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33)
을 위한 세계는 없다-533화(533/817)
EP.533 아이들을 위한 경쟁은 없다 (5)
* * *
***
여명은 정체 모를 마법이 감각을 왜곡하는 걸 바로 간파했다.
처음이면 모를까,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은 덕분이었다.
차원문의 틈새에서 새 머리의 거인을 만났던 순간, 혹은 아야톨라의 꿈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꿈을 훔쳐보던 순간.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감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장 먼저 촉각이 사라지고, 시각이 빙빙 돌고, 청각이 비틀린다. 마치, 물살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그러나 여명은 나뭇잎이 아니었고, 육체 또한 그때와 달랐다. 환골탈태한 육체는 곧바로 뒤틀린 감각을 붙잡았다.
이미 인간을 벗어난 신경계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순수한 마나가 동시에 움직이며 뒤틀린 감각을 교정했다.
물론, 마나로 자신의 감각을 두들기고, 뭉개는 감각은 빈말로도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찰나의 순간 속에서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대로-깨어나지 않았다.
정상으로 돌아온 그의 감각이 다른 무언가를 잡아낸 까닭이었다.
‘세티?’
여명은 그녀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억지로 감각을 돌렸다.
이게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예리하게 곤두선 여명의 감각은 자신의 환상을 넘어 세티의 환상으로 뛰어들었다.
세티와 이미 많은 걸 공유한 탓일까. 여명은 너무나 부드럽게 그녀의 환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그러나 여전히 난잡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한 번 해본 일은 두 번도 가능한 법.
여명의 육체는 조금 전보다 간단하게 감각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후각, 촉각, 청각, 그리고 정신병 테스트처럼 요란한 색으로 물들었던 시야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티의 환상 속에서 처음 그를 마주한 건….
[????]놀란 표정의 새 머리 거인이었다.
거대한 황금 왕좌 위에 앉은 거인은 예전에 봤던 새 머리 거인과는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한쪽 눈구멍이 텅 빈 애꾸눈이었고, 머리 위에 기다란 이집트식 왕관을 썼으며, 무엇보다 표정이 풍부했다.
부리를 쩍 벌리고 여명을 바라보는 얼굴이 얼마나 리얼한지, 꼭, 다큐멘터리 속 진짜 매를 보는 것 같았다.
“….”
이런 게 왜 세티의 환상 속에 있지? 아니, 그보다 왜 성녀의 눈 속에 이런 마법이 숨겨져 있던 거야?
여명이 거인을 보며 의문을 삼키는 가운데, 거인이 말했다.
[넌 뭐지? 어떻게 여기 들어온 것이냐?]‘그쪽이야말로 대체 뭡니까? 어떻게 이런 환상을….’
대답하려던 여명은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 머리의 거인이 대답했다.
[내 이름은 □□□다.]‘….’
[못 알아듣는군. 그러면 외부인이란 뜻일 터… 이 영광스러운 경쟁에 어떻게 외부인, 그것도 남자가 끼어든 거지?]‘영광스러운… 뭐요?’
[피비린내 나는 경쟁, 시련의 극복, 열등감의 해소, 우정의 완성. 이것이 영광이 아니라면 무엇이 영광이겠는가?]‘….’
[그리고 자꾸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라. 내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이니.]애꾸눈의 새 머리는 하나 남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그를 노려봤다.
딱히 두려운 건 아니었으나,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문뜩, 새 머리 거인이 앉아있는 황금 옥좌에서 청금석 쇠똥구리 장식을 발견하고 뭔가를 떠올렸다.
이집트 신화.
여명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인천의 쇠똥구리라고 합니다.’
[쇠똥구리? 아주 멋진 이름이군.]‘….’
멋지다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라서 그런 걸까, 여명은 살짝 울컥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외람되지만, 직접적으로 묻겠습니다. 혹시 이집트 신화의 신이십니까?’
여명이 황금 옥좌를 보며 묻자, 새 머리의 눈매가 씰룩거렸다.
[옥좌를 보고 알아챈 것인가? 이름도 모르는 자가 어찌… 혹시 파라오의 핏줄인가?]‘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추락한 이집트의 신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새 머리의 표정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우리를 찾았다… 희망을 깨서 미안하지만, 난 너를 도울 수는 없다.]‘예?’
[고향의 후손들은 우리를 빨갱이들에게 팔아먹었고, 운명은 우리를 속박했다.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내린 벌이었지.]‘…?’
