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25)
을 위한 세계는 없다-525화(525/817)
EP.525 잘 돼 갑니다 (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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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수 감독이 로드 하우 아카데미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 그러니까 전윤성이 중등부 올림피아에서 우승했던 시절에.
그는 로드 하우를 배경으로 한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선진국이 독점한 초인 교육, 이대로 괜찮은가.]어딘가 그럴싸한 제목과 달리, 프로그램 속 내용은 뒤처진 한국 초인계에 대한 불만과 전윤성, 전용섭 부자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여러모로 부끄러운 방송이었지만,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그런 저열한 해방구가 필요했었다.
무슨 짓을 해도 10강급 초인을 만들지 못할 거라는 암울한 확신이 한반도를 뒤덮던 시대였으므로.
물론, 지금은 전부 옛이야기에 불과했다.
당장 공항에 내린 유진수 감독의 마음부터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어떻게든 아카데미와 학생들의 어두운 면을 찾아내려고 했던 과거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밝고 희망적인 스토리가 가득했-
“…촬영팀이 학생 섬에 들어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촬영은 북쪽 섬에서만 가능합니다.”
공항에서 그와 촬영팀을 안내하던 교직원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모 의원의 낙하산으로 내려온 PD놈이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뭔데 된다, 안 된다 지랄이야? 우리는 이미 촬영 허가 다 받고 왔다고.”
유진수 감독은 PD를 말리려 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낙하산 따위가 갑질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그가 말리기도 전에, 교직원이 먼저 낙하산 PD의 신경을 긁었다.
“그 촬영 허가라는 게, 여기 북쪽 섬에서만 적용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학생들의 생활 공간에는 가실 수 없습니다. 소위 언론인이란 사람들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죠.”
“아니, 이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낙하산 PD는 눈을 부라리며 교직원에게 다가갔다.
그걸 본 유진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아카데미 교직원 대다수가 초인이란 사실도 모르는 병신을 낙하산으로 꽂아 넣다니.
그가 누가 저 병신 좀 막아보라고 촬영팀에게 손짓하고, 낙하산 PD가 교직원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메드가 입학처장님?”
공항 입구에 서 있던 한 학생이 교직원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말끔한 교복 차림의 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검은 머리에 진한 금색 눈동자… 그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청년이었다.
작금의 한국인들이 올림피아 결승 티켓을 사재기하는 이유이자, 10강이 몇 년 내로 11강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떠들게 만드는 주인공.
천여명. 그의 실물을 본 촬영팀을 일제히 얼어붙었다. 심지어 교직원의 멱살을 잡으려던 낙하산 PD까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여명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흑인 교직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로 잘 아는 듯한 태도였고, 메드가라 불린 교직원 또한 그런 태도로 천여명에게 대답했다.
“오랜만은 무슨. 저번에 정학 당할 때 봤네.”
“어… 그랬던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정학을 연속으로 당해서 기억이 좀.”
“…연속 정학. 그래, 정학이 끝나고 한 달도 안 돼서 또 정학을 맞은 건 아카데미 역사상 자네가 최초야.”
“부끄럽습니다.”
“알면 됐네.”
그렇게 친한 건지 어색한 건지 모를 대화를 나눈 직후, 여명은 메드가의 뒤편에 있는 촬영팀을 싹 훑으며 말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 문제 없네. 아직까지는.”
촬영팀을 빤히 바라보며 내뱉은 메드가의 말에 낙하산 PD가 움찔거렸다. 그는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억지 미소를 지으며 천여명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천여명 학생. 저는 KG그룹 방송 제작 위원회의 김준 PD입니다. 이번에 올림피아 영상 제작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천여명입니다.”
천여명이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자마자, 그가 천여명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 함경남도 안변의 국회의원이신 김성륜 의원님이 제 삼촌 되십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
기억 못 했다. 하지만 여명은 장인이자 노예인 홍용완이 함경남도 함흥의 국회의원이라는 걸 떠올렸다.
같은 함경남도 출신이라면, 상대는 자연스레 홍용완 의원의 파벌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여명이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 기억납니다. 저번에 저희 장인어른과 함께 오셨던….”
“네, 맞습니다! 저번에 홍 의원님과 함께 아카데미를 방문하셨습니다.”
거기까지 지껄인 낙하산 PD는 촬영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내 인맥이 이만하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어진 여명의 말은 그의 자신감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뭘 가져오셨습니까?”
“…예?”
“못 들으셨습니까? 성의 표시로 뭘 가져오셨냐고 물었습니다.”
그 노골적인 말에 PD는 물론이고 메드가 입학처장마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명은 맞잡은 PD의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흠, 설마, 김 의원님께서 빈손으로 보내신 겁니까?”
“어, 그게….”
“에이… 아니죠? 아,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주기 어려운 물건인가 보군요. 그렇죠?”
“….”
여명은 PD의 어깨를 탁탁 두들겨 준 뒤, 촬영팀 방향으로 그를 밀어버렸다.
누가 봐도 그를 무시하는 행동이었고, 낙하산 PD는 얼굴이 빨개진 채 촬영팀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멍청이 하나를 처리한 여명은 촬영팀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유진수 감독님은 누구십니까?”
유진수는 앞으로 나서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천여명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한 까닭이었다.
홍용완, 그 또라이 새끼랑 같은 부류의 인간.
“반갑네. 내가 유진수일세.”
그래서 유진수는 홍용완을 대하듯 여명을 대하기로 했다. 깍듯이 허리를 숙이고, 비위를 맞추는 것.
“예, 저도 반갑습니다. 감독님. 촬영에 대한 건 입학처장님께 다 들으셨지요?”
