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60)
을 위한 세계는 없다-560화(560/817)
EP.560 관심, 욕심, 복수심, 그리고 양심. (4)
* * *
***
성녀가 리볼버를 뽑는 순간, 살로메는 방음벽을 한 번 더 시전했다.
탕 – !
총소리를 전부 없애는 건 불가능했지만, 크지 않을 정도까지 소음을 억누르는 건 성공했다.
그래도 혹시 본 사람이 있을까, 살로메는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 안내원과 선수들은 선수촌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살로메는 성녀에게 화를 냈다.
…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어 소리치기 직전, 세티가 성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리 말고 폐를 쏴. 어차피 안 죽으니까.”
할 말이 없어진 살로메는 재빨리 방음벽을 세 겹 더 겹쳤다. 총 다섯 개의 방음벽은 총소리를 아기 숨소리만큼 작게 만들었다.
!!
겸사겸사, 변장한 KGB의 비명소리도 묻어버렸고.
가슴을 부여잡고 꺽꺽거리는 요원의 모습이 얼마나 처량한지, 여명이 잘못 본 거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살로메를 제외한 세 사람은 그딴 연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요원을 둘러싸더니, 어디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커다란 가방에 요원을 욱여넣었다.
요원은 가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꿈틀거렸지만, 세티가 발길질을 하자 그마저도 조용해졌다.
직후, 여명이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가장 가까운 건… 세티가 배정 받은 방인가? 일단 거기로 가자.”
무슨 시체라도 옮기는 듯한 모습. 살로메는 연신 주변 눈치를 보며 일행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선수촌 입장 중에 큰 가방을 옮기는 건 별로 특이한 광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녀와 여명이 함께 다니는 모습이 더 눈길을 끌었으면 끌었지.
아무튼, 방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가방을 열어 요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으엑.”
KGB 요원을 처음 본 살로메는 기겁했다.
몸에 박힌 인공 성물이 번쩍이고, 슬금슬금 솟아오른 촉수가 상처를 재생하는 광경이라니.
여러모로 역겨운 몰골이었지만, 이미 이런 몰골을 본 적 있는 일행은 침착하게 녀석을 깨웠다.
그러니까, 다리에 한 발 더 쐈다.
탕!
총성이 울린 직후, KGB 요원은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부릅 눈을 떴다.
살로메는 그제야 상대가 진짜 요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입에서 쏟아지는 비명을 내뱉는 대신, 떨리는 눈으로 일행의 얼굴부터 확인했으니까.
“성녀… 대체 어떻… 게…?”
곧 상황 파악을 끝낸 요원이 성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성녀는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내뱉었다.
“빨갱이 냄새가 좀 심해야지.”
“….”
요원은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콱 찌푸렸다.
“…우리가 네 어미와 무슨 사이인지 알고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
“너희가 엄마를 납치하고 푸른 쥐를 헤집어 놓은 게 반년도 안 지나긴 했지. 다시 생각하니 더 빡치네. 한 발 더 맞을래?”
“그건 당연한 징벌이었다. 푸른 쥐가 먼저 우리의 명령을 거부했고, 우리는…!”
성녀는 어디 더 지껄여 보란 듯 리볼버의 탄창을 재장전했다.
요원이 입을 다물었고, 철컥-재장전을 끝낸 성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소련이 망한 시점에서 푸른 쥐는 소련과 아무 관계도 없어. 당신들은 이미 조직에서 정리됐잖아?”
“하, 그래, 배은망덕한 너희가 감히 우리에게 반기를 들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조국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지 마라.”
“….”
“조직, 정보, 그 외에 너희 핏줄 속에 흐르는 모든 것…! 어머니의 땅이 살아 숨 쉬는 한, 너희 중 누구도 감히 조국과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다…! 설사 그게 잡종 성녀인 너일지라도!”
그의 목소리에 얼마나 깊은 신념이 담겨있건 간에, 성녀는 그를 비웃었다.
