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31)
을 위한 세계는 없다-531화(531/817)
EP.531 아이들을 위한 경쟁은 없다 (3)
* * *
***
달깍.
네티는 꽉 찬 짐가방을 잠갔다. 올림피아 본선용이랍시고 한국에서 보내준 짐가방이었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가방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 가방을 보며 공포를 느꼈을 테니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자매들만 아니면 이대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콱 뒤져버리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귀찮음이었다.
‘그놈의 국뽕이 뭐라고, 이런 짐가방까지 싸야 하나.’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생각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최근 그녀는 짐가방처럼 귀찮은 물건과는 너무 멀어져 버렸다.
전부 형부 덕분이었다. 속옷보다 무거운 물건들은 형부가 전부 인벤토리로 옮겨줬으니까.
아니, 언니는 속옷까지 인벤토리에 넣었던 거 같기도.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간 네티는 짐가방에 기대며 킥킥 웃었다.
즐거움과 놀라움이 반반 섞인 미소였다. 그래, 참으로 즐겁고, 놀라운 일이었다.
고작 한 사람과의 만남이 이렇게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니.
정말이지, 기적 같은-
“갑자기 왜 웃어? 무섭게.”
그때, 옆자리에서 똑같은 짐가방을 싸던 동생이 꼽을 줬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서.
“언니, 징그러워.”
네티는 고개를 돌려 시리와 시스를 바라봤다. 왜 투덜거리나 했더니, 사랑하는 자매들은 아직도 짐가방과 씨름하고 있었다.
“언니 사랑해라고 하면 도와줌.”
네티가 그런 말을 꺼내자마자, 두 동생이 동시에 대답했다.
“꺼져.”
“좆까.”
킥, 네티는 자매들의 독립성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계속 구경만 했다.
그다지 재밌는 볼거리는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해진 용량의 두 배가 넘는 내용물을 채우라는 한국 스폰서분들의 명령부터가 재미없었으니까.
뭐, 공식 용량보다 많이 담기는 강점을 홍보하기 위해서라나?
저러다 터지면 어쩌려고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스폰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아직까지는.
거기까지 생각한 네티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한때 목줄이 걸려있었던 희생양의 목.
형부가 목줄을 풀어줬지만, 진정한 자유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 줄을 묶었던 목장 주인들이 아직 살아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올림피아를 끝으로, 그 주인들도 끝장나리라.
그러기 위한 올림피아였고, 그러기 위한 학교생활이었다.
하지만, 과연 모든 게 언니의 계획대로 돌아갈까?
언니의 계획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완벽한 계획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뿐.
당장 드레이테리얼이 그랬고, 시카고가 그랬다.
언니와 형부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선을 탔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 도박에서 승리했지만, 한국에서도 그럴까.
‘도박판에서 언제나 이길 수는 없는 법이고, 누군가는 최악을 대비해야 하는 법.’
네티는 드레이테리얼에서 성녀를 대신해 몸을 던진 언니를 떠올린 뒤, 동생들을 바라봤다.
엄마와 할머니를 만난 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시리, 일본에 다녀온 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핏속에 숨겨진 힘을 수련 중인 시스.
두 사람에 비해 그녀는 뭐 특별히 잘난 게 없었다.
몰래몰래 코르부스에게 가르침을 청해 무술과 마법 양면에서 눈에 띄게 성장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기껏해야 범재와 천재 사이 어딘가.
그건 한 명 한 명이 괴물 같은 형부의 일행 중에서 그녀가 가장 무능하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네티는 좌절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최악에 대비해야 하고, 아무리 무능한 자라도 남을 위해 죽을 수 있으므로.
그래, 죽음. 그녀는 마지막으로 짐가방의 태극기를 보며 각오했다.
이번 한국행에서 언니와 형부가 도박에서 실패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판돈으로 사용할 수 있기를.
다른 자매들이나 팔선녀가 아닌, 자신이—
leise flehen meine Lieder—
그때, 네티의 핸드폰이 조금 특이한 벨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자 잔뜩 분위기를 잡고 있던 네티는 부랴부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형부였다.
“형부?”
[응, 처제, 잠깐 할 말이 있는데….]대화는 길지 않았다. 네티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매들을 향해 말했다.
“언니랑 형부가 할 말 있다고 모이래.”
그 말을 듣자마자 막내는 짐가방을 뻥 차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시리는 좀 묘한 눈으로 네티를 바라봤다.
“언니, 설마 형부 벨소리를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로 해놓은 거야?”
“….”
