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18)
을 위한 세계는 없다-518화(518/817)
EP.518 잘 돼 갑니다
* * *
간신과 충신을 나누는 건 충성의 깊이가 아니라 충성의 방향이다.
『생가탄 히라리아, 일명 마지막 황태자의 격언.』
***
해저터널은 전투를 벌이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비린내를 머금은 콘크리트 벽과 무질서한 통로의 연속.
거기에 세티가 설치한 LED마저 끄자 터널은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바닥에 착지한 쇠미리도, 후안도 시야에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권총을 뽑았다.
탕!
밀수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러시아식 권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두 사람은 짧은 불빛 사이로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코앞이다.
대여섯 걸음이면 서로에게 닿을 거리.
쇠미리와 후안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 탄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두 사람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핑! 총알이 보호막을 후려치는 와중에도, 쇠미리는 상대가 그물로 총알을 막아내는 걸 느꼈다.
그래, 2장 보스가 첫 사격에 죽을 리 없지. 그녀는 콘크리트 더미 뒤에서 재장전하며 여명의 말을 떠올렸다.
후안은 초인이 현대 무기를 사용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용도로 설계된 보스다.
근접전에서는 주 무기인 그물과 사냥 칼을 이용해 주인공을 압박하고, 거리를 벌리면 각종 총기로 대응하고, 그걸 또 피하면…
또르르-탁!
수류탄을 쓴다.
쇠미리는 보호막을 펼치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콰앙! 폭발과 함께 터널이 흔들렸다. 용이 쌓아놓은 게 틀림없는 과자 박스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후안은 과자 박스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소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쇠미리는 주문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샤아아 – ! 엘프식 바람 칼날과 총알이 함께 터널을 훑었다. 후안은 노련하게 은폐했고, 그것이 쇠미리가 노린바였다.
틱! 그녀는 허리춤에 걸린 수류탄 핀을 뽑았다. 여명이 건네준 미국산 수류탄은 엘프들이 쓰던 소련식 수류탄과는 무게부터가 달랐으나, 미리는 능숙하게 후안이 엄폐한 위치로 수류탄을 던졌다.
탕!
총소리가 울리고, 수류탄의 굉음이 뒤를 따랐다. 권총으로 수류탄을 맞춘 게 틀림없었다. 녀석의 감각이 벌써 어둠에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쇠미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후안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다. 1분 내로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인간보다 날쌘 엘프라지만, 마법사인 이상 초인보다 빨리 달리는 건 불가능하다는걸.
알면서도 달렸다. 적절한 위치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그리고 터널이 아닌 공동이라 불러야할 장소에 도착한 순간.
후안이 사냥 칼을 뽑으며 포효했다.
“토막을 내주마! 귀쟁아!”
귀쟁이는 대답 대신 지팡이에 마나를 모았다. 엘프의 날카로운 감각이 움직이며 지팡이 끝에서 주문을 뽑아냈다. 아슬아슬한 때에 터져 나온 바람의 칼날이 사냥 칼을 튕겨냈다.
채앵 – !
후안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냥꾼이었다. 그는 첫 일격이 막히건 말건, 쉬지 않고 칼을 휘두르며 쇠미리를 압박했다.
도주는 불가능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물을 쥔 손이 그녀의 퇴로를 차단했으니까.
초인과 칼싸움을 벌이거나, 도망치다가 그물에 당하거나.
원래 시나리오 속 주인공은 이 살벌한 이지선다를 극복하기 위해 동료를 희생했다.
히로인 중 하나가 자발적으로 그물을 붙잡아 틈을 만들었다고 했었나.
하지만 그녀는 혼자였다.
이곳에는 앞을 막아줄 여명과 세티도, 뒤를 받쳐줄 살로메와 성녀도 없었다. 모든 싸움은 오롯이 그녀 혼자만의 문제였다.
쇠미리는 알면서도 이곳에 왔다.
그물 따위를 극복하기 위해 희생하는 멍청한 히로인이 아닌, 용사파티에 진정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데메론드의 딸아! 고작 이따위 실력으로 나를 도발한 거냐?!”
