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7)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7화(507/817)
EP.507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9)
* * *
***
저벅, 저벅.
뒷짐을 진 채 계단을 올라오는 젊은 변경백의 외모는 계단의 시련이 만든 환상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 그는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여명과 닮은 동시에, 무심했다.
하지만 저 눈동자.
감정이 담긴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처럼, 그 아래에서 무엇이 들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고요함이었다.
변경백과 눈을 마주한 여명은 본능적으로 그와 자신의 수준을 가늠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까마득하다.
그건 계단이 만들어 낸 가짜 변경백이나, 변경백의 모습을 빌린 심마와 마주했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실망은 없었다. 그가 얼마나 높은 곳에 서 있는지 볼 수 없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지 보였으므로.
‘…한번 붙어보고 싶다.’
여명은 솟구치는 호승심을 억눌렀다. 이건 계승 아닌가. 전대 성녀님의 경우를 보듯,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여명이 자신을 타이르는 사이, 변경백이 걸음을 멈췄다.
검을 뽑아 휘두르면 바로 닿을 거리.
그는 찬찬히 여명의 얼굴을 훑으며 물었다.
“이름은?”
“천여명.”
“지구식 이름이라…?”
변경백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으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천천히 뒷짐을 푼 그는 덤덤하게 다음 질문을 꺼냈다.
“작위는?”
“…작위?”
“사회적 지위 말일세. 지구에도 왕이나 귀족은 있을 것 아닌가.”
“…그런 건 가진 적 없습니다. 가질 생각도 없고요.”
“하다못해 선출직 직위조차 없는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홍용완 의원과 한국의 장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치에는 뜻이 없어서.”
“의외로군.”
의외라고? 왜? 여명은 묻지 못했다. 다음 순간, 변경백이 검을 뽑아 든 까닭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말보다는 검을 나누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그래,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군.”
“….”
“실력을 보이겠나?”
억눌렀던 호승심이 척추를 타고 역류했다. 여명은 미소 짓는 동시에 검을 뽑았다.
“기회를 주신다면야, 기꺼이.”
***
언제 흐른 건지 알 수 없는 땀 때문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하지만 강하게 끌어 올린 마나는 그와 검을 단단하게 이어주었다.
짧은 심호흡, 교차하는 눈빛, 일렁이는 검기.
여명의 근육이 기대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순간, 변경백이 말했다.
“오라.”
그 말을 신호 삼아, 여명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고지대의 이점을 이용한 내려찍기. 비교적 뒤늦게 움직인 변경백의 검은 여명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
먼저 상대의 몸에 닿은 건 여명의 검이었다. 그러나 변경백의 몸은 허깨비처럼 그의 검을 통과시켜버렸다.
유령처럼 공격을 무시하는 변경백 가문의 가전 무술.
변경백은 자연스럽게 그 빈틈 사이로 검을 찔렀다.
푹! 꿰뚫린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이것이야말로 여명이 노린 바였다.
다음 순간, 그는 혈관 속 무장 혈청을 움직여 자신을 찌른 검을 콱, 붙잡았다.
뒤늦게 여명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깨달은 변경백이 검을 뽑으려 했으나, 여명의 급속 냉각이 조금 더 빨랐다.
쩌저적!
검이 꽂힌 자리가 얼어붙으며 그대로 변경백의 검을 붙잡았다.
일반적인 초인이었다면 멍청한 자해였겠지만, 여명은 달랐다. 그에게는 주가시빌리가 있었으니까.
화악 – !
어깨 위로 터져 나오는 붉은 아지랑이가 변경백의 시야를 가리는 동시에, 여명은 멈추지 않고 변경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상대가 변경백 가문의 가전 무술을 사용하는 이상, 검술로는 승산이 없기에 노린 공격.
조금이라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선 어떻게든 난전으로 몰고 가…
…지 못했다.
자동인형 같았던 가짜 변경백과 달리, 눈앞의 변경백은 붙잡힌 검을 뽑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검을 놓은 뒤, 맨손으로 여명의 공격을 받아쳤다.
날아오는 검을 손바닥으로 쳐내는 건 기본이었다. 심지어 급소를 노린 발차기와 비각술조차 흘려내는 게 아닌가?
‘역시 검이 없어도 10강은 10강인가.’
여명은 이를 악물고 공격을 이어 나갔다.
살벌한 마나를 따라 검을 휘두르고, 발을 뻗었다. 날카로운 마법들이 그의 사각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하나하나가 치명타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공격.
흔들리는 계단과 번쩍이는 마법의 빛이 모든 공격의 살벌함을 증명하는 듯했다.