“아하, 그래서 아직도 노멘클라투라의 개로 지내는구나?”
노멘클라투라.
소련 시절에는 공산당의 고급 간부였으며, 소련 멸망 이후에는 신흥 부자가 되어 현 모스크바를 좌지우지하는 특권 계층을 이르는 말.
그들은 조국의 자본을 헐값에 팔아 부를 축적하고, 사회와 경제의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이념을 정면에서 능욕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개라고 불린 게 어지간히도 억울했던 걸까. 요원은 눈에 띄게 분노했다.
“잡종 년이 감히….”
“순종이라서 좋으시겠네요. 어쩐지 턱이 크더라. 삼촌이 아빠야, 아니면 할아버지가 아빠야?”
“….”
“설마 둘 다야?”
듣고 있던 살로메가 인종에 대한 나쁜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성녀는 총을 거꾸로 쥐고 요원의 상처를 내려쳤다.
이번에는 요원도 참지 못하고 끄으윽-! 비명을 내질렀다.
“헛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었는지나 말해. 어? 학생들 상대로 테러라도 일으키려고 했어?”
“….”
요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썹을 치켜뜨고 입술을 꽈악 다문 게, 죽음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그 꼴을 보던 살로메는 조금 의아했다.
혹시, 성녀는 정보를 빼낼 생각이 없는 걸까?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KGB 요원처럼 숙련된 요원에게 고문해 봤자 진짜 중요한 걸 얻을 수 없다는 건 상식 아닌가.
물론, 상식이 있다면 총부터 쏘는 미친 짓은 벌이지 않았겠지만….
요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그녀의 의문이 깊어지는 그때.
조용히 상황을 관조하던 세티가 갑자기 방 밖으로 나갔다. 뭐지?
의아한 살로메와 달리, 성녀는 씩씩거리며 요원을 노려봤다.
“여명만 아니면 여기서 콱 죽여버리는 건데… 운 좋은 줄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성녀도 방 밖으로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뭐야, 진짜 뭐지?
갑자기 홀로 남은 살로메는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여명의 마나를 확인했다.
그녀의 피부 위로 느껴지는 마나는 어떤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잠시 나가 있어.’
마법사인 그녀조차 놀랄 만큼 정밀한 마나.
대체 언제부터 이런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살로메는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 나온 순간 문뜩, 피부에 마나를 문지르는 건 생각보다 야한 일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답을 찾지 못한 그녀는 애써 의문을 삼켰다.
***
일행들이 전부 밖으로 나간 직후.
KGB 요원과 단둘이 남은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담배를 꺼냈다.
“이름은?”
“…날 심문해봤자 원하는 정보는 뽑아낼 수 없을 거다. 꼬마야.”
여명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요원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며 말했다.
“아쉽게도 남는 소련제 담배는 없지만, 미국 주지사도 피는 꽤 비싼 담배다. 이거라도 펴.”
“….”
요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담배를 거부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조용히 담배를 뻐끔거렸다.
이윽고, 그가 담배를 다 피운 직후. 여명은 이번에는 보드카와 잔을 꺼냈다.
요원은 여명이 잔을 채우는 걸 빤히 바라보다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보드카 말고 크바스는 없나?”
“….”
크바스는 호밀빵을 발효시켜 만드는 러시아 전통 음료를 가리켰다. 당연히 그딴 걸 가지고 있을 리 없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크바스는 무슨… 보드카나 먹어.”
“쌩 보드카는 취향이 아니라서… 섞어 마실 거 없나?”
거, 바라는 것도 많네. 여명은 대충 오렌지 주스를 꺼내 보드카 잔에 섞어줬다.
스크루드라이버라 불리는 대중적인 칵테일 레시피.
요원은 따로 감사 인사도 없이 천천히 잔을 비운 뒤, 딱! 소리 나게 빈 잔을 내려놨다.
“좋군. 가는 길이 섭섭하진 않겠어.”
