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11)
을 위한 세계는 없다-511화(511/817)
EP.511 10강에 가장 가까운 자. (2)
* * *
***
로드 하우 아카데미 북쪽 섬.
외부인들을 위한 번화가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다.
학부모, 기자, 외교관, 관광객, 그리고 학생들을 스카웃하러 오는 각종 헤드헌터들까지.
개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역시 학부모였고, 가장 적은 건 의외로 헤드헌터였다.
반반한 초인을 찾는 연예 기획사나 아직 포텐이터지지 않는 초인을 노리는 용병단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다른 아카데미와 달리, 로드 하우에는 애초부터 소속이 없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으니까.
로드 하우에서 가장 수준 낮은 학생들조차 이런저런 기업의 러브콜을 받으며, 어지간한 용병단 정도는 골라서 갈 수 있다.
그래서 넓은 로드 하우 미팅룸에 단 두 명만 덜렁 앉아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 어떻든? 예상대로 2학년 중에 있던가?”
먼저 입을 연 건 거구의 히스패닉 남성이었다. 깔끔한 양복 차림임에도,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한눈에 용병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자였다.
“아뇨, 흔적도 못 찾았습니다.”
그의 맞은편, 교복을 입은 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즉답이었다. 용병은 실망스러운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헤로니모, 앞으로 용병으로 살고 싶다면 알아둬라. 용병이 돈을 받았으면, 언제나 받은 돈 이상을 해야-”
헤로니모라 불린 학생은 곧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1학년과 3학년도 추가로 찾아봤지만, 말해주신 특징을 가진 학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
“데메론드의 무술은커녕, 엘프 검술을 쓰는 학생도 없더군요. 애초에 이름도 외모도 모르는 인간을 무술이랑 장신구로만 찾는 건 좀….”
학생이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용병이 정색했다.
“인간? 아니지. 그건 인간이 아니라, 귀쟁이다.”
“….”
헤로니모는 그게 뭔 차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용병은 쯧, 혀를 찬 뒤 턱을 쓸었다.
“그래, 아카데미가 바보도 아니고, 뻔하게 숨겨 놓지는 않았겠지… 학생들 귀를 하나하나 잘라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고생했다.”
“그럼, 제 보상은…?”
“1학년과 3학년을 모두 확인한 점, 그리고 무술을 쓰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점을 들어 성공 보상 중 절반을 지급하마.”
절반. 헤로니모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용병이 서류철 하나를 꺼내 그의 앞에 툭 내려놨다.
그건 지난번에 봤던 용병단 입단서나 명령서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한 사람을 꼼꼼하게 분석한 보고서.
‘천여명….’
헤로니모는 조심스레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사진, 출생지, 출신 학교 같은 개인 정보부터, 사용 무술, 습관, 예상 약점 같은 기밀 정보까지.
그의 눈이 꼼꼼하게 정보를 기억하는 가운데, 서류 너머 용병이 말했다.
“천여명. 한국 출생. 눈동자 색을 보아 아샤 피난민의 후손으로 판단됨. 학교 졸업 후 어느 날 초인이 되었고, 그대로 PMC… 민간군사기업에 뛰어들었다.”
“…아무 도움 없이 혼자 초인이 됐다고요?”
“그래, 너처럼 운이 좋은 케이스지. 아니면 핏줄이 대단하던가. 다음 페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만주 사태 이전에는 제대로 된 경력도 없었다.”
“….”
그의 말대로 페이지를 넘겨보자, 텅 빈 경력 칸이 눈에 들어왔다.
정보가 없다기보단, 기록할 가치가 없는 정보가 대부분이란 뜻.
지금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였다.
“그냥 유명한 1학년인 줄 알았는데… 이 친구도 뒤가 좀 구린 친구였군요. 기록을 조작한 겁니까?”
“아니, 거기 적힌 건 전부 조작되지 않은 사실이다. 푸른 쥐 같은 정보 길드에서 직접 녀석의 뒤를 캐낸 끝에 내린 결론이지.”
“…흐음.”
헤로니모는 한 번 더 서류를 확인했다. 그리고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치곤 성녀와 만난 뒤에 얻은 유명세가 너무 비정상적인 거 아닙니까? 성녀의 호의에, 성검의 관심에… 이건 누가 봐도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라 똘똘하구만.”
