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36)
을 위한 세계는 없다-536화(536/817)
EP.536 아이들을 위한 경쟁은 없다 (8)
* * *
***
뜬금없는 만남에 놀랄 법도 하건만, 여명과 장만은 약속을 잡고 만난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상을 차렸다.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마실 걸 꺼내는 걸 본 라쉬크가 ‘소풍 왔냐’ 라고 투덜거렸지만, 기사단장이 슬쩍 바라보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세티 뒤로 도망쳤다.
‘진짜 강자는 귀신같이 알아본다니까.’
아무튼, 라쉬크를 보며 피식 웃은 여명은 그대로 어르신과 대화를 시작했다.
첫 주제는 물론 ‘장만 어르신과 기사단장님이 어쩌다 함께하게 됐는지’ 였다.
장만은 가볍게 대답했다.
“단장께서 수인에게 습격받는 나를 구해주셨다.”
“…?”
다른 곳도 아니고 인천에 수인이?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기 무섭게, 장만이 덧붙였다.
“최근 수인들이 뒷골목에 흘러들었다. 단순히 암시장을 노리고 흘러든 녀석들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곳에 끈이 이어져 있더구나.”
“설마… 정부요?”
“그래, 털 달린 식인귀 놈들 전부 정부의 끄나풀이었다. 내가 요즘 정부에 좀 밉보인 게 있다 보니… 개에게 물린 게지.”
정부에 밉보인 일이라. 그게 뭔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밀수꾼 일을 쉰 장만 어르신에게 이제와서 밀수죄를 따지려는 건 아닐 테고…
최근에 여명에게 구해준 정보. 분명 그게 문제가 된 것이리라.
그래, 정부 핵심 요인들을 뒤지는 게 그리 간단할 리 없었다. 상대는 이 나라를 지배한 비밀 집단이었으니까.
여명은 감사함과 장만 어르신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자책감이 반반씩 담긴 한숨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뭐, 감사할 게 뭐 있나. 굳이 장만이 아니더라도 수인에게 공격받는 사람을 구하는 건 기사의 의무일세.”
“….”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내가 왜 장만을 도왔느냐는 굳이 물을 것도 없네. 한국 정부 같은 거악과 맞서 싸우는 것 또한 기사의 의무니까. 그렇지 않나? 산초?”
단장은 그대로 산초를 바라봤다. 하지만 산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장과 조금 달랐다.
“기사의 의무요? 저는 그냥 장만이 제 영화에 투자해 준다길래 도와주는 겁니다.”
“…부단장, 그 무슨 기사답지 못한 말인가.”
“단장님, 무급 노동도 기사의 예법이 아닙니다. 저 정도 되는 자유 기사가 공짜로 일하는 거 보셨습니까?”
“어허! 진정한 기사는 밥값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법이거늘.”
단장이 눈을 부라렸지만, 산초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누가 봐도 여명의 부담을 풀어주기 위한 말과 대화였고, 그걸 눈치챈 여명은 애써 웃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나중에 산초에게 투자금을 잔뜩 내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여명은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아, 그리고 어르신께 전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전할 말? 내게 말인가? 대체 누가?”
“카를로스가 어르신께 남긴 말입니다.”
카를로스란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장만과 산초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장만 어르신은 사실을 확인하듯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네가 말한 카를로스가 자칭 11강이라고 지껄이는 카를로스 피노체트를 말하는 게냐?”
“네, 그 카를로스입니다.”
“….”
장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짧게 눈을 감고 뭔가를 고민했다.
“유언… 이더냐?”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그를 죽였습니다.”
장만은 뭔가 쓰라린 표정으로 턱을 쓸었고, 산초와 라쉬크는 여명이 카를로스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여명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카를로스의 유언을 전했다.
“그분을 막아줘서 고맙다. 산티아고에는 아직도 비가 내린다.”
유언을 들은 장만은 마치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무거운 침묵.
장만은 정말로 조각상이 된 것처럼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라쉬크가 눈치를 보며 여명이 꺼내놓은 주스를 향해 손을 뻗을 때쯤.
장만이 여명에게 물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 정체에 관해 묻지 않는 것이냐?”
“예.”
