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52)
을 위한 세계는 없다-552화(552/817)
EP.552 먹물로 쓰인 거짓, 피로 쓰인 사실. (6)
* * *
***
김만일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꾸역꾸역 처먹은 영약 덕분인지, 아니면 뭐 다른 개조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식탁이 들썩 거릴 정도로 머리를 내려쳤는데도 정신을 유지했다.
“니, 니놈이 감히 나한….”
쾅!
“이 배은망….”
쾅!
“개새….”
쾅!
“그만, 제발 그만…!”
쾅! 쾅! 쾅!
여명은 개의치 않고 계속 얼굴을 내려쳤다. 튼튼한 게 뭐 어쩌란 말인가. 오히려 더 팰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이윽고, 김만일의 앞면이 다 일그러지고 피를 질질 흘릴 때쯤.
조용히 차를 홀짝이던 김강혁이 말했다.
“그만하면 됐네. 천여명.”
쾅! 여명은 한 번 더 머리를 내려찍은 뒤 손을 멈췄다. 힘을 잃고 식탁에 축 늘어진 김만일의 입에서는 짐승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그어으어….”
김강혁은 잠시 그 꼴을 바라봤다. 마치,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감상적으로.
그리고 곧 김만일의 몸이 늘어지기 전에, 보좌관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보좌관은 즉시 품에서 작은 포션을 꺼내 뚜껑을 땄다.
뽕. 바닥으로 떨어지는 뚜껑을 따라 코를 찌르는 딸기향.
설마 이곳에서 구더기 공주의 포션이 등장할 줄이야.
여명이 속으로 당황을 삼키건 말건, 보좌관은 그대로 김만일의 얼굴에 포션을 부었다.
김만일은 코로 물약이 들어간 듯 잠시 쿨럭거리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나, 나한테… 이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그렇게 처맞고도 아가리를 놀릴 수 있다니. 뻔뻔함과 배짱이 놀라울 정도.
그러나 김강혁은 젓가락을 들어 불어 터진 만두를 깨작거리며 대답했다.
“김 전 대통령. 아직도 모르겠나? 난 당신 아래에서 굽신거리던 전 국방부 장관들과는 다르다는걸.”
“…네, 네놈이 각하께서 정한 위계를 어, 어기려는 것이냐…?”
“각하께서 정한 위계? 입이 비틀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김강혁은 젓가락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명하신 건 군부에서 의회로의 권력 이양이었다. 너에게 군부를 숙청한 권한을 준 건 각하시지만, 그게 네놈이 군부의 주인이란 뜻은 아니지.”
“….”
“군부의 주인은 각하고, 그분의 오른팔은 나다. 너는 기껏해야… 간판에 불과해.”
“가, 감히… 네놈의 전임자에 전임자들조차 내게 그딴 말을 하지 못했거늘!”
김만일이 목소리를 쥐어짜 일갈하자, 장관이 차갑게 대꾸했다.
“전임자? 적당히 쓰고 버릴 위치에 올려놓은 군부의 개들? 감히 그들과 나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나?”
“….”
“아직도 모르겠나?”
김만일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김강혁을 노려봤다.
국방부 장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남은 만두를 씹어 삼킨 뒤,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네가 형을 피해 한국으로 도망쳐 왔을 때도, 네놈 가족들의 시체로 애국자 행세를 할 때도, 열사들의 핏물로 네 몸을 장식할 때도… 난 거기에 있었다.”
“….”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한 것일까. 김만일은 경악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얼굴로 장관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장관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제 꺼져라.”
그러자 김만일은 마치 맹수를 마주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몇 번이고 바닥에 넘어질 뻔하면서도 방을 나서는 게, 겁을 아주 단단히 먹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당황한 직원들이 우르르 김만일을 따라 떠난 직후.
보좌관이 말했다.
“처리할까요?”
장관은 직원들에게 다음 요리를 내오라고 손짓한 뒤 대답했다.
“아니, 내버려 둬. 저 양반의 죽음은 따로 쓸 일이 있을 테니.”
