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48)
을 위한 세계는 없다-548화(548/817)
EP.548 먹물로 쓰인 거짓, 피로 쓰인 사실. (2)
* * *
***
“…여기까지가, 저희가 한국 정부에 복수하려는 이유에요.”
여명과 세티의 과거사는 생각보다 길었다.
가축우리를 불태운 까닭일까, 평소에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내용까지 전부 꺼낸 까닭이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람도, 아예 처음 듣는 사람도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이야기.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
산초와 기사단장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었다.
신념을 가진 이들이 사회의 밑바닥을 보고 실망하는 대신 어떻게든 해결법을 찾는 것처럼, 두 기사는 묵묵히 여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던 성녀와 살로메의 반응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만 어르신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여명은 굳이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 외에 방구석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던 구더기 공주 또한 묘한 눈으로 세티를 바라봤다.
아마 같은 실험실 출신으로서 동질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튼, 마지막으로 박철 기자.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놨다.
“…거짓말.”
“….”
박철은 세티를 정확히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 국가라지만… 뭐? 인공 인간을 만들고 사람을 실험체로 썼다고?”
이어서 여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소부 길드의 노동자들을 살인마에게 먹이로 던져주고… 그 시체를 네크로맨서에게 공급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이다. 전부 거짓말이야.”
여명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박철은 더 크게 소리쳤다.
“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비록 주체민주주의니, 뭐니 하는 반쪽짜리라지만! 그런 짓을 대놓고 벌일 정도로 썩지는 않았다!! 우리의 선배들은 군부와 맞서 싸웠고, 피를 흘려 민주화를 이뤄냈다! 이 나라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
그제야, 여명은 그의 말을 끊었다.
“김일성의 아들, 김만일 전 대통령도 그들과 한패입니다. 그가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도 전부 계획된 거죠.”
“….”
“군부 독재도, 민주화도, 전부… 모조리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에 불과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일말의 거짓도 없는, 담백한 진실이었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때때로, 진실은 그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법. 박철은 진실에 찔린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세티와 여명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길 잠시.
박철은 대뜸 고개를 들고 물었다.
“증거… 증거는 있나?”
“저희가 직접 보고 겪은 일에 증거가 필요합니까?”
“필요하냐고? 당연히 필요하지!”
그는 여명을 똑바로 보며 소리쳤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순국선열들, 자유를 위해 기꺼이 거리로 나왔던 민주열사들이 몇 명인데!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이 모두 애꿎은 곳에 쓰였다는 걸 증명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증거가 필요한 게 당연한 거 아니냐?!”
“….”
‘민주열사’를 입에 올리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떨린 건 단순히 우연일까? 여명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겐 이 나라 대중을 구할 이유도, 의무도 없습니다.”
“…뭐?”
“이 나라가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면, 예, 대중은 진실을 알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게 제 복수와 무슨 상관입니까?”
“….”
“내가 바라는 건 정의가 아니라 보복입니다. 그런데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대중을 설득하라고요? 그게 복수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박철은 화를 내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내뱉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성녀와 세티가 궁금한 듯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 도움도 못 되지.”
“….”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회는 너희에게 그런 걸 요구할 자격이 없구나. 기자인 나는 특히 더 그렇지.”
박철은 슬쩍 세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나라의 어둠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여명을 바라봤다. 금색 눈동자가 그의 머리를 꿰뚫는 것처럼 번뜩였다.
“이 나라의 밑바닥 또한, 보지 못… 아니, 보지 않은 거지. 기자라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미명 아래… 다른 기자들과 똑같은 곳을 보고 있었어. 기자 실격이다.”
“….”
“하, 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건 날 살려달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야.”
지켜보던 산초의 눈썹이 씰룩이는 가운데, 여명이 물었다.
“그러면 뭡니까?”
“이건 미래의 피해자들을 위한 일이다. 진실이 알려져야만, 제2, 제3의 천여명이 생기지 않는다.”
“….”
“제2 제3의 희생양 자매 또한 막을 수 있겠지. 이 나라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알려야만,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여명은 장만과 성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성녀는 ‘이제 슬슬 지루하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고, 장만은 ‘조금 더 떠들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다’는 뜻을 담아 손을 흔들었다.
여명은 어르신의 조언을 따랐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박철은 스스로의 말에 흥분한 것처럼 소리쳤다.
