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34)
을 위한 세계는 없다-534화(534/817)
EP.534 아이들을 위한 경쟁은 없다 (6)
* * *
***
지구인들이 제국이라 부르는 땅의 남부.
두꺼운 여행용 로브로 몸과 얼굴을 가린 한 여행자가 작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여행자의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여자인듯했는데, 마을 사람 중 누구 하나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요 몇 년간 마을로 쏟아지는 지구 문물과 외지인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여자의 로브 아래 힐끔힐끔 보이는 권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여행자가 마을의 유일한 잡화점 겸 식당… 아니, ‘월마켓’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인장 말로는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잡화점의 이름에서 따온 거라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런 이름보다는 주인장이 가끔 얻어오는 지구 상품들에 더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뭐, 아무튼.
여행객이 월마켓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장의 힘찬 인사가 월마켓을 울렸다.
“어서 오십쇼! 지구식 잡화점 월마켓입니다!”
“….”
여행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월마켓 내부를 살펴봤다.
낡은 식탁을 중심으로, 아마 지구에서 주워 온 것 같은 플라스틱 진열대가 죽 늘어선 모습.
진열대 위의 상품 중 대부분은 아샤의 상품들이었지만, 겉모습 자체는 지구의 편의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쇼핑?”
그리고 주인장이 아주 싹싹했다. 여행자는 로브를 벗지 않은 채 대답했다.
“둘 다 하죠. 여기 음식 중 가장 맛있는 게 뭐죠?”
“루스벨트 스튜. 지구에서 특별히 공수한 고기 통조림으로 만든 스튜죠. 저희 아내가 가장 잘 만드는 요립니다. 제미니 시티에서 주방 일을 했었거든요.”
“고기 통조림… 혹시, 스팸?”
“맛과 보관성을 모두 잡은 위대한 음식이죠.”
“아, 예… 그럼 그걸로 주세요. 준비되는 동안 물건 좀 둘러볼 테니.”
“예, 알겠습니다. 여보! 여기 루스벨트 스튜 하나!”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여행객은 천천히 진열대의 물건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낡은 지구산 군용 캠프, 말린 고기와 통조림, 그리고 번개탄까지.
누가 봐도 야영을 위한 상품을 가득 담은 여행객은 주인장에게 달러를 내밀었다.
그제야 여행객이 지구인인 걸 눈치챈 주인장은 놀라면서도 순순히 값을 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장의 아내가 루스벨트 스튜를 가지고 나왔다.
대체 왜 이름에 루스벨트가 들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자와 스팸이 가득 들어간 스튜였다.
“아까 계산하면서 음식값도 같이 치렀습니다. 맛있게 드시지요.”
그렇게 말한 주인장은 그대로 식탁에 스튜를 내려놓고 계산대로 돌아갔다. 여행객은 여전히 후드를 벗지 않은 채 천천히 스튜를 떠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스튜 국물 위에 떠 있던 스팸 기름이 그릇 아래로 가라앉을 때쯤.
옆 식탁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군.”
여행자는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탁, 수저를 떨어트렸다.
깔끔하게 정리한 콧수염과 부리부리한 눈동자.
아샤의 복장을 입고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브라우닝.”
미국을 대표하는 3대 초인이자, 10강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강자.
군복 대신 평범한 아샤 농부의 옷을 입은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인사는 됐어. 모리네. 피차 이런 곳에서 만날지 몰랐던 것 같으니.”
“….”
푸른 쥐의 사장이자 성녀의 어머니, 모리네는 숨을 삼킨 뒤 물었다.
“…날 추적한 거야?”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군.”
브라우닝은 고풍스럽게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면 서로 진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지 않겠나?”
모리네는 순순히 후드를 벗었다. 기다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브라우닝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변장도 풀고.”
“….”
모리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감히 10강의 제안을 거부할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곧이어, 사아아-마나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환상이 사라졌다.
