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15)
을 위한 세계는 없다-515화(515/817)
EP.515 10강에 가장 가까운 자. (6)
* * *
***
“10강을 찍고 와라?”
카를로스는 코웃음인지 황당함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10강을 그리도 쉽게 입에 담다니… 그래, 깊은 오만은 멍청함과 구분할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보지 못하는 법이지.”
바람 한 점 없었지만, 마나의 파동이 격해지며 그의 삼색휘장이 펄럭거렸다. 살벌한 눈동자가 여명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겠지? 안다. 나도 그랬고, 세상에 강대하다는 무수한 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애송… 아니, 개구리야. 너는 어째서 10강이 10강이라 불리는지, 어째서 50위도 아니고, 가장 강한 한 명도 아닌, 딱 10명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구나.”
여명은 카를로스가 지껄이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의 말에 혹해서? 아니면 두려움을 느껴서?
아니,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입을 털며 무술을 준비하고 있듯, 여명은 실시간으로 그 무술을 파훼하고 있었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막대한 마나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어느 부분에서 강해지고, 느려지며, 어느 곳에서 분출되는지…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전부 보고 있었다. 손 한 번 겨루지 않고 카를로스의 수십 년을, 그가 쌓아온 힘을 해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낀 카를로스는 여명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흠칫, 뭔가를 느낀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고민은 없었다. 고수는 의문보다는 본능을 더 믿는 법. 카를로스는 곧바로 휘장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후안, 쳐라!”
그것이 시작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끊어지고, 후안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렐린, 리온!”
하지만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쇠미리였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두 개의 빛 덩어리를 쏘아냈다. 여명과 인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빛이었다.
천족처럼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빛 덩어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둥지 중앙에서 빛을 내뿜었다.
번쩍!
초인이라도 눈을 찡그릴 강렬한 빛.
하지만 고작 시야 좀 가린다고해서 초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초인에게는 여섯 번째 감각이 있었으니까.
“같잖은 짓을.”
눈을 감고 마나를 넓게 펼친 후안은 품에서 그물을 꺼냈다. 세계수 가지에서 뽑아낸 섬유질로 엮고, 엘프의 피로 담금질 된 사냥꾼의 그물.
휘릭 – ! 감각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닫혀있던 그물의 주둥이가 벌어졌다.
빛을 가르며 날아오는 그물은 여명과 쇠미리를 동시에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둘 중 누구도 붙잡지 못했다.
길쭉한 지팡이가 앞으로 튀어나와 허공에서 그물을 휘감았으므로.
‘…뭐?’
그물 같은 기형 병기를, 그것도 이 짧은 순간에 대응했다고? 아무리 엘프라지만 대응이 너무 완벽했다. 마치 그가 그물을 던질 걸 미리 알고 있던-그 순간, 그물에 얽힌 지팡이가 후안의 몸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이 년이? 후안이 뒤늦게 놀라 팔을 당겼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퍼엉 – !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쇠미리의 몸이 둥지 저편, 해저터널로 날아갔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여전히 그물을 잡고 있던 후안은 낚싯줄에 붙잡힌 물고기처럼 맥없이 쇠미리를 따라 터널 저편으로 끌려가 버렸다.
카를로스는 그 모든 상황을 마나로 느끼고 있었지만, 후안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 여명을 바라봤다.
“…귀쟁이 년이 마나를 힘껏 모아 뭘 하나 했더니. 눈을 가리고 공기를 터트려 날아가는 게 전부인가.”
“….”
“기껏 준비한 게 1:1이더냐? 저 터널에 무슨 함정을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저 귀쟁이는 후안을 이길 수 없다.”
둥지를 채운 빛이 천천히 사라지는 가운데, 여명이 말했다.
“공략법이 없다면 그렇겠지.”
“…뭐라?”
“그 반응을 보아하니, 운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시나 보군. 하기야, 개나 소나 아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
카를로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모욕을 질문으로 되돌려주는 건 그의 성정과 맞지 않았으니까.
모욕에는 폭력으로.
자칭 11강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걸쳐진 휘장이 치렁치렁 손을 따라가고-그 뒤로 거센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 속에 담긴 마나의 양이 어찌나 거대한지, 허공이 일렁거리며 위압감을 뽑아낼 정도.
“영광으로 알 거라.”
“….”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그리말디로 보내줄 터이니!”
다음 순간, 마치 장마처럼 성난 마나가 여명을 향해 덮쳐왔다.
***
여명은 쏟아지는 마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마왕이나 꿈을 흘리는 자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
하지만 어째서 일까.
흥분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명은 담담하게 산의 눈물을 횡으로 휘둘렀다.
까가각 – !