“와… 이 미친년, 노골적인 것 좀 보게.”
“다, 닥쳐! 이게 언니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그냥 슈베르트 좋아해서 넣은 거야!”
“…그럼 다른 사람 벨소리 바꾼 거 있어?”
네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대뜸 걸음을 돌려 방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두다다다-문밖으로 발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시리는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하, 진짜… 어디로 모이는 건진 알려주고 가야지.”
***
다행히 자매들은 별문제 없이 교직원 휴게실로 모였다.
휴게실에는 형부와 언니, 그리고 성녀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녀님이 성난 목소리로 형부와 언니를 번갈아 괴롭히고 있었다.
“아, 진짜, 약속했잖… 안녕, 동생들?”
자매들이 들어오자마자 싹 입을 씻는 걸 보아하니, 아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모양.
네티는 물론이고, 다른 두 동생들 또한 살짝 긴장했다.
“좀 허황된 이야기 같겠지만, 세 사람 모두,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좋겠어. 알겠지?”
그리고 이어진 여명의 말은 자매들의 상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떨어진 별과 신명, 그리고 그녀들의 진짜 정체.
기나긴 이야기가 끝난 직후, 방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네티였다.
“형부의 원래 이름이랑… 우리 이름이 이상한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어요?”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 그럼 이름 찾기 쉽게 그렇게 지었나 보네요.”
그렇게 말한 네티는 슬쩍, 성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었던 성녀님 이름도…”
“뭐? 내 이름이 어때서? 내 풀네임 알아?!”
“아니, 풀네임은 모르지만, 마지막 이름만 봐도 솔직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성녀님 이름이 가장….”
그러자 성녀가 벌떡 일어나 여명을 가리켰다.
“야! 아무리 그래도 쇠똥구리가 더 이상하지!”
“….”
졸지에 가장 이상한 이름이 된 여명은 크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아무튼, 이름에 관한 건….”
“아무튼이라니! 여명, 너도 내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응? 여기서 내 풀네임 아는 건 너랑 세티뿐이니까, 말해봐!”
“….”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리고 슬쩍 일행들을 모두 훑은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모두 소중하다고 생각해.”
“저흰 부모님이 정해준 이름 아닌데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막내의 한마디.
네티는 동생을 말리긴커녕 거기에 한마디를 더했다.
“…형부, 설마, 쇠똥구리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인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당황하는 여명을 구해준 건 세티였다. 그녀는 쿵! 커다란 서류 뭉치를 책상에 올려두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땐 전부 오십보백보니까, 그만 싸워.”
“에이, 그래도 시스가 제일 이쁘… 켁!”
그새를 못 참은 막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세티가 서류를 던져 그녀의 입을 맞췄다.
그걸 본 성녀와 다른 동생들이 조용해졌고, 세티는 그제야 천천히 서류를 나눠주며 말했다.
“다들 읽어봐. 혹시 느낌이 오는 이름이나 단어가 있으면 말하고.”
“…이게 뭔데요?”
막내가 입술을 문지르며 물었다. 세티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불사의 왕이 기록한 떨어진 별들의 명단과 이야기를 번역한 거야.”
“….”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자매들이 서류를 보며 꿀꺽 침을 삼키는 가운데, 성녀가 물었다.
“나는 왜? 난 저번에도 읽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난 떨어진 잡신 따위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너도 떨어진 별인 거 같아서, 라고 말할 수 없던 세티는 곧바로 여명에게 눈짓했다. 여명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게… 음, 우리 중에 가장 신성을 잘 쓰는 게 너잖아. 그러니까 혹시 이상한 게 있나 찾아봐 줘.”
“…맨입으로?”
“….”
“다섯 신 교단의 성녀에게 공짜로, 이런 이단적이고 사악한 책을 읽게 하시겠다?”
이번에는 이렇게 나오는 건가. 여명은 성녀의 볼을 꼬집고 싶다는 생각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줘?”
“물론 해줄 수 있지. 근데, 지금은 안 돼. 왜 인지는… 너랑 세티가 더 잘 알… 아얏!”
여명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주욱-꼬집었다. 한쪽도 아니고 양쪽 전부.
결국, 성녀는 양 볼이 새빨개진 뒤에야 투덜거리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가벼운 침묵.
마법학부장 가단이 번역해 준 책의 분량은 꽤 많았고, 교직원 휴게실에는 오랫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이윽고, 가장 늦은 막내마저 번역본을 모두 읽은 직후.
여명이 물었다.
“뭔가 느낀 사람?”