“….”
용병은 책상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우리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신들이 직접 내린 게 아니고서야, 이런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 없지. 어떤 조직에서 의도를 가지고 키운 놈이 분명해. 아마 초인이 된 이후 계속 정보 길드의 눈을 피해 수련한 거겠지… 문제는,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이런 놈을 키웠냐는 거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용병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녀석이 처음 데뷔한 선죽 용병단이 어디 휘하인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둔간 중공업. 그 잘나신 드워프들이 녀석의 첫 번째 후원자였다. 우연이라기엔 참 공교로운 일이지.”
헤로니모는 놀라지 않았다. 천여명과 드워프들이 친하다는 건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당장 올림피아에 앞서 비행기 채로 선물을 보내고, 전용 연금술사까지 붙여줬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나.
그러면 드워프들이 녀석을 키운 걸까? 하지만 그 가설은 최근 천여명의 행보를 설명하지 못했다.
홍세티인가 뭔가하는 이상한 이름의 계집한테 빠져서, 한국 정부에게 코가 꿰인 상황.
뭐 한국에서는 이미 영웅이나 다름없다는데… 드워프들이 바보도 아니고, 잘 키운 초인이 다른 나라에게 넘어가는 걸 두고 볼 리 없었다.
선물을 주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고.
결국, 답을 찾지 못한 헤로니모는 용병을 바라봤다.
용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정답은 알려줄 수 없다.”
“…그러면 이런 정보는 왜 보여 주신 겁니까?”
“딴마음 먹지 말란 뜻으로 보여준 거다.”
“….”
“딱 봐도 뒤가 구린 놈이야. 괜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정정당당하게 싸울 필요 없어.”
거기까지 말한 용병은 탁! 소리 나게 물약 세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최고급 도핑 영약과 네 혈관 속 잠력을 억지로 끌어내 줄 영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기에 바를 독이다.”
헤로니모는 꿀꺽 침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약물 전부 올림피아에서 금지된 약물인 까닭이었다.
이기건 지건, 그는 앞으로 영원히 올림피아에서 도핑을 한 개자식으로 낙인찍히게 되리라.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용병이 물약을 툭툭 치며 말했다.
“용병은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의뢰, 오직 의뢰만이 전부다. 그리고 이번 의뢰 내용은 명확하다.”
“….”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천여명에게 상처를 내라.”
용병은 헤로니모를 향해 약병을 밀었다.
“지금 네 실력으로 불가능한 의뢰다. 그러니 이것들을 전부 사용해.”
“하지만 독은….”
“재생력을 억제하고 마나를 억누르는 독이다. 바르는 법은 알려줄 테니,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팔이건 다리건 쑤셔라. 천여명이 본선에서 맥을 못 추도록. 알겠나?”
“….”
헤로니모는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잡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선금을 받았다.
아카데미 후배의 앞길을 막는 게 못내 걸렸지만, 원래 뒤가 구린 놈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좀 풀렸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도핑 약의 부작용은 어느 정도입니까?”
“대략 반년 정도는 휠체어 신세를 질 거다. 당연히 무술은 거의 못 쓸 거고… 그래도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성공만 하면, 계약금의 50배는 나올 테니.”
“….”
휠체어에서 반년. 이제 막 아카데미 졸업을 앞둔 청년에겐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계약금의 50배라니.
고향의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형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마음이 꺾인 헤로니모가 약을 쥔 순간.
끼이익-갑자기 미팅 룸의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누구… 어?’
재빨리 약을 챙긴 헤로니모는 물론이고, 약을 건넨 용병조차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인물을 보고 굳었다.
천여명.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거지? 설마 헤드헌터에게 잡혀 온 것도 아닐 텐데.
헤로니모의 마음속 의문을 읽기라도 한 걸까. 미팅룸을 두리번거리던 천여명은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헤로니모와 달리, 맞은 편에 앉은 용병은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천여명의 개인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순식간에 갈무리한 뒤, 자연스럽게 천여명을 맞이했다.
“오, TV로만 보던 유명 인사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설마 우리 용병단에 입단할 생각인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따로 DINA 용병단을 찾는 분이 계셔서요. 안내 겸 찾아왔습니다.”
“우리 용병단을 찾는 사람?”
