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27)
을 위한 세계는 없다-527화(527/817)
EP.527 잘 돼 갑니다 (10)
* * *
***
[천여-명-?]머리가 잘린 자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괴수가 천여명을 불렀다. 여명이 고개를 돌려보니, 잘린 채 떨어진 머리통이 그를 보며 얼굴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마치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듯한 표정.
“…저거 설마, 한국에서 보낸 놈이야?”
여명은 설마 싶은 마음으로 물었으나, 살로메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승만 시티에서 괴수 군인에게 받은 USB 기억해? 그걸 쫓아온 거 같아.”
“….”
대체 그 USB 안에 뭐가 들었길래, 올림피아 직전에 이런 정신 나간 짓을? 여명은 살로메와 괴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국의 미친 짓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토막 내면 알아서 답을 내놓겠지.
여명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한데, 괴수 녀석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게 아닌가?
살로메는 갑자기 왜 저러냐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여명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천여명은 한국의 미래 그 자체였으니까.
아직 진실을 모르는 녀석이 보기에 여명의 등장은 비밀 작전 중 민간인이 등장한 것보다도 더 큰 충격이겠지.
섬뜩한 촉수들이 공격을 멈추고 뜸을 들이는 걸 보아하니, 그대로 작전을 속행 할지 도주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물론, 녀석의 생각 따윈 상관없던 여명은 서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후웅- ! 이미 그의 몸을 가득 채운 파양결의 마나가 파도치고,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여명이 한걸음 내딛는 순간, 괴수는 선택했다.
시작은 촉수였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분열된 촉수들은 거의 동시에 여명을 향해 쏟아졌다.
흡사, 고깃덩이로 이루어진 파도가 치는 듯한 모습.
하지만 여명은 촉수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촉수 너머, 녀석의 살덩이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총구들.
하나하나가 중화기로 보이는 그 총구는 여명이 아닌 살로메를 노리고 있었다.
‘날 잡아두는 사이에 살로메를 죽일 생각인가?’
진짜 그의 실력을 모르기에 펼칠 수 있는, 얄팍한 수.
여명은 녀석의 몸에 박힌 총구 하나하나에 정확히 검기를 날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녀석이 몸을 틀었지만, 그 찰나를 놓칠 여명이 아니었다.
화르륵 – !
곧, 그의 전신에서 주와이외즈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여명을 휘감으려던 촉수들이 타오르며 오그라들고, 공기가 뜨겁게 달궈졌다.
아무리 대단한 괴수라도 이만한 열기 앞에서는 그저 잘 익은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
여명은 그대로 촉수 사이를 가르며 괴수의 몸통 위로 뛰어올랐다.
치이익-! 살과 피가 타오르는 소리와 동시에, 배에 달린 녀석의 입에서 마나가 담긴 비명이 튀어 나왔다.
[꺄아아악!!]살로메와 라날이 동시에 귀를 틀어 막을 정도로 섬뜩한 비명.
그것으로 시간을 벌었다고 판단한 건지, 괴수는 불타는 부위를 뺀 육체를 일제히 분리했다.
몸통은 강아지를 닮은 괴수 두 마리가 되어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고.
다리는 지렁이와 비슷한 무언가로, 팔은 거미를 닮은 곤충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촉수가 가득 달린 등은 거대한 해조류와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 사방으로 도주했다.
마치 하나로 뭉쳐 놓은 괴수들이 다시 분리되는 듯한 모습.
그걸 본 살로메는 괴수를 이렇게까지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겁했지만, 여명의 반응은 달랐다.
만주를 거쳐 히라리아까지 무수한 괴수를 보고 죽여온 그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불길의 범위를 늘렸다.
곧 이리저리 도망치던 괴수들은 모두 삽시간에 주와이외즈의 불길 속에서 잿가루가 되었다.
딱 한 마리, 아니, 한 부위만 빼고.
[머리! 저기 머리가 도망친다!]라날이 소리치며 가리킨 건 여명이 처음에 자른 녀석 머리통이었다.
두 개의 사람 머리와 닮은 그것은 언제 만든 건지 모를 촉수들을 꿈틀거리며 용의 둥지 입구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녀석의 뒤통수를 보는 여명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 가운데, 살로메가 지팡이를 들고 소리쳤다.
“어딜!”
곧, 그녀의 지팡이에서 현란한 광선이 발사되었다. 번쩍이는 광선에 직격 당한 머리통이 절반이 녹아내리며 둥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여명의 입에서 오-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지만, 의외로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녹아내리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머리통은 그대로 빨빨 대며 수로로 뛰어들었으니까.
“…어?”
살로메가 멍하니 그 꼴을 바라보는 사이, 정신을 차린 라날이 한마디 했다.
[멍청아, 머리통이 두 개면 당연히 뇌도 두 개지!]“….”
살로메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채 눈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명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하지? 쫓아가야 하나?!”
그녀의 당황과 달리, 여명은 담담했다. 그는 둥지를 뒤덮은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회수하며 말했다.
“살로메, 내가 혼자 왔을 거 같아?”
“아….”
다른 동료들이 하수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걸까? 살로메가 안도의 한숨을 쉬기 무섭게, 여명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괴수 군인이 줬던 USB, 이제는 나한테 넘겨야겠지?”
살로메는 바로 대답하지도, USB를 꺼내지도 않았다.
짧은 사이 여명에게 USB를 넘겨야 할 이유가 열 개도 넘게 떠올랐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반대의 한마디였다.
