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23)
을 위한 세계는 없다-523화(523/817)
EP.523 잘 돼 갑니다 (6)
* * *
***
열리는 문을 따라 떠들썩했던 강당에 정적이 고였다.
척, 척, 척.
각 잡힌 발소리를 따라, 흥분, 기대, 그리고 경외심이 뒤섞인 공기가 여명의 코를 찔렀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자, 강당 입구에 멈춰 선 맥팔레인이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 단단한 다문 입, 각 잡힌 몸.
그는 누가, 어디서 봐도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똑같이 군인의 자리에서 10강에 오른 브라우닝과 비교하면, 브라우닝이 일반인으로 보일 정도.
그나마 캐나다의 유명 하키팀 마크가 새겨진 운동복을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복장까지 군복이었다면 분위기가… 아니, 잠깐.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다른 팀도 아니고, 40년 넘게 우승 못 하는 팀의 팬이야?
맨날 하위권에서 빌빌거리던 야구팀을 응원하던 청소부 형들을 떠올린 여명이 묘한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맥팔레인이 입을 열었다.
“반갑다. 제군들. 나는 오늘부터 제군들의 훈련을 담당할 레너드 맥팔레인이라고 한다.”
낮고 진중한 목소리. 그는 강당에 모인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의 면면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아카데미에서 나눠준 자료를 봤겠지만, 이번 훈련은 최근 늘어나는 올림피아 경기 중 사고를 줄이기 위한 훈련이다.”
경기 중 사고.
올림피아 참가자가 모두 학생들이라고 해도 본질은 초인이니만큼, 유혈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문제는, 초인이 워낙 귀중한 인재다 보니 애들 싸움이 국가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진다는 것.
냉전 시대에는 대놓고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도 흔했다는데… 뭐,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 수업 자체가 맥팔레인이 움직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도 10강이 직접 안전 훈련이라니. 명분은 확실하네.’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맥팔레인은 강당 중앙의 훈련장에 올라서서 말했다.
“훈련은 본선 경기를 위해 아카데미를 떠나는 시간을 제외하고 임의로 진행될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체력적인 부분에서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강도를 조절할 것이며, 원하는 학생이 있다면 피로회복제를 지급하고 이론 훈련만을 진행하겠다.”
그 말에 호응하듯, 교직원들이 학생들에게 훈련 계획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미 받아본 학생들도 한 번 더 받아보며 훈련에 흥미를 보였지만, 여명은 노골적으로 계획서를 무시했다.
앞으로 연기를 위한 일이었으나, 애써 계획서를 나눠준 선생님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맥팔레인은 훈련장 아래에 자유분방하게 모인 학생들을 한 번 더 훑으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번 훈련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지금 질문하도록.”
물론, 여기서 질문을 던질 정도로 눈치 없는 학생은 없…
…지 않았다.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손을 들었다.
“천여명 학생. 뭐가 궁금하지?”
맥팔레인의 목소리를 따라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여명은 최대한 껄렁하게, 그러니까 양아치 같은 말투로 말했다.
“이 훈련, 그냥 빠져도 됩니까?”
“….”
10강의 훈련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다는 말.
어떻게 보면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아니, 대놓고 모욕적인 말이었다.
-와, 저게 미쳤나.
-이번 1학년에 특히 미친놈이 있다더니. 쟤야?
-성검한테 가르침 받았다는 소문이 진짜일까? 그거면 이해가 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놀라서 수군거리는 것과 달리, 맥팔레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되물었다.
“수업 내용, 아니면 나. 어느 쪽이 불만인지 물어도 되겠나?”
여명은 여전히 껄렁거리며 말했다.
“둘 다 불만 없습니다. 그냥, 저하고는 안 맞는 훈련인 거 같아서요.”
“…그러니까, 혼자 독학하는 쪽이 더 낫다?”
“예, 뭐,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
이쯤 되자, 맥팔레인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럼에도 여명은 그치지 않고 계속 맥팔레인의 속을 긁었다.
가능하면 지금 바로 빠지고 싶은데, 이대로 나가도 되냐-뭐 그런 말들.
말투와 표정이 얼마나 양아치 같은지, 멀찍이서 지켜보던 성녀가 한마디 할 정도였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저거 연기 아닌 거 같아. 사실은 저런 양아치가 본체고, 평소의 착한 여명이 연기 아닐까?”
