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37)
을 위한 세계는 없다-537화(537/817)
EP.537 아이들을 위한 경쟁은 없다 (9)
* * *
***
아샤인들은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맹수와 수인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괴수들은 언제나 산 너머에서 온다는 동화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브라우닝은 모리네가 자신을 가까운 산등성이로 안내했을 때 조금 놀랐다.
그리고 산등성이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낡은 모닥불 앞, 목이 잘린 괴수를 의자 삼아 앉은 남자.
이미 구십을 넘어 백을 바라보고 있을 나이의 남자는 세월조차 견뎌낸 듯, 브라우닝보다 아주 조금 더 늙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브라우닝을 놀라게 한 건, 주름 사이에서 번뜩이는 그의 금색 눈동자였다.
‘이거, 너무 닮았는데.’
보통 아들은 엄마를 닮고, 딸은 아빠를 닮지 않나? 그런 실없는 생각과 동시에, 브라우닝은 남자의 반대편에 앉았다.
딱히 인사는 없었다. 그저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렁거리는 마나가 모닥불의 불씨를 집어삼키는 내내,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모리네가 두 마나에 짓눌려 안색이 창백해질 때쯤.
브라우닝이 대뜸 아공간을 열었다.
놀라서 권총에 손을 올린 모리네의 반응과 달리, 브라우닝이 아공간에서 꺼낸 건 싸구려 위스키와 두꺼운 유리잔 세 개였다.
쪼르르-브라우닝은 본인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모리네, 한잔할 텐가?”
“…됐어요. 남편 말고 다른 남자가 주는 술은 안 마시는 주의라.”
모리네는 여전히 권총에서 손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브라우닝은 반대편 남자에게 말했다.
“혹시 그쪽도?”
“아니, 난 마시겠네.”
브라우닝은 피식 웃으며 잔 하나를 더 채워 남자에게 던졌다.
탁! 마나가 가득 담긴 술잔은 안의 술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묵직했다. 아마 일반인이었다면 손목이 나갔을 정도의 묵직함.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가 준 잔으로 입술을 적셨다.
“미국의 맛이군.”
미묘한 평가. 브라우닝은 위스키 향을 맡으며 말했다.
“미국의 맛이 싫으면 프랑스의 맛도 있소만.”
곧이어 브라우닝이 아공간에서 와인병 하나를 꺼내 흔들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사절하지.”
피식 웃은 브라우닝은 와인을 집어넣은 뒤,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본인 한 잔, 상대편에게도 한 잔.
그렇게 두 사람이 묵묵히 잔을 나누길 잠시.
병에 남은 위스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운 시점에서, 브라우닝이 대뜸 마나를 거두며 이런 말을 꺼냈다.
“지금 내 아공간에 있는 무기를 전부 터트리면, 대충 20분간 쏟아지는 무차별 포격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소. 한 번 시작되면 내가 죽어도 계속 이어지는 포격이오.”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모리네는 그를 노려봤다. ‘안 싸우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는 뜻이 담긴 눈빛.
브라우닝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군의 초인 대응팀은, 당신이 핵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변경백 가문의 가전 무술이라고 파악하고 있소. 다른 위상으로 몸을 숨기는 위상 도약 겸 절대 방어… 대응팀의 예측에 따르면, 당신에게는 단발성 핵보다 지속적인 화력 투사가 더 효율적일 거라더군.”
“….”
“까놓고 말해서, 나는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요. 만약 내 공격이 통하면, 우리 군은 내가 뿌린 화력의 몇 배를, 수 시간 동안 당신에게 쏟아낼 작정이고.”
그렇게 말한 브라우닝은 위스키 한 병을 더 꺼내 뽕, 뚜껑을 열었다. 남자는 덤덤히 지적했다.
“군 기밀을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나?”
“안될 건 또 뭐요? 나도 나름 장성이오. 작전 중 목표 변경 권한 정도는 가지고 있소.”
브라우닝은 병나발을 불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쪽이 차원문을 넘는 것도 아니고 성도로 간다는데… 에이, 잔뜩 각오하고 왔다가 괜히 김만 샜네. 여기서 공격해봤자 전쟁의 명분만 주지.”
“….”
“저기, 이 상황을 이용하려고 부리부리 눈을 굴리는 놈만 봐도 그렇지 않소.”