여명은 당장이라도 변경백의 몸을 꿰뚫고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느꼈는데…
‘닿지 않는다.’
그의 공격은 가전 무술은커녕 일반적인 공방조차 뚫을 수 없었다.
“맹수처럼 싸우는군.”
공방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변경백이 짧은 감상까지 남길 정도.
“아직, 진짜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짧게 호흡을 끊으며 소리친 여명은 그대로 화산쇄설을 일으켰다.
직후, 검기에 휩싸인 그의 검 끝에서 어마어마한 불씨가 피어났다. 맨손 방어 쯤은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기사단장의 무술은 그대로 폭-
“그만.”
그때, 변경백이 갑자기 손을 멈췄다.
그건 팽팽한 줄다리기 중에 줄을 놓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고, 놀란 여명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빌어먹을 중력과 가속도는 여명을 계단 아래로 밀어 넣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계단을 구른 그가 간신히 자세를 잡았을 땐, 열 계단 넘게 아래로 내려온 뒤였다.
“…끄응.”
그나마 폭발은 멈춰서 다행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여명은 어깨에 꽂힌 변경백의 철검을 뽑으며 위를 바라봤다.
“왜 멈추신 겁니까?”
변경백은 여명을, 정확히는 눈 깜빡할 사이에 재생하는 그의 어깨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됐다. 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군.”
“…뭐가 말입니까?”
화산쇄설을 알아본 건가?
여명이 살짝 기대하며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네가 얼마나 불합리한 존재인지.”
“…?”
여태껏 유효타 한 번 못 먹였는데? 여명은 자신을 놀리나 싶어 눈썹을 씰룩였다. 하지만 변경백의 표정은 비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작 그 나이에, 이만한 힘과 그만한 깨달음이라… 모든 것이 불합리의 극치라 할만하다.”
“아니, 그건 당신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외모만 보면 저랑 몇 살 차이 없….”
여명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변경백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 아래로 깊은 주름이 생기고, 코 아래로 진한 수염이 자라났으며,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늘어났다.
불과 몇 초 만에 수십 년 세월을 뒤집어쓴 모습.
순식간에 중년이 된 그는 한층 더 묵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남겨놓은 감정과 기억은… 이미 마왕을 쓰러트린 뒤의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젊은이라 불릴 수 없던 시절이지.”
젊은 모습이 그냥 변장이었다… ? 여명이 전대 성녀님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변경백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너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나는 진의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풋내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기의 천재 소리를 들었지.”
“….”
“이게 불합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불합리란 말인가.”
비꼼보다는 순수한 찬사에 가까운 말이었다. 설마 칭찬을 들을 줄 몰랐던 여명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하기야, 데메론드와 제국 기사단장 모두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이윽고 같은 계단에 도착한 변경백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명은 그와 같은 눈높이에서 물었다.
“…어떻게?”
“두 사람 모두 개성이 강한 검을 휘두르지. 동시에 합쳐 놓으니 꽤 볼만하더군.”
“….”
그렇게 말한 변경백은 떨어진 철검을 회수해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조금 더 싸우고 싶었던 여명은 괜히 입맛을 다셨으나, 변경백은 그대로 계단 위에 걸터앉았다.
여명은 그를 따라 앉으며 물었다.
“그… 더 질문하실 건 없으십니까?”
“많다. 하지만 나보다는 그쪽이 더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군.”
“….”
차원문 너머의 귀족이라 그런가, 변경백의 말투와 행동에서는 묘한 고상함과 품위가 느껴졌다. 여명은 평소보다도 더 조심스레 물었다.
“전대 용사 파티는… 왜 이런 유산을 남겨두신 겁니까?”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듣지 않았나? 퀴니와 마하간의 입이 그렇게 무거울 리 없는데.”
“…운명과 주인공이 싫어서, 그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시긴 했습니다.”
“아, 입이 가벼운 친구들이라 영 믿질 못한 거였군?”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기대를 배신해서 미안하지만, 나도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군.”
“….”
“굳이 이유를 더 추가하자면… 성녀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게 전부일세.”
변경백의 대답과 상관없이, 여명은 침을 삼켰다.
전대 성녀님, 그러니까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새삼스레 변경백의 얼굴이 보인 탓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 전대 성녀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쭙습니다. 혹시….”
“내가 그녀와 아이를 가진 적 있느냐고?”
선수를 빼앗긴 여명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나와 그녀가 자네의 부모냐고 묻는 거라면, 미안하군.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니콘의 친구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