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50)
을 위한 세계는 없다-550화(550/817)
EP.550 먹물로 쓰인 거짓, 피로 쓰인 사실. (4)
* * *
***
의외로 파순의 주접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즐거움을 다음을 위해 남기고 싶다나?
정보를 더 뽑아내고 싶었던 세티가 ‘여학생 히틀러’ 같은 고급 정보를 넌지시 흘렸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여학생 히틀러? 씨, 천여명이랑 성녀랑 손잡고 성도에 불 지르는 게 더 현실성 있겠다!’
그래도 웃기긴 웃겼는지, 파순은 낄낄 웃다가 사례가 걸릴 정도였다.
뭐, 아무튼.
대화를 끝낸 여명은 파순의 팔을 묶은 줄을 풀어줬다.
“아, 묶인 상태로 나갔으면 재밌었을 텐데. 내일 뉴스에도 나오고. 천여명! 어린 소녀와 본디지 플레이하다!”
“…그 지랄 날까 봐 풀어주는 거다. 제발 좀 닥쳐.”
여명은 그대로 파순의 엉덩이를 걷어차 방 밖으로 밀어내려 했으나, 파순은 휘릭-그의 발차기를 피하며 말했다.
“아, 맞다. 야, 가기 전에 쇠똥구리 제어권 돌려줘.”
“…싫다면?”
세티가 끼어들자, 파순이 히죽 웃었다.
“저거 정체를 알면 돌려주고 싶을걸? 천여명, 똥구리한테 변장 해제하라고 명령 내려봐.”
똥구리… 여명은 파순의 뒤통수를 후려친 뒤 가짜 쇠똥구리를 향해 명령했다.
“변장을 해제해.”
그러자 곧이어 피눈물의 환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해제되며 무뚝뚝한 슬라브인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가짜 피부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은…
빨갱이였다.
그것도 지켜보던 데스나이트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섬뜩한 빨갱이.
[어우, 씨, 저게 뭐야?]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의 피부는 데스나이트의 죽은 피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문제는 몸매였다. 시뻘건 피부가 뼈에 달라붙어서 혈관이 드러날 정도로 빼빼 마른 몸.
머리카락과 눈썹조차 없이 반들거리는 그 몰골은 사이코패스가 만든 인간 박제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대체….”
처음부터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던 여명조차 말끝을 흐릴 정도.
B급 고어 영화를 좋아하는 막내를 제외한 희생양 자매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혐오를 감추지 않는 가운데, 파순은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
“놀랐지? 정체를 들으면 더 놀랄 걸? 이건 말이야… 스탈린을 윤회시키기 위해 만든 임시 육체다?”
“…스탈린? 윤회?”
갑작스러운 이름 언급에 여명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파순은 손가락을 빙빙 흔들었다.
“시체 부활 마법의 응용이지. 빨갱이들은 시베리아 제1 연구소에서 실종된 스탈린의 영혼을 이곳에 불어넣어… 스탈린을 부활시키려 했지!”
…빨갱이들의 실행력이란. 여명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순간.
파순이 번쩍 손을 펼쳤다.
“스탈린이 진짜로 죽었다면 당연히 이 신체에 빙의됐겠지만… 짜잔! 이 시체에는 아무 영혼도 깃들지 않았네? 그래, 스탈린은 사실 살아있던 거야! 서프라이즈!”
“….”
짧은 침묵. 스탈린과 여명이 만난 걸 이미 알고 있는 희생양 자매들이 모두 시큰둥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곧, 파순이 발끈하며 침묵을 토막냈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아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 이거 생각할수록 엿 같네. 직접 스탈린을 만나서 훈장을 받아? 시발, 이게 말이나 되냐?”
투덜거린 파순은 그대로 가짜 쇠똥구리… 아니, 스탈린을 위한 인공인간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재밌으니까 됐어. 그리고 어쨌든 이놈은 따로 데리고 다니기 힘들 테니까. 나한테 다시 권한 넘겨줘.”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빙의체를 바라봤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 속 탁한 눈동자는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명은 녀석의 피부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이거, 전투력은 얼마나 되지?”
“그럭저럭? 다른 놈도 아니고 위대하신 철혈의 서기장님을 위한 육체인데, 약할 리 없잖아?”
“….”
뭔가 숨겨진 기능이 더 있군. 여명은 파순의 주둥이를 찢어버리는 대신, 빙의체를 인벤토리로 ‘회수’해 봤다.
하지만 빙의체는 인벤토리로 회수되지 않았다. 소유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건…
‘…살아있다?’
누가 봐도 언데드이건만, 데스나이트처럼 완전히 죽은 자로 인정되지는 않는 모양.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니… 여러모로 섬뜩한 물건이었다. 이대로 처분하거나 따로 숨겨두고 싶었지만, 파순이 이 녀석을 선수로 등록한 이상 그것도 어려웠다.
