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62)
을 위한 세계는 없다-562화(562/817)
EP.562 관심, 욕심, 복수심, 그리고 양심. (6)
* * *
***
한국의 올림피아 선수촌, 남성 초인용 건물.
외부와 통행이 차단된 복도에서, 무장한 경비원 다섯이 숙소 문을 두들기며 물었다.
“천여명 선수, 계십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경비원들이 문을 둘러싼 채로 자세를 잡는 순간.
문 너머에서 우당탕! 무언가 쓰러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겸사겸사 뭔가 질질 끄는 소리도.
그리고 잠시 후,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예, 천여명 선수, 경비팀에서 나왔습니다.”
-경비팀에서? 무슨 일이십니까?
“저, 그게 총소리를 들었다는 신고가 두 건 연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 총소리… 죄송합니다. 수련 중에 실수를 좀 해서요.
총소리와 실수. 이어지지 않는 단어였지만, 경비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자세를 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초인의 말 아닌가.
천여명이 마약을 빨고 알몸으로 춤을 춰도 그를 막기보단 기자들을 막아야 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수련은 되도록 수련실에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예,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선수촌과 경기장 사이에 있는 수련실로 가시는 게 귀찮으시다면, 선수촌 내부에도 작은 수련장이 있습니다. 혹시 안내가 필요하면 호출해 주십시오.”
의례적인 말을 남긴 경비들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때쯤.
문 안에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각자 다른 소리가 이어졌다.
“거 봐,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
조금 전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주제에, 너스레를 떠는 성녀.
“읍, 으읍, 읍!!”
눈과 귀, 그리고 입은 물론이고, 팔다리까지 묶인 채 바닥에서 몸을 비트는 모낙랑.
“헥, 헥….”
마지막으로 혀를 쭉 내민 채, 숨넘어가기 직전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는 수인까지.
“…개판이네.”
그들을 보며 긴장이 탁 풀린 여명은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모낙랑은 그냥 오고 싶어서 왔고, 개… 아니, 늑대 수인은 그런 모낙랑을 이용해 나를 만나러 왔고, 마지막으로 너는….”
성녀는 보란 듯 가슴을 쭉 내밀며 소리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왔지!”
“….”
“그 표정 뭐야? 진짜야.”
여명이 뚱한 시선으로 물었다.
“…다섯 신께 맹세할 수 있어?”
“어… 이런 사소한 일에 맹세할 정도로 성녀의 맹세가 가벼워 보이시나요?”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까는 그 모습이 어찌나 뻔뻔한지, 만주에서 처음 만나던 시절이 떠오를 정도.
결국, 인내심이 끊어진 여명은 손을 들어 그녀의 엉덩이를 짝!! 때렸다.
기껏해야 꿀밤이나 먹을 줄 알았던 성녀는 깜짝 놀라 소파 위로 쓰러졌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아팠다.
“저, 저기, 여명? 이거 진짜로 아픈데?”
“아파하라고 때린 거니까.”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총집에서 리볼버를 빼앗았다.
“압수. 병 고칠 때까지 총은 압수입니다.”
“아, 왜!”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 다른 건 몰라도 오늘은 일반인까지 쐈잖아.”
여명이 모낙랑을 가리키며 말하자, 성녀가 갸웃거렸다.
“뭐? 일반인? 어딜 봐서 저게 일반인이야?”
“…그렇다고 초인도 아니지. 일단 치료부터 해줘. 저러다 과다출혈로 죽겠다.”
“…?”
성녀는 진짜 모르겠다는 듯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여자, 겉이랑 다르게 천족이잖아. 영약을 한 트럭 먹은 노인네들보다 튼튼할 텐데, 저 정도 출혈로는 절대 안 죽어.”
이번에는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릴 차례였다. 성녀는 자세를 다잡으며 물었다.
“어? 천족이 뭔지 몰라?”
몰랐다. 그가 아는 천사님은 그를 봉인했던 케프리뿐이었고, 천족에 대한 교육이나 다큐멘터리도 없었으니까.
여명이 대답하지 않자, 성녀는 입가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 똑똑이가 모르는 것도 있었네? 아니, 얼마 전까진 평범한 청소부였으니까 모르는 게 딱히 이상하진 않나…?”
“….”
“귀여운 청소부 씨? 이 누나가 알려줄까?”
여명은 대답 대신 성녀의 볼을 꼬집었다.
성녀는 큭큭 웃다가, 모낙랑이 펄떡! 몸을 비틀 때쯤 설명을 시작했다.
