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12)
을 위한 세계는 없다-512화(512/817)
EP.512 10강에 가장 가까운 자. (3)
* * *
***
세계수의 싹.
거창한 이름과 달리 싹의 생김새는 별 볼 일 없었다.
색을 잃고 쪼그라든 게, 마치 말린 고사리 같기도 했고, 청소부 시절 지겹도록 뽑았던 잡초 같기도 했다.
줄기 속에서 느껴지는 옅은 마나가 아니었다면 영약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이야, 이만한 물건은 진짜 오랜만에 본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 거 같아.”
하지만 연금술사인 라쉬크는 다른 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여명이 들고 있는 세계수의 싹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여명은 문뜩,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10년? 이거 세계수가 불탄 뒤에는 다시 못 캤다고 하지 않았어요?”
세계수 전쟁이 끝난 건 수십 년 전 아닌가? 여명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라쉬크는 가볍게 대답했다.
“뭐, 다시 캐지는 못해도 물량이 그만큼 많았거든. 내가 막 입문했을 때는 잉글리시 맨드레이크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었어. 가격은 그때도 비싼 편이었지만.”
“….”
잉글리시 맨드레이크가 뭔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그만큼이나 많은 양을 엘프들에게 갈취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수십 년을 쓸 수 있을 양을 갈취하고 핵까지 날리다니.’
여명이 미국의 무시무시함에 진저리를 치고, 엘프들을 떠올리며 동정심을 느끼길 잠시.
라쉬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아샤인들을 방패 삼아 전쟁까지 벌여서 엘프들한테 영약을 빼앗았는데, 오히려 그거 때문에 엘프들 눈치를 보게 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응? 아, 그게, 현대 제약 회사들이 생산하는 영약 레시피는 대부분이 엘프 숲에서 나는 영약 재료를 기반으로 만들었거든. 그래서 엘프들이 영약 공급을 차단하면 손가락만 빨아야 해.”
“….”
“그렇다고 다른 아샤 지역에서 영약을 공수하자니 엘프 숲만큼 물량이 많지도 않고, 진짜 귀한 건 아샤인들이 홀랑 먹어 치워서… 뭐, 덕분에 나 같은 암시장 약사들도 살 구멍이 있었지만.”
거기까지 설명한 라쉬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전혀 몰랐다는 눈치네? 우리 똑똑이 동생이 웬일이래?”
“전 그냥 먹을 줄만 알았지. 시장 상황 같은 건 관심이 없어서…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축산업 전문가가 돼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차마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없어서 몰랐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여명은 그렇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라쉬크는 기다렸다는 듯 여명의 말을 곡해했다.
“돼지고기처럼 흔하게 영약을 퍼먹었구나, 그렇구나… 나도 세계수의 싹으로 만든 영약 한 병만 먹어봤으면.”
부러움 섞인 말투, 세계수의 새싹을 향하는 은근한 눈빛, 길어지는 말꼬리.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노골적인 모습이었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장단에 맞춰줬다.
“오늘 산 혈초랑 칠레 쑥은 라쉬크가 다 쓰세요.”
“어? 정말? 진짜 그래도 돼?”
“예, 거기에 처음 약속한 돈도 드릴 테니까… 세계수의 싹은 그만 노리시구요.”
“…하지만 세 뿌리나 있는데?”
“세 뿌리 ‘밖에’ 없는 거죠.”
그러자 ‘씁, 안 통하네’ 라고 중얼거린 라쉬크는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실험실이 가까워질 때쯤 은근히 물었다.
“…돈 안 받을 테니까, 한 뿌리는 나 주면 안 될까? 두 뿌리만 있었다고 구라치면 되잖아.”
“….”
여명은 대답 대신 뚱한 눈으로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우리 둘이 입 맞추면 절대 모를…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누난데, 그런 눈으로 보는 거 맞아?”
라쉬크가 항변했지만, 여명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부끄러운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치사뽕이다.”
“스스로 누나라고 생각하신다면, 말투부터 어른스럽게 하셔야죠.”
“치사뽕이십니다.”
“….”
그녀가 뭐라고 하건, 여명은 끝끝내 한 뿌리도 나눠주지 않았다.
***
다시 찾은 라쉬크의 실험실.
여명을 맞이한 건 쇠미리와 네티였다.