그렇게 드러난 모리네의 외모는 과연 성녀의 어머니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속눈썹, 그리고 정체불명의 마나가 느껴지는 푸른 눈.
소련의 인공 혈통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혼혈의 외모였다.
“만족했어?”
모리네가 입술을 씹으며 말하자, 브라우닝이 고개를 저었다.
“저열한 의도는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군. 그저 내가 얼굴을 공개한 만큼, 너도 얼굴을 공개하길 바랐을 뿐이다.”
“…정말로 그거뿐?”
“겸사겸사, 성물지기 취향도 좀 보고.”
“….”
남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모리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브라우닝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서로 얼굴도 봤으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모리네, 변경백은 이 마을 주변에 있나?”
“….”
모리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그녀 몸속의 근육과 심장은 그렇지 못했다. 모리네가 무언가 억누르는 걸 파악한 브라우닝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주변에 있군… 은거를 풀고 세상에 나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달깍, 찻잔을 내려놓은 브라우닝은 모리네가 걸어온 마을 방향을 바라봤다.
“이유가 뭐지? 이제와서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대답할 이유가 없어.”
“아니, 대답해야 할 거다. 네 대답에 따라, 내가 변경백과 싸워야 할 테니까.”
“…뭐?”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라. 난 군인이고, 빌어먹을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의무가 있다. 특히 올림피아 기간에는 더더욱.”
무시무시한 내용과 달리, 브라우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전쟁이라니.”
모리네가 슬쩍 말끝을 흐리자, 브라우닝이 눈매를 모았다.
“변경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자칫하면 냉전 이후 찾아온 기나긴 평화기를 끝장낼 수도 있는 상징. 아샤 독립주의자들이 변경백이 움직이는 걸 눈치채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지구인들은 또 어떻고?”
“….”
“대중은 몰라도, 폭주하는 초인의 무서움을 모르는 고위층은 없다. 데메론드와 주가시빌리들이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보여줬으니까. 댐을 파괴하고, 원전을 공격하고… 칠레 때처럼 정부 중요 인사들을 모조리 참살한다면? 심지어 그는 데메론드보다 더 강하지.”
“…그건 당신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모리네가 반박하자, 브라우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지. 하지만 내게는 지켜야 할 조국과 가족이 있다. 사람들이 내 꿈과 욕망 중 무엇을 믿건 간에, 지킬 게 있는 초인에게는 한계와 약점이 있다. 데메론드가 엘프들을 희생할 수 없어서 결국 복수를 멈췄던 것처럼… 하지만 변경백은 어떻지?”
“잃을 게 없다고? 그래서 그분이 학살을 저지를 거라고? 정말 그렇게 믿어?”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게 믿는 놈들이 있을 거다. 그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커다란 빨간 버튼이니까. 그동안 스스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거기까지 말한 브라우닝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두 사람을 힐끗거리는 잡화점 주인장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질서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
모리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 때문에 3차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 세계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소련의 붕괴와 중공의 실종으로 인한 두 차례의 경제 위기가 남긴 흉터는 여전히 세계 경제에 남아 있었고, 중동이나 발칸 반도 같은 화약고들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며 인도의 초인 군벌들은 하루가 멀다고 내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굴복한 제국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북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하고 있으며, 들끓는 반 지구 정서와 그 사이를 파고든 종말 교단과 독립주의자들이 여전히 암약하고 있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 변경백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전쟁을 불러올 불씨가 될 수 있었다. 모리네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변경백께서는 그런 의도로 움직이신 게 아니야.”
모리네는 스튜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내 대답에 따라 변경백과 싸우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싸울 필요 없어. 그분은… 그저 성묘하러 가시는 거니까.”
“…성묘?”
“그래, 성묘. 이제 곧 전대 성녀님의 기일이고, 변경백께서는 그분의 묘에 꽃을 바치기 위해 성도로 가는 중이야. 그게 전부야.”
“….”
