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22)
을 위한 세계는 없다-522화(522/817)
EP.522 잘 돼 갑니다 (5)
* * *
***
아카데미 공항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 겸 식당.
이른 시간이라 텅텅 빈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은 네티는 나머지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여기요! 여기 예약해 놨어요.”
그녀가 안내한 테이블 위에는 이미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베이컨이나 계란 후라이, 팬케이크처럼 간단한 식사류가 대부분이었다.
손님을 대접하는 식사치고는 좀 모자랐지만, 존 어빙 감독은 별 불만 없이 의자에 앉아 곧바로 포크를 들었다.
그는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듬뿍 뿌리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먹으면서 물어보거라.”
“….”
“다음 비행기로 바로 떠날 생각이니,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여명이 어떻게 말문을 열까 고민하는 사이, 베이컨을 썰던 네티가 휙 손을 들었다.
“왜 형부를 보고 빨갱이냐고 물으셨나요?”
시작부터 직구를?
놀라서 계란 노른자를 터트린 여명과 달리, 감독은 대충 팬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초인보다는 노동자에 가까운 몸이라서 그랬다.”
“…노동자? 어디 가요?”
네티는 모르겠다는 듯 여명의 몸을 훑었다. 감독은 똑같이 여명을 보며 말을 이었다.
“혈관과 심장의 마나를 움직이는 초인들은 마음껏 최적의 근육을 만들 수 있지. 실제로도 대부분은 그렇게 하고. 하지만 이 녀석의 근육을 보거라.”
까닥까닥. 그는 시럽이 흐르는 포크로 여명의 몸을 가리켰다.
“우선 어깨와 손목 사이, 저 울퉁불퉁한 근육은 트레이닝으로 키운 게 아니다. 쉬어야 할 때 억지로 움직여서 붙은 일 근육이지.”
“….”
“그리고 손아귀의 굳은살. 검을 쥐어서 생기는 굳은살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를 휘두른 게 아닌, 끌고, 미는 과정에서 생긴 굳은살이다. 역시나 뭔가를 쥐고 일하는 노동자에게 익숙한 굳은살이지.”
거기까지 말한 감독은 포크를 살짝 내려 식탁 아래 숨겨진 여명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가장 결정적인 건, 골반과 엉덩이 사이의 근육이다. 초인들에 비해 아래 허리와 엉덩이가 단단한 걸 보면, 오랜 시간 허리를 굽힌 채로 움직인 걸 알 수 있지.”
“….”
“종합해보면 빼도 박도 못 하는 노동자 출신인데… 하필 붉은 별과 마지막으로 싸운 게 노동자 출신이라 한 번 떠봤다. 혹시라도 관계가 있을지 모르니까.”
네티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감독과 포크와 형부의 엉덩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언니에게 한 대 맞기 전에 말을 돌렸다.
“초인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좋은 눈과 경험, 그리고 사물을 향한 관심.”
네티가 오오 감탄하건 말건, 감독은 여명을 향해 덧붙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빨갱이나 테러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 심지어 세간에 알려진 것과도 다른 것 같은데. 양아치보단 제비놈 같군.”
제비라니. 처제들의 베이컨을 대신 썰어주던 여명은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걸 보고 웃음을 참는 네티를 대신해, 이번에는 세티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감독님은 왜 붉은 별에 대해 찍으시려는 거죠?”
“기록할 가치가 있으니까.”
“…가치요? 그는 테러리스트인데요?”
“그래, 테러리스트라도 찍지. 기록이란 그런 거니까. 너무 이상하게 볼 거 없다. 미국이 영어 패권을 위해 띄운 마법 위성이나, 천족이랑 한 번 해보려고 극지방을 거니는 정신병자들도 찍으러 다니는 게 우리니까.”
“….”
천족? 세티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감독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누가 알겠나? 그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혁명가일지.”
“혁명가… 요?”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혁명가. 그에게 공격 당한 사람들을 모아보니 그런 의심이 들더군. 재벌, 아야톨라, 정부 요원들… 이상하리만큼 강자만을 노리고 있지 않나. 마치, 옛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
“만약 그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닌, 진짜 혁명가라면… 그는 기록되어야 해. 혁명이란 시대의 불만을 뚫고 자란 싹이며….”
그때, 여명이 끼어들었다.
“…모든 싹이 나무가 될 수 없을지언정, 후대를 위한 본보기가 돼야 하므로.”
그러자 감독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명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감독님의 다큐에 나오는 내래이션이었죠.”
“…내 작품을 아나?”
“예, 제목이 뭐였더라… 세기의 혁명들?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겁니다.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전쟁, 러시아 혁명 등 여러 혁명을 시리즈로 다뤘던 다큐멘터리로 기억합니다.”
학생 입에서 다큐 이야기가 나온 게 퍽 신기한지, 감독은 어색하게 웃었다.