“….”
“잡종 년과 달리 예의를 아는 꼬마로군… 그럼 이제 죽여라. 술과 담뱃값이다. 저항 없이 죽어주지.”
한껏 분위기 잡은 걸 오해한 건가. 여명은 다시 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죽는 건 됐고, 이름이나 말해.”
“…죽어주는 건 쉽지만, 그 이상은 들어줄 수 없다.”
“그건 나중에 가서 확인하고, 이름이나 말해. 거, 여자 이름도 아닌데 여러 번 묻게 하네.”
“….”
요원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디미트리. 내 이름은 디미트리 게오르기예비치 이바노프다.”
“디미트리라고 부르면 되나?”
“마음대로 불러라. 왜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KGB를 상대로 배드캅 굿캅 놀이를 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정말로 무슨 생각이냐? 천여명.”
여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말 대신 행동으로 디미트리를 놀라게 했다.
그러니까, 보란 듯 손에서 무장 혈청을 뽑아냈다.
그의 피로 만들어진 붉디붉은 낫과 망치.
그게 누가 사용하는 무기인지 깨달은 디미트리는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 붉은 별…?”
무장 혈청을 회수한 여명은 다시 한번 보드카 잔을 채우며 말했다.
“내 소개는 이걸로 충분한 듯한데… 대화 좀 하지.”
“…K, KGB를 공격한 너와 할 말은 없다. 주가시빌리와 무장 혈청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지 마라!”
“아까는 어머니의 땅이 살아 숨 쉬는 한 모두 조국 아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핏줄의 문제다. 너 같은 외부인이 조국의 힘을 훔쳐 쓴다고 해서, 우리 조국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은 품에서 작은 훈장 하나를 꺼냈다.
황금빛 월계관 안에 적색 깃발이 휘날리는 적기 훈장.
다른 사람들은 그저 소련의 훈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디미트리는 달랐다.
그는 우선 월계관이 황금색이란 사실에서 이게 1943년 이후에 변경된 적기 훈장의 디자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음으로 적기 안에 적혀있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필체를 보고 대조국 전쟁 중에 찍힌 훈장임을 깨달았고, 훈장의 세밀함에서 적어도 원수급에게 지급된 훈장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건 훈장에 담긴 마나였다. 그가 가진 인공 성물을 뛰어넘은 막대한 마나.
대조국 전쟁을 치른, 원수급 인물이 받은 훈장… 그것도 성물급?
그 순간, 그는 이 훈장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고 경악했다.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훈장을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거늘.
“누, 누구에게 이걸….”
디미트리가 훈장을 낚아채려 하기 전에, 여명은 다시 훈장을 회수하며 대답했다.
“이 귀한 걸 누구에게 받았겠어? 주인에게 직접 받았지.”
여명은 거짓이 아니라는 듯 훈장의 리본을 펴고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
훈장의 마나는 반발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제 주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
디미트리는 멍하니 훈장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무릎을 꿇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감히… 네가 그분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거냐?”
여명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보드카 잔을 들어 스트레이트로 잔을 비운 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디미트리. 그분이 고작 만났다고 훈장을 주실 분인가?”
“….”
“내가 그분의 손이다.”
그분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디미트리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가 KGB란 조직에 속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렇게 디미트리가 적기 훈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다음 순간, 마치 노린 것처럼 방문이 열렸다.
“부르셨어요?”
“….”
방 안으로 들어온 건 금발의 여인과 익숙한 얼굴의 러시아 청년이었다.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방문이 다시 닫힌 순간, 두 사람의 변장이 풀렸으니까.
소녀는 자신의 기다란 귀를 드러냈고, 슬라브계 청년은 피부가 녹아내리며 흉측한 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별, 그분의 적기 훈장, 그리고 엘프와 소련제 인조인간….
디미트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박힌 인공성물을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KGB 특무 요원 디미트리가 서기장 각하의 손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