천여명은 대답 대신 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곧이어 슬쩍 문이 열리며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푸석푸석한 분홍 머리카락 아래, 진한 다크서클이 늘어진 여인.
어딜 봐도 약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가 손님이라는 걸 알아본 용병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아, 영약을 사러 온 분이셨군.”
여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슬쩍 헤로니모를 바라봤다.
“혹시 용병단 회의 중이셨다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니, 아닐세.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야 있나.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났으니, 바로 가지.”
“감사합니다. 아시는 듯하지만, 저는 천여명입니다. 그리고 저기 오시는 분은 핑… 아니, 라쉬크. 둔간 제약의 전속 연금술사십니다.”
“오, 연금술사라니.”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쉬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후안. DINA 용병단의 후안입니다.”
***
후안.
여명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작가의 노트에 적혀있는 이름이었으므로.
1장 보스 피혁 사제에 이은, 시나리오 2장 보스.
엘프 사냥꾼 후안.
왜 2장 따위는 옛날에 끝났을 이 순간에 이 녀석이 아카데미에 찾아왔느냐-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미 작가의 노트가 의미 없을 정도로 운명을 비틀고 다닌 건, 여명 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녀석은 원래 ‘시나리오’와 마찬가지로, 로드 하우 아카데미의 엘프를 찾고 있다는 것.
세계수의 싹을 판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닌 것부터가 뻔한 수작이었다.
세계수가 수소 폭탄 아래 타오른 뒤, 단 한 번도 새로 피지 않은 귀한 풀을 미끼 삼아 엘프들을 낚아보려는 수작.
미리와 리메가 그 수작에 걸려들기 전에 여명이 먼저 알아챈 건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작가의 노트가 이럴 때는 쓸만하네.’
여명이 오랜만에 바오닉에게 상을 줘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일행은 DINA 용병단의 숙소에 도착했다.
번화가 외곽의 비교적 저렴한 호텔이었는데, 용병단의 숙소치고는 매우 작은 축에 속했다.
“이거, 숙소가 좀 볼품없어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카데미에 온 인원이 겨우 둘 뿐이라서 그렇습니다.”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안이 그렇게 설명했다.
여명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볼품없지 않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둘?’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후안 혼자 다녔을 텐데? 그가 꼬리를 무는 의문을 삼키는 사이, 일행은 숙소에 도착했다.
홍보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는지, 곳곳에 영약 상자가 쌓인 호텔 방.
아샤에서만 나는 귀한 약초와 풀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라쉬크가 여명에게 속삭였다.
“진짜 할 거야?”
“…예, 진짜 할 겁니다.”
“쓰읍… 이거 끝나고 정말 원하는 거 다 사주는 거다.”
“예, 예.”
짧은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라쉬크는 후안의 안내를 따라 온갖 재료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화약과 피를 먹고 자란다는 남미의 혈초부터, 파괴된 칠레 차원문 주변에서만 난다는 흑쑥까지.
세티가 봤다면 라쉬크의 머리통을 깨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지만, 여명은 한치의 불만도 없이 전부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수의 새싹이 든 상자에 도착한 직후.
“세계… 아니, 명백한 권리 세 뿌리. 이거 다 주세요.”
“어… 손님, 죄송하지만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어렵다고요?”
“예, 저희도 한 뿌리는 따로 쓸 일이 있어서요. 두 뿌리까지는 팔 수 있지만, 세 뿌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여명은 슬쩍 라쉬크와 눈을 마주쳤다.
연습한 대로 하세요-라는 눈빛이었고, 라쉬크는 오만상을 찌푸린 뒤 그렇게 했다.
“아니, 잠깐, 그건 무슨 개소리죠?”
“예? 개소리라니, 그 무슨…”
“아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한 뿌리는 남겨야 한다고 미리 말을 하던가. 지금 세 뿌리 다 보여주고 한 뿌리는 안 팔겠다는 게 말이 돼요? 방금 떠오른 내 영감은 어떻게 책임질 건데?”
“….”
후안은 이게 뭔 소리냐는 듯 여명을 바라봤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우리 연금술사분께서 워낙 장인 정신이 투철하신 분이라… 한 번 보고 떠오른 레시피는 무조건 만드셔야 합니다. 이번에는 명백한 권리 세 뿌리를 보고 영감이 오셨나 봅니다.”
