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5)
을 위한 세계는 없다-55화(55/817)
〈 55화 〉 죽은 드워프를 위한 파반느 (8)
* * *
***
붉은 용, 오르세 타불은 잠에서 깨어났다.
용의 날카로운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동굴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그는 날개를 펼친 뒤,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드디어 수십 년간의 기다림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늘 그랬듯 헛된 기대일까?
그때 우르르 천장이 울리며 그의 머리 위로 종유석과 흙먼지가 떨어졌다.
누군가 강제로 문을 열어젖히는 신호였다. 아무래도 진짜로 손님이 찾아온 듯싶었다.
오르세 타불은 그제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대단할 건 없었다.
먼저 동굴에 설치된 마법진과 가디언들을 깨웠다. 어둠에 잠겨있던 동굴이 마나의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시야가 확보되자, 용은 발치에 놓인 무덤을 정성스레 청소했다. 먼지를 치우고, 무덤 옆에 놓인 보물들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준비는 금세 끝났다. 이미 수백, 수천 번 반복해온 일이었기에.
쿵! 쿵!
한데, 손님이 문을 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용에게 짧은 여유가 허락되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늙은이들이 언제나 그렇듯, 그는 눈을 감고 과거를 추억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둥지였다.
수십 년간 이곳을 지켜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이곳을 둥지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의 진짜 둥지는 저 차원문 너머, 황금과 마나 메탈이 가득한 드워프 왕국에 있었으니까.
황금과 보석이 가득하고, 드워프들이 직접 만들어준 정교한 장식품과 보물들이 가득했던 곳.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은 그를 본떠 만든 실물 크기의 동상이었다.
젊은 시절의 그가 드워프 왕을 목에 태우고, 마물들과 맞서 싸우던 순간을 본떠 만든 동상.
한때, 그 동상은 용의 자부심이자 기쁨이었다. 드워프들에겐 역사이자 신화의 증거였으며, 위대한 미래를 약속하는 상징이었다.
…그랬었다.
스탈린이 드워프의 왕국들을 침략하기 전까지만.
용은 추억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머나먼 기억 너머, 그의 둥지와 동상을 파괴한 전쟁을 떠올렸다.
저주받을 침략자, 스탈린과 공산주의자들이 비처럼 퍼붓던 겨자가스와 포탄들.
지구의 살인 병기 앞에서, 드워프들의 육중한 요새와 지하 대로는 아무 소용없었다.
후대의 드워프들은 그 시절을 ‘노란 겨울’이라고 불렀다.
어떠한 협상도, 회유도 없이 계절이 바뀔 동안 이어진 포격.
가장 고집 센 드워프조차 항복할 수밖에 없는, 혹은 그런 드워프들을 모두 쓸어버린 공격이 끝나자, 드워프들은 항복했다. 겨자가스에 노랗게 변색된 백기를 들고서.
전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드워프는 인간이 아니었고, 동물은 프롤레타리아가 될 자격이 없었으므로.
수많은 드워프가 굴라그로 끌려갔다. 씨족들이 멸족당했다. 드워프 산맥은 레닌 산맥으로 개명 당했다.
그의 둥지라고 다를 것 없었다.
용의 나이만큼이나 기나긴 역사를 담고 있던 둥지는 폭격 아래 스러져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동상의 최후는 더 끔찍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반동적인’ 동상을 용광로에 처넣었다.
그 후 동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용은 알 도리가 없었다. 소비에트 궁전의 자재가 되었거나, 레닌 동상이 되었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
거기까지 기억을 되새기자, 용의 오른 날개가 욱씬거렸다.
‘또… 또 이러는군,’
용은 오른 날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흉터를 매만졌다.
드워프 왕을 목에 태운 채, 러시아의 방공망에 몸을 날렸던 순간에 얻은 흉터.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려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스탈린이란 마왕을 처치하려고 했던 그의 우둔함과 무지가 낳은…
그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동굴을 지키던 봉인이 풀리고, 입구에 준비된 마법진이 폭발한 탓이었다.