“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제게는 장만 어르신은 장만 어르신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말끝을 흐린 여명은 라쉬크에게 주스 대신 물을 건네주며 덧붙였다.
“전설적인 밀수꾼이시잖아요. 당연히 대단한 과거사 하나쯤은 있으실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괜히 물어봤다가 하루 종일 과거 이야기만 들을 것 같아서 안 물어봤습니다.”
과거가 어떻건, 이미 믿고 있다는 뜻이 담긴 말.
그건 가족 사이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장만은 주름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 원, 이렇게 눈치가 빨라서야. 네가 물어보면 옛 자랑을 잔뜩 늘어놓을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못 하게 됐구나.”
그렇게 한껏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중간부터는 세티와 산초가 끼어들어서 앞으로의 계획과 작전, 그리고 통신에 대한 정보를 나눴는데, 장만 어르신의 연락망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정 위치에 설치되는 점자, 아날로그 방식의 전화기와 흔히 삐삐라 불리는 무선 호출기, 심지어는 비둘기를 이용한 전서구까지.
비록 범위가 개성과 한반도 남부에 한정되긴 했지만, 그 안에서만큼은 시크릿 소사이어티나 푸른 쥐와도 견줄만한 연락망이었다.
“옛 인연들이 만들어 준 연락망이다. 네가 복수를 시작한 뒤에 만들기 시작한 거라, 생각보다 큰 쓸모는 없을 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만이 알아낸 정보의 양과 질은 상상 이상이었다.
양치기를 세뇌하고, 홍용완을 쥐어짜 직접 내부 정보를 캐낸 세티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니.
개중에는 심지어 친정부 기자들의 명단과 역으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자들의 명단까지 있었다.
세티는 감탄하며 적극적으로 장만의 연락망 사용법을 배웠다.
물론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고, 예상보다 더 오래 창고에 머물게 된 여명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했다.
휴대용 버너에 구운 팬케이크와 적당히 데운 냉동식품, 그리고 샌드위치.
여태껏 조용히 있던 딜라는 물론이고, 단장과 산초가 워낙 맛있게 먹어줬기에 여명은 생각보다 많은 양을 조리했다.
뭐, 어쨌건 간에.
배부르게 먹고 한껏 긴장이 풀린 라쉬크가 여명에게 이 창고에는 왜 라텍스 침대가 없냐며 한껏 성질을 부릴 때쯤.
시계를 확인한 여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세티, 곧 저녁 기자회견 시간이야. 이제 돌아가자.”
“뭐? 벌써 그렇게 됐어?”
놀란 세티가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여명은 장만과 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모레, 첫 본선 경기가 끝난 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면 따로 알려주세요. 제가 아공간으로….”
그때, 세티가 끼어들었다.
“여명, 나는 잠깐만 더 남아있을게.”
“뭐?”
“중요한 부분이 얼마 안 남아서, 한두 시간만 더 배우고 갈게. 오늘 기자회견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환상을 씌워서 해줘. 부탁할게.”
“…아, 그래? 알겠어. 기자회견은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배우고 와.”
여명은 세티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카데미에서 챙겨온 라쉬크와 딜라의 작업 도구를 창고에 꺼내놓은 그는, 산초가 적은 기다란 ‘필요한 물품 목록’을 챙겨 창고를 떠났다.
쿵!
창고 문이 닫히며 여명이 떠난 자리에는 라쉬크의 투덜거림과 세티가 장만에게 연락망 사용법을 배우는 소리만이 남았-그 순간, 한 소리가 더 추가 되었다.
또각, 또각. 창고 내부에서 들려오는 여성용 신발 소리.
여명과 만나기 싫어한 ‘그녀’의 발소리라는 걸 눈치챈 세티는 고개를 들었다.
곧 발소리와 함께 창고 구석에서 등장한 건, 후줄근한 흰 가운을 걸친 여성이었다.
나이는 대충 서른 살을 조금 넘겼을까. 양팔이 밧줄로 묶인 그녀는 세티를 보곤 미간을 구겼다.
“…다 간 게 아니었네.”
“….”
“그나마 쇠똥이는 없어서 다행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여성은 그대로 여명이 남겨놓은 음식들로 걸어왔다. 세티가 의아한 눈으로 보건 말건, 대뜸 묶인 팔을 들어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딜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사이, 그녀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혐오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삼켰다.