결국, 여명은 한숨을 참으며 명령했다.
“쇠똥… 아니, 빙의체. 아까 전처럼 변장한 뒤, 저 녀석과 계속 함께 다녀라.”
“호위 임무입니까?”
“아니, 감시 임무다.”
“명령을 받듭니다.”
기괴한 몰골과 상관없이, 경례 자세만큼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파순은 다시 변장하는 빙의체를 보며 투덜거렸다.
“감시 임무? 야, 이거 내가 찾은 내 물건이야! 제대로 돌려줘야지!”
여명은 대답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파순은 지지 않으려는 듯 양손으로 중지를 펴며 말했다.
“누가 빨갱이 새끼 아니랄까 봐, 남의 개인재산을 멋대로 약탈… 악! 시발! 할 말 없으니까 주먹질한다!”
여명이 발작하는 파순의 머리끄댕이를 붙잡은 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졌다.
***
파순을 쫓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새로운 정보를 논의하려던 여명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갑작스레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천여명 씨? 반갑습니다.]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니라, 정부에서 준 보안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
[저는 국방부 장관이신 김강혁 장관님의 보좌관, 김백범이라고 합니다.]“….”
장관의 보좌관?
장만 어르신에게 보낼 비밀 암호를 적고 있던 세티는 물론이고, 각자 정보를 확인하고 있던 희생양 자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여명은 벨라디바에게 쉿-제스처를 보낸 뒤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장관님께서 따로 천여명님을 보고자 하십니다.]“아, 그런 거라면 장인어른과 먼저 상의를 하셔야….”
[지금 뭔가를 오해하시나 본데,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딱딱한, 마치 장교가 일반병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목소리.
[6시… 지금부터 1시간 뒤에 개성 태화관으로 모시겠습니다. 준비하고 계십시오.]“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취소하십시오.]“….”
여명은 분노를 참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알려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약속을 잡으시는 건…”
[장관님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이유는 만나서 들으십시오.]“….”
[이 이상 불만이 없다면 제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럼, 이-]“야, 좆 까.”
여기서는 한 타임 쉬고,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어디 보좌관 따위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네. 야! 장관님한테 전해. 보좌관이 좆같이 굴어서, 직접 오지 않는 이상 안 만날 거라고.”
[….]“대답 안 하냐?”
[1시간 뒤에 모시러 가겠습니다.]상대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여명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긴장한 자매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인기인은 괴롭네.”
네티는 마시던 콜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 살짝 쫄았어요. 왜 갑자기 급발진하신 거예요?”
“장관 정도면 내가 양아치인 걸 알고 있을 텐데, 굳이 굽신거릴 필요 없잖아.”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애국자’들의 회의에 참여하기도 전에 조웅찬 장관과 김강혁 장관 사이의 경쟁 관계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로 김강혁이 아카데미로 보냈던 비전 유물 때문이었다.
그가 보낸 비전 유물 속에는 천둔검법 외에도 애국자로 세뇌하는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물론, 여명은 가볍게 극복했지만, 김강혁의 관점에서는 그가 세뇌에 걸린 것으로 보일 터.
괜히 만나서 그의 꼭두각시인 척 연기하느니, 아예 만나지 않는 게 베스트였다…
“…형부는 갈수록 음험해지시네요.”
여명의 설명을 모두 들은 네티의 한마디. 하지만 세티는 ‘나는 그런 면도 좋다’ 며 동생의 말에 반박했다.
이 언니가 진짜… 자매들이 닭살 돋는 표정으로 바라보건 말건, 세티는 펜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아까 전화처럼 보좌관이 직접 오는 경우인데… 어떻게 할 거야?”
“두들겨 패야지.”
“….”
예상외의 대답이었던 걸까, 세티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그걸 본 여명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곧바로 조웅찬 장관한테 도움을 청할 거야.”
“뭐어?”
“김강혁 장관의 보좌관이 엿 같이 굴어서 팼어요. 도와주세요. 장관님!”
“….”
“조웅찬은 김강혁과 내가 사이가 멀어지는 걸 원할 테니 바로 얼씨구나 하면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겠지. 김강혁은 세뇌가 남았다고 생각하니 아쉬워하면서도 물러날 거고… 어때?”
세티는 괜찮은 계획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강혁 장관이 직접 오면?”
“그때는….”
***
1시간 뒤, 정말로 김강혁 장관의 보좌관이 정말로 여명을 찾아왔다.
커다란 덩치에, 짧게 자른 머리카락,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가진 중년 남자.
벨라디바를 비롯한 데스나이트를 미리 숨겨놔서 망정이지, 그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뻥! 여명의 호텔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여명. 미리 말한 것처럼 모시러 왔습니다.”
호텔 방을 지켜야 할 경비들은 장관의 보좌관이란 이름에 쫄아버린 건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공무원 호위는 이런 단점이 있었네. 여명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했다.