“하오나… 다른 장관들에게 붙으면….”
“글쎄, 김관형이나 조웅찬이 바보도 아니고 멋대로 주와이외즈를 뽑아 자기 배를 채우려던 뒷방 늙은이를 받아줄 것 같지는 않군.”
“…그렇다고 해도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자네도 잘 알잖나.”
그렇게 말한 장관은 슬그머니 여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좌관 또한 식탁에 턱을 괴고 여명을 바라보았다.
“주와이외즈를 뽑아내겠답시고 무리하다가 자칫 세뇌가 풀리면, 그 책임을 누가 지려고?”
“….”
“세뇌가 너무 약하게 걸렸어.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나?”
“…예, 그렇긴 합니다.”
두 남자는 동시에 여명의 위아래를 훑었다. 흡사, 묶어놓은 맹수를 보는 것처럼 흥미와 긴장이 반반 섞인 눈빛.
곧, 보좌관이 말했다.
“이 녀석의 실력이 예측보다 훨씬 강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왜, 실력의 3할은 숨기는 게 용병의 덕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어쩌면… 세뇌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여명은 경악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신경계를 억눌렀다.
장관의 깊은 눈동자가 그의 몸을 훑는 가운데, 보좌관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만약 그렇다면 배우 중의 배우군요.”
직후, 장관은 여명에게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 자네는 배우에게 팔이 부러진 건가?”
“팔로 끝난 게 다행입니다. 실력만 보면 군부에서도 상대할 놈이 손에 꼽겠더군요. 예의를 모르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만….”
“농담이었네.”
“저는 진담입니다. 현역 시절… 아니, 딱 10년 전에 이 녀석을 주웠으면 이렇게 복잡한 계획 없이 장관님이….”
“…그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복잡한 계획’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장관의 표정이 굳었다. 보좌관이 실언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그가 말했다.
“일단 식사나 끝내지. 남은 코스는 자네가 먹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직 코스 중 절반 밖에 안 나왔네. 여기가 얼마나 비싼데, 온 김에 먹게.”
보좌관은 의외로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관이 여명을 향해 짧은 한시를 읊조렸다.
“일산행진일산청(一山行盡一山靑).”
여명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몰라 눈은 마주치지 않는 사이, 장관이 덧붙였다.
“조금 전까지 있던 일은 모두 잊어라. 주와이외즈에 대한 이야기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
“산 하나를 넘으면 푸른 산이 또 서 있네.”
곧 그의 이마를 간질거리던 마나가 사라졌다. 여명은 곧바로 세뇌가 풀린 척 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고 뜸을 들였다.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여명은 두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이마를 짚은 뒤,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끄응… 영문 모를 신음은 덤이었다.
연기가 잘 먹힌 건지, 김만일의 자리에 앉아있던 보좌관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 예상보다 훨씬 헐렁하게 묶여있었군요. 장관님은 여기까지 예측하신 겁니까?”
“어느정도는.”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때쯤, 여명은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묶여…? 두 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군부에서 키우는 개 이야기 중이었네. 잘 잤나?”
“…잘 잤냐고요? 무슨 소리십니까?”
“자네, 잠시 기절해 있었네. 아마 만두에 들어있던 영약을 잘못 처리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것 같네만….”
“….”
핑계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몇몇 영약들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곤 했으니까.
여명은 별다른 반박이나 질문 없이, 미간을 주무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 대통령님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먼저 가셨네. 다음에 한 번 더 대접하고 싶다고 하시더군.”
“….”
여명은 장관의 말은 전적으로 신뢰하는 척, 한숨을 쉬었다.
“가게 측에게 보상을 청구해야겠군요.”
“이미 했네. 오늘 밥값은 물론이고, 다음에 연인들을 데리고 올 때도 무료로 대접하겠다더군. 물론, 오늘 먹은 만두는 빼고.”