“이, 이건 네 복수에도 도움이 될 거다. 네가 애국자들을 전부 죽인다 한들, 대중은 여전히 그들을 일류 정치인과 열사로 기억할 거다.”
“하지만 전부 죽겠죠.”
“그래! 그리고 넌 테러리스트로 기억되겠지! 그 뒤에는 녀석들에게 기생하던 놈들과 핏줄들이 명예를 자본 삼아 다시 이 나라를 지배할 테고!”
“….”
“진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네 복수는 그저 반쪽짜리에 불과해! 겁쟁이의 복수! 죽은 청소부들에게 당당하고 싶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컥-세티와 성녀의 총구가 동시에 그의 머리통으로 향했다.
세티가 말했다.
“기자 아저씨. 뭔가를 원하시면, 도발이 아니고 설득을 하셔야죠.”
“….”
“아니면… 우리가 안 죽일 거라는 자신이 있으신가?”
탕!
세티는 그대로 박철의 손을 쏴버렸다. 박철은 끄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 꼴을 보던 살로메가 멍하니 말했다.
“지, 진짜 쏘네? 그냥 위협만 할 줄 알았는데….”
“그럼 가짜로 쏘겠어?”
“…아, 아니. 나는 당연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분위기 잡는 줄 알았어.”
“그거야 여명을 모욕하기 전의 이야기고.”
그렇게 중얼거린 성녀가 옆구리를 푹 찌르자, 살로메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박철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세티가 말했다.
“말할 수 있겠어요?”
“씨, 씨발. 당연… 하지. 고, 고문 쯤은 아, 아무렇지 않아.”
“좋아요. 그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티는 여전히 권총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아저씨를 살려둬야 할 이유를 말해보세요.”
크흡, 눈물과 콧물을 삼킨 박철이 대답했다.
“나, 나도 이 판에 껴다오. 대중에게 숨겨진 진실을 알리고 싶다.”
“…당신의 뭘 믿고요? 이름도, 언론사도 뭣도 없는 삼류 기자 아닌가요?”
“씨, 씨발, 이 대화 빨리 끝내면 안 되냐? 이미 답은 정해진 것 같….”
세티는 정색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대답.”
“…성녀께서 내가 무슨 성물의 주인이라고 했으니, 성도에 가서 인정받으면 내 몸값은 확 뛰겠지. 아니, 하다 못 해 성녀님이 날 전용 기자로 삼으면 교인들은 전부 믿어줄 거다! 됐냐?”
“네, 다행히 바보는 아니시네요.”
세티는 생긋 웃으며 권총을 내려놓은 뒤 그대로 박철과 악수했다. 그러니까, 구멍 뚫린 박철의 손을 꽈악-붙잡았다.
“살려드릴 테니, 앞으로 함께 하죠. 박철 기자님.”
으아어어그-박철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세티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
***
여명 일행이 창고를 떠나고 10분 정도가 지난 뒤.
박철은 붕대 감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처음부터 저를 끌어들일 계획이었습니까?”
그의 질문이 향한 건 장만이었다. 누가 봐도 두목으로 보이는 꼬장꼬장한 노인네.
장만은 세티가 가져온 USB 속 자료를 보며 대답했다.
“아니, 죽일 생각이었지. 그쪽이 훨씬 빠르고 편하니까.”
“….”
“한데, 여명이 그쪽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더군.”
박철은 천여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중 앞에 내민 가짜 얼굴과 카메라에 찍힌 진짜 얼굴 모두를.
“…그 친구, 괴짜로군요.”
“착한 아이지. 자네와는 다르게.”
“….”
“박철. 종군 기자에, 민주 기자… 참 인상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더군.”
박철은 문뜩 여명의 존중을 받는 이 노인의 정체가 뭘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뱃사람 특유의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노인은 마치 고래의 그것처럼 깊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 자네가 여명에게 했던 말이 전부 진심이라고 믿네. ”
박철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장만이 구더기 공주를 향해 손짓했다.
구더기 공주는 물약을 가져오란 뜻으로 이해하고 포션을 꺼냈다가, 장만이 한 번 더 손을 흔드는 걸 보고 나서야 가루약을 챙겼다.
‘작가’에게 먹였던 것과 똑같은 독.
약을 챙긴 장만은 신음하는 박철에게 포션과 가루약을 내밀었다.
“포션과 약일세. 쓰는 법은 알겠지?”
