가 보자.”
그때, 여태껏 조용히 있던 세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명, 계승… 아니, 전대 성녀님 만나러 가는 거지?”
“응, 그러려고. 왜, 지금 뭐 시킬 일 있어?”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세티가 재차 질문했다.
“아니, 시킬 일이 아니라 알려줄 게 있어서… 근데, 그전에 하나만 대답해 줄래?”
“…?”
“네가 그분의 친아들이라는 거, 밝혔어?”
“…아니, 아직은.”
세티는 그럴 줄 알았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여명과 눈을 마주쳤다.
침묵.
지켜보던 네티가 슬쩍 눈치를 볼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채웠지만, 때때로 눈빛은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하는 법이었다.
그래, 여명은 세티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여러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를 만나 행복해 하는 그를 보고 느끼는 기쁨.
환상에 불과한 어머니에게 의지하다가 상처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리고… 이대로 마음이 풀려서 복수를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을 마주한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
둘 사이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뜬금없어 보이는 대답이었다.
무슨 눈빛이 오고 갔는지 눈치챈 성녀가 입술을 삐쭉이며 질투를 표현하는 가운데, 세티 또한 빙그레 미소로 화답했다.
“응, 네가 괜찮으면 됐어.”
직후, 그녀는 여태껏 보고 있던 서류 뭉치 두 개를 그에게 내밀었다.
“위에 있는 건 다음 예선전 상대의 정보가 담긴 서류야.”
“…예선전 상대? 다 기권한 거 아니었어?”
“누군지 모를 양반이 올림피아 측에 항의했나 봐. 예선전 상대가 전원 기권으로 본선에 올라오는 건 너무 큰 특혜가 아니냐고.”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특혜는 무슨…”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꽤 이름있는 쪽에서 항의한 것 같아. 올림피아 측에서 네 상대를 추가로 모집했어. 3학년 선배인데… 벌써 남미의 유명 용병단에 입단이 정해진 실력자야. 네 상대는 안 되겠지만, 적당히 싸우는 척해줘.”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그리고 거기 남은 서류는 뭐야?”
“시크릿 소사이어티에서 보낸 첩보야. 프랑스에 문제가 생겼나 봐. 거의 1시간꼴로 오귀스트에게 긴급 복귀 명령을 내리고 있다나? 혹시 몰라서 챙겨놨어.”
“….”
오귀스트에게 복귀 명령? 무슨 일이지?
여명은 느긋하게 호주 관광을 다니는 오귀스트를 떠올리며 서류를 챙겼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중요한 정보가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뭐,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이따 지하에서 보자.”
여명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동생 앞에서 못 하는 게 없다’며 세티가 그의 가슴을 때리고, 성녀가 ‘나도! 나도!’ 같은 소리를 하며 그의 발목을 잡길 잠시.
조용히 구경만 하던 실험실의 주인이 폭발했다.
“야 이 시발, 염장 그만 떨고 이제 좀 꺼져!”
“…라쉬크,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그걸 몰라서 묻냐!”
구더기 공주는 분홍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유리병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언성을 높였다.
“니가, 니가… 이 엿 같은 벌레 치료제를 100인분이나 만들라고 시켰잖아!”
“….”
“보조도 없어서 나 혼자 며칠째 쪽잠 자면서 약 만들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앞에서 염장을 떨어? 시발, 제사인가 뭔가 용 둥지 가서 하라고!”
“아니, 지하에는 햇빛이 안 들어서… 태양신의 제사를 하기엔 좀….”
“그딴 논리적인 대답은 필요 없어! 위로를 해달라고, 위로를!”
위로라. 여명은 괜히 볼을 긁으며 대답했다.
“…이번 마폭고 치료제는 일본 스미토모 그룹이 주문한 물건이에요.”
“뭐? 스미토모? 그 일본 재벌?”
“네, 그 재벌이요. 그것도 회장이 직접 의뢰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번 의뢰만 잘 넘기면… 미국과 일본의 재벌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겁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정점에 선 연금술사가 되시는 거죠.”
“….”
여명의 위로가 먹힌 걸까, 라쉬크는 들고 있던 비커를 내려놓고 푹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너 진짜… 내가 언제 그런 인맥 구해 달라고 했어? 응? 그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좋으시죠?”
“….”
구더기 공주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뿌듯함과 기쁨, 그리고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여명을 바라보다가, 성녀가 피식 웃는 걸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자식들이 진짜… 다 꺼져! 내 실험실에서 꺼지라고!”
“하지만 여기 월세는 제가 내는… 흡!”
쨍그랑! 라쉬크는 기어코 빈 물약 병을 던졌고, 여명은 재빨리 일행을 데리고 실험실 밖으로 도망쳤다.
***
[하아….]그렇게 여명이 해저터널에 도착하자마자, 마하간이 한숨을 쉬었다.
[또 계승을 치르러 왔느냐? 그렇게 강한 놈이, 매일매일 지겹지도 않으냐?]요 며칠간 여명과 파티원들에게 시달린 그는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다.
유령도 피곤을 느낀다는 사실이 퍽 신기한 일이었다. 구걸하는 유령을 보는 건 더 신기한 일이었고.
[그냥 오늘은 쉬면 안 될까?]“예, 안 됩니다.”
여명이 고개를 내젓자, 마하간이 처량하게 빌었다.
[그럼 계승 말고 계단의 시련만 하는 건? 그, 가짜 변경백에게 용사 무술 2초식을 전수 받아야지.]“마하간….”
하지만 빈다고 봐줄 여명이 아니었다. 그는 최근에 마하간을 움직인 말을 다시 꺼냈다.
“그렇게 힘드시다면 저도 쉬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전 평생 어머니 얼굴도 못 보고 자랐다는 걸.”
[….]“어머니와 이렇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하아, 예, 하지만 그게 마하간이 고생해야 할 이유는 아니지요. 저는 이만 돌아갈 테니, 오늘은 편히 쉬세요.”
노동자들에게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며 착취한 공산 귀족들의 선동이 이랬을까?
여명이 축 어깨를 늘어트리고 등을 돌리기 무섭게, 마하간이 푹 한숨을 쉬었다.
[아오… 그래, 오늘도 내가 졌다. 졌어! 염병 그만 떨고 내려가자꾸나!]“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이놈아.]여명은 투덜거리는 마하간과 함께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넓은 계단 중턱에 도착한 마하간은 평소처럼 계승을 시작했다.
[가능하면 오늘은 짧게 끝내다오.]“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여명은 전대 성녀님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사아아-서서히 계단의 마나가 움직이는 가운데, 여명은 고민했다.
세티의 말마따나, 오늘은 자신이 그녀의 아들이란 사실을 밝혀야 할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미루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가 먼저 눈치채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머니.
어색한 단어를 혓바닥 위로 굴리던 여명의 감각으로, 작은 마나가 느껴졌다.
‘계승’이 시작됐다는 신호.
한데, 그의 예상과 달리 아래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전대 성녀님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끈적하고, 깊고, 무거운 마나.
이건…
“…변경백?”
여명의 질문에 호응하듯,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게 두 눈동자가 계단의 어둠 사이로 서로를 마주한 바로 다음 순간.
여명만큼이나 젊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 계단 위로 올라왔다.
“이번 대의 용사는…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