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14)
을 위한 세계는 없다-514화(514/817)
EP.514 10강에 가장 가까운 자. (5)
* * *
***
시간을 잠시 뒤로 돌려, 헤로니모와 여명이 최후의 일격을 나눈 순간.
패배를 직감한 후안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녀석을 너무 높게 봤나 봅니다. 그 귀한 약을 두 병이나 처먹고도, 설마 칼침 한 번 못 놓을 줄이야….”
그러나 스승이라 불린 노인은 화를 내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그는 여명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니, 후안. 네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미군 쪽에서 분명….”
“그래, 미군. 녀석들의 잘못이다. 목표물의 수준조차 파악 못했으니… 저걸 보거라. 저게 어디 학생이라 할 수 있느냐?”
그 순간, 툭, 헤로니모의 어깨가 떨어졌다. 후안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언제 팔을 벤 거지?
“봤느냐? 무술에 이치를 담는 경지… 만박불통이 초인 랭크 200위를 운운할 때는 헛소리를 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거짓말 속에 더 큰 거짓말을 숨겨놓고 있었구나. 저놈보다 강한 초인은 세계에 100명도 되지 않겠어.”
후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입니까?”
“그래, 그 정도다. 하긴, 몸에서 세계수의 냄새를 풍기는 놈이 평범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
세계수의 냄새.
스승이 세계수의 싹을 전부 내주라 한 것도, 천여명의 경기를 관람하러 온 것도 전부 그 냄새 때문이었다.
후안은 그런 냄새를 맡아본 적 없었지만, 그의 스승은 이 거리에서도 냄새가 느껴지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그사이, 링 위의 천여명이 헤로니모와 무언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승자의 아량치고는 너무나 조곤조곤했고, 선배를 걱정하는 것치고는 너무 험악한 표정.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후안이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궁금해할 때쯤.
천여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정확히 후안과 그의 스승을 향해 노려봤다.
후안은 놀란 표정을 숨기기 위해 눈에 힘을 줬지만, 노인은 노골적으로 웃었다.
“역시, 저놈은 귀쟁이와 붙어먹는 놈이 틀림없다. 저 멍청한 놈의 반응을 보거라. 자기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 눈치챈 것 같구나.”
스승은 헛구역질하는 헤로니모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후안은 그말 속에서 다른 뜻을 찾아냈다.
정체를 들켰다.
“스승님. 일단 자리를 뜨시지요. 미군이 제공한 배편을 타면 데메론드가 오기 전에….”
하지만 스승이 그의 말을 끊었다.
“배편? 제자야. 단번에 우리를 찾은 걸 보면 모르겠느냐? 놈은 처음부터 우리가 올 걸 예상하고 사람을 심어놓은 게다. 아마 이 관객석 어딘가에서 우릴 주시하고 있겠지.”
“….”
그러고 보니, 천여명과 함께 강당에 왔던 하늘색 머리 계집애가 보이지 않았다.
‘명백한 권리를 사고, 경기를 준비하는 그 짧은 사이에 우리를 의심했단 말인가? 어떻게?’
미군 쪽 계획이 유출된 걸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 도망 생활로 다져진 후안의 본능이 경고했으나, 그의 스승은 느긋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프, 그것도 세계수 혁명단이 녀석의 뒤에 있는 게 확실하구나. 하, 감히 귀쟁이 따위가 인간을 위한 아카데미에 있다니….”
“….”
“자, 이러지 말고 가자꾸나.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초대하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스승님, 데메론드가…”
“그 귀쟁이 걱정일랑 하지 말 거라. 녀석은 오지 않을 테니.”
스승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이 아카데미와 호주에 누가 있는지 잊었느냐?”
후안은 그제야 스승이 어찌 저리도 당당한지 깨달았다.
현재 아카데미에는 맥팔레인이 있고, 바다 건너 호주에는 성검, 만박불통, 그리고 엘랑의 불이 있다.
고작 한 시간 거리에 10강 중 넷이 모여 있는 장소.
데메론드, 그 무시무시한 실력만큼이나 지능도 뛰어난 귀쟁이는 절대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그는 이길 장소에서만 칼을 뽑는 치명적인 전략가였으니까.
그제야 스승의 뜻을 이해한 후안은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그의 스승은 느긋하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관객들의 환호 사이를 가로지르며 말했다.