“….”
세티와 쇠미리 모두 성녀의 헛소리를 무시했으나, 살로메는 달랐다.
“오… 진짜로 그런 거라면 좋겠네요.”
“…응?”
“네??”
처음 말을 꺼낸 성녀는 물론이고 세티 자매들마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살로메가 뒤늦게 변명했다.
“아니, 그냥, 착한 남자보다는, 그… 나쁜 남자 쪽이 더 인기 있는 타입이잖아요? 전 그런 관점에서….”
그때, 쇠미리가 끼어들었다.
“나쁜 남자… 콧수염을 기르고, 지크 하일이라고 외치는 그런 남자요?”
“….”
살로메는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쇠미리에게 놀림 받을 걸 깨달은 까닭이었다.
“나치 아니라고….”
억울한 혼잣말을 따라 성녀가 키득거리고, 일행에서 좀 떨어진 미리엄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맥팔레인은 여전히 진중한 목소리로 여명을 대하고 있었다.
“그게 학생이 원하는 바라면, 좋아. 내 직권으로, 다음 훈련부터 빠지는 걸 허락하겠다.”
“다음? 지금 당장은 안 되는 겁니까?”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천여명 학생은 안 된다. 이건 경기 중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훈련이니까.”
“….”
“사지 절단 두 번, 척추 부상 한 번. 젊은이의 혈기라기엔 도를 넘었지.”
부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여명은 이쯤에서 굽힐까 하다가, 슬쩍 이쪽을 보는 세티의 눈빛을 확인했다.
‘계속해.’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제가 싫다면요? 그러면 어쩌시겠습니까?”
“….”
“뭐, 10강씩이나 되는 분이 직접 절 두들겨 패실 것도 아닐 테고.”
설마 여명이 이렇게까지 깐죽거릴지 몰랐던 선배와 교직원들이 놀라건 말건, 맥팔레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난 그런 식으로 힘을 쓰지 않는다. 대신… 거부할 수 없는 테스트를 하나 권유하도록 하지.”
“…?”
테스트?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사이, 맥팔레인이 강당 저편,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군인은 기다렸다는 듯 네모난 무언가를 꺼내 맥팔레인에게 두다다 뛰어와 그것을 건네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방패였다.
흔히 시위 진압 방패라고 불리는, 투명한 플라스틱 재질의 방패.
기껏해야 권총탄도 못 막는 방패를 들어 뭘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맥팔레인이 방패에 마나를 불어넣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메이플 시럽처럼 진한 갈색의 마나가 그대로 방패를 둘러싸더니, 맥팔레인의 기세만큼이나 단단하게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쿵! 곧 대련장에 방패를 내려놓은 맥팔레인은 여명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방패에 흠집을 내면, 내 명예를 걸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뭐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지.”
“….”
“단, 이 테스트를 받으려면 오늘 훈련에 참여해야 하네. 어떤가?”
여명은 그냥 나가고 싶은데요-라고 말하려다가 애써 입을 다물었다.
10강이 뭐든 한 가지 들어준다, 그건 평범한 학생이라면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한도 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장 10강의 무술을 알려달라고 한다면? 이미 학생 수준은 한참 전에 벗어났다.
‘과연, 거부할 수 없는 테스트네.’
여명은 쩝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짓것, 해보죠, 뭐.”
강당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된 가운데, 맥팔레인은 오연히 서서 여명이 대련장으로 내려오길 기다렸다.
저벅, 저벅, 여명의 걸음 소리를 따라 숙덕거리는 동급생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눈치 없는 학생들이 각자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순간.
세티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테스트, 다른 사람도 참가할 수 있나요?”
“흐음?”
“저도 받고 싶어서요. 그 테스트.”
맥팔레인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성녀 또한 손을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녀의 손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손짓을 잡아먹을 정도로 크게 소리친 사람이 있었으므로.
“여도… 아니, 나도 그 테스트에 참가하겠습니다!”
2학년들의 틈바구니에서 벌떡 일어난 건 흑발에 연한 금색 눈동자를 자랑하는 청년이었다.
차원문 너머, 제국의 삼 황자.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검을 뽑았다.
“10강에게 부탁할 기회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리고 뒤늦게 끼어드는 성녀.
“저도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오자, 다른 학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특히 아샤 출신 학생들.
-이거 끼어도 되나?
