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08)
을 위한 세계는 없다-508화(508/817)
EP.508 우리가 기다린 너에게 (10
* * *
***
유니콘의 친구.
여명은 변경백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고자도 발기는 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아주아주 무례한 고민 끝에, 여명은 진실이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은 변경백의 자식이 확실했으므로.
용사 혈통이 거의 다 끊겼다는 재벌 용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지막 용사 혈통은 변경백뿐이다.
전대 성녀님이 그의 어머니고, 여명 자신이 순수 인간인 이상, 다른 아버지의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여명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케프리가 그러했듯, 그가 태어난 4천 년 전 시간선의 변경백과 눈앞의 변경백은 다른 사람일 테니까.
같은 유전자와 같은 육체를 가졌어도, 회귀 속에서 다른 시간, 다른 경험을 겪은… 다른 사람.
회귀 밖에서 4천 년을 보낸 여명이 어찌 그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쓴웃음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군.”
그때, 변경백이 그의 상념을 끊었다. 그는 지긋이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이 자신의 눈을 볼 때 이런 느낌일까? 어딘가 따스한 눈동자라고 생각한 여명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질문이 있기는 한데… 무례한 질문인 것 같아 그냥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무례라.”
흐음, 여명을 보던 변경백은 무릎에 오른팔을 올렸다. 그리고 주먹 끝으로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더욱 내게 질문해야지.”
“예?”
“비록 진짜 기억을 부여받고, 진짜처럼 움직일지언정, 지금의 나는 나치의 계단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진짜 내게 무례한 질문을 하느니, 환상인 내게 질문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
옳은 말이었다.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계단의 환상을 진짜 사람처럼 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환상으로 만난 어머니가, 전대 성녀님이 진짜라고 믿고 싶었던 거다.
하, 부끄러운 깨달음이었다. 얼굴을 쓸어 넘긴 여명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변경백님의 아들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변경백은 피식, 그러니까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안 하는 게 나을 정도로 무례한 질문이군.”
“….”
“검을 뽑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대답해 보자면… 기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네.”
변경백은 진짜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선, 기쁜 건…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더 뛰어난 아들이란 부분이군. 모든 아버지들의 꿈이지. 예법이나 예의가 좀 모자라긴 하지만… 그거야 가르치면 될 일이고.”
“…화가 나는 부분은요?”
“나는 그녀를 사랑한 이후 단 한 순간도,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린 적 없네.”
“….”
“그런 내가 그녀 말고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봤을 거 같은가?”
그 순간, 계단 아래에서 옅은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꼭 닮은 검은 머리카락이 팔랑거리는 가운데, 여명은 변경백의 눈빛이 세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사랑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의심도 없는 자의 눈빛.
여명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성녀님의 아들이라면요? 그러면 어떠십니까?”
변경백은 피식 웃었다. 마치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처녀와 총각의 아들이라. 지구의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참 좋아할 이야기로군.”
“….”
“물리적으로 그게 가능하냐는 사실을 떠나서, 그게 사실이라면… 흠, 글쎄, 좀 아쉽겠군.”
“…아쉽다구요?”
변경백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아들보다는 딸을 원했거든. 그것도 여러 명으로.”
딸 부잣집을 바라신 건가? 어머니를 떠올린 여명은 지나가듯 말했다.
“그…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들로도 그분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며느리도 엄밀히 말하자면 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며느리?”
“그러니까, 음, 아들이 며느리를 많이 데리고 오면… 딸 여럿을 낳은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문뜩 변경백의 표정을 확인한 여명은 뒤늦게 자신이 개소리를 지껄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변경백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되묻는 대신, 차분한 언성으로 대답했다.
“초대 용사님의 예를 들어 말하는 거라면, 음… 글쎄, 생각은 기발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 여러 여인에게 동시에 사랑받는 건 마왕을 잡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
참 합리적이고 교양 있는 대답이군.
합리적인 삶과 거리가 먼, 그러니까 마왕을 쓰러트리고 여러 여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
짧다면 짧은 대화가 끝난 후.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난 변경백은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이만하면 충분히 알겠군.”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 여명은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검을 뽑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계승을 시작할 테니.”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자신이 가진 무기 중 가장 좋은 검을 뽑았다.
산의 눈물. 겨자가스를 닮은 연한 노란색으로 번들거리는 검.
드워프들의 증오가 녹아든 검을 본 변경백은 보석을 감정하는 것 같은 눈으로,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실망한 듯한 눈으로 말했다.
“…훌륭한 검이지만,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무기군.”
“용사의 무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직 다 모으지 못했습니다.”
변경백은 어디까지 모았고, 뭘 모으지 못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런가, 라고 중얼거린 뒤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을 꺼냈다.
여명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투명한 호박(琥珀)을 닮은, 보석 꿀.
‘…변경백 가문의 가보.’