“…제작하는 내내 미국과 소련 양쪽에서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그다지 완성도 높은 다큐는 아니었지.”
“겸손이십니다. 마지막 화에서 한나 이렌트의 말을 인용해 혁명의 강점과 혁명이 가져올 무질서를 대비시키는 내용만 봐도 명작이라 불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명작이라… 젊은 친구에게 그런 후한 평가를 받을 줄은 몰랐군. 혹시 내 다른 작품들도 본 적 있나?”
감독이 운을 떼자마자,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그가 찍은 다큐에 대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누구나 아는 대표작부터 초기작, 그리고 종종 각국의 의뢰로 만들었던 마이너한 다큐멘터리까지.
여명은 상상 속 우상과 만난 것처럼 우다다 감상을 풀어놓았고, 감독 또한 오랜 팬을 만난 게 즐거운 듯 자신만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어떤 촬영이 어떻게 어려웠고, 어디서는 죽을 뻔했으며, 또 어떤 때는 스폰서와 싸우기도 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들.
그렇게 이어지는 둘만의 대화가 어찌나 흥겨운지, 뻔뻔한 네티조차 대화에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시킨 베이컨이 딱딱하게 굳고, 커피마저 식을 무렵.
여명이 지나가듯 이런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재밌었어요. 그, 위대한 정치인 시리즈요.”
“…?”
“리처드 닉슨이 모함을 이겨내고 다시 정권을 잡는 내용하고, 스탈린과 어머니가 나오는 부분은 특히….”
이야기에 빠진 여명은 미처 몰랐지만, 세티는 볼 수 있었다.
위대한 정치인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존 어빙의 몸이 움찔거리고, 동공이 확대되는걸.
놀라움과 경악이 섞인 반응. 그 반응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지만, 세티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뭐지?’
세티의 머리 위로 의심이 피어나는 가운데, 감독이 여명의 말을 끊고 물었다.
“자네 혹시, 한국 개성 출신인가?”
“예? 아뇨.”
“그러면 만주나 서울 출신인가?”
“인천 출신입니다.”
“인천… 처음 듣는군. 정확히 어딘지 알려줄 수 있겠나?”
“서울과 개성 사이에 있는 해안 도시인데, 갑자기 그건 왜…?”
여명이 말꼬리를 흐렸으나, 감독은 별일 아니라는 듯 턱수염을 쓸었다.
“아니,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랬네. 아, 그리고 혹시 본관은 어딘가?”
여명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인천 천 씨입니다.”
“….”
천 씨, 천 씨라…. 짧게 입술을 웅얼거린 감독은 천천히 식은 커피를 마셨다.
세티가 보기에, 그건 뭔가 고민하는 걸 숨기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녀는 감독이 여명에게서 뭔가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을 증명하듯, 커피잔을 내려놓은 감독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흠, 내가 지금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 아카데미에 남아 자네 홍보물을 찍는 걸 돕는 게 나을 것 같군.”
“네? 정말이십니까?”
“그래도 기왕 팬을 만난 김에, 제대로 된 영상 하나 만들어 주지. 단, 붉은 별이 다시 나타나면 난 바로 떠날 걸세. ”
여명은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물론, 그의 얼굴 가득 고인 미소를 보면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 감독, 뭔가 있어.’
세티는 혹시라도 여명이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의 허벅지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그리고 감독이 비행기 표를 취소하기 위해 자리를 잠깐 뜬 순간.
여명은 세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알아. 근데… 지금은 그냥 지켜보자.”
“왜?”
“미국에서 보낸 첩자라면 옆에 두는 게 낫고, 무엇보다… 나도 알고 싶거든. 저 어르신이 대체 뭘 보고 놀란 건지.”
“….”
다 알고 있었네. 세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놀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쾅!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두 명의 소녀 때문이었다.
한 명은 익히 알고 있는 살로메였고, 그녀의 팔을 꼭 잡고 뒤따라온 갈색 머리 소녀는-
“어… 분명, 미리… 어쩌고 였는데.”
“미리엄! 미리엄이요!”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프랑스 소녀, 미리엄.
이름보다 오귀스트의 증손녀로 널리 알려진 그녀는 세티를 보며 한참이나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여명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번에 일을 사죄하러 왔어요.”
“…처맞은 걸 사죄하러 왔다고?”
세티가 능청스레 되묻자, 미리엄의 입에서 작게 이 씨발-이란 단어가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세티에게 사과했다.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당신과 그… 천여명을 뒤에서 비꼰 거. 무례하고, 치사한 일이었어요.”
“…좋아, 사과를 받아들일게. 내 질문 하나만 대답해 주면.”
“질문? 무슨 질문이요?”
“왜 갑자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는 거야?”
그 질문의 답은 살로메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여명과 희생양 자매를 쓱 훑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교장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내일부터 본선 진출자들끼리 모여서 훈련할 거라는데….”