브라우닝은 모리네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려는 눈매를 모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모리네의 위아래를 훑기를 잠시.
그는 차게 식은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낭만적인 이야기군. 이대로 믿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면 믿어. 전부 사실이니까.”
“아니, 전부는 아니겠지. 모리네… 네가 순순히 모든 걸 말해줄 리는 없으니. 아마 숨겨둔 비밀이 더 있겠지?”
“….”
“하지만 캐묻지 않겠다.”
브라우닝은 마지막 남은 찻잔을 비우며 말했다.
“싸우는 것도 보류하도록 하지. 그 대신… 한 가지 더 요구하도록 하겠다. 나를 변경백에게 안내해라.”
“뭐?”
모리네가 되묻기도 전에, 브라우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놀라? 싸우는 건 보류한다고 했잖아. 그냥 온 김에 변경백 얼굴이나 보려고 그런다.”
“….”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는 브라우닝의 뒷모습을 보며, 모리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와 천여명이 함께 아야톨라와 싸웠다는 정보를 떠올리고 있었다.
***
차원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과 상관없이, 한국인들과 함께 개성 공항에 도착한 여명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공항 출입국 관리소를 넘자마자 그를 마주한 광경 때문이었다.
-천여명! 천여명이다!
-민족의 자랑!
-꺄아아악!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바글바글한 사람들.
어림잡아도 공항 바깥까지 빽빽하게 차오른 인파는 흡사 나치의 전당대회가 떠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다른 나라의 올림피아 우승자도 이만한 관심을 받지는 못할 텐데. 정부 측에서 준비한 건가.”
여명의 옆자리에서 기겁하는 세티의 말마따나, 이건 단순히 인기가 좋다 나쁘다, 수준의 레벨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준비한 무대.
누가 이런 무대를 만든 걸까? 홍용완 의원? 아니면 조웅찬? 누가 만든 일이건 간에, 여명은 이 무대에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손을 위로 올리고, 모인 사람들을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마나가 담긴 목소리가 공항을 울리기 무섭게,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답변이 돌아왔다.
찰칵, 찰칵, 카메라가 셔터 소리가 그 사이로 파고들고, 곧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여명에게 몰려들었다.
-천여명 학생! 올림피아에 임하는 각오 한마디 해주시죠!
-우승은 확정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랑스 언론에서 천여명 학생이 귀화할 거라는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죠!
기자들도 매수한 건가? 그 많은 기자 중 누구도 껄끄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언론이 다 그렇지. 여명은 오랜만에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기자들에게 대답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저 천여명, 반드시 올림피아에서 우승해 조국과 연인에게 그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오글거리는 대사였지만, 기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끝내준다며 박수까지 쳐댔다.
물론, 옆에서 듣고 있던 희생양 자매들은 헛구역질을 삼켜야 했지만.
그나마 연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충 10분 정도 기자들과 씨름하고 있자, 양복을 입은 양반들이 나타나 여명과 한국인 일행을 둘러싼 덕분이었다.
그렇게 양복쟁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 밖으로 나가자, 쫙 빠진 리무진 두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 올림피아 때는 그냥 공용 버스를 썼던 거 같은데?
“타시죠. 가장 앞에 있는 차가 천여명님을 모실 겁니다.”
여명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리무진에 올라탔다.
골때리는 건, 세티를 제외한 나머지 본선 진출자들은 모두 한 리무진에 몰려 탔다는 사실이었다.
‘시발, 이거 맞아요?’
창문 너머, 다른 선수들과 함께 리무진에 탄 네티가 얼굴로 욕을 하는 게 보였다.
여명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네티는 한층 더 화난 표정으로 창문을 두들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무진은 깔끔한 엔진음과 함께 공항을 떠났다.
리무진의 창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개성 차원문을 보자 한국에 온 게 실감 났다.
여명과 단둘이 리무진에 탄 세티 또한 같은 마음인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시작부터 염병이네.”