세티와 성녀는 각자 경기 준비를 위해 먼저 떠났고, 네티는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왔다는 모양.
아무튼, 여명은 곧바로 쇠미리에게 세계수의 싹을 내밀었다.
“진짜… 세계수의 싹이네요.”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세계수의 싹을 본 순간, 쇠미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떨리는 눈동자, 조심스러운 손.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여명은 웃으며 생각했다. 가져오길 잘했다고.
“여명, 정말 고마….”
그녀가 무어라 감사의 말을 전하기 전에, 여명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우리 사이에 고마울 게 뭐 있어, 그냥 받아.”
“여명….”
미리가 말끝을 흐리는 동안, 여명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 위에 싹을 쥐여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쉬크는 ‘염장은 다른 데 가서 떨어라’ 같은 말을 주절거렸고, 네티의 반응도 비슷했다.
하지만 쇠미리가 양손으로 조심스레 세계수의 싹을 쥔 직후.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번쩍 – !
싹을 쥔 손에서 옅은 초록빛이 터져 나온 탓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맑아지는 투명하고 청아한 빛.
이게 뭔가 싶어 눈을 깜빡이던 라쉬크는, 미리가 다시 손을 펼치자마자 기겁했다.
“…???”
엘프의 새하얀 손에는 조금 전까지 빽빽 말라붙은 풀 대신, 파릇파릇한 새싹이 들려있었으니까.
환상? 아니었다. 되살아난 새싹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생기는 누가 봐도 진짜였다.
“뭐, 뭐야 그거? 이미 메마른 영약을 되살렸네??”
라쉬크는 연금술사다운 반응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콧김을 씩씩 내뱉을 정도로 흥분해서 이거면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느니, 엘릭서 재료도 구할 수 있다느니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연금술사가 아닌 여명과 네티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은 되살아난 싹이 아니라, 쇠미리의 표정부터 살폈다. 분명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왜 그래?”
“언니?”
두 사람이 그녀를 부르기 무섭게, 쇠미리는 천천히 싹을 내려놨다.
사박, 그녀는 내려놓은 세계수의 싹과 여명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여명… 이 싹을 판 사람이 누군가요?”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게, 이 새싹… 아버지가 예전에 미끼로 풀어놓은 싹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미끼? 무슨 미끼?”
“…엘프 사냥꾼들을 잡기 위한 미끼요.”
엘프 사냥꾼.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필 이 자리에 라쉬크가 있는 까닭이었다.
엘프 사냥꾼 후안에 대해 설명하려면 ‘작가의 노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녀는 바깥에서 온 자나 운명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부외자였으므로.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라쉬크, 잠깐만 자리 좀 비워 주실래요?”
“어? 왜? 나는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기껏 돌려 말했더니, 정타로 꽂아버리시네.
여명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쉬크가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뭐, 나가 달라면 나갈 건데, 그… 혹시, 내가 니 하렘 인원이 아니라서 쫓아내는 건 아니지?”
“…하렘이요? 또 뭔 개소리를 하는….”
“아니,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솔직히 니 주변 여자들 중에서 내가 가장 유능한 거 같은데… 무슨 중요한 일 있으면 나만 쏙 빼고… 응? 혹시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래?”
“….”
그녀의 주접이 어찌나 지독한지, 여명과 네티는 물론이고, 한껏 고민하고 있던 쇠미리조차 정색했다.
“…농담인데.”
“그런 농담 한 번만 더 하면 진심으로 화낼 겁니다.”
하아, 여명은 한숨을 쉰 뒤 덧붙였다.
“듣고 싶으면 들으세요. 저도 라쉬크를 믿으니까. 단, 들은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아시겠어요?”
라쉬크는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후회했다.
***
지구의 역사가 증명하듯,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
자연, 그림, 음악, 그리고 생명 그 자체까지.
그리고 그 대상이 약하다면, 힘을 써서 강제로 빼앗은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서 패배한 엘프가 약탈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제국에게 존중받을 정도로 강대했던 숲의 왕국은 수소 폭탄과 고엽제 아래 몰락해 버렸다.
엘프를 지켜줄 세계수와 군대는 불타버렸고, 숲은 배은망덕한 숲 인간들을 앞세운 다국적 기업의 텃밭이 되어버렸다.