“내 말 못 들었나? 안 간다고 했을 텐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여명은 그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냉장고로 걸어가 대뜸 맥주를 꺼냈다.
뽕. 날아간 병뚜껑을 따라 거품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여명은 병을 쥐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처제들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꺼져주겠어?”
“….”
보좌관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여명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푹 한숨과 함께 마나를 끌어올렸다.
“어쩔 수 없군. 천여명… 네가 자초한 일이다.”
그렇게 녀석이 여명에게 걸어오는 순간. 여명은 조금 전에 땄던 병뚜껑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따앙 – !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병뚜껑은 그대로 보좌관의 미간을 노렸다.
재빨리 고개를 젖혀 병뚜껑을 피한 보좌관은 그대로 바닥을 박차며 여명에게 달려들었다.
국방부 장관의 개인 보좌관이란 자리가 이름만 있는 건 아니었는지, 뛰어오르는 자세가 꽤 괜찮았다.
물론, 여명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올림피아 우승 후보가 우습나? 진짜 개나 소나 덤비네.”
여명은 뛰어내리는 보조관의 발을 피한 뒤, 그대로 마시던 맥주병을 거꾸로 잡고 휘둘렀다.
쨍그랑! 보좌관의 머리와 충돌한 맥주병이 박살 나며 병 조각이 튀었다. 보좌관이 발작적으로 손을 휘둘렀으며, 여명은 그의 팔뚝을 잡고 역으로 관절기를 걸었다.
우드득, 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여명의 발이 보좌관의 목을 짓밟았다.
“좆밥이었네.”
보좌관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깨진 맥주병 위로 목이 눌린 탓이었다.
그리고 여명이 그를 아예 기절시킬 생각으로 발에 힘을 실은 순간.
짝, 짝, 짝!
방 입구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남자가 그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었다.
“김강혁 장관… 님.”
설마설마했는데, 직접 찾아올 줄이야. 어쩐지, 경비 놈들이 그 흔한 경보도 울리지 않더라니.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여명이 속으로 혀를 차건 말건, 장관은 계속 박수치며 말했다.
“훌륭하군. 저 친구가 그래도 실전으로 다져진 친구인데. 고작 몇초 만에 제압될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그만 풀어주겠나? 죽이기엔 아까운 친구라서.”
여명은 은근히 힘을 주고 있던 발을 들었다. 보좌관은 컥, 컥 막힌 숨을 토해냈다.
여명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가 전화로 그러지 않았나. 보좌관이 좆같이 굴어서, 직접 오지 않는 이상 안 만날 거라고.”
“….”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더군. 자네 정도 되는 사람과 만나려면 정중해야지.”
김강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뒤, 흐느적거리며 일어나는 보좌관을 향해 손짓했다.
“저 친구가 군인 생활을 너무 오래 해서… 이걸로 교훈을 좀 배웠겠지. 고맙네.”
“….”
비전 유물 속에서 봤던 그 장관이 맞나? 여명은 전형적인 정치인처럼 말하는 김강혁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김강혁 장관은 그런 눈빛조차 웃음으로 흘려보내며 말했다.
“이제 함께 가주겠나? 매우 중요한 일이라서.”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쩍 자매들이 모여있는 침실을 바라봤다. 문틈 사이로 밖을 보고 있던 네티와 눈을 마주치자, 네티가 살짝 눈을 깜빡였다.
‘추적 마법 켰어요.’ 라는 뜻이 담긴 눈빛.
여명은 아쉬운 표정을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관이 직접 와주셨는데 안 나갈 수 없죠.”
그렇게 대충 옷을 챙겨 입은 여명은 그대로 김강혁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보좌관이 몰골이 심각했지만, VIP 전용 엘리베이터 덕분에 기삿거리가 되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호텔 밖으로 나서는 찰나, 여명은 침착하게 대응을 준비했다.
세뇌를 이용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국방부 장관은 무엇을 노리고 그에게 세뇌가 담긴 비전 유물을 보냈는가…
여러 고민이 떠올랐지만, 모두 오래가지 못했다.
김강혁이 타고 온 두꺼운 방탄 차량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그런 고민을 전부 날려버릴 인물이 그를 반겼으니까.
“이 친구가… 소문의 젊은이로군. 사진보단 실물이 낫구만.”
“….”
여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상대편을 바라봤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를 닮은 진한 쌍꺼풀, 드넓은 이마와 도톰한 볼살, 그리고 순수함으로 가린 욕망 가득한 눈동자까지.
“그렇게 빤히 보는 걸 보니, 나도 사진보다 실물이 낫나 보군. 그렇지 않나?”
“예, 어르신.”
김강혁 장관마저 공손히 대답하는 그의 이름은… 김만일.
조국의 적 김일성의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끈 전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