-중장님도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 아닐까?
-그래서 이 기회 놓칠 거야?
그쯤 되자, 다른 학생들도 손을 들다 못해 대련장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지, 나름 분위기를 잡고 내려가던 여명은 물론이고, 맥팔레인조차 살짝 쓴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처음 물꼬를 튼 세티는 여유롭게 망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그녀가 나 잘했지? 라는 뜻을 담아 여명에게 윙크를 날리는 사이, 삼 황자가 대련장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어지간히도 조급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아무튼, 여명보다 먼저 무대에 오른 삼 황자는 멋지게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맥팔레인. 나 도가탄 히라리아는 제국의 삼 황자가 아닌, 한 명의 학생으로서 당신에게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지을 법도 하건만, 맥팔레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황자와 그 뒤에 몰린 학생들을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메이플 시럽색 마나로 강화된 방패를 들며 말했다.
“좋다. 훈련의 첫 시작으로 학생 제군의 전력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완곡한 동의. 학생들이 흥분하는 가운데, 삼 황자는 기다렸다는 듯 마나를 가득 끌어 올려 검기를 만들어 냈다.
영약을 얼마나 많이 처먹은 건지, 마나를 다루는 솜씨에 비해 검기의 순도가 어마어마했다.
물론, 혈관으로 세계수의 마나가 흐르는 여명이 보기엔 그저 그랬지만, 다른 학생들은 오오-감탄을 내뱉을 정도.
“그럼, 가겠습니다!”
삼 황자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여명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용사의 무술… 은 아니고, 천둔 검법에 가깝군.’
멀쩡한 용사의 무술을 억지로 비틀고 쥐어짜 일반인이 휘두를 수 있게 만든 무술.
‘황가에는 더 이상 용사의 핏줄이 없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삼 황자의 무술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으므로.
새삼 여명이 자신의 혈통에 전율하는 사이, 삼 황자는 비틀린 용사의 무술을 펼쳤다.
변경백이 보여줬던 2초식과 비슷한 전신 찌르기.
고오오 – !
검을 타고 소용돌이 치는 마나가 꽤 인상적이긴 했지만…
깡!
검은 방패를 뚫기는커녕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삼 황자는 반탄력에 휩쓸린 듯 역으로 바닥을 굴렀다.
“….”
역시 10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삼 황자의 실력이 볼품없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건 삼 황자의 대처는 나쁘지 않았다.
대련장을 데굴데굴 구른 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정돈된 자세로 검의 손잡이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차원문 너머, 기사의 예법.
“역시, 10강의 벽은 높군요. 볼품없는 실력이었지만, 감히 조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맥팔레인은 마찬가지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볼품없지 않았다. 그리고 몸에 더 잘 맞는 옷을 찾으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다. 내가 장담하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짜가 용사의 무술 말고 다른 무술을 쓰라는 이야기인가.
짧지만 인상적인 격돌이네. 라는 여명의 감상이 전염된 걸까?
나머지 학생들은 삼 황자의 굴욕을 보고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밀어내며 링 위로 올라섰다.
역시 본선 진출자들이라 그런가. 괜히 순서가 밀린 여명이 팔짱을 끼는 사이, 벌써 다음 학생이 맥팔레인의 방패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누구도 그의 방패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세티 패거리는 물론이고, 여명에게 따로 미안… 이라는 말을 남긴 전윤성마저도.
그 와중에 성녀의 사격이 흠집을 내는 데 성공했지만, 몰래 숨겨둔 ‘실탄’을 쓴 게 들통나 교직원들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쟤는 진짜….’
어쨌거나, 마지막에 남은 여명이었다. 딱히 노린 건 아니고, 이리저리 순서를 양보한 결과였다.
여명은 대련장 위로 올라가 맥팔레인에게 물었다.
“지치셨으면 다음으로 미루셔도 됩니다.”
“이대로 보내면 천여명 학생이 다음 훈련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닌가?”
여명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무기를 꺼냈다.
세디달에게 받은 검, ‘시리’.
산의 눈물이나 무장 혈청을 꺼낼 수 없기에 꺼낸 검이었지만, 맥팔레인을 긴장시키기엔 충분했다.
“…좋은 무기군.”
“예, 사연이 많은 무기죠.”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맥팔레인은 묵묵히 방패를 들었고…
여명은 시리 위로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