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모리네는 브라우닝과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산등성이 저 멀리,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우를 닮은 괴수 한 마리가 보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모리네가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브라우닝이 대뜸 아공간에서 데저트 이글이라 불리는 대구경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총은커녕 저격총으로도 맞추기 어려운 거리이건만, 그의 무술을 따라 날아간 44 매그넘 탄은 그대로 여우 괴수의 머리통을 터트려 버렸다.
황당한 건, 머리가 날아간 괴수가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쳤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보낸 게 분명한 괴수.
변경백이 힐끗, 멀어지는 괴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음 순간, 달려가던 괴수의 몸이 쩌억-반으로 잘리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모리네가 흠칫 놀라는 가운데, 변경백이 담담히 말했다.
“날 믿나?”
브라우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변경백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바라봤다.
검 손잡이에는 그의 혈통을 상징하는 보석 꿀이 모닥불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 믿소.”
“….”
“내가 떠나자마자 가장 가까운 LA 차원문으로 돌진해 지구로 넘어가면, 학살이 벌어지겠지. 수천이란 숫자가 우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학살이.”
“그러면 어째서?”
“당신은 못 믿지만, 당신 아들이랑 며느리들은 믿으니까.”
그러자 변경백에게서 처음으로 반응이랄 만 한 게 나타났다.
그의 미간이 구겨진 걸 본 브라우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너무 내 말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오만, 만약 성도에서 칼을 뽑고 싶거들랑 올림피아 시즌은 피해주시오. 그쪽 아들과 마찬가지로 내 딸도 참가 중이라서.”
주제에 부탁까지 하냐는 듯한 모리네의 눈빛과 상관없이, 브라우닝은 술 한 병을 더 꺼내 모닥불 앞에 탁! 내려놨다.
“이건 부탁하는 김에 드리는 뇌물이오.”
“….”
“앞으로도 즐거운 여행 되시고, 부디 올림피아와는 엮이지 말아 주시오. 애들 축제를 이용하는 좆같은 인간들은 지금도 차고 넘치니.”
그 말을 끝으로, 브라우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떠나는 그를 따라 주변을 장악했던 마나의 압박이 서서히 사라졌다.
혹시 지금이라도 두 사람이 싸우면 어쩌나, 모리네가 전전긍긍하는 순간.
변경백은 의외의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다.
“며느리‘들’…?”
***
기자회견을 끝낸 여명은 거의 녹초가 되었다. 체력적으로야 별문제 없었지만, 역시 연기가 문제였다.
양아치 연기면 모를까, 국민 영웅 노릇이라니.
기자들에게 가식을 떨 때마다 내면의 뭔가가 뭉텅뭉텅 썰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매일 이런 일을 하는 정치인들에게 존경심이 생길 정도.
앞으로 몇 번이고 이 짓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호텔로 향했다.
한국 정부에서 제공한 호텔은 외국 귀빈들과 차원문을 넘어오는 귀족들을 위한 5성급 호텔이었는데, 호텔을 통째로 올림피아 선수단에게 제공한 상태였다.
보안을 이유로 선수단 숙소는 첫 본선 경기 이후에 공개한다나 뭐라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대놓고 한국인 선수들을 우대하기 위한 꼼수질이었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 달리 얼마 되지 않는 한국인 선수들에게 맨 위층을 통째로 제공하고, 여명에게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VIP룸을 준 게 그 증거였다.
덕분에 로드 하우 출신이 아닌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마저 그를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여명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만한 호텔 VIP룸은 사생활 침해를 당할 일이 거의 없고, 호위들 또한 여명의 눈치를 보느라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니까.
물론, 한 명도 아니고 희생양 자매 전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방해하지 마시오.’ 라는 소리를 해야 하긴 했지만… 여명은 스스로에게 결백했다.
자매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아까, 아래층에서 만난 기자가 저보고 형부랑 그렇고 그런 사이냐고 물어보는 거 있죠?”
방에 도착하고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막내가 여명에게 그런 말을 던졌다.
농담인가 싶어 웃으며 넘어가려 했더니, 다른 자매들도 비슷한 질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프랑스 그랑제콜 참가 팀 코치가 저보고 여자 넷으로 형부 꼬신 거냐고 묻던데요?”
어이가 없다며 투덜거리는 네티와.
