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10)
을 위한 세계는 없다-510화(510/817)
EP.510 10강에 가장 가까운 자.
* * *
자비에 감사하는 자는 적고,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라 믿는 족속은 많으니.
한번 피를 흘렸으면 절대 멈추지 마라.
[칠레의 특수군, 피노체트의 아이들의 격언]***
올림피아 예선이 거의 끝나감에도, 아카데미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고 점점 더 뜨거워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예선은 아카데미 내부경쟁에 불과했지만, 본선은 각국, 각 집단의 자존심이 걸린 진짜 경쟁이었으니까.
작게는 초인 교육 기간 사이의 경쟁심부터, 크게는 국가 간의 해묵은 자존심 싸움까지.
고작 학생 싸움에 무슨 국가의 자존심까지 나오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당사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수십 년간 프랑스에게 불공정 무역을 강요당한 아샤 소왕국 출신 학생이 순수한 마음으로 프랑스 학생과 경쟁할 수 있을까?
아세안 대전쟁의 참전국 출신 학생들이 서로를 미래의 적이 아닌, 그저 같은 학생으로 볼 수 있을까?
한국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만나는 건? 이스라엘 출신이 독일 출신을 만나는 건 또 어떻고?
진짜로 피를 보던 냉전 시대의 체제 경쟁만큼은 아니었지만, 작금의 올림피아가 대리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경쟁심에 빠진 인간들은 종종… 아니, 꽤 자주 공정이란 단어를 짓밟는 법.
최근 아야톨라에게 굴욕을 당한 모스크바가 노골적으로 자국 학생들에게 영약을 뿌린다거나.
몇몇 남미 국가들이 불법 영약을 빼돌려 학생에게 준다는 소문은 이미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결국, 공정한 사람들마저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게 되는 악순환이…
“…다르게 말하면, 이 시즌이 암시장 연금술사들의 최고 대목이란 뜻이지.”
열심히 설명하던 세티의 말을 끊은 건 구더기 공주였다.
갑자기?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분홍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포장지에 꾹꾹 눌러 담던 라쉬크가 덧붙였다.
“연금술사들도 바보는 아니라, 올림피아 시작 전에는 이래저래 약을 쌓아 놓거든.”
“그래요?”
“응, 약효를 조금 줄인 대신에 소화가 빠른 영약처럼 평소에 안 팔리는 물약도 이 시즌에는 기똥차게 팔려서… 여러모로 좋은 때야. 하루 이틀 가는 도핑 물약도 값이 몇 배나 뛰고, 이 시즌에는 오히려 마약이 돈이 안 된다니까?”
물약을 상자에 넣어 포장을 끝낸 라쉬크는 카페인과 피로에 쩔은 분홍색 눈동자로 여명을 빤히 바라봤다.
그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갑자기 왜 저래?
옆에 있던 성녀가 ‘야근 때문에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같은 말을 지껄일 때쯤, 라쉬크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자, 그러면 누구 씨 덕분에 이 대목을 놓친 내 기분이 어떻겠어?”
“어… 잘 모르겠습니다?”
“….”
이 씹새-입술 사이로 욕설을 내뱉으려던 라쉬크는 푹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가 돈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응? 적어도 내 수준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면 안 되겠냐?”
“대우? 무슨 대우요?”
“이 텁텁한 실험실 말고, 거 뭐냐, 저기 번화가에서 가장 높은 VIP룸에서 지내게 해준다던가?”
너무한 요구라고 생각한 걸까, 말을 꺼낸 라쉬크는 은근히 여명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여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일찍 말하시지, 당장 옮기세요. 경비는 제가 낼게요.”
“….”
여명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오히려 이야기를 꺼낸 라쉬크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되네?’ 싶은 눈으로 여명을 바라본 그녀는 슬며시 조건을 추가했다.
“저기, 그러면 하는 김에 영약 재료 하나 사줄 수 있을까? 많이는 필요 없고, 한두 병 만들 양이면 되는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꽤 비싼 영약을 요구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는지 아는 세티와 여명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드릴 수는 있는데… 쉬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최근에 계속 밤샘하셨잖아요.”
“그건 시발 니가 일을 존나…! 아니, 아니. 이건 양보 못 해. 대목일 때 그럴싸한 약 하나 만들어서 시장에 내놔야 이름값이 유지된단 말이야.”
“…이름값? 핑크 데스?”
“연지 벌레의 주인! 하다못해 구더기 공주라고 해라! 어?! 구더기 공주의 이름값이 아까워서 그런다 새꺄!”
그때, 성녀가 여명에게 ‘마약쟁이한테도 이름값이 있었어?’ 라고 속삭였다.
다 들으라는 듯 노골적인 목소리였고, 라쉬크는 곧바로 버럭 소리 질렀다.
“마약쟁이가 아니고, 전통 연금술사야! 나 국제 약사 자격 가지고 있거든?! 전문직이라고!”
“아이고, 그러셨구나. 약사 라이센스 가진 마약쟁이였구나.”