“…이야, 레시피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정작 만든 사람은 다 까먹었는데.”
“….”
마치 여명에게 자신이 레시피를 알려준 듯한 말투. 세티는 슬쩍 미간을 구기며 장만에게 물었다.
“저 사람, 대체 누구죠? 왜 여기에….”
그 순간, 그녀가 세티의 말꼬리를 끊었다.
“나 기억 못 하니? 홍세티.”
“…뭐?”
“정말 기억 못 하나 보네. 잘 생각해 봐. 니 엄마가 날 참 싫어했거든.”
“그게 무슨…?”
“니 엄마. 얼굴하고 운이 전부인 멍청하고 뻔뻔한 여자 말이야. 평생 돈 쓰는 것밖에 몰라서, 온갖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다 못해 기어코 나라한테 다리를 벌리고, 말년에는 너한테도 돈을 뜯으려고 했던 그 쓰레기 창년이 나를… 아얏!”
세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본 산초는 망설임 없이 여성의 뒤통수를 후렸다.
여성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 지르려 하자, 짝! 산초는 아예 그녀의 뺨을 때렸다.
“…여자한테 손찌검을 하다니. 기사의 이름이 울겠네.”
“포로에는 여자도 남자도 없다. 연구소에서 안 죽이고 잡아 온 것 이상의 자비를 베풀 거라 생각지 말도록.”
연구소? 설마 개성 연구소에서 잡혀 온 연구원이란 말인가?
세티는 한 번 더 여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게,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그때, 여성이 세티에게 정답을 말해버렸다.
“천애란.”
“….”
“내 이름, 천애란이라고. 이제 기억나지?”
세티는 그제야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젊은 여자를 미워하는 친엄마가 매일 같이 욕하던 최연소 연구원을.
***
천여명의 기자회견장은 어마어마한 인파로 가득했다.
그것도 한 명 한 명이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로 가득 찬 인파.
‘대통령도 이만한 인기는 없었는데… 전 현직 대통령들이 동시에 질투해도 이상하지 않겠군.’
카메라를 든 중년의 기자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인파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장 사진이 잘 찍히는 맨 앞자리는 빌어먹을 애널써커들의 고정석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생각이었다.
‘천여명, 반드시 네 더러운 본질을 반드시 밝혀주마.’
그는 다른 기자들의 온갖 욕설을 들어가면서 꿋꿋이 앞으로 향했다. 매너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또 언제 이렇게 여명을 찍을 기회가 올지 몰랐으니까.
그래, 그에겐 오늘뿐이었다.
천여명의 더러운 낯짝을 찍고, 그의 표정을 분석하고… 가려진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오늘뿐.
그렇게 천여명이 나올 단상에서 나름대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기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천여명을 기다리고 있자니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빌어먹을 국산 담배 하나만 물면 소원이 없겠는데….’
그렇게 투덜거린 기자가 자리를 빼앗으려는 다른 기자들과 실랑이하길 잠시.
기자회견장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회견 시작까지는 10분도 더 남은 시점이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밥 먹듯 수업을 째는 양아치라더니, 한국에서는 미리 오는 건실 청년 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끝까지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그는 여명이 회견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카메라를 들었다.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그는 조용히 카메라로 여명을 관찰했다.
진짜 중요한 건 수백 장의 사진이 아니라, 중요한 한 장의 사진이었으니까.
아무튼, 그의 카메라에 잡힌 여명은 기자회견장 단상 위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기자들을 마주했다.
녀석은 꽤 멋스러운 자세로 마이크를 잡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 일찍 온 거, 질문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아, 그리고 앞줄에 계신 유명 언론사 기자분들은 회견 끝난 뒤 질문 시간에 하시면 되니까, 지금은 뒤에 계신 분들 질문부터 받겠습니다.”
노골적으로 중소 언론사 기자들의 호의를 사는 말.
애매하게 10분이란 시간 전에 등장한 것도 그렇고, 이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언론 플레이가 아니었다.
‘홍용완… 아니, 그 새끼는 너무 멍청해. 혹시 김관형 장관의 빽을 등에 업고 있는 건가?’