“저는… 웬 비서관이 와서 자매 중 누가 가장 총애를 받고 있냐는 질문 정도만 받았어요.”
그 비서관의 안경을 박살 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시리까지.
한국에 도착한 지 고작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이런 지랄이 난다고? 여명은 황당함과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너희도 어엿한 본선 진출자인데, 어이가 없네. 그런 질문한 사람들 이름 알려줘. 내가 직접 가서 따질 테니까.”
그러자 네티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괜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왜 그럴 필요가 없어. 이런 건….”
그때, 막내가 끼어들었다.
“계획에 방해되는 것도 있구, 저희는 익숙해서 괜찮아요.”
“…익숙해?”
“그야, 저희는 저번 올림피아에서 줄줄이 탈락한 실패작들이니까요.”
“….”
“우리 한국인들이 그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지금까지도 정부는 저희한테 기대를 안 한다니까요? 그렇게 정부부터 우릴 찬밥 신세로 취급하니까, 기자건, 외국 코치건 쿡쿡 찔러대는 거죠.”
여명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 지금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건 오직 우승 후보인 천여명과 그의 연인인 세티뿐. 다른 한국인 진출자들은 뉴스에 이름만 올라오는 정도였다.
씁쓸한 깨달음이 혓바닥 위로 퍼지는 순간, 네티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동안 저희도 형부 덕분에 많이 강해져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시리와 막내가 이때다 싶은 듯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기니까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강자의 여유!”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자매들을 보며 여명 또한 웃었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자매들에게 함부로 지껄인 녀석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아까 만났다는 기자랑 코치, 그리고 의원 이름 좀 알려줄래?”
여명이 그렇게 갑질 양아치로 변신할 준비를 하는 사이, 열린 호텔 문 사이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투명 망토의 감각.
“많이 늦었네.”
여명이 허공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마자, 세티가 투명 망토를 벗었다.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세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 입술을 씹었다. 자매들마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바라보는데, 여명이 한 번 더 물었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야?”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말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여명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대신, 쓰게 웃었다.
“그럼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돼. 내가 나중에 직접 들을 테니까.”
“…응.”
이건 또 뭔 대화람? 정실만 알 수 있는 대화인가?
네티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건 말건, 세티는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내려는 듯 뭔가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우리 동생들 다 모인 김에 말해야겠다. 다들 이것 좀 봐줄래?”
세티가 펼친 건 어떤 건물의 설계도였다. 일반적인 설계도가 아니라, 불법으로 증축된 내부와 지하를 모두 포함한 비밀 설계도.
여명이 건축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설계도에 그려진 건물은 마치 커다란 수용시설 같았다.
그것도 사람보다는 동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용시설.
그리고 여명이 이게 뭐냐고 물으려는 순간.
조용히 설계도를 노려보던 네티가 입을 열었다.
“…아, 가축 우리. 엿같은 우리 집.”
“….”
“언니, 여기 복도 기억나? 밤에 철창 바깥으로 발을 뻗으면 전기 자극이 흘렀잖아. 엿 같은 거. 난 아직도 밤에 깨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겠다니까?”
희생양 자매가 자란 곳.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시리가 물었다.
“이 설계도는 어디서… 아니, 왜 가지고 온 거야?”
“당연히 부숴버리기 위해서지.”
“…부순다고? 여기를?”
“응, 완전 설계도가 손에 들어온 이상, 언젠가 반드시 부술 수 있어.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려우니까 일단 모두 설계도를 외우고 있….”
그때, 여명이 끼어들었다.
“내일모레.”
“…으, 응?”
“나랑 네티, 그리고 막내의 본선 경기가 있는 날이야. 알리바이도 있겠다, 그날 가서 태워버리자.”
자매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과 달리, 세티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구소 테러 때문에 경비도 늘어났을 거고, 또….”
“본선 경기 이후에는 서울에 있는 선수단 숙소로 내려가게 될 텐데, 이날보다 습격하기 좋은 날이 올까?”
“….”
여명은 세티를 시작으로 자매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으며 말을 이었다.
“엿 같은 과거를 태워버리는 건 빠를 수록 좋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가자. 내가 옆에 있잖아.”
직후, 자매들의 시선이 호텔 창문으로 향했다.
드넓은 VIP룸에서 자매들이 유일하게 커튼을 친 창문.
멀쩡한 건물로 위장한 가축 우리가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