“…로드 하우 답지 않은 짓을 하네. 그래서?”
“훈련 중 얼굴 붉히지 않게, 서로의 감정은 다 털어놓고 가자는 거죠.”
과연 그게 전부일까. 오귀스트와 여명의 관계를 아는 세티는 힐끗 미리엄의 표정을 확인했다. 어딘가 겁을 먹은 듯한 표정.
그녀는 미리엄을 자극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냥 참가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아, 그게….”
살로메는 괜히 주변을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세티와 여명에게 속삭였다.
“그러기 어려울 거 같아요. 10강이 직접 지도해 줄 거래요. 맥팔레인. 그 사람이요.”
“….”
여명과 세티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미국의 노림수가 이거였네.
***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한국에서 유진수라는 감독이 여명에게 이런저런 질문지를 보낼 무렵.
로드 하우 아카데미 본선 진출자들과 그들을 보호할 교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예선전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진 대강당을 통째로 빌려서.
수십 명에 달하는 본선 진출자들과 교직원들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오늘 그들을 가르치러 오는 사람의 이름값 때문이었다.
캐나다의 맥팔레인 중장.
그 무시무시한 중동과 아세안 전쟁에서 활약한 진짜 10강.
비록 직접 아세안 전쟁을 마무리한 호세나 데메론드 같은 괴물과 비교되어 10강 중 하위로 평가받는 그였지만, 10강은 여전히 10강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핵무기에 비견되는 강자.
그런 10강에게 직접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돈과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덕분일까, 제국에서 온 삼 황자는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의 손자조차 눈에 띄게 흥분해 있었다.
물론, 여명은 그런 흥분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맥팔레인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대놓고 실력을 숨겨야 하는 판 아닌가.
훈련은 해저터널의 용사 파티에게 받는 것만 못했다. 아니, 대련을 빙자해서 팔다리를 부러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다고 빠지자니 미국이 더 의심할까 무섭고.’
여명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가운데, 의외의 인물이 그에게 다가왔다.
천검 세바 레르몬토프.
코르부스와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외부 강사로 초빙된 유명 용병이자, 일리노이 주지사 올턴의 부하… 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
짙은 담갈색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여명의 옆에 털석, 주저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봐, 양아치. 왜 혼자 있냐? 쟤들은 뭐하고?”
세바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저 멀리 세티와 모여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성녀, 쇠미리, 살로메, 심지어 오귀스트의 증손녀 미리엄까지.
잠시 그녀들을 보던 여명은 차갑게 대답했다.
“굳이 여기서까지 함께 다니면서 소문을 만들 필요 없으니까.”
“음, 그건 그렇지… 근데 왜 반말하니?”
“존댓말을 원하면 선생 자격으로 왔어야지. 지금은 전령 아닌가?”
일부러 성질을 긁어 봤는데, 세바는 의외로 담백하게 웃었다.
“나 여기 교직원 자격으로 온… 아니, 지금은 전령이 맞지. 씁, 우리 존경하는 보스의 전령. 근데 내 정체는 언제부터 알았냐?”
“유리 레르몬토프와 만났을 때부터.”
“아, 멍청한 동생 새끼가 이름을 깠나 보네.”
“…이제 내가 그쪽 보스를 존경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지?”
“흐, 우리가 원래 이런 조직이 아닌데. 그리고 존경하는 편이 좋을 걸. 네 덕분에 청문회를 들락거리면서도 지지도 40%를 유지하는 양반이라고.”
“….”
전국민을 대상으로 거짓말을 한 게 걸리고도 40%인가. 미국인들이란.
여명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세바가 계속 말했다.
“아, 그리고 우리 보스가 너에게 했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넌 언제든 내민 손을 잡기만 하면 돼.”
“헛소리할 거면 꺼져.”
여명이 슬그머니 마나를 끌어 올리며 말하자, 세바는 허리에 걸린 무기 상자에 팔을 올리며 킥킥거렸다.
“이 새끼… 선생일 때랑 태도 다른 것 좀 보게. 양아치 짓하는 거, 연기 아니지?”
“….”
“왜, 내 팔도 자르게? 나도 한 판하고 싶긴 한데… 네 수인 스승이 날 잡아먹을 테니 참는다. 그리고, 좋은 말 전해주러 온 거니까 너도 좀 참고.”
거기까지 말한 천검은 크흠, 헛기침한 뒤 조금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지사님의 전언이다. 맥팔레인은 죽이지 마. 일대일로 싸우지도 말고.”
“…뭐?”
“뜻을 물어봐도 난 모른다. 너 같은 게 어떻게 맥팔레인을 죽인다는 건지… 저기 여자들하고 같이 다구리라도 까나?”
“….”
“다 전했으니, 난 간다.”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천검을 잡지 못했다.
바로 다음 순간, 강당의 문이 열리며 맥팔레인의 도착을 알렸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