[무슨 기적으로 네가 이 영광의 순간에 끼어든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 떠나거라. 그리고 오늘 일은 전부 잊어라. 운명은 잔혹한….]그때, 왕좌 앞 허공이 쩌억-갈라지며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아, 드디어…!]새 머리와 여명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영상을 확인했다.
오래된 브라운관 TV처럼 화질이 나쁜 영상은 가면을 쓴 어떤 소녀를 비추고 있었다.
새 머리와 반대로 눈구멍이 뚫린 매 가면.
여명은 그녀의 몸매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챘다. 저 도담한 몸매는 분명, 성녀가 틀림없-
[쉿!]새 머리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아주아주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여명은 무어라 따지지 않고 조용히 영상을 바라봤다.
영상 속 성녀는 아카데미 복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어찌나 다급한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여명이 의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그녀는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성녀가 꽉 닫힌 문을 붙잡았다. 새 머리 거인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성녀는 문을 열었다.
학생 대신 햇빛으로 가득한 교실 안에는 단 한 명의 소녀만이 서 있었다.
비단 같은 검은 생머리 아래, 익숙한 검은 개 가면을 쓴 소녀.
그녀, 세티는 문을 연 성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햇빛을 등진 그녀의 얼굴로 음영이 드리우고, 성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면을 썼음에도 서로를 알아본 듯, 두 소녀는 천천히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이윽고, 두 사람이 텅 빈 교실에서 마주한 순간.
[시작은 뭐지? 기습? 견제기? 아니면 시작부터 필살기?]성녀와 세티가 동시에 가면을 벗고, 새 머리의 거인이 주먹을 꽉 쥐는 소리가 여명의 귀를 울렸다.
하지만 성녀는 공격 대신 입을 열었다.
“뭐야, 왜 혼자 있어?”
영상을 보던 새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셋이서 하기로 했잖아!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영상 너머 세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고민하다가, 꿈을 꾸는 것처럼 멍하니 말했다.
“여명은 여기 없어.”
“뭐? 여명이 안 온 거였어?!”
“아니, 그게 아니….”
여명이 이대로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건 말건, 성녀는 세티의 손을 와락 붙잡고 말했다.
“뭐 하고 있어? 당장 잡으러 가자!”
“….”
“분명히 귀쟁이랑… 아니, 그 히틀러랑 있는 거야!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매일 여명이 혼내도 독일 노래 부르는 이유가 뭐겠어? 어?! 이 엉큼한 콧수염 같으니….”
세티는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면서도 성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성녀가 그녀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교실을 벗어나는 가운데, 세티가 말했다.
“성녀, 그거 알아?”
“뭘?”
“사실, 나는 오랫동안 널 싫어했어.”
“….”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질투했어.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 가족을 가지고도… 나를 친구라고 불러줄 수 있는 그 선량함이 너무 찬란해서. 그래서, 질투했어.”
성녀는 걸음을 멈추고 세티를 돌아봤다. 세티는 서글프면서도 후련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미안해. 이런 곳에서 밖에 진심을 말할 수 없는 나라서.”
“….”
“그리고 고마워. 이런 나를 친구로 여겨줘서.”
여명은 세티의 고백이 가감 없는 진실임을, 그리고 성녀 또한 그것을 눈치챘음을 느꼈다.
짧은 침묵 후, 성녀가 말했다.
“알아.”
“….”
“질투했던 것도, 가끔 날 미워했던 것도 알아.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나 싫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거든.”
여러 의미가 담긴 말.
여명의 옆에 앉은 새 머리는 마치 해석이라도 하듯 ‘저 아이가 혼혈이란 이유로 얼마나 많은 미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라고 덧붙였다.
혼혈 성녀. 여명이 새삼 그 단어를 떠올리는 사이, 성녀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간직할게. 내가 좋아하는 세티는 그런 사람이니까. 서툴면서도, 한 번 감정을 쏟으면 멈추지 않는 사람.”
“성녀….”
“그러니 앞으로 서로에게 더 잘해주자. 후회도, 슬픔도 없이. 우리는 이제 친구 이상이잖아?”
거기까지 말한 성녀는 환하게 웃었다. 세티 또한 웃었고 두 개의 미소가 서로를 비췄다.
[음, 피비린내나는 전투는 없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군.]그리고 그 미소를 본 새 머리가 뭔가를 기대하듯 숨을 참은 순간.
성녀가 갑자기 모든 기대를 박살 냈다.
“음, 잠깐, 세티. 그래도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가자.”
“…으, 응?”
“난 사실 여자끼리 하는 건 별로 흥미 없어. 저번에 따로 찾아봤는데, 나랑은 안 맞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둘만 하면 여명이 질투할 거 같기도 하고… 미안.”