!!!
짧은 진동이 이어졌다. 진동을 버티지 못한 동굴 천장이 우수수 흙먼지를 토해냈다.
애써 청소한 무덤 위에 다시 먼지가 쌓였다. 용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를 뚫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중성적인 목소리가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리 오너라 !”
드워프가 아닌 인간의 목소리. 오르세 타불은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손님이 아니라 강도였군.’
용은 주저 없이 가디언들을 움직였다.
***
어스름한 만주의 저녁.
저무는 태양 아래, 세 대의 오토바이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만주 벌판을 내달렸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들은 순식간에 돌과 모래, 거친 흙이 가득한 벌판을 지나쳤다.
오토바이마다 두 사람씩 타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살벌한 곡예 운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별문제 없이 벌판을 주파했다. 운전자가 전부 초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벌판을 가로지르며 달리기를 한참.
하늘의 해가 넘어가 어스름이 어두움으로 바뀔 시간에, 일행의 시야로 지평선 대신 커다란 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일행은 벌판 대신 눈 덮인 숲과 구불구불한 산길 위를 달렸다.
소련의 몰락 이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탓일까, 산길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초인의 감각조차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결국, 김만수가 균형을 잃고 산 아래로 추락할 뻔하고 나서야, 일행은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자마자,성녀가 입을 열었다.
“내 운전실력은 어때? 버틸 만해?”
명백하게 놀리는 말투였다. 성녀의 뒤에 앉아 있던 여명의 눈썹이 씰룩였다.
“…최악의 승차감이다.”
“에이, 그거야 이상한 곳을 잡고 있으니까 그렇지. 허리 잡아도 된다니까?”
성녀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줄 생각으로 내뱉은 농담이겠지만, 어딜 잡아야 할지 몰라 아슬아슬하게 시트를 붙잡고 있던 여명은 웃을 수 없었다.
눈밭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그녀의 미친 엄마와 드잡이질한 게 불과 며칠 전 아닌가.
그는 성녀의 뒤통수에 꿀밤을 한 대 먹여줄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데없는 농담은 됐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지?”
“쓸데없다니… 난 진심으로 한 말인데?”
“…대답.”
“또, 또 목소리 깐다. 뭐 농담도 못 하나?”
“….”
“아, 진짜.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다룰마 씨 말로는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계곡에 있다고 했으니까…아마 저 산만 넘으면 도착하지 않을까?”
성녀의 말마따나, 산길도 없는 거친 산을 넘자마자 커다란 계곡이 보였다.
완만한 주변 풍경과 달리, 거의 직각에 가까운 경사의 절벽이 나란히 서 있는 계곡.
모르고 봤다면 절경이라고 할만한 풍경이었으나, 이곳에 만주를 멸망시킬 마도구가 있다는 걸 알고 보니 꽤 살벌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여기서부턴 걸어서 간다.”
때마침 오토바이 연료도 바닥을 보였기에, 권 단장은 일행에게 하차를 명했다.
일행은 조심스레 오토바이를 눕혀놓은 뒤, 조용한 걸음으로 계곡에 접근했다.
다행히 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계곡에 가까워지자, 권 단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이 매복하고 있다면 꼼짝없이 죽을 지형이군.”
권 단장은 계곡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숨을 곳 하나 보이지 않는, 직각에 가까운 계곡.
미필인 여명이 보기에도, 위에서 총알을 쏟아내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제가 올라가서 확인해볼까요?”
여명이 묻자, 권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 위를 확인하려면 산을 돌아가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매복을 감수하는 건 말도 안 되잖습니까.”
멀미 탓에 헛구역질하고 있던 김만수가 끼어들었다. 그는 꺼림칙한 얼굴로 계곡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인원을 나누시죠. 저와 동료들은 먼저 위를 확인하겠습니다.”
“선발팀과 후발팀을 나누자?”
