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54)
을 위한 세계는 없다-554화(554/817)
EP.554 먹물로 쓰인 거짓, 피로 쓰인 사실. (8)
* * *
***
성녀는 바빴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교인들 때문에?
아니면 올림피아에 참가한 성기사들과 사제들 때문에?
물론, 모두 그녀를 바쁘게 만들긴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기자들과 정치인들이었다.
평소라면 아카데미나 교단에서 알아서 차단했겠지만, 지금은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인터뷰 제안과 미팅 약속.
그나마 차례를 지키는 족속들은 양반이었다.
반대편 건물에서 몰래 성녀의 방을 찍으려 한 기자나, 관심을 끌겠다며 성경을 집어 던지는 정치인 등… 한 시간에 한 명꼴로 미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한국 측에서는 그때마다 성녀에게 사과하며 선수촌으로 옮기면 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단언했지만, 글쎄.
성녀는 선수촌으로 가도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국을 못 믿겠다기보단, 세간의 관심이라는 게 원래 그러했다.
인기인의 비애라고 할까? 고도화된 현대 사회는 개인의 고통보다는 대중의 알 권리를 더 우선하는 법이었다.
물론, 그녀의 고통을 줄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성녀만큼이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여명이 대중의 관심을 끌어 준다면 성녀의 상황이 한결 나아지겠으나…
그는 대외적으로 기자를 두들겨 패고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중이었다.
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다른 나라 정치인들의 접근을 차단한 상태였고.
쉽게 말해, 그에게 쏠릴 관심이 역류해 성녀에게 쏠리는 중이었다.
힘든 만큼 여명에게 한마디 할 수도 있을 텐데, 성녀는 묵묵히 대외적인 관심을 받아냈다.
마치, 그게 여명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듯이.
그 모습이 얼마나 성숙한 지, 옆에서 지켜보던 살로메가 살짝 감동할 정도였다.
물론,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쓰으읍, 나도 그냥 기자 한 명 쏠까? 기레기 새끼들 인터뷰 귀찮아 죽겠네.”
조금 전까지 교인 한 명 한 명에게 조언을 해주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푹 퍼진 성녀의 한마디.
“성녀님!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죠! 호위 성기사들이나 다른 교인들이 그 말 들으면 얼마나 충격받겠어요!”
놀란 살로메가 잔소리를 쏟아냈으나, 성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지금 여기엔 너랑 귀쟁이만 있잖아.”
“평소에도 관리하셔야죠!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면 어쩌려구요!”
“평소에 관리는 무슨… 내가 이 짓을 평생 해왔어. 성도에서 기도회 열면 몇 명 오는지 모르지? 대중 앞에서 가면 쓰고, 기자들이랑 투닥거리는 건 내겐 그냥 일상이라고.”
“….”
“너도 알 거 아니야. 유명세라는 게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이런 식으로라도 안 풀면 나 진짜 죽어.”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평생 마탑에서 살았는데.”
“아, 넌 몰라도 네 안에 총통은 알고 있을….”
“이 인간이 진짜! 제가 히틀러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죠!”
살로메는 베개를 들고 성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섯 신의 오점이니, 오스트리아 출신이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며 다투길 잠시.
여태껏 성녀의 방에서 조용히 자고 있던 미리디스가 눈을 떴다.
“어? 귀쟁이 깼다!”
엘프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성녀는 곧장 살로메를 발로 밀어버리고 두다다 미리디스에게 달려가 어깨를 붙잡았다.
“뭐래? 여명이 꿈에서 뭐라고 했어? 장관이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지? 막 세뇌한 걸 확인하겠답시고 옷을 벗긴다거나….”
미리디스는 어깨를 흔들어 대는 성녀를 슬쩍 밀어낸 뒤,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런 일 없었어요. 대체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아니, 난 여명을 세뇌하면 옷부터 벗길 거 같아서….”
“….”
“…농담인 거 알지?”
엘프가 크흠, 헛기침한 뒤 베개에 맞아 쓰러진 살로메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쪼르르 다가오고 나서야, 엘프는 종이에 펜을 올렸다.
“우선, 김강혁 장관을 끝으로 한국 내부 파벌 파악이 끝났어요.”
슥, 슥, 그녀는 세 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뒤, 각각 삼 장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국방부 장관 김강혁.