승냥이처럼 아샤를 기웃거리던 제3세계의 독재자들, 특히 불안정하게나마 차원문이 열려있던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독재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감히 미국이 독점한 영약을 탐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숲에는 여전히 가치 있는 물건들이 있었으니까.
엘프.
미국의 방조 아래, 그들은 숲의 생존자들을 잡아들였다. 그래, 마치 버려진 열매를 줍듯이-엘프를 ‘사냥’했다.
동물보호법도, 인권 선언도 소용없었다.
자국민들조차 잔혹하게 쥐어짜던 독재자들이었다. 그들이 붙잡은 엘프를 노예로 만드는 건 그나마 온건한 축에 들었다.
옛 용사의 일화를 끌고 와 강제로 교잡종을 만들려는 시도나,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인체실험용 마루타로 사용하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역겨운 일들 또한 있었고.
독재자들과 그 수족들은 그 악덕을 부끄러워하긴커녕, 그것을 강자의 권리라고 불렀다.
그래, 약자를 먹는 강자의 권리. 하지만 그 말을 지껄인 자들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것.
***
올림피아 마지막 예선전이 펼쳐질 대형 강당.
아카데미 입학식이 열렸던 강당 중앙에는 커다란 대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링. 입학식과 마찬가지로 여태껏 예선전도 한 번 참가하지 않은 여명이었지만, 대련장 모습 자체는 익숙했다.
영상에서 본 것도 있고, 링의 모습이 학생용 대련실과 다를 바가 없는 탓이었다.
굳이 학생용 대련실과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천장이 없고 바깥에 각종 기업들의 광고가 가득 붙어 있다는 사실 정도일까.
개중에는 둔간 중공업이나 스미토모 그룹처럼 익숙한 기업들의 광고들도 보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는 건 무리였다.
링 주변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는 탓이었다.
-줄! 줄 서세요!
-경기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거기! 대련장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
여명을 따라 강당으로 온 네티도 살짝 질렸는지, 연신 강당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형부, 마지막 예선전이라고, 경기를 외부인들에게 공개한 모양인데요?”
“그럼 저 사람들이 다 구경꾼이라고?”
“아마 그렇겠죠? 이대로 형부가 들어서면 난리 나겠네요.”
“….”
여명은 마음속으로 교직원들에게 사과한 뒤, 강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다.
-어? 천여명이다!
-어디, 어디?
-꺅! 밀지 마세요!
다음 순간, 여명은 번쩍이는 사진 세례와 인터뷰 제안, 그리고 무수한 인파들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사진 안 찍습니다. 죄송하지만 인터뷰는 따로 연락 주세요. 광고는 제 소속사에 부탁드립니다.”
그나마 일본에서 비슷한 일을 겪어본 덕분인지, 여명은 어렵지 않게 인파를 해치고 ‘선수 대기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어려운 것과 귀찮은 건 별개의 문제였다. 쾅! 대기실 문을 닫은 여명은 후우-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딱 붙어 있던 네티 또한 어안이 벙벙한 듯 문밖을 바라봤다.
“막내한테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형부 인기가 진짜… 어마어마하네요.”
“처제랑 세티가 그만큼 홍보를 잘해줬단 이야기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곧, 약속이라도 한 듯 방음 마법을 펼쳤다.
주변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간단한 마법.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장막을 확인한 네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미리 언니도 엘프는 엘프네요. 사냥꾼을 사냥하자니….”
여명은 대기실에 마련된 보호대를 이리저리 확인하며 대답했다.
“엘프 사냥꾼을 사냥하는 건 세계수 혁명단의 의무라잖아. 도와줘야지.”
“하긴, 언니한테 받은 것도 있고, 때마침 그쪽에서 던진 미끼도 물었으니 이번이 기회긴 하죠. 근데… 형부랑 싸울 3학년 선배 불쌍하네요. 자기도 모르게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됐잖아요?”
“…죽이진 않을 거야. 엘프 사냥을 도왔다는 증거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자 네티가 손날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긴, 엘프 사냥꾼이라기엔 너무 어리긴 해요. 기껏해야 우리보다 2년 선배인데… 그러면, 평소처럼 오른팔만?”
“….”
“아니면 저번에 당한 선배처럼 척추를…?”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발 감당할 수 있는 사고만 치라고 부탁하던 교장의 얼굴을 떠올린 뒤, 툭, 대답을 내놨다.
“팔만 자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