“예, 단장님과 성녀님, 그리고 여명은 아래에서 대기하고 계시다가, 확인이 끝나고 돌입하는 겁니다. 어떻겠습니까?”
“나쁘지 않군. 하지만 선발조의 구성을 조금 바꾸도록 하지. 보물이 있는 곳으로 돌입한 뒤의 전력을 생각하면”
권 단장과 김만수 부단장이 대화를 이어나가던 그때, 여명이 조용히 검을 뽑았다.
스릉.
모두의 시선이 여명에게 향했다가, 여명의 시선을 따라 왼쪽 절벽 위로 향했다.
절벽 위에서는 달빛을 등진 무언가가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만수는 처음에는 그것이 양복을 입은 사람인 줄 알았으나, 달빛이 녀석들의 얼굴을 비추자마자 흡, 숨을 삼켰다.
“돼지머리? 저 녀석들, 설마 북만주에서 우리를 습격한…”
북만주 사태 때 맞닥뜨렸던 바로 그 괴인들. 여명은 김만수의 말을 긍정했다.
“그 녀석들이 틀림없습니다. 아까 전의 습격에서도 비슷한 녀석을 만났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돼지머리가 아니라 말머리긴 했지만.”
여명은 저 동물 머리 괴물들이 정부에서 만든 개조 인간이란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알아봤자 좋을 것 없는 정보였으니까.
“…북만주에서 우릴 노린 것도 우연이 아니란 소리인가.”
그 탓에 권 단장이 묘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았지만,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권 단장의 고민이 이어는 사이, 절벽 위의 돼지머리들은 계속 숫자를 불려 나갔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적어도 서른 이상. 여명이라도 꽤 격전을 각오해야 하는 숫자였다.
고민을 끝낸 권 단장은 뭔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봤다.
“적들의 숫자는 우리의 몇 배는 되고, 무장 수준도 우리보다 낫다. 정면으로 싸우면 필패, 이대로 기회를 살핀다고 해도 옥새를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
“…방법이 없군요. 이대로 후퇴하실 겁니까?”
김만수의 물음에, 권 단장이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님께선 목숨은 걸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어쩌시겠습니까? 여기서 후퇴하시겠습니까?”
“…제가 싸운다고 대답하면요?”
“우리가 역으로 매복을 할 겁니다. 오른쪽 절벽 위에 올라가, 녀석들이 보물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는 순간을 노릴 겁니다.”
권 단장의 계획은 그럴싸했지만, 승리를 담보하진 못했다. 설사 그렇게 돼지머리를 처리한다고 해도, 옥새를 찾을 거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것을 이해한 성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여명을 보며 물었다.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다 죽여야지. 여명은 뒷말을 삼키고, 심드렁한 표정을 가장했다.
일행이 후퇴를 결정했어도,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들과 싸웠을 것이다.
옥새가 탐나서? 아니, 아니다.
옥새를 얻어 드워프에게 보상을 받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목숨을 걸고 용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정부가 이렇게나 공을 들이는 일이라면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방해할 생각이었다.
그런 여명의 생각을 오해한 건지, 성녀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싸워야지.”
“…성녀님.”
“여기까지 왔는데 후퇴할 순 없잖아요? 권 단장님. 단장님 계획대로 해요. 오른 절벽 위에 올라가서 습격하고, 그 후에는”
성녀의 결연한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소총을 드는 순간, 계곡의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마나의 파장이 불어온 탓이었다.
사방의 나무가 동시에 흔들리고, 풀들이 고개를 숙였다. 용병들이 동시에 침을 삼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나.
그리고 그것을 느낀 건 절벽 위의 돼지머리 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들은 다급하게 계곡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러니까, 가파른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운이 좋군.”
그 모습을 본 권 단장이 말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행 모두가 동의했다.
손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추락할 꼴로 절벽에 매달린 돼지머리라니.
그 이상의 말도, 계획도 필요 없었다.
달깍.
일행은 동시에 총을 장전하고, 돼지머리들이 쏟아지는 절벽을 향해 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