성녀가 이죽거리자, 라쉬크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이, 씹, 너, 너 나한테 무슨 약 가져갔는지 다 까볼까? 어? 니가 그러고도 성녀-”
성녀는 대답 대신 슬그머니 총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말하면 당장 뽑아서 쏴버리겠다는 경고.
라쉬크에게 대체 무슨 약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상한 약이라도 받았나?’
뭐, 기껏해야 정력제나 받았겠지. 성녀의 뻔한(?) 욕망을 간파한 여명은 그대로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마약 이야기는 여기까지. 라쉬크도 더는 안 만든다고 약속했으니까, 너도 그만 놀려.”
성녀는 네, 네, 건성으로 대답했다. 여명은 다시 라쉬크에게 물었다.
“…그래서, 라쉬크? 무슨 재료인데요?”
라쉬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성녀가 총을 쏠 것을 대비해 여명과 쇠미리 사이에 앉았다.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재료는 그럴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명백한 권리, 두 뿌리… 아니, 한 뿌리만 사줘.”
이번에는 성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뭐요? 야근 때문에 진짜 미쳤어요? 차라리 용의 비늘을 달라고 하시죠!”
“아니, 그건 이미 있어서….”
“….”
그러자 성녀는 진짜로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여명은 염동력으로 그녀의 총을 빼앗은 뒤 조심스레 물었다.
“명백한 권리라는 그거, 제가 아는 영약이랑 같은 겁니까?”
“…네가 아는 게 뭔데?”
“엘프 전쟁의 원인 중 하나요.”
***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쇠미리를 바라봤다.
세티와 성녀, 그리고 여명을 따라 라쉬크의 실험실에 온 그녀는 여태껏 그의 옆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명백한 권리’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책을 덮은 채 라쉬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미리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쉬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숲 인간들이 미국에 내다 팔다가 엘프들의 신경을 건드린 그 풀떼기 맞아.”
“…왜 하필 그겁니까?”
“이게 요즘이야 구하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꽤 흔한 영약이었거든. 덕분에 올드한 레시피에는 안 들어가는 곳이 없어서… 한 번 써보게.”
“….”
“내가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고, 그 뭐시냐, 예전부터 탐내던 건데… 때마침 파는 인간이 있어서 그래. 응? 어떻게 안 될까?”
그 질문의 답은 여명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때마침 파는 인간이 있다고요? 어디요?”
“으, 응?”
“대체 어디서, 어떤 간 큰 놈이… 세계수의 싹을 팔고 있어요?”
세계수의 싹. 그건 엘프가 ‘명백한 권리’를 부르는 단어였다.
그리고 그 단어를 들은 라쉬크는 뒤늦게 쇠미리가 엘프란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도 성녀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엘프.
귀가 안 보인다고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야근 때문에 뇌가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미국-엘프 전쟁의 산증인 앞에서 명백한 권리를 운운하다니….’
극단주의 엘프, 그러니까 대다수의 엘프라면 당장 칼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당황한 라쉬크는 여명에게 눈빛으로 애원했다.
도와줘.
여명은 조금 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라쉬크, 저 말고 공주님을 보셔야죠.”
“…뭐? 공주님?”
“예, 이름도 위대하신 새싹 공… 읍!”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쇠미리가 그의 어깨를 찰싹! 내려쳤다.
“제가! 공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죠! 공주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여명이 과장되게 몸을 움츠리며 쇠미리의 손을 요리조리 피하길 잠시.
쇠미리는 기어코 여명의 등짝을 두어대 더 때렸다. 그래도 그 장난스러운 행동이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조금 화가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라쉬크, 화 안 낼 테니까, 세계수의 싹을 팔고 있다는 사람이 누군지 말해요.”
하지만 라쉬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분위기고 뭐고, 공주란 단어가 그녀의 뇌리를 찌른 까닭이었다.
뭐 시발, 공주? 설마 그 ‘데메론드’의 딸인가?
상황 파악은 빨랐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라쉬크는 쇠미리를 향해 곧바로 넙죽 허리를 숙였다. 오랫동안 소시민으로 살아온 생존본능이었다.
“저기, 그, 제가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이번에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입단 홍보를 하러 온 남미 용병단이 직접 채취한 명백… 아니, 세계수의 싹을 팔고 있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확실한 거죠?”
“예, 그럼요. 확실합니다! 제가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라쉬크를 본 성녀가 ‘공주보다 성녀가 높은데’ 라며 짧게 투덜거리고, 쇠미리가 아카데미에 온 용병단들의 이름을 헤아리길 잠시.
조용히 있던 세티가 탁! 소리 나게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그녀가 설명했다.
“DINA 용병단. 최고는 아니지만, 남미 분쟁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베테랑 용병단이야. 영약 거래도 활발하게 하고 있고… 진짜로 세계수의 싹을 파는 건지, 아니면 홍보용 낚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네.”
“…그런 정보는 왜 가지고 있어?”
여명이 되묻자, 세티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철을 펼쳐 한 부분을 툭툭 두들겼다. 그녀가 두들기는 곳에는 낯선 3학년 선배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거야 여명, 네 예선전 마지막 상대인 3학년 선배가 입단하는 용병단이… 바로 여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