“그러게 말이야.”
“…누가 마련한 무대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지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일 거야. 우리 아빠처럼.”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노골적인 환대와 차별 대우라니. 멍청한 홍용완 의원이나 할법한 짓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범인은 홍용완 의원이 아니었다.
진짜 범인은 리무진 천장에 달린 TV 화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천여명. 국민들의 열렬한 환대는 어떠셨습니까?]안경을 쓴 전형적인 사무원이 그곳에 있었다. 뭐 하는 놈인가 싶어 세티를 바라보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조웅찬 장관의 비서야.’
‘조 장관이 저렇게 멍청한 놈을 비서로 써?’
‘어쩔 수 없어. 그의 사생아거든.’
사생아라니. 별로 알고 싶지 않던 비사를 알게 된 여명은 웃는 낯으로 비서에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제게 의견을 물어봐 주시면 좋겠군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행사는 굳이 여쭙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준비한 게 하나 더 있거든요.]“…하나 더 있다고?”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도로 저편에서 끼이익-! 소리가 울렸다.
쾅! 곧바로 뭔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교통사고라도 난 모양.
한데, 화면 너머 비서놈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이런, 벌써 시작했나 보군요.]“…시작해? 뭘?”
[방금 도로 위에 난 교통사고, 저희 쪽에서 일으킨 겁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의 관광버스를 쓰러트렸습니다. 아마 어린 중상자가 많을 겁니다. 언론이 대기하고 있으니, 바로 가서 구하시지요. 아주 멋진 그림이 될 겁니다.]언론 플레이를 하기 위해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고?
여명이 어이가 없어서 화면 너머 비서를 빤히 바라보자, 비서가 안경을 올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바로 나가셔야 준비한 언론이-]“하, 씨발, 진짜.”
다음 순간, 구수한 욕설이 그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이 개좆만 한 새끼가… 웃으면서 말하니까 진짜로 내가 우스워 보이냐?”
[….]갑자기 튀어나온 인천 뒷골목의 욕설에 놀란 건지, 화면 너머의 녀석은 물론이고 운전사마저 이쪽을 힐끗 바라봤다.
좋아, 연기가 잘 먹히네. 여명은 오랜만에 양아치 연기에 심취했다.
“하… 비행기 타고 와서 힘들어 죽겠는데, 구조는 뭔 씨발. 어? 호텔 방이나 빨리 안내해 줄 것이지.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천여명씨,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좋은 이미지를 위해….]“좋은 이미지는 염병하고 있네. 야 이 씨발년아, 내가 만주에서 구한 인간이 몇인데 이딴 걸로 이미지를 쌓아?”
“아, 생각할수록 빡치네. 니가 올림피아 나가냐? 어? 너 이 새끼 어디 소속이야? 어떤 새끼가 이런 일 벌이라고 싸인해 줬어? 내가 똑바로 못 쉬어서 본선 경기 말아먹으면, 니가 책임질 거냐? 어? 씨발, 책임질 거냐고!”
오랜만에 펼친 양아치 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명과 세티는 창밖으로 보이는 사고 현장의 검은 연기를 외면하지 못했으니까.
“저기, 여명… 너무 그러지 말고, 사람들부터 구하자. 응?”
“아니, 씨발 저 새끼가….”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안 돼?”
세티가 ‘양아치를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를 연기하기 무섭게, 여명은 그에 맞춰 움직였다. 찍-바닥에 침을 뱉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리무진의 문을 열었다.
물론, 나가는 순간까지 연기를 마무리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작은 화면 속 비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너, 이 씹새끼. 얼굴 기억했어.”
그렇게 리무진에서 내린 두 사람이 곧바로 사고 현장을 향해 내달리는 가운데, 세티가 조심스레 이런 말을 꺼냈다.
“여명, 방금 그거… 연기 맞지?”
“당연히 연기지.”
어째서일까, 세티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