“뭔…?”
후안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라쉬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됐고! 이거 세 뿌리 다 파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건 어렵습니다. 저희도 사정이 있….”
“안 돼?! 안 된다고?! 그럼 나도 안 사!”
라쉬크는 여태껏 구매한 영약 재료가 든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던졌다.
연기에 너무 몰입한 건지, 그녀는 후안이 입을 열기 전에 버럭 소리쳤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 내가 이 좆만한 아카데미에 있으니까, 너 같은 용병 나부랭이도 내가 우습지!? 내가!! 내가 지구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전통 연금술사고! 둔간 중공업 후계자가 내 뒷배인데!! 어!? 내가 전화 한 통 하면 이런 코딱지만 한 용병단! 업계에서 추방하는 거 일도 아니야! 알아들어? 추방! 추방이라고!!”
그녀는 무슨 랩을 하는 것처럼 두다다다 말을 내뱉더니, 마무리로 카약 퉤-바닥에 침까지 뱉었다.
‘…이거 연기 아닌 거 같은데.’
살짝 당황을 삼킨 여명은 약속대로 그녀를 붙잡고 ‘아이고, 연금술사님, 화내지 마세요’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그리고 라쉬크가 흥! 콧방귀를 뀐 직후, 여명은 살벌한 표정을 짓는 후안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세 뿌리 전부 팔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돈이라면 더 드리겠습니다.”
“…돈을 더 줘? 이 상황에서 그게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 하나? 내가 용병이 아닌 장사치로 보이나 보지?”
“아뇨, 아니지요. 하지만 저희 연금술사님이… 그….”
여명은 라쉬크의 시야를 피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렸다. 후안은 기가 차는 표정으로 그와 라쉬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손을 저었다.
“허, 참. 어이가 없군… 돌아가게.”
“안 그래도 간다! 가!”
라쉬크는 훽! 등을 돌리고 호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여명은 나가는 와중에도 방의 구조를 끝까지 살폈다. 방 위치는 물론이고, 세계수 싹이 든 상자 위치도 알았으니, 밤에 투명 망토를 쓰고 잠입해 싹을 훔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두 사람이 호텔 문을 잡으려는 순간.
호텔 방 깊숙한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전부 드려라.”
마귀가 있다면 이런 목소리일까? 어딘가 갈라지고 꺼림칙한 목소리였다.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후안이 놀란 눈으로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목소리가 들려온 호텔 방 안에서 후안과 같은 복장의 노인이 나와 말했다.
“뭐 하고 있느냐? 전부 드리래도? 연금술사께서 필요하시다고 하지 않느냐?”
“스승님, 하지만….”
“드려라.”
라쉬크가 ‘이거 어떻게 하냐?’ 라는 신호를 담아 여명의 옆구리를 찔렀으나, 여명은 답을 주지 못했다.
저 노인네, 정확히는 여명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눈빛 때문이었다.
마치 뱀이 쥐를 감싸듯, 눈빛을 따라 여명의 몸을 조이는 마나.
무슨 무술인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전조도 없이 펼치는 모습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고수. 마탑주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
몸을 휘감은 마나가 목까지 올라올 때쯤, 무술의 마나 흐름을 파악한 여명은 그의 마나를 떨쳐냈다.
노인의 탁한 눈에 이채가 서렸으나, 여명은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저희 연금술사께서 실례를 했습니다.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실례랄 것까지야. 예술가라면 누구나 저런 괴벽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지.”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라쉬크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 방에 여명만이 있는 것처럼 오직 여명만을 빤히 바라봤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어느새 라쉬크가 집어던진 장바구니를 다시 채우고, 명백한 권리 세 뿌리까지 챙겨 넣은 후안이 여명에게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결제는 어떻게 할 건가? 현금? 우린 달러만 받네.”
“…돌아가는 즉시, 알려주신 계좌로 입금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후안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장바구니를 건넸고, 여명을 노려보던 노인은 그 살벌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여명이 라쉬크와 함께 호텔 문을 연 순간.
노인이 섬뜩한 눈빛과 함께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 올림피아 마지막 예선전 상대가 우리 용병단의 신입이라지? 재밌는 경기를 부탁하네.”
“…부탁은 오히려 제가 드려야지요. 올림피아 정신에 걸맞은 경기,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노인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여명은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