그것을 모르는 후안은 쉴 새 없이 그녀를 몰아쳤다. 쇠미리는 거의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꼬며 칼날을 피하다가, 간신히 지팡이를 휘둘렀다.
후안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그녀의 지팡이를 흘려—
내지 못했다.
페이크였다.
쇠미리의 지팡이를 막아낸 순간, 그의 옆구리로 발차기가 파고들었다. 마법사의 발차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펑!
다음 순간,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후안의 몸이 날아갔다. 후안은 끔찍한 격통 속에서 늑골이 부러진 걸 느꼈다. 골절? 모르긴 몰라도 금이 간 건 확실했다.
초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발차기를—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날카로운 본능이 생각보다 먼저 그의 몸을 움직인 탓이었다.
탕!!
총알을 피해 바닥을 굴렀지만, 그의 볼이 길게 베였다. 사격 소리 뒤에 숨은 은밀한 바람의 칼날이 살을 벤 것이다.
총격과 마법의 조합. 후안은 오싹한 감각을 느끼며 총을 뽑아 쇠미리를 겨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빠각 – !
엘프의 지팡이가 후안의 어깨를 내려찍었다. 어깨가 후끈거렸지만, 천만다행이었다. 원래 목표는 목이었으니까.
“크윽!”
후안은 비명을 참으며 칼을 휘둘렀다. 쇠미리는 초인과 비슷한, 그러나 분명 다른 움직임으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뭐지? 갈림길을 걷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때, 후안은 지하 공동 전체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느꼈다. 자연적인 바람과 거리가 먼, 마법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의 중심에는 쇠미리가 있었다.
흡사 바람의 갑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
“이 무슨…?”
후안은 황당함을 삼켰다. 육체 능력을 보조하는 바람 마법이라니. 저런 건 이론과 마나 양면으로 불가능했다.
성질을 변화한 마나를 실시간으로 움직이면서 갑옷처럼 두르는 것? 히라리아의 마탑주나 만들 수 있는 이론이다.
거기에 저만한 바람을 유지할 수 있는 마나? 어디 주먹만 한 세계수의 결정이라도 가지고 오지 않고서야…
후안은 불현듯 쇠미리의 지팡이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지팡이 끝에 달린 주먹만 한 보석을.
“…세계수는, 귀쟁이들에게 주기엔 너무 아까운 보물이지. 그렇지 않나?”
“그쪽 어머니도 당신 같은 식인귀 말고, 착한 아들을 낳고 싶으셨을 거예요.”
패드립에는 패드립인가.
후안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미리도 바람을 머금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후안이 먼저 달려들었다.
시작은 수류탄이었다. 쇠미리가 바람으로 수류탄을 내던지는 사이, 그는 이미 쇠미리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쾅! 수류탄의 폭발을 배경삼아, 번뜩이는 사냥 칼이 바람을 머금은 지팡이와 충돌했다.
후안은 집요하게 그녀의 목을 노렸고, 쇠미리는 기꺼이 그 싸움에 어울렸다.
지팡이를 휘두르고, 마법을 쏘고, 스스로를 강화했다. 그래, 그녀는 살로메가, 성녀가, 세티가 할 수 있는 일을 동시에 벌였다.
다섯 명의 파티원들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그녀의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리는 후안이 그 증거였다.
어느 순간, 그녀는 지팡이 끝으로 사냥 칼을 쳐냈다. 균형을 잃은 후안의 가슴이 열리고, 쇠미리는 녀석의 가슴에 지팡이를 찔러넣었다.
“컥!”
후안의 가슴과 입에서 동시에 피가 튀었다. 일반적인 싸움이었다면 이게 마침표가 되었겠지만, 사냥꾼의 싸움은 달랐다.
그는 쓰러지는 순간에도 그물을 던져 쇠미리의 지팡이를 휘감았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꽉 쥐었지만, 후안이 칼을 투척하자 지팡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탁! 무기를 잃은 그녀는 후안이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가슴이 뚫린 후안은 말할 것도 없었고.
“참 질기시네.”
“그래, 너희에게 배운 것 중 하나지.”
“….”