마나와 검기가 충돌하자 유리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깨진 마나가 이리저리 흩어지며 진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니, 비는 속임수였다. 갈라진 마나들은 보이지 않는 화살로 변해 여명을 향해 쏟아졌다.
!!!
어디서 본듯한 모습과 달리, 화살의 위력은 확실했다. 하나하나가 수류탄과 맞먹는 위력. 용의 둥지를 이루고 있는 두꺼운 콘크리트가 폭발하는 가운데, 여명은 가볍게 비각술을 펼쳐 그 사이로 날아올랐다.
노련한 사냥꾼이 그러하듯, 카를로스는 도망가는 먹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크게 휘장을 휘두르자 어마어마한 마나가 방향을 바꿔 몰아쳤다.
여명의 대응은 침착했다. 공중을 뛰어다니며 마나를 피하고, 피할 수 없으면 검을 휘두르며 마나를 막아냈다.
그때마다 둥지를 울리는 충격이 쾅, 쾅! 공기를 때렸지만, 유효타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입을 털 실력은 있었나 보군. 카를로스는 휘리릭, 휘장을 크게 돌리며 말했다.
“나를 도망자라 매도하더니, 진짜배기 도망자가 따로 있었구나!”
“….”
“보기 좋은 재롱이지만, 그뿐이다. 더 나은 재롱이 없다면… 이만 죽어라.”
다음 순간, 여명을 쫓던 마나가 쩌억-!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졌다. 조금 전 화살 같았던 마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굵기의 마나들.
그걸 본 여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카를로스의 마나 사용법이 상상 이상이라서? 아니, 그는 이미 저것과 비슷한 마나를 본 적있는 까닭이었다.
‘…세계수의 줄기.’
그래, 지금 그에게 쏟아지는 카를로스의 마나 촉수는 꿈속에서 봤던 세계수의 줄기와 너무나 비슷했다.
하도 엘프를 처먹다 보니 본질마저 비슷해진 것일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어느새 허공을 뒤덮은 마나 촉수가 사방에서 몰아쳤으니까.
샤아아앗 – !
여명은 쏟아지는 마나 촉수를 피해 천장까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천장과 부딪히기 직전에 몸을 돌려 천장에 발을 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천장을 박차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카를로스를 향해 가속하는 여명의 검 위로 불씨가 튀었다. 그리고…
콰과과과광 – !
그의 몸을 붙잡으려던 마나 줄기들이 불씨와 함께 폭발했다.
그 짧은 순간 속 폭발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공기가 출렁거리며 둥지 전체가 울릴 정도였다.
“폭발 무술이라고?”
카를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여명의 검이 길게 불씨를 수놓았다.
약식 화산쇄설.
그렇게 시작된 불씨는 마치 도폭선의 연쇄 폭발처럼 카를로스가 있는 곳을 향해 쏟아졌다.
!!!!
카를로스는 피하지 않았다. 어린놈의 검을 피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그가 쌓아온 마나가 너무나 많았으므로.
“흡!”
그가 양손으로 휘장을 쥐고 펼치자 그의 몸에서 새로운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그대로 폭발을 집어삼켰다.
무식하다 못 해 어이가 없는 방어였다.
‘저기서 마나를 더 뿜어낸다고?’
대체 얼마나 많은 영약과 엘프를 처먹었으면 저 만한 마나를 품고 있는 거지?
여명은 감탄이 아닌 혐오를 느끼며 녀석의 코앞에 착지했다.
깊은 물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을 장악한 카를로스의 마나가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명의 검은 곧장 녀석의 목을 노렸다.
찰나의 시간 속에서, 불타는 칼날이 카를로스의 탁한 눈동자 위에 빛을 비췄다.
하지만 그 검은 카를로스의 머리를 날리지 못했다. 카를로스가 오른 다리를 휘둘러 검을 걷어찬 덕분이었다. 맨피부와 검이 충돌했음에도 베는 감각이 없었다.
알파 원이나 올턴 주지사가 떠오를 정도로 강화된 피부.
아메리카 놈들은 왜 이렇게 강화 육체를 좋아하지?
여명은 검을 회수하며 콰앙! 약식 화산쇄설을 터트렸다. 카를로스 또한 코앞에서 터진 폭발에 맞는 와중에도 손을 뻗어 여명의 복부를 후려쳤다.
퍼억!
내장이 으깨지는 듯한 충격을 시작으로 여명의 검과 카를로스의 손이 얽혔다.
“개구리 새끼가 감히! 나에게 접근전을 걸어?”
카를로스는 휘장이 치렁거리는 주먹을 휘둘러 여명의 검과 몸을 난타했다. 인간이라기보단 탱크에 가까운 기세였고, 주먹에 실린 힘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울컥-피가 역류했지만, 여명은 지지 않고 약식 화산쇄설을 터트렸다.