“천족은, 음, 간단히 말해 억수로 운이 좋은 인간이야.”
“…운이 좋다고?”
“여명, 자연적으로 모인 마나가 흐르는 걸 본 적 있어?”
“마탑에서 비슷한 걸 보긴 했지.”
여명은 마탑의 지맥을 떠올리며 말했다.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 마탑이나 성도, 혹은 엘프 숲이 대표적으로 자연적으로 마나가 흐르는 곳이야. 이걸 마나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현상이 꼭 지역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야.”
“…설마 동식물에도 적용되나?”
“응. 가끔 마나의 길이 동식물들에게 생기는 경우가 있어. 그리고 인간도….”
“…동물이지.”
성녀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은 엘프를 문자 그대로 잡아먹던 카를로스와 칠레를 떠올렸다.
“설마… 인간 영약?”
무시무시한 말을 들은 성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천족은 별부리미 꽃처럼 아예 태생부터 마나를 머금는 영약과 달라. 그냥 육체에 마나가 흐르는 길이 뚫렸을 뿐이거든. 먹어 봤자 마나의 길이 끊길 뿐. 영약처럼 몸으로 흡수하는 건 불가능해.”
“…아니, 잠깐. 그러면 그걸 왜 천족이라고 부르는 건데?”
“먹을 순 없지만, 다른 건 가능하니까.”
“….”
“마나의 길이 뚫렸다는 건 주변에 마나를 내뿜는단 소리거든. 그리고 마나가 풍부할수록… 초인이 될 확률도 올라가고, 수련도 잘 되지.”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여명은 조금 불쾌한 생각을 떠올렸다.
지구와 만나기 전에는 중세나 다름없었던 아샤에서, 초인은 가문과 국가를 넘어 아샤인 전체의 지상목표였다.
그런 초인을 만들고, 더 강하게 해줄 수 있는 인간 토템(?)이라니.
“…가문과 왕국들이 천족을 두고 어마어마하게 싸웠겠네.”
“싸움뿐이면 다행이지. 문헌을 보면 전쟁까지 간 기록도 흔해.”
전쟁이라. 여명은 아직도 바닥을 기는 모낙랑을 보며 말했다.
“천족이란 이름을 붙인 건 성도인가?”
“와, 어떻게 알았어? 옛 다섯 교단은 분쟁을 멈추기 위해 그들을 인간이 아닌 신의 축복을 받은 천족이라고 이름 붙인 뒤, 전부 성도에서 관리했어.”
“…분쟁의 씨앗을 멋지게도 처리했네.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겐 꽤 미움받았겠는데?”
“미움 정도야, 뭐… 현대 미국도 미움받지만 아무도 뭐라고 안 하잖아? 반항하는 사람은 전부 성기사단과 성검의 권위로 찍어 눌렀지.”
“….”
“그리고 애초에, 천족이란 사람들 머릿수가 적어서 크게 상관없었어. 아샤 전체를 봐도 백 년에 한두 명 정도? 여태껏 지구에서 나온 천족도 두 명뿐이고… 아니, 이 아줌마까지 합치면 세 명인가.”
거기까지 말한 성녀는 발로 모낙랑을 쿡쿡 찔렀다.
“이런 게 천족, 그것도 세티의 어머니라니….”
“….”
“어떻게 그 부모들 아래에서 세티 같은 애가 태어난 걸까…? 나도 그렇지만, 부모님 안 닮는 것도 복이라니까.”
나도 그렇지만? 여명은 모리네와 성물지기를 동시에 떠올렸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의 딸인데.’
자칫 성녀를 자극할까, 속으로 생각을 삼킨 여명은 애써 말을 돌렸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수인부터 깨우자.”
“잠깐, 내 총은?”
“….”
“민간인 쏜 거 아니잖아. 돌려줘야지.”
성녀는 여태껏 설명한 대가를 받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쓰읍-여명이 이대로 리볼버를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는 가운데, 성녀가 손가락을 베베 꼬며 덧붙였다.
“뭐, 나는 다른 총을 줘도 되긴 하는데….”
“….”
여명은 성녀에게 리볼버를 돌려줬다. 그러니까, 총을 거꾸로 쥐고 그녀의 등을 마구 때렸다.
***
개… 아니, 늑대 수인은 재생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제미니 시티의 거대 기업들이 사용하는 폭동진압 샷건은 채 1분도 안 돼서 재생할 수 있었는데.
대체 무슨 총을 쏜 건지 모르겠지만, 총알이 박힌 자리가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상처가 욱씬거리는 게,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 같았다.