“….”
“크흠, 그러니까! 일단 지금 이 분위기는 유지한 상태로… 여명 찾아서 셋이서 하자. 어때? 좋지?”
아니, 지금 이 분위기가 뭔데? 놀란 여명은 세티와 새 머리를 번갈아 확인했다. 세티는 이마를 짚었고, 새 머리는… 가관이었다.
부리를 쫘악 벌린 채 경악하는 표정이라니.
[…????] [뭐임?] [영광은 어디 갔지? 아니, 그보다 우리 이름은? 어째서 둘 다 우리의 이름을 밝히지 못-]당황 속에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새 머리는 뭔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그렇군! 여명은 사람 이름이었어! 누구지? 설마 남자인가?]“….”
장인어른 몰래 결혼한 사위의 마음이 이럴까?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여명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새 머리가 휙 고개를 돌려 여명을 노려봤다.
[너.]‘예.’
[네가 여명이군.]아니라고 둘러대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새 머리는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으니까.
[천여명… 넌 뭐냐? 아니, 그보다 싸움터가 아닌 곳에서 어떻게 그녀가 성녀의 눈을 볼 수 있었지?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지? 설마 그가 죽은 것인가?]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앞에서, 여명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저기, 대답해 드릴 테니 질문은 천천히….’
새 머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와 성녀는 처녀로 죽을 운명이었다.]‘…?’
[전대 성녀와 마찬가지로, 후대를 남길 수 없도록. 둘 다 여자로 빚어졌고, 평생 짝을 찾을 수 없도록 운명이 둘을 강제했다.]‘….’
[그러니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대체 누구이기에 이 끔찍한 운명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끌어올린 것이냐?]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의 아이들이란 단어 속에서 깨달은 사실 때문에.
눈앞의 새 머리는 세티의 환상 속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성녀의 심상 속 존재였다.
그래, 성녀 또한 떨어진 별이었다. 희생양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거기다 성녀의 심상 속에 있던 이 새 머리는 세티가 그녀의 눈을 볼 때를 위해 특별히 뭔가를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하필 그가 끼어들어서 일이 꼬이긴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새 머리와 눈을 마주했다.
‘제가 천여명 맞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케프리의 축복받은 화신입니다.’
[…!]케프리.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새 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쭉 내밀어 여명을 살폈다.
은은한 달빛처럼 빛나는 매의 눈이 여명의 위아래를 훑기를 잠시.
새 머리는 감탄과 찬탄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쇠똥구리. 아, 그렇게 된 거였군.]‘….’
뭔가를 알아낸 것인지, 그는 부리를 벌리고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웃던 새 머리가 딱! 소리 나게 부리를 닫았다. 코르부스도 그렇고, 조류 특유의 제스처인 듯했다.
아무튼, 새 머리는 품에서 주사위를 꺼내며 말했다.
[물론, 대답해줄 수 있다.]새 머리는 그대로 주사위를 던지려 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주사위를 굴려야 하는 겁니까?’
[그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그렇다면… 굳이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 어째서?]‘그건 제가 아닌, 성녀를 위한 주사위잖습니까.’
[….]새 머리는 주사위를 든 손을 멈추고 여명을 빤히 내려다봤다. 새의 표정이라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사람이라면 요놈 봐라? 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좋다. 운명을 거스른 이상 언젠가 너도 자연히 알게 될 터. 이 주사위는 더 중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겠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고개 숙여 부탁하지. 나를 위해 시간을 써주겠나?]‘시간을 써 달라는 건…?’
[네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성녀의 눈을 보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다오.]‘….’
앞의 두 개는 괜찮았지만, 마지막이 문제였다. 셋이서 한 침대에 있다가 성녀가 복상사할 뻔했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셋이서… 뭐?]아 맞다. 생각을 읽을 수 있으셨지.
[대체 성녀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순수한 아이가 어쩌다가??]‘아니, 제가 한 건 별로 없는데요….’
여명은 그런 변명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새 머리는 여명의 변명을 받아들였다. 물론, 성녀가 먼저 셋이서 하자고 꼬드긴 사실은 끝끝내 믿지 못했지만.
***
환상 속에서 여덟 시간, 현실에서 네 시간 정도 지난 시점.
세티와 여명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과 동시에 성녀도 깨어났다.
어째서인지, 성녀와 세티는 환상 속에서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조용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거 무효야! 무효!! 다시 해! 다시!! 아, 옷 입지 말라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성녀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긴 했지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명은 올림피아 본선이 개최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