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6)
을 위한 세계는 없다-56화(56/817)
〈 56화 〉 죽은 드워프를 위한 파반느 (9)
* * *
***
탕!
성녀가 가장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밝게 빛나는 총알이 밤의 어둠을 넘어, 운 없는 돼지머리의 등을 꿰뚫었다.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내려오고 있던 돼지머리는 몸을 파르르 떨다가, 그대로 추락했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비명이 길게 이어졌으나, 곧이어 쏟아진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두두두두두!!!!
절벽에 매달려 있던 돼지머리들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용병들의 총알이 녀석들을 덮쳤다.
아무 대비도 없는 적, 철저하게 유리한 지형.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이었다.
“적습 ! 적습이다 !”
뒤늦게 일행의 존재를 눈치챈 녀석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다시 위로 올라가기 위해 꿈틀거리거나, 아예 손을 놓고 뛰어내리거나.
권 단장 비롯한 노련한 용병들은 위로 올라가는 녀석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들은 맨 윗줄에 있는 녀석들부터 조준해 착실히 돼지머리의 수를 줄여나갔다.
뛰어내린 놈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계곡 바닥에 핏자국만 더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일방적인 사격을 이어나가길 한참.
일행이 탄창을 전부 비웠을 땐, 벌써 3할에 가까운 돼지머리가 추락한 뒤였다.
“…젠장, 한동안 편육은 못 먹겠군.”
김만수 부단장이 탄창을 갈며 중얼거렸다. 전투 중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이었다.
편육이 뭔지 모르는 성녀는 피식거리는 용병들을 곁눈질하다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서 있는 여명의 모습을 확인하곤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었나?
‘아니면 혹시… 유머가 뭔지 모르는 건가?’
농담할 때마다 정색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의심이 가는 면이 있었다.
유머 불감증이라니, 여명은 아카데미에 있는 그녀의 친구와 묘하게 닮은 점이 많았다…
성녀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탄창을 갈아끼는 사이, 돼지머리 녀석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캬 아 악!
녀석들은 무슨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일제히 절벽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저 녀석들 갑자기 왜 저래?”
이 상황에 절벽에 몸을 고정한다고? 추락해 죽느니 총에 맞아 죽겠단 뜻인가?
일행이 당황하는 사이, 여명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마나를 펼쳐 절벽 위를 살폈다.
역시나, 그의 감각으로 뒤틀린 마나가 느껴졌다. 절벽 위에 아직 내려오지 않은 녀석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돼지머리가 아닌 소머리, 혹은 말머리 급.
‘왜 아직 안 내려오고 있는 거지? 설마…’
여명의 의심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녀석이 갑자기 뒤틀린 마나를 내뿜었다. 섬뜩한 감각이 찌르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마법의 전조, 그것도 꽤 대규모 마법이 준비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여태껏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나?’
여명은 고개를 돌려 일행에게 경고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단장님! 녀석들이 마법을 쓸”
그가 경고를 내뱉기도 전에, 절벽 맨 위에서 뒤틀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뛰어! 내려라 !”
목소리에 실린 마나가 배열되며 주문이 완성됐다. 돼지머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일행을 내려다봤다.
수많은 붉은 눈동자가 소름 돋게 반짝이는 순간, 녀석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미친, 저건 또 뭔…”
집단 자살이라도 벌이는 줄 알고 긴장했던 일행의 생각과 달리, 돼지머리들은 중력을 거스르며 느릿한 속도로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조금 전과 비교하면 수십 배는 빠른 속도였다. 땅에 착지하기까지 몇십초면 충분한 속도.
여명은 검을 뽑고 절벽 위를 노려봤다.
“여명? 잠깐…!”
그의 표정을 살피던 성녀가 손을 뻗었으나, 여명은 이미 뛰어나간 뒤였다.
“위험하니까 돌아… 와…?”
성녀는 여명에게 소리치려다가 그대로 입을 벌렸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여명은 돼지머리들과 싸우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 여명은 돼지머리들을 발판으로 삼아 절벽 위로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하강하는 녀석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고, 반항하는 녀석들은 배를 뻥 차서 절벽으로 날아간 뒤, 다시 절벽을 박차고 다른 돼지머리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네다섯 번쯤 반복하자, 그는 어느새 절벽 위에 도착해있었다.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곡예… 아니, 신기였다.