박철은 순순히 상처에 포션을 뿌리고, 가루약을 삼켰다. 그는 입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딸기 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크흡, 이거 뭐 하는 약입니까?”
“잠복성 독약.”
“…예?”
“사람 몸에 잠복하는 독일세. 일정 기간마다 독을 다시 먹거나,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몸에 독이 퍼지는 물건이지. 전문가가 만든 거니, 아마 꽤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걸세.”
친절한 설명에 놀란 박철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장만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배신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이지. 이 정도는 해야 우리가 이 나라를 불태울 수 있는 조직이란 걸 실감할 것 같아서 먹였네.”
박철은 침을 삼킬 엄두도 못 내며 대답했다.
“…믿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해독약을 주시면 안 될까요?”
“줄 수야 있지. 하지만 내가 더한 독을 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확신할 수 없었다. 박철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가운데, 장만이 웃으며 말을 끝냈다.
“앞으로 잘해보세. 기자 양반.”
***
투명 망토를 쓰고 호텔에 돌아온 여명이 처음으로 마주한 건 경비병이 아니었다.
노란 단발 머리의 애새끼와 누군지 모를 훤칠한 슬라브계 청년.
모스크바 초인 교육원 상징이 새겨진 삼선 츄리닝을 입은 두 사람은 쓰러진 한국 경비병들을 의자 삼아 복도에 앉아 있었다.
앉아있는 자세가 어찌나 껄렁한지, 복도와 계단 저편에 있는 다른 경비병들이나 초인 참가자들은 두 사람에게 다가올 엄두조차 못 내는 상황.
몇몇 기자들이 용기를 내어 카메라를 찰칵거리는 가운데, 단발 머리 씹새끼… 아니, 파순이 소리쳤다.
“아, 그냥 친구 보러온 거라고! 같은 용병 출신 친구! 천여명!! 진짜 친구라니까?!”
여명과 같은 투명 망토 안에 숨어있던 성녀가 ‘진짜 미친 새끼라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여명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일단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데스나이트들과 처제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급하게 달려온 경비병들 질문을 받아야 했다.
-처, 천여명님! 죄송하지만 파순과 쇠똥구리란 분을 아십니까?
“….”
여명은 뒷골이 당기는 걸 느끼며 방을 나섰다.
호텔 방에서 그로 변장하고 있던 벨라디바가 무슨 짓을 한 건진 몰라도, 경비들은 아주아주 송구스러운 태도로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저, 그게… 아래층에서 천여명님의 용병 시절 친구란 분이 시설을 점거한 채로 천여명님이 나올 때까지 꼼짝도 안 하겠다고 버티고 계십니다.”
“…그놈을 데리고 온 아카데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모스크바 초인 교육원은 워낙 자유분방해서… 기존 학생이 아니라 공개 예선을 통해 올라온 선수라고 일부러 내버려 두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모스크바 학생들을 차별해서 손 놓고 있는 건 아니고?
여명은 뒷말을 꾹 삼킨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파순이 있는 층에 도착한 순간.
경비병 하나를 더 쥐어패던 파순이 열리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명 오빠!”
“…이 개새끼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옆에 있던 경비는 놀라긴커녕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파순은 기자들이 보란 듯 천연덕스러운 소녀의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여명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더 볼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기 무섭게, 여명은 그대로 파순의 몸을 걷어찼다.
펑!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순이 복도 저편으로 날아갔다.
창문 밖까지 차버릴 생각이었는데, 파순은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더니 그대로 우아하게 착지했다.
그새 더 강해졌네. 여명은 쯧 혀를 차며 무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쇠똥구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선과 몸의 선 모두가 굵직굴직한 슬라브계 청년은 성큼성큼 여명에게 다가왔다. 누가 봐도 위협적인 걸음걸이였고, 사람들은 조금 전 파순의 주접만큼이나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가 다가올수록, 여명의 표정도 슬슬 일그러졌다. 뒤틀린 마나를 직접 다루는 그는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죽었다기도 애매한…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반 언데드?
뭐가 되었건 불쾌한 족속이었다. 여명은 인벤토리를 준비하며 생각했다. 여기서 싸우면 피해가 커질 테니, 속전속결로 끝내자.
그렇게 그가 힘껏 마나를 끌어올리고, ‘쇠똥구리’가 그의 범위로 들어온 순간.
여명의 검보다도 빠르게, 쇠똥구리가 그에게 경례했다.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가장 위대한 적기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
뭔데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