쇠미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으나, 후안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사냥 칼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내던진 사냥 칼은 쇠미리와 후안 사이, 정확히 한 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저 칼로, 100명이 넘는 엘프를 죽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지. 같은 엘프인 너는 느낄 수 있겠지? 남미의 네크로맨서들이 탐낼 정도로 진한 원한이.”
“….”
“데메론드의 딸이여, 저 칼로 날 마무리할 기회를 주마.”
“…뭐요?”
“지팡이도, 그물도 없으니 저 칼을 잡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이다. 그러니… 공평하게 가지. 내가 셋을 세면, 동시에 칼을 집는 거다. 어떠냐?”
쇠미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간단한 문제다. 너에겐 엘프의 원한을 풀어줄 의무가 있고, 내게는 사냥꾼의 명예가 있다.”
“….”
“하겠나?”
“좋아요.”
“좋아, 셋을 세지. 셋….”
그 순간, 둘은 동시에 권총을 뽑았다.
탕!
바닥에 피가 튀었다. 엘프가 아닌 사람의 피였다.
***
“고생했어.”
쇠미리가 둥지로 돌아오자마자, 여명이 그녀를 반겼다. 승리했냐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후안의 머리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승리의 증표였으니까.
“…여명도 고생했어요.”
쇠미리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타오르는 시체와 여명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덧붙였다.
“저도 태워도 돼요?”
“응, 얼마든지.”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쇠미리는 후안의 머리를 불더미에 집어 던졌다.
화르륵! 애국자의 불이 죽은 사냥꾼의 머리를 태우는 가운데, 쇠미리는 사냥 칼과 그물을 잡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건 왜 안 태워?”
“태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
“주인공은 이걸 유용하게 썼다면서요. 제 원한 때문에 태우는 건… 아깝잖아요.”
2장 보스의 드랍 장비. 작가의 노트에는 반드시 챙겨야 하는 아이템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여명은 굳이 그걸 챙기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고, 쇠미리는 NPC가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 저건 동포의 피를 먹은 칼과, 동포들을 짐승처럼 잡아댄 그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명은 그녀의 손에서 칼과 그물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주와이외즈의 불길 속에 두 물건을 집어 던졌다.
“여명! 그걸 그냥 태우면…!”
“…우울한 게 좀 풀리지?”
“….”
“같이 기도하자. 죽은 엘프들을 위해서.”
쇠미리는 복잡한 얼굴로 여명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타탁, 타탁-그물과 칼이 타오르는 소리를 따라 쇠미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이 둥지 바닥에 떨어진 순간.
두 사람의 등 뒤로 이어진 그림자가 속삭였다.
『웃어라. 눈물은 신부가 입장할 때 흘려도 늦지 않으니.』
익숙한 목소리. 여명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쇠미리를 보고 나서야,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아….”
일렁이는 불길 위로, 투명한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칼과 그물, 그리고 두 엘프 사냥꾼의 잿가루 사이로 피어나는 그것은 엘프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수한 엘프의 아지랑이.
어찌 보면 영혼 같기도, 단순히 환상 같기도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지랑이 속 엘프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아주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여, 여명… 저기, 이건….”
놀란 쇠미리가 엘프들의 아지랑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풀었다.
조금 전 카를로스에게 흡수한 마나.
그러자 마나들은 기다렸다는 듯 아지랑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곧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뭔가 주문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더 많은 엘프들의 얼굴이 아지랑이 위로 피어오르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마치 성불하는 것처럼, 천천히, 경건하게.
애써 흡수한 마나가 사라지고 있었지만, 여명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멍하니 아지랑이를 올려다보는 쇠미리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보다 더 가치 있었으니까.
이윽고, 아지랑이 속 수많은 엘프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쇠미리가 붉어진 눈시울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여명, 제가 무슨 말 할지 알죠?”
“응, 나도 사랑해.”
여명은 웃었다. 쇠미리 또한 그를 보며 웃었다. 불길 앞에서 눈동자가 겹치고, 고요한 열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의 키스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뒤늦게 집을 찾아온 집주인의 성난 포효 때문에.
[안 돼! 내 집! 내 집이…!!! 이, 이 미친놈아!! 빌린다며! 그냥 빌리는 거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