성녀는 절벽 너머로 사라지는 여명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돼지머리들이 땅에 착지한 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아빠 말대로 육체단련도 좀 할걸.”
***
계곡 아래 용병들이 돼지머리와 교전을 시작한 그 순간.
절벽 위에 착지한 여명은 주문을 외우고 있던 소머리 네 마리와 마주했다.
아래에서 올라온 여명을 본 소머리들의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당황 가득한 침묵.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그나마 현실감각이 남아있는 소머리 하나가 반사적으로 권총을 들어 올렸다.
“네놈… 어떻게…?”
그는 의문을 풀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 마지막 질문이었으니까.
다음 순간, 여명은 말도 없이 래밍턴 MH750을 발사했다.
터엉!
탄환이 빛을 만들었다. 정면에서 탄환에 직격당한 소머리가 볼품없이 날아갔다. 남은 소머리 셋은 그제야 마나를 끌어 올렸다.
“죽여!”
“캬아악!”
여명은 녀석들에게 마법을 펼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샷건을 회수하기 무섭게 검에 마나를 실었다.
보급용 철검의 검신을 따라, 푸른 마나가 일렁거렸다.
벌판에서 마주했던 파순의 장풍과 유사한, 유형화된 마나.
유사 초인에 불과한 돼지머리들과 달리, 소머리들은 그 마나가 무엇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검기…! 피해라!”
세 소머리 중 둘이 몸을 날렸다. 녀석들이 있던 자리로, 검기가 쏟아졌다.
검을 떠난 검기가 대기를 가르며 길게 바람 소리를 냈다.
사아아…
잠시 후, 잘린 바람이 다시 이어졌다.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여명은 검을 든 팔을 늘어트리고, 마나를 회수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털석.
미처 검기를 피하지 못한 녀석의 소머리가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이런 미친….”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피한 소머리가 신음을 흘렸다.
이 짧은 시간에 두 마리의 소머리가 참살당하다니. 붉게 충혈된 녀석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너, 너!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다. 천여명! 겨우 신입 용병이 어떻게 이런 실력을…!”
녀석들이 주문을 끌어올리며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여명은 대답도 없이 재차 몸을 날렸다.
대화를 나눌만한 사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녀석들을 정리하고 옥새를 찾으러 가야 했다.
이곳에 없는 말머리와 파순은 필시 옥새를 찾고 있을 터.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런 생각 속에서 여명이 검을 치켜든 순간, 소머리들의 마나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캬 아 악!”
북만주의 침엽수림에서 봤던 바로 그 붉은 광선을 내뿜는 주문.
나름 필살기인 듯싶었지만, 여명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우라간의 손잡이를 꺼내 주문에 대비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쿠구구궁…!!
하지만 그가 우라간의 손잡이를 꺼내든 순간, 계곡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광선을 준비하던 소머리도, 검을 내려찍던 여명도 공격을 멈추고 진동의 원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계곡의 깊숙한 곳, 옥새가 잠들어 있는 동굴.
그곳에서 무형의 마나와 함께 어마어마한 진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벌써 옥새를…?’
이미 늦었단 말인가? 말머리와 파순이 보물을 지키고 있던 어린 용을 벌써 처리했다고?
여명은 다급한 마음을 삼키며 소머리에게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눈앞의 적이 우선.
소머리도 그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었는지, 끌어올렸던 마나를 그대로 내뿜었다.
콰아아아아!
뒤틀린 마나로 이루어진 붉은 광선. 여명은 능숙한 자세로 우라간의 손잡이를 내밀었다.
어째서인지, 동정 운운하는 유니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호막의 효과까지 사라진 건 아닌지, 영롱한 보호막이 여명을 보호했다.
붉은 광선은 여명의 몸에 닿지 못한 채 그대로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뭐?! 어떻”
보호막 사이에서 튀어나온 검이 빛줄기를 그렸다. 단말마를 내뱉던 소머리의 목 위로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졌다.