그렇게 중년 기자가 여명이 ‘정부의 끄나풀’이란 확신이 더욱더 커지는 것을 느끼는 찰나.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중소 언론사들은 중소 언론사다운 질문을 쏟아냈다.
-이틀 뒤 필리핀의 폴 포마르 학생과의 본선 경기가 있는데, 어떤 전략을 세우셨습니까?
올림피아 전략을 묻는 멍청이.
-현재 KG 방송에서 천여명 학생과 홍세티 학생의 이야기를 각색한 드라마를 준비한다는데, 남배우 역에는 누구를 생각하시는 중입니까?
이런 장소에서 굳이 드라마 홍보를 하는 등신.
-정말로 홍씨 가문 데릴사위로 들어가 지역구를 물려받으실 겁니까?
그리고 되지도 않는 찌라시를 뿌리는 병신까지.
기레기 삼종 세트가 전부 모인 꼴을 보고 있자니, 중년 기자는 입맛이 썼다.
저 기레기들이 아니라 나한테 질문 기회를 주면… 훨씬 나은 질문을 할 수 있을 텐데.
그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다음 순간, 천여명이 그를 지목했다.
“거기, 삼각대 사이에 있는 기자님? 예, 카메라 들고 계신 분이요.”
설마 자신이 뽑힐 줄 몰랐던 기자는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봤다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걸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다리가 살짝 후들거리는 가운데, 그는 즉흥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그, 천여명 학생의 인기는 정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키운 거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키웠다고요?”
“예, 오늘 추돌 사고는 물론이고, 만주 사태의 활약과 아카데미의 인기 또한 정부의 조작이란 소문인데요. 이에 대해 해명할 것 없으십니까?”
준비된 질문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질문은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기자들은 설마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거나, 노골적으로 웅성거렸다.
-저거… 그 새끼 아냐? 국방부 장관한테 만주 사태를 정부가 일으킨 거냐고 따지던 그 새끼.
-부끄러워서 펜을 접는다더니, 여기는 왜 온 거람?
-이름이… 그래, 박철. 대형 언론사 짤리고 독립 언론사 차린 병신이잖아.
-하여간, 눈치 없는 새끼들은 분위기 조지는데 뭐 있다니까.
-경비병! 저 새끼 끌어내지 않고 뭐해!
여명에게 날 선 질문을 꺼낸 중년 기자, 박철은 동료 기자들의 쑥덕거림에도 굴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어 여명을 똑바로 겨눴다.
‘한 번의 표정, 한 번의 연기, 무엇이라도 좋다. 네 놈이 사기꾼이라는 증거를 내보여라.’
분노할까? 아니면 소문대로 양아치 짓을 할까?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천여명을 노리고, 눈치 빠른 기자들 또한 그의 얼굴을 겨눈 순간.
여명은 하, 사람 좋은 미소를 띄웠다.
“누군가 퍼트린 지 모르겠지만, 참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이 퍼트린 소문이네요.”
“….”
“개인적으로 재밌는 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제 인기는 국민 여러분께서 제 실력을 인정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실력이야 뭐… 이미 충분히 증명된 것 같은데요?”
부드러운 표정, 정석적이면서도 꼽을 주는 대답. 천여명의 화난 표정을 찍으려던 기자들이 실망하는 가운데, 처음 질문을 꺼낸 박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자님, 더 질문하실 거 없으십니까?”
여명이 재차 질문하자, 박철은 그대로 등을 돌려 기자들 사이로 도망쳐 버렸다. 몇몇 기자들이 그의 뒷모습을 비웃었지만, 박철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윽고, 회견장을 벗어난 그는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한 뒤, 카메라를 켰다.
달깍.
그의 카메라, 이 세상에 딱 세 대밖에 없는 ‘진심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 카메라에는 조금 전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의 천여명이 찍혀 있었다.
미소 짓는 거짓 얼굴이 아닌,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대답하는 천여명이.
“뭐지 이 새끼…?”
혹시, 평범한 정부의 개새끼가 아닌 건가? 아니면 설마, 한국의 실험체?
의문을 삼킨 박철은 이제 막 기자회견이 시작되는 회견장을 힐끗 바라본 뒤, 그대로 회견장을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뒤로, 기대와 의문이 담긴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