“맹수는 쉽사리 발톱을 보이지 않는 법이거늘… 저 독초 같은 놈이 아직 어려서 다행이구나.”
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승도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그가 아닌 천여명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카메라와 마이크에 둘러싸인 천여명은 여전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역겨운 걸 보는 듯, 혐오스러운 눈으로.
***
엘프 사냥꾼 후안.
시나리오의 1장 보스인 피혁 사제의 다음을 장식하는 2장 보스.
‘작가의 노트’에 따르면, 그는 엘프가 지구로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카데미를 찾아와 엘프들을 납치한다.
데메론드에게 칠레가 멸망하기 전부터 만들고 있던 ‘유사 엘릭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처음 그 부분을 읽었을 때, 여명은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엘프가 워낙 영약과 관련된 종족이니만큼, 영약을 얻어내려는 속셈이거나, 엘프들이 엘릭서 제조법을 알고 있겠거니-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미리디스가 말해준 진실은 그의 상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엘프 사냥꾼들이 꿈꾸는 유사 엘릭서는, 엘프‘가’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엘프‘로’ 만드는 엘릭서였다.
고작 한 글자 차이였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천지 차이였다.
그래, 그들은 엘프를 재료 삼아 엘릭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게 진짜 엘릭서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만약 네크로맨서들이 인간의 시체로 물약을 만드는 사실을 몰랐다면, 미친 소리라고 무시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십만 자국민을 죽인 독재자라는 걸 몰랐다면, 아예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둠을 너무나 많이 본 여명은, 쇠미리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래, 그는 알 수 있었다.
스탈린이 드워프를 동물로 본 것처럼, 피노체트는 엘프를 먹을 수 있는 영약으로 봤다는 걸.
‘엘프는 동물이 아니니 동물보호법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과 같은 종이 아니니 인권이 없다.’
쇠미리의 입에서 재현된 역겨운 논리가 바로 그 증거였다.
같은 자리에서 그녀의 말을 듣던 일행들은 그저 피노체트의 악의에 기겁할 뿐이었지만, 스탈린에게 몸을 빌려줬던 여명은 그 이상을 느꼈다.
피노체트… 아니, 이 지구의 모든 독재자들이 스탈린을 향해 품었던 감정.
질투.
스탈린의 권력, 힘, 그리고 엘릭서까지. 피노체트는 그 모든 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그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서, 칠레의 독재자는 엘프의 피와 살을 이용해 유사 엘릭서를 만들었다.
이걸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냉전이 낳은 광기? 아니면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 만든 참극?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고, 또 어떻게 부르건 간에, 여명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오늘, 그가 그것의 마침표를 찍을 테니까.
***
-마탑주만큼이나 강한 자와 싸울 거 같아.
휴대폰 너머로 그 뜬금없는 말을 들었을 때, 세티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며 물었다.
-죽여야 하는 일? 아니면 제압해야 하는 일?
설명은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명은 그녀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으니까. 필요한 건 수단뿐이었다.
-죽여야 하는 일.
여명은 선택했고, 세티는 그에 필요한 수단을 내놨다.
첫 번째는 장소였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그만한 강자와 싸우면서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곳은 딱 한 곳 뿐이었다.
지하 해저터널.
오르세 라날이 둥지를 비워야겠다는 말을 끝으로, 세티는 다음 수단을 내놨다.
이번에는 적에 대한 정보였다. 그녀는 여명과 쇠미리가 알려준 정보를 기반으로 상대가 누군지 예측했다.
엘프의 원수, 남미의 식인귀, 자칭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후예이자, 11강.
카를로스 피노체트.
자칭이었지만, 그는 11강이라 자신할 만한 강함을 가진 자였다.
데메론드와 세계수 혁명단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남미에서 굵직굵직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는 강자.
하지만 그건 여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여명이 더 나았다. 11강이라니. 자신이 10강급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말 아닌가.
세티에게 있어, 여명은 이미 10강과 비견해도 부족함 없는 초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길 수 있는 수단’ 같은 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고마워.
여명 또한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길 방법 따윈 묻지 않았다. 그는 쪽, 짧은 키스 소리와 함께 통화를 끊었다.
-힘내.
곧 세티는 조용히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자신의 마지막 올림피아 예선 경기를 준비했다.