“이 USB를 넘긴 사람… 그러니까 강 중령의 부탁은, 제가 직접 한국의 잘못을 알려 달란 거였어요.”
“….”
“그리고 전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여명,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이 USB는 줄 수 없어.”
거기까지 말한 살로메는 슬쩍 여명의 눈치를 봤다. 그는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그녀의 나약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줬다.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어… 괜찮아?”
“괜찮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편이 나한테도 이득이고. 그 USB 속 정보를 대중에게 밝히는 순간, 너도 한국의 적이 될 테니까.”
“….”
“이걸로 너 스스로 내 복수에 끼어든 거야. 알지?”
노골적인 내용이었지만, 살로메는 그의 말속에 숨어있는 묘한 다정함을 읽을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서 USB를 넘겼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복수에서 그녀를 빼놓지 않았을까-하는 짧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여명이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모스 부호는 어디서 배운 거야?”
“으, 응?”
“현대에는 지구인들 중에서도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어떻게 정확하게 S.O.S 신호를 보낸 건지 궁금해서.”
살로메는 슬쩍 하늘을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 내가 전자기기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알잖아? 나 태블릿 컴퓨터 잘 쓰는 거.”
“아, 그래? 난 또 히틀러의 지식으로 안 줄 알았지.”
“….”
살로메는 몸을 떨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은근히 흐르는 식은땀까지는 막지 못했고, 여명의 묘한 눈빛이 그녀의 위아래를 훑자마자-
“아, 맞다. 여, 여명! 그거 알아? 라날이 우라간의 폼멜 다 수리했다?”
그녀는 여명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뭐?”
“다 수리했는데, 나중에 써먹으려고 숨겨두고 있더라고! 와, 진짜. 나도 알고 놀랐다니까?”
여명은 예상대로 그녀에게서 관심을 돌려 오르세 라날을 바라봤다. 그리고 졸지에 비밀이 들킨 라날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야 이 배신자년아!]***
꼬였다.
한때는 김 상사로 불렸던, 완성체 22호는 아카데미 하수도 바닥을 내달리며 생각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용과 조국의 중대한 비밀이 담긴 USB, 모두를 손에 넣기 직전에 하필, 그가 나타나다니.
천여명.
조국의 미래, 위대한 장관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칭했다. 22호 또한 그 말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천여명에게 계획이 막힌 지금, 22호의 머릿속에는 슬금슬금 의심이-
‘없다.’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그래, 천여명은 조국의 미래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USB에 걸린 추적 저주도, 용의 둥지도 모두 그대로다.
다시 시도하면 된다. 위대한 윗분들께서 다시 계획을 주실 터였다. 어쩌면, 천여명과 함께 용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22호가 여전히 애국자이듯, 나라의 미래인 천여명 또한 애국자임이 분명하기에.
고민을 없앤 그는 곧바로 계획으로 생각을 돌렸다. 지금은 새로운 몸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천여명과 살로메에게 연달아 얻어맞은 그에게 남은 건 뇌와 거기에 달린 촉수 몇 개가 전부였으니까.
자아가 없는 괴수가 있다면 좋겠으나, 아카데미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차선으로 다른 인간의 몸을 찾기로 했다.
문제는, 누구의 몸을 빼앗느냐였다.
학생의 몸을 빼앗기 위해 기숙사로 잠입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고… 교직원은 초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선택은 촬영팀의 다른 한국인을 목표로 하는 것.
하지만 22호는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더 좋은 먹이가 있는데 굳이 같은 동포를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촬영팀에는 한국인도, 초인도 아닌 사람이 하나 있었다.
존 어빙.
외국에서 유명한 감독이라는데, 늙은이인 만큼 몸을 빼앗는 것도 쉬우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22호는 그대로 하수도를 가로질러 촬영팀의 숙소에 도착했다.
조금 낡았지만, 어디가서 꿀리지 않는 호텔.
이번 촬영에 조국이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알려주는 숙소였다. 22호는 잠시 호텔을 올려다보다가, 수도관을 타고 천천히 호텔에 잠입했다.
뇌만 남은 상태에서 호텔에 잠입하는 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애국심으로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은 조국을 위해, 위대한 민족의 별을 위해…
끼익—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크기의 환풍기를 열고 존 어빙의 방에 잠입한 22호는 천천히 침대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잠든 노인의 머리 위로 촉수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
콱-!
누군가 그의 뇌를 콱 붙잡았다. 누구냐! 그가 촉수를 꿈틀거리며 저항했지만, 상대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꿈틀거려보라는 듯 촉수를 하나하나 뽑아내는 게 아닌가? 22호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반항을 멈추자, 상대가 속삭였다.
“괴수의 세포로 세뇌한 뇌라… 금제만으로는 부족했나? 하긴, 수단은 많을수록 좋지.”
마치 한국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목소리였다. 22호는 상대를 보기 위해 뇌에 달린 눈동자를 재생했다.
반쯤 재생된 그의 눈에 비친 건, 시릴 정도로 푸른 눈동자였다.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눈동자.
홍세티?
22호가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뒤편에 고인 그림자 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가시가 솟구치더니… 푹! 그대로 22호의 뇌를 꿰뚫었다.
“…수단은 많을수록 좋아.”
실에 꿰이는 인형이 주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듯, 22호 또한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시가 뇌를 헤집는 감각만큼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래서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입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