유진수는 슬쩍, 메드가 입학처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별다른 조롱도, 흥미도 없이 촬영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촬영팀의 바보짓을 언급하며 공격할 사람은 아니라는 뜻.
유진수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물론, 설명은 잘 들었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촬영 계획에 대해 잠깐 논의할 수 있겠나? ”
“예, 물론이죠. 입학처장님? 전 이만 이분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보지.”
그렇게 촬영팀이 여명을 따라 공항을 나서는 가운데, 여명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근데 혹시… 다들 빈손은 아니시죠?”
“….”
이런 염병할 새끼. 유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촬영팀이 선물… 아니, 뇌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챈 천여명은 태도를 싹 바꿨다.
-전 그냥 본선 대비 훈련하러 갈 거니까, 촬영은 세티랑 존 어빙 감독님하고 알아서 하세요.
유진수는 당황했다. 갑의 위치에서 철저하게 촬영팀을 이용할 줄 알았건만, 천여명은 낙하산 PD 등 인맥을 노리고 온 놈들에게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존 어빙 감독이 촬영에 참가하는 것도 의외였다. 한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라면 학을 떼는 양반이 왜?
거기다 홍용완 의원의 딸인 홍세티 또한 정상인이었다.
아빠 유전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녀는 촬영팀을 존중하며 여명의 빈자리를 채웠다.
왜 예상보다 일이 술술 풀리는 거지?
알 수 없었으나, 유진수는 그 이유를 찾는 대신 현재의 행운에 만족하며 촬영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섬에 들어가는 대신,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북쪽 섬에서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 형식의 방송을 만들기로 했다.
유진수는 인터뷰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상을 뽑을 자신이 있었다.
영상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천여명은 그런 존재였다. 엘랑의 불이니, 10강의 방패에 흠집을 냈느니 하는 어마어마한 소문만으로도 시청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름없었는데…
“천여명이요? 완전 양아치죠!”
첫 인터뷰부터 뭔가 이상했다. 바오닉 레락… 천여명과 같은 기숙사 방을 쓰는 아샤인은 쌓인 게 많은지 어마어마한 울분을 토해냈다.
“수업 재끼는 건 일상이고, 통금시간을 어기는 건 기본에, 선배 알기를 아주 좆으로 아는 놈이라니까요?”
“….”
“게다가 여자는 또 얼마나 밝히는지… 이거 진짜, 밝히면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될 겁니다.”
바오닉 레락은 그 이후로도 거의 10분 동안 천여명의 인간성을 성토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실력에 대한 비판은 없다는 점 정도일까.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데.’
난감함을 삼킨 유진수는 SNS에 인터뷰를 유출하려는 덜떨어진 촬영팀 직원을 징계한 뒤, 학생들을 불러 인터뷰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터뷰는…
-팔을 자르면서 성욕을 느끼는 게 분명해요.
-성녀님을 꼬시기 위해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는 거라는 소문도 있어요. 이게 그냥 빈말이 아닌 게, 걔한테 척추가 박살 난 2학년 선배가 성기사 출신이거든요? 분명 성녀님을 지키려다가 그 꼴이 난 거겠죠.
-뭔가 이름이 이상한 학생들하고만 노는 것 같아요. 홍세티, 박네티, 쇠미리… 이거 한국인이 지은 이름 맞아요?
-선배들을 도미노처럼 우르르 넘어트리더니, 그냥 비웃고 가더라니까요? 이거, 아주 제정신이 아닌 놈입니다.
-옛 소련의 비밀 무기라는 소문도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벌써, 10강 중 넷이나 엮였잖아요? 성검, 만박불통, 맥팔레인, 오귀스트… 이게 말이나 돼요?
-졸업한 뒤에 프랑스로 가는 조건으로 엘랑의 불을 전수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샤워실에서 봤는데, 거기 크기가, 와… 포르노 배우인 줄.
-좀비 테러 사태 때는 멋졌는데, 요즘은 좀… 무서워요.
-저도 그냥 들은 건데, 네오 나치라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마법부의 그릇한테 나치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 걸 본 사람이 있다나?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면 못 참던데, 결벽증이 있는 걸지도?
-기자 노릇하는 놈들은 걔 정보 팔아서 돈 좀 만지던데, 이번에는 촬영까지? 천여명이 한국에서 진짜 인기가 그렇게 많아요?
그래, 많았다. 아마 이 인터뷰를 모아 방송하면 나락으로 가겠지만.
아니, 신토불이 초인에게 관대한 한국 특성상 오히려 인기가 오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건 간에, 인터뷰를 끝낸 유진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천여명이 로드 하우의 양아치니, 뭐니 하는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학생들이 밝힌 인터뷰 내용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양아치가 아니라 미친놈 아닌가?
함께 촬영에 참여한 존 어빙조차 황당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찰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아무튼, 이대로 모든 진실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천여명과 엮인 의원이 몇인데, 진실은 무슨.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유진수는 비장의 수를 꺼냈다.
인터뷰를 통째로 짜깁기 하는 것.
원래부터 정직한 감독과는 거리가 멀었던 유진수다운 판단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 올림피아 개최지가 한국인 덕분에, 그에겐 시간과 예산 모두 넉넉했다.
그러나 딱 하나, 그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으니…
촬영팀 중 몇몇이 밤마다 숙소를 벗어나 아카데미를 돌아다닌다는 점.
촬영팀이란 핑계로 아카데미 경보 마법진을 피해 요리조리 아카데미를 살피던 그들은, 어느 날 조국에 이런 문자를 보냈다.
[승만 시티에서 사라진 404 특수 연구부대의 기밀 데이터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목표물, 살로메 리어 두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