그 짧은 사이에 이런 거짓말을 준비한 건가? 여명은 옅은 혐오와 그보다 적은 감탄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씁, 다음이라… 빌어먹을 요리 때문에 전 대통령님과 별다른 대화도 못 했네요. 혹, 장관님은 저에게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조웅찬 장관을 조심하게. 그는 욕심이 많은 인간이니.”
“….”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만나서 반가웠네. 천여명.”
여명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겁먹은 직원들이 그를 밖으로 안내하고, 묵직한 발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던 그때.
장관이 중얼거렸다.
“우리 개새끼가 오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볼까.”
***
한국은 좁다.
불과 20분 만에 여명이 김강혁 장관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는 정보가 이곳저곳에 퍼질 정도로.
외교부 장관 김관형은 여느 때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정보를 가져온 양치기와 세티에게 앞으로도 꾸준히 정보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
하지만 기획재정부 장관 조웅찬은 달랐다.
그는 여명과 김강혁이 간 음식점 위치를 알아낸 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조 장관은 가진 모든 연락망을 이용해 연락을 돌렸다. 장관 직권으로 ‘애국자’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서.
예정보다 빠른 회의였지만, ‘올림피아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란 적절한 핑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천여명이 드디어 ‘애국자’ 회의에 참여할 거란 말이었다.
소식을 들은 여러 ‘애국자’들이 기대와 걱정을 품는 가운데, 천여명의 장인, 홍용완 의원은 이 순간을 기회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이용해 최대한 많은 사람이 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자신의 파벌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금고를 좀 털었다.
이게 다 사위와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배은망덕한 딸년은 아버지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르겠지.
속으로 애꿎은 세티를 욕한 홍용완은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일이 조금, 아니, 존나 꼬이긴 했지만 아직도 그는 대통령을 꿈꾸고 있었다.
천여명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헛된 꿈.
이번 ‘애국자 회의’는 그것을 위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좋은 결과를-그때, 긴급한 전화 한 통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다다단, 딴딴, 딴!
요란한 벨 소리와 함께 휴대폰 위로 [애국단 공 단장]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이 인간이 이 시간에 왜?
홍용완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받았다.
“공 단장, 무슨 일인가? 나 지금 바쁘니….”
[죄송합니다. 의원님. 긴급한 정보가 있어서 이 시간에 연락드렸습니다.]“긴급한 정보? 우리 사위가 김 장관 따라간 거라면 이미 늦었네만.”
[아뇨, 아닙니다. 이번에는 남산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입니다.]“뭐? 남산?”
[그, 쌍년이 연구소에서 나왔답니다. 김관형 장관 짓 같다는데… 아주 고급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개성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쌍년? 하필 이때?
“이런 씨발. 추적자는 붙였나?”
[아뇨, 그게, 워낙 과속을 해서….]“미친년이 과속하지 그러면 제 속도로 달리겠냐? 당장 사람 풀어서 잡아! 딸하고 못 만나게 하라고!”
[예, 옙! 알겠습니다!]홍의원은 그대로 휴대폰을 집어 던진 뒤, 씩씩거리며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곧장 올림피아 선수단이 묶고 있는 호텔 경비 반장에게 통화를 연결했다.
뚜-뚜- 뚜—
짧은 통화음 끝에 경비 반장이 연결되자마자, 홍의원은 곧바로 두다다 말을 쏟아냈다.
“이봐, 나 함흥의 홍의원인데, 거기 내 아내라고 주장하는 년이 호텔로 들어오면 반드시 막게. 사위도, 딸년도 못 만나게 막아. 알겠나? 반드시 막아!”
[예, 예?]“시발, 내 말 못 들었어? 내 아내라고 주장하는 미친년이 호텔에 오면 막으라고!”
아쉽게도, 그의 고함은 먹히지 않았다. 경비 반장이 다른 라인을 타고 있어서? 아니.
[저, 호, 홍의원님. 죄송하지만… 부인, 아니, 그 여성 분은 이미 들어오셨는데요.]“뭐?”
[그러니까, 몇 분 전에 이미 호텔에 들어오셨….]“씨발, 빨리 말했어야지! 당장 가서 막아! 명령이다!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