그러자 성녀는 물론이고, 자매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아예 찾은 게 없진 않았다.
“뭔가 느끼진 못했는데요. 그래도 비슷한 이름들은 찾았어요.”
네티는 슬쩍, 번역본의 중간을 펼치며 말했다. 케프리, 여명의 신명이 적힌 페이지였다.
그걸 본 여명이 물었다.
“이집트 신들의 이름?”
“네, 여기, 세트랑 네프티스, 오시리스, 이시스요. 세트는 세티 언니랑 비슷하고, 오시리스는 시리랑, 이시스는 그냥 막내 이름 그 자체잖아요? 조금 다르긴 해도 네프티스란 이름도 제 이름이랑 비슷하고.”
그가 이전에 읽고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던 이름들이었다. 여명은 살짝 기대를 품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느꼈다?”
“네, 직접 읊어도 딱히 다른 느낌은 못 받았어요.”
당연하지만, 실망은 없었다. 당장 여명부터가 케프리란 이름을 보고도 아무것도 못 느끼지 않았나.
단번에 이름을 찾고 각성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걸 아는 것일까, 네티 또한 실망하지 않고 물었다.
“이거 말고 신명을 찾을 다른 방법은 없나요?”
“물론, 더 준비한 게 있지.”
그렇게 말한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 뒤편에 있는 커다란 상자를 들어 쿵!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건…?”
네티가 묻자마자, 여명은 상자를 열었다.
머리가 없는 작은 이집트식 조각과 청금석, 피라미드가 그려진 이집트산 캔맥주와 말린 대추야자 그리고 작은 금덩이까지.
참으로 뜬금없는 조합을 본 네티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여명이 말했다.
“전통 이집트 제사 물품. 출처, 다큐멘터리.”
“제사요? 무슨 제사요?”
질문의 대답은 여명이 아닌 성녀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새하얀 그릇 위에 상자 속 물건들을 조심스레 올리며 대답했다.
“너희 모두 방금 본 이름의 신들에게 제를 올릴 거야. 누구 씨랑 다르게 아주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누구 씨’가 누군지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녀님이 슬쩍 형부를 째려봤으니까.
아무튼, 제사를 준비한 성녀는 자매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자, 이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그러자 가장 먼저 세티가 나섰다.
그녀가 조심스레 준비된 제단 앞에 서자, 성녀는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하게 이집트식 제물이 담긴 그릇을 세티에게 건넸다.
“자세가 흐트러져도 괜찮으니까. 진심으로 신의 이름을 불러. 알았지?”
그릇을 받아 든 세티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곧 성녀가 그녀를 이끌고 탁자 위에 준비된 제단으로 안내했다. 세티는 제물을 바친 뒤 성녀와 함께 천천히 기도를 올렸다.
이집트 다큐와 똑같지는 않았지만, 다큐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건한 제례(祭禮).
하지만 기도를 시작하고 3분이 지나도록, 어떠한 신성도 제사에 응답하지 않았다.
“…실패네.”
성녀는 살짝 풀이 죽었지만, 제사를 멈추진 않았다. 아직 자매들이 셋이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
네티, 시리, 시스. 세 사람이 차례대로 세티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길 한참.
안타깝게도, 자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제사가 문제인가?”
혹시나 싶어 성녀 혼자 제단 앞에서 기도에 들어가자, 곧바로 다섯 신의 빛이 그녀의 이마에 깃들었다.
이집트식 제물로도 연결되는 걸 보니, 다섯 신이 어지간히도 성녀를 총애하는 모양.
뭐 어쨌거나, 제사도 문제가 아니란 걸 확인한 일행은 모두 아쉬움을 삼켰다.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으로서는.”
“….”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 내 경우처럼 너희도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당장은 이런 게 있다는 걸 아는 것에 만족하자.”
여명이 직접 자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하자, 자매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처 몰랐지만, 그녀들은 여명과 같은 신화 속 존재라는 우연, 혹은 운명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고 있었다.
“아직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우선은 올림피아에 집중….”
그때, 기도를 끝낸 성녀가 벌떡 일어났다.
“여명! 세티!”
뭐가 그리 신난 건지, 그녀는 방정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녹색 신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어!”
“…계시?”
설마 신명에 대한 힌트를 얻은 걸까? 여명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순간.
성녀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의미로 여명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신명을 찾고 싶으면, 오늘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대!”
“….”
“약속은 선량한 자들의 미덕일지니! 아직 호텔 예약 남아있어! 당장 가자!”
약속이 뭔지 모르는 자매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여명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세티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
세티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