기획재정부 장관 조웅찬.
외교부 장관 김관형.
미리디스는 국방부 장관의 이름 위에 펜을 올리며 말했다.
“우선 국방부 장관 김강혁. 한국 군부의 최고 통수권자이고, 꽤 수준 높은 초인이에요. 그리고 최근에 KGB랑 손을 잡은 것 같아요.”
KGB? 성녀는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소련의 망령이 여기서 왜 나와?”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킴 필비가 직접 한국에 와서 뭔가를 꾸미고 있나 봐요.”
“…킴 필비라니. 그러면 다른 녀석들은?”
미리디스는 기획재정부 장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웅찬. 초인이 아닌 순수 정치인이고, 한국 내부 세력인 애국자들의 의장이에요. 각종 용병이나 군부 외 초인들로 세력을 꾸미고 있고, 국내 세력도 가장 강해요.”
“…어떤 면에서는 가장 귀찮은 인간이네. 김관형은?”
“이 사람이 문제인데… 어떤 면에서는 가장 위험한 인간 같아요. 여러 국내 비밀 프로젝트를 맡고 있고, 무엇보다….”
미리디스는 잠시 숨을 삼킨 뒤 말했다.
“…여명 말로는, 이 사람이 아야톨라 같데요.”
“뭐?”
“눈물을 흘리는 자 본인이거나, 최소한 사제는 틀림없다네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냈어? 어제 김강혁 만나러 간 거 말고 따로 움직인 적 없-”
“여기에 아야톨라가 직접 찾아왔어요.”
“….”
입을 벌리는 살로메와 혐오를 숨기지 않는 성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여명이 있는 위를 바라봤다.
성녀는 허벅지에 있는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야톨라에, 빨갱이에… 이거보다 더 막장일 수 없겠는데? 대체 어떻게 겉으론 멀쩡하게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거야?”
미리디스는 곧바로 세 개의 동그라미 한가운데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리곤, 그 위에 짧은 직위를 적었다.
“…각하?”
“세 장관이 섬기는, 이 나라의 진짜 주인.”
“….”
“정확하진 않지만, 이 사람이 전쟁 이후부터 계속 역사를 조종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이 나라가 이렇게나 겉과 속이 다르게 성장한 건 그 결과고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개인이 한 국가의 역사를, 그것도 수십 년간 지배할 수 있다니.
살로메가 물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정체는 누구죠?”
“몰라. 아직은.”
“….”
“좋든 싫든 올림피아가 끝나기 전까지 이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는 게 이번 복수의 핵심이 될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만큼은 죽여야 할 테니.”
거기까지 말한 미리디스는 손가락에서 불꽃을 일으켜 종이를 불태워 버렸다.
“성녀님과 살로메는 올림피아에 참가하면서 계속 자리를 지켜줘. 여명의 알리바이가 되어줘야 하니까.”
그러자 성녀가 물었다.
“…그럼 너는?”
“저는… 음, 장만 어르신과 같이 테러 계획을 짜기로 했어요.”
“뭐? 왜 너만? 나도 어르신이랑 있고 싶은데!”
성녀가 투덜거리자, 미리디스가 턱을 괴며 대답했다.
“그야… 테러범의 딸이니까?”
“….”
“농담이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그냥, 저희 혁명단과 인연이 있으신 분이라서 그래요.”
“우리 엄마도 빨갱이인데….”
성녀는 잠시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쩝 기분을 풀었다.
아쉽지만 각자 잘하는 게 있는 법.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데 자신만 어리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아, 그래도 빨리 선수촌으로 가면 좋겠다. 적어도 자유롭게 여명을 만날 수 있으면 좀 편할 텐데.”
“…조금만 기다리시면 돼요. 이 호텔 시설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게 세 사람의 회의가 끝나기 직전. 미리디스가 뭔가를 떠올린 듯 손가락을 폈다.
“아, 맞다. 여명이 꿈속에서 신신당부했는데, 성녀님은 절대 세티의 엄마랑 만나지 말라고 했어요.”
성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티의 어머니를 왜 만나면 안 돼? 한국 정부 때문에?”
“아뇨? 보면 병이 도질 거라는데요?”
“병? 그게 무슨… 아.”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어지는 병.