쾅! 휘두르는 검에서, 쾅! 발작적으로 휘두른 팔꿈치에서, 쾅! 카를로스의 발을 밟은 발바닥에서.
서로의 옷이 찢어지고, 고급스러운 휘장 위로 그을음이 지는 와중에도 둘 중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퍼억! 콰앙! 퍼억! 콰앙!
서로의 안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난타전.
“너 같은 놈의 피로 휘장을 더럽히다니!”
먼저 입을 연 건 카를로스였다. 처음 여유는 어디 갔는지, 그는 질린 얼굴로 여명의 몸을 후려쳤다.
우지끈! 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주먹을 타고 올라왔지만, 여명은 물러나긴커녕 오히려 그에게 박치기를 가했다.
빠악!
카를로스는 이마가 찌르르 울리는 와중에도 밀려나지 않았다. 덕분에 둘은 이마를 딱 붙인 채 서로를 노려보는 꼴이 되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 폭발에 그을린 피부, 그리고 난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이글거리는 황금색 눈동자.
서로 주먹과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목을 뒤로 뺐다.
그리고 한 번 더, 박치기.
콰앙!!!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여명이 그 와중에 이마에서 화산쇄설을 터트린 탓이었다.
카를로스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네깟 놈이-! 죽을! 각오를! 한다고! 날! 이길, 수! 있겠-?”
그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스르륵 일어나는 여명의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주가… 시빌리?”
순간, 카를로스의 머릿속에서 어떤 정보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일본에서 붉은 별과 싸웠던 천여명, 세계수 혁명단의 공주와 함께 온 천여명, 그리고 그런 천여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의뢰한 미군.
모든 게 하나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눈앞의 주가시빌리를 보자 한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사실, 천여명이 빨갱이라면? 붉은 별과 싸운 게 모두 연기고, 미군이 그 사실을 의심해서 후안에게 의뢰를 넣은 거라면?
그래, 그렇다면 저 비정상적인 실력을 비롯한 모든 게 설명됐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에 전율하며 천여명을 노려봤다.
푸쉬이이-이미 상처를 재생한 여명 또한 그를 노려봤다.
짧은 침묵.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카를로스가 희열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냉전이 그리도 허무하게 끝났을 리 없지.”
“….”
“귀쟁이 새끼와 무역 협력은 무슨…! 뒤로 너 같은 호박씨를 까고 있는데, 무슨 평화란 말이냐?”
“…호박씨?”
여명이 눈썹을 씰룩이자, 카를로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넌 죽는 한이 있어도 주가시빌리를 펼치지 말아야 했다. 너… 너 같은 괴물이 남아있다는 걸 알면 멈췄던 빨갱이 박멸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
“….”
“다섯 꼭짓점 중 넷이 모였으니, 약속은 끝났다! 엘프 사냥이 다시 시작될 거다! 흐하하하!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돼! 내가 직접 미군과 함께 숲을 불태울 테니까!”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퉤-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거, 대단한 깨달음을 얻으셨나 봅니다.”
“깨달음? 아니, 이건 그 이상이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난 오늘 역사를 바꾸게 된 거다!”
“깨달음보다 좋은 거라… 그렇다면 내가 손해를 봤네. 난 겨우 두 개밖에 못 깨달았거든.”
“…뭐?”
“당신이 내게 던져준 화두. 10강이 10강인 이유. 그리고…”
말끝을 흐린 여명은 무장 혈청 검을 뽑았다. 오른손에는 산의 눈물, 왼손에는 무장 혈청.
양손에 검을 늘어트린 여명은 굳건하게 서서 선언했다.
“당신이 그만한 마나를 가지고도 10강이 되지 못한 이유.”
“….”
그의 혓바닥이 정곡을 찌른 걸까? 카를로스는 조금 전 박치기를 맞았을 때보다도 정색했다.
“하, 대체 뭘 믿고 그리도 입을 놀리는 것이냐? 주가시빌리의 생명력을 믿는 거냐? 하! 내가 직접 죽인 주가시빌리가 몇 놈인지 아느냐? 너 같은 괴물도 재생할 틈을 주지 않고 머리를 으깨버리면…!”
“카를로스.”
상대의 말을 끊은 여명은 천천히, 사방을 장악한 그의 마나 사이로 파고들며 말했다.
“당신은 영원히 10강이 되지 못할 거야. 엘프를 쥐어짜 만든 엘릭서도 완성되지 않을 거고.”
“….”
“오늘, 여기가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
여명이 그렇게 선언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순간.
붉은 아지랑이와 막대한 마나가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