그의 손에 들린 보석 꿀은 여명이 시카고 암시장에서 구했던 반쪽짜리와 달리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왜 검이 아니라 저걸 꺼내는 거지? 여명이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변경백이 보석 꿀을 꽉 쥐었다.
곧이어, 번쩍! 보석을 쥔 그의 주먹에서 선명한 금빛 섬광이 흘러나왔다.
여명이 섬광의 정체가 응축된 마나라는 걸 깨달을 때쯤, 섬광은 기다랗게 늘어나며 검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보석 꿀 그 자체가 검이었던 건가?
어째서 계단이 만들어낸 변경백이 가문의 가보가 아닌 일반 철검을 들고 있었는지 깨달은 여명의 눈앞으로, 섬광이 사라지며 진정한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금빛 손잡이와 그 위에 장식된 보석 꿀이었다.
과할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 위에 달린 칼날에는 어떠한 장식도 없었다.
평범한 아샤의 칼보다 얇은, 투박할 정도로 심플한 칼날.
하지만 그 칼날을 마주한 여명은 화려한 손잡이를 볼 때보다도 더 크게 감탄했다.
무게 중심이 완벽한 것은 물론이오, 무뎌진 곳조차 없는 모습이라니.
초대 용사 이래 밀랍 산맥의 괴수를 처치해 온 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모습이었다.
변경백 가문이 저 검을 가보로 삼은 시간을 헤아려 보자면, 저 검은 그 자체로 역사적 유물이요, 기술적 경이의 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검이 여명에게 겨눠지고 있다는 점일까.
꿀꺽, 여명이 침을 삼키는 사이, 가보를 든 변경백은 담담하게 물었다.
“용사의 무술은 익혔나?”
“예, 익혔습니다. 첫 초식뿐이긴 하지만….”
“…첫초식만 익혔다고? 그건 무슨 소리인가?”
변경백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여명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계단의 시련에서 변경백님이… 그러니까, 환상이 쓰는 무술을 보고 익힌 게 첫 초식뿐입니다. 제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두 번째 초식은 영 사용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용사의 무술을 보고 익혔다고?”
“아, 그게. 저는 눈으로 본 무술을 보고 베낄 수 있습니다.”
“…일견즉해?”
“네, 일견즉해.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름으로 부르더군요.”
직후, 며느리와 딸을 운운하던 이야기를 듣고도 평정을 유지하던 변경백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이놈이 지금 무슨 개소리를?’ 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견즉해로 용사의 무술을 익혔다… 어디 한 번 보여주겠나?”
뭔가 문제가 있나? 물론, 일견즉해가 진의까지는 훔쳐 오지 못하지만, 용사의 무술은 용사의 핏줄 그 자체가 진의 아니던가.
여명은 변경백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나 고민하면서도 천천히 검을 양손으로 잡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용사의 무술이었고, 그것을 알아본 변경백의 표정은 한층 더 이상해졌다.
“자세와 마나는 정확하군. 흠… 어디 한 번 사용해 보게.”
“예?”
“나한테, 전력으로 쏘아내게.”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여명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음 순간, 변경백이 그와 똑같은 자세를 잡았으므로.
용사의 무술, 첫 초식.
죽기 싫으면 최선을 다해라. 검을 쥔 변경백의 기백은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발이 어긋날 정도로 좁은 계단을 벗어나, 변경백과 거리를 벌리고, 일부러 고지대를 선점한 뒤…
먼저 검을 휘둘렀다.
산의 눈물이 공기를 벤 자리로, 주가시빌리와 닮은 검붉은 검기가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초인은 반응도 못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긴 검기였다.
하지만 변경백은 일반적인 초인을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다. 한 발 늦게 검을 휘둘렀음에도, 그의 검기는 여명보다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여명과는 전혀 다른, 용사를 상징하는 황금색 검기.
!!!!
두 검기가 충돌하며 끔찍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둘 다 상처는 없었지만, 여명이 서 있는 방향으로 한층 더 무거운 충격파가 날아왔다.
기본적인 위력에서도 밀리나? 여명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다잡고 한 번 더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검기를 쏘아내려는 순간.
“…황금색이 아니군.”
변경백이 자세를 바꿨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는 검을 쥔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전형적이다 못해 뻔한 찌르기 자세.
하지만 저 간단한 자세 속에 담긴 마나의 흐름은 여명이 아는 그 어떤 무술보다도 복잡했다.
‘용사의 무술, 이 초식….’
저건 정상적인 무술이 아니었다. 혈통은 물론이고, 재능이 없으면 닿을 수 없는 영역의 무술.
마나를 꿰뚫어 보는 여명의 눈동자 위로 실핏줄이 돋아나고, 흐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설마 죽지는 않겠지.’
여명이 허탈하게 웃으며 용사의 무술 일 초식을 휘두른 순간.
변경백의 검이 허공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