성녀는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나쁜 년이면 여명이 이렇게 완곡하게 욕을 하는 걸까?
뭐, 마족이라도 되나?
***
아야톨라와 만난 다음 날 저녁.
꿈으로 미리디스에게 정보를 넘긴 여명은 오랜만에 양복을 차려입었다.
‘애국자’ 회의에 참석할 때 입으라며 조웅찬 장관이 보내준 최고급 양복.
100%로 핸드 메이드로 제작된 양복은 깃털처럼 가벼운 동시에, 몸에 딱 맞았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잡아주는 옷의 라인이 어찌나 편한지, 청소부 시절에 입던 옷이 누더기로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옷은 옷일 뿐이었다.
스탈린은 평생 뻣뻣한 인민복과 군복만 입으면서도 지구의 절반을 지배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옷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에 달려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드레스를 입은 채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그 생각을 더욱 굳혔다.
“어떠니, 사위?”
세티의 어머니, 모낙랑이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말했다. 등과 허벅지가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보란 듯 몸매를 드러냈다.
보다 못한 여명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꺼지쇼.”
“호호, 말은 그렇게 해도 그분께서 날 연락책으로 지정한 이상 날 어쩌진 못하잖니? 첫 만남은 좀 꼬였어도, 앞으로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게 어떠니?”
거, 더럽게도 뻔뻔하네. 여명은 그녀의 종아리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모낙랑과 다른 방에서 세티가 나왔다.
화려한 모낙랑의 드레스와 달리, 단아한 한복차림.
여명은 그녀의 푸른 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
“그래? 다행이네. 이거 더럽게 불편하거든.”
그때, 모낙랑이 끼어들었다.
“딸아, 원래 아름다움이란 조금 불편한 법이란다. 너는 아직 여자답게 산다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에는 사고 치면 안 된단다?”
조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시비를 건다고 해야 할지.
세티와 여명은 동시에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호텔 아래로 향했다.
“가, 같이 가야지!”
모낙랑이 굽 높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따라오건 말건, 두 사람은 올림피아 선수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vip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야 이 배은망덕한 년아!”
미처 엘리베이터에 타지 못한 모낙랑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세티가 입을 열었다.
“우리 둘 다 내일 경기인데 오늘 회의를 잡은 건, 조웅찬이 많이 급했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내일 경기에서 원하는 게 있거나.”
세티는 한복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느 쪽이건 그리 기쁘진 않네. 그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니….”
“살생부 만들러 가는 거라고 생각해.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일 거니까.”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각하까지. 두 사람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호텔을 벗어난 순간.
창문까지 새까만 차량 두 대와 운전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소머리 가면을 쓴… 양치기 둘.
운전기사로 쓰기엔 아까운 전력들이었지만, 여명과 세티는 티 내지 않고 그들의 안내를 따라 차에 몸을 실었다.
뒤늦게 나온 모낙랑이 부모의 권리를 요구하며 같은 차에 타겠다고 우겨댔으나, 양치기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튼, 양치기들은 그대로 두 대의 차를 이끌고 일행을 개성 어딘가로 이끌었다.
중앙대로, 주남산, 김강혁이 안내했던 고급 음식점은 물론이고 개성 차원문이 있는 곳조차 지나며 운전하길 한참.
끼익-도심을 벗어난 차량은 어떤 거대한 무덤 앞에서 멈췄다.
여명이 주변을 둘러보자, 완만한 구릉 위에 안치된 커다란 봉분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석이 서 있었는데, 이건 흡사…
“왕릉…?”
옛 왕조의 왕을 모신 무덤.
애국자 회의를 한다더니 왜 이런 곳으로 왔지? 여명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자, 소 가면의 양치기가 말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왕릉입니다.”
“….”
“가시죠. 윗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설마 여기가 회의장인가? 아무리 미쳤기로서니, 옛 왕조의 무덤을 회의장으로 쓴다고?
여명은 당황과 혐오 속에서 양치기를 따라갔다. 그리고 정말로 왕릉 안으로 들어가서 본 풍경은, 그의 상상보다 한층 더 역겨웠다.
위대한 왕이 잠들어 있어야 할 무덤 위에는, 아주 작은 차원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차원문 위에 떠 있는 에너지원은…
엄지손톱만 한 타락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