***
아카데미 하수도 깊은 곳. 용의 둥지.
탁.
집주인이 강제로 쫓겨난 콘크리트 둥지 위로, 가벼운 발소리가 내려앉았다.
둥지에 발을 디딘 건 정장을 입은 거구의 남성과 가볍게 뒷짐을 진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숙련된 군인과 같은 눈빛으로 용의 둥지를 훑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노인 쪽이었다.
“함정도 없고, 그렇다고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단둘이서 기다리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빌기라도 하려고?”
그러자, 콜라 박스 위에 앉아 있던 금발의 소녀가 판초우의 사이에서 지팡이를 꺼내며 대답했다.
“우리 둘로 충분하니까.”
“…하.”
노인은 감탄인지 헛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소녀를 훑었다. 금발 사이로 드러난 기다란 귀와 판초우의 위에 새겨진 세계수 혁명단의 상징…
“…엘프들은 언제나 오만했지. 죽는 순간까지도 입을 멈추질 않았어.”
“당신도 그러길 빌지.”
“….”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는군. 쯧쯧 혀를 찬 노인은 엘프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청년을 바라봤다.
“천여명. 하나만 물으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누추한 곳으로 초대한 것이냐? 하마터면 안내하던 하늘색 머리 계집애를 죽일 뻔했잖느냐.”
“…카를로스 피노체트.”
“오.”
카를로스라 불린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여명의 말에 그의 인상이 왈칵 구겨졌다.
“아카데미에 있는 맥팔레인이 무서워서 마나도 제대로 못 끌어올리는 주제에, 주둥이는… 안내하던 소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면, 당신은 하수도에서 죽었어.”
“…하하, 예상보다 재밌는 애새끼로구나.”
“당신은 딱 예상만큼 재미없고.”
스릉,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산의 눈물을 꺼내 쥐었다. 대련에서 쓰던 잡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선명한 예기가 번뜩였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말했다.
“젊은이의 오만이란… 그렇게나 벌을 원한다면, 어른으로서 기꺼이 벌을 내려주마. 후안?”
직후, 후안은 조용히 총을 꺼내며 앞으로 나섰다. 총알 대신 주사기와 비슷한 마취탄이 가득 장전된 기괴한 총이었다.
“너는 저 계집을 맡아라. 나는 저 건방진 놈을 훈육할 테니.”
“예, 스승님.”
그러자 엘프, 쇠미리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난 계집이 아니다. 쓰레기 같은 엘프 사냥꾼들아. 내 이름은 미리디스 입 맑스다.”
“…뭐라?”
“너희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데메론드의 딸이자, 위대한 세계수의 마지막 자녀. 그리고 이 순간, 너희를 심판해 정의를 되찾을 회초리다.”
“….”
미리의 설명이 끝난 순간, 카를로스와 후안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데메론드의 딸…? 하하하하! 호박이 넝굴채 들어왔군! 그래, 가끔은 이렇게 운 좋은 하루도 있어야지! 후안! 팔다리를 잘라도 좋으니. 산 채로 잡아라.”
후안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카를로스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뻣뻣한 볼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천여명, 고맙다. 이 은혜를 봐서 네 목숨 정도는 살려주….”
그때, 여명이 그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팅! 무언가 날아오는 걸 본 카를로스는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여명이 날린 게 뭔지 확인해 보니, 그건 작은 얼음덩어리였다.
얼음덩어리는 그를 지나 용의 둥지 입구에 흐르는 물길에 퐁당-빠졌는데, 곧바로 까드득-얼어붙으며 물길을 틀어막았다.
그걸 본 카를로스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입구를 막아? 왜, 내가 도망이라도 갈 것 같으냐?”
“평생을 데메론드를 피해 도망친 겁쟁이랑 싸우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
노골적이다 못해 치명적인 도발.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여명을 노려보다가, 품에서 스르륵-기다란 천을 꺼내 들었다.
칠레의 국기를 상징하는 백, 청, 적으로 물든 기다란 천.
그 천을 마치 휘장처럼 어깨에 두른 카를로스는 곧 한껏 마나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조금 전 그 말, 후회하게 될 거다. 애송아.”
어느새 전투 준비를 끝낸 쇠미리를 따라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린 여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말은 10강이 된 뒤에 하셔야죠. 자칭 11강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