여명은 쓰러지는 소머리를 확인하지도 않고, 즉시 마지막 소머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망? 도망간다고?’
마지막 남은 소머리는 여명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도망가고 있던 건지, 녀석은 벌써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어진 상태였다.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도망가는 소머리와 절벽 아래를 번갈아 바라봤다.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빨랐다. 여명은 소머리를 내버려 두고 절벽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계곡 아래에서는 용병들이 돼지머리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권몽주 단장이 손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일곱 마리가 넘는 돼지머리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다른 용병들의 상태가 아슬아슬했다.
여명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이이 귓가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는 다리에 마나를 몰아넣었다.
다음 순간, 비각술의 깃걸음을 펼쳐 절벽의 중턱을 박찼다.
여명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절벽 아래로 강하했다. 달빛을 등지고 떨어지는 그의 모습은 모두 시선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손도끼를 휘두르던 김만수, 저주를 준비하던 돼지머리, 그리고 침착하게 적들을 상대하던 권몽주 단장조차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쿵!
땅에 착지하자마자, 여명은 고통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마나를 때려 박고, 절벽에서 한 번 더 높이를 줄였음에도 발목과 종아리뼈가 아작나는 게 느껴진 탓이었다.
‘다리가 재생될 때까지… 1분은 걸리겠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멀쩡해 보였고, 그것만으로 아군에겐 용기를, 적에겐 경계를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성녀는 손뼉이라도 칠 기세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이 새끼! 선배님들을 어떻게 한 거냐!”
여명에게는 다행히도, 1분간 가만히 서 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를 노려보던 돼지머리 중 하나가 달려들어 준 덕분이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광기 어린 붉은 눈동자를 보며, 여명은 안도감과 마나를 담아 철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썩둑, 검기가 담긴 칼에 직격당한 돼지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며 피와 내장을 쏟아냈다.
그의 발치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여명은 손을 까딱이며 돼지머리들을 도발했다.
“…안 덤비고 뭐 해? 양치기들아.”
양치기. 그 단어를 들은 돼지머리들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작은 진실을 담은, 짧은 도발.
돼지머리들은 분노를 참지 않았다. 살기를 숨기지도 않았다. 용병들을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 중 일부가 즉시 발을 돌려 여명에게 달려들었다.
“죽여!”
“우릴 알고 있는 녀석이다!”
“캬아아악!”
도발 한 번 제대로 먹혔네. 여명은 다시 한번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재차 검기를 쏘아내려는 그 순간.
쿠구구구구!!!!
익숙한 진동이 또다시 땅을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진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쩌저저적!
계곡 저편에서 땅이 갈라지며, 계곡 전체에 커다란 금이 생겼다. 금세라도 땅이 무너질 징조.
모두가 경악하는 사이, 이곳에서 가장 상황 판단이 빠른 건 권몽주 단장이었다.
“이런 제기랄, 전원 대피! 대피해! 성녀님! 어서 피하”
하지만 그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징조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콰과과광!!!
계곡의 저편, 동굴이 있는 자리가 폭발했다. 마치 화산이 터지듯, 어마어마한 진동과 함께 바위와 흙먼지들이 비산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할 만큼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지만, 계곡에 있는 모두가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떠오르는 돌과 먼지 사이, 거대한붉은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으니까.
“…옥새를 지키는 용!”
권 단장이 전율하며 소리친 순간,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기꾼드워프새끼. 저게 어린 용이라고?’
여명은 베이스캠프에서 어린 용을 운운했던 다룰마 둔을 떠올리곤헛웃음을 삼켰다.
여기 오기 전에 새로운 조건을 제시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난쟁이 놈의 모가지를 날려버려야 속이 풀렸을 테니까.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지하에서 튀어나온 용은 달빛이 내리쬐는 하늘 위에 멈췄다.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키고, 노란 파충류의 눈동자가 계곡에 모인 사람들을 살벌하게 훑었다.
침입자들을 향해 브레스라도 뽑으려는 걸까? 아니면 마법? 계곡 아래 모인 모두가 침을 삼키며 긴장하던 그 순간.
용의 입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혈족의 징표를 가진 자가 왔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