-아, 수인은 치유하기 어려운데.
육체의 죽음이 다가오니 정신마저 흐릿해지는 걸까?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쏜 미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유 기적 쓰지마? 왜?
-그 포션 비싼 건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이 따스해졌다. 수인은 한참 동안 그 따스함에 몸을 맡겼다.
아, 죽음이란 이리도 따듯한 것이었나!
죽음이 차갑고 어두운 것이라던 선배들의 말이 거짓이었다니. 수인은 최후의 깨달음 속에서 천천히 눈을-감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의 복부에 소독용 빨간약이 부어졌으니까.
깨, 깨갱!!
늑대 수인은 상처에서 치솟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는 몸짓이 어찌나 컸는지, 털이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뭐, 아무튼.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제야 자신이 치료받았음을, 그리고 치료 해준 장본인이 자신에게 총을 쏜 미친년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무슨 성녀 코스프레라도 하는 건지, 안대를 찬 미친년.
“이, 씨발 개 같은 년이-”
수인은 당장 손톱을 뽑고 내려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발길질이 그의 머리를 후려 찼다.
“커헉!”
깨갱 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두개골을 강타했다. 수인은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발차기의 주인을 바라봤다.
그가 원래 이곳에 온 목적, 천여명.
녀석은 차가운 황금빛 눈동자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질문하고, 넌 대답하고. 그 외의 다른 행동은 허락하지 않는다.”
“좆 같은 소리를-컥!”
천여명은 한 번 더 그의 얼굴을 찼다.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공격이었다.
커헉, 컥. 바닥에 쓰러진 늑대 수인은 피가 섞인 이빨을 내뱉었다.
“넌 누구냐?”
“나, 난… 재글랑. 황색 털 부족의 전사다!”
“…황색? 네 털은 검은색인데?”
“외가 쪽이 검은 털이다…! 이 털 차별주의자 놈아!”
“….”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쓰러진 늑대 수인의 뒤통수를 후려친 여명은 질문을 계속했다.
“날 찾아온 이유는?”
“네, 네놈의 스승과… 네놈이 휘두른 무술… 때문이다….”
“…위선과 오만?”
옛 황금 씨족의 무술이라더니, 그새 그걸 알아본 수인이 있었나.
여명은 녀석의 뒤통수를 꽈악 붙잡은 채로 말했다.
“끊어진 혈통의 무술을 누가 쓰건, 그게 무슨 상관이지?”
“끄, 끊어지지 않았다!”
“…뭐?”
“황금, 씨족은! 살아있다! 너와, 너의 스승은, 그분들의 것을, 찬탈한-도둑놈이고! 한국 정부만 아니었어도, 너 같은 건 당장이라도…!”
소리친 수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명을 노려봤다. 자신만의 논리와 신념으로 가득 찬 짐승의 눈동자.
여명은 그 눈동자 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읽어냈다.
한국 정부와 일하는 수인들이 단순히 종말 교단 휘하 일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를 황금 씨족이 있다는 것.
‘황금 씨족 뒤에는 분명… 종말 교단이 있겠지.’
한국과 손을 잡은 이상, 교단도 그의 적이었다. 하나하나 피를 쥐어짜도 모자라지 않을 적.
그들을 뒤흔들 계획을 떠올린 여명은 곧바로 혀를 놀렸다.
“패배자가 말이 많군.”
“이 새끼가…! 뭐라고 했냐!”
“못 들었나? 황금 씨족 말이다. 내 스승에게 학살당한 패배자들 아닌가? 살아있었으면 적당히 숨어서 목숨을 부지할 것이지. 꼭 비열한 짐승의 티를 내는군.”
“비열하다고…?”
그러자 수인은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이를 드러냈다. 여명은 해보라는 듯 녀석의 뒤통수를 꽉 붙잡고 말했다.
“그럼, 비열하지. 모낙랑을 이용해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날 협박할 생각 아니었나? 때마침 베팅 조작 스캔들이 터졌으니 타이밍도 딱 좋고… 이게 비열한 게 아니면 뭐지? 응?”
“…닥쳐!”
“이거 원, 수인이 아니라 기레기 새끼가 따로 없어. 이빨과 발톱이 아까운데, 차라리 뽑아버리는 건 어때? 발톱 뽑힌 발로 무릎 꿇으면 내가 너희 부탁을 들어 줄지도 모르잖아?”
수인은 그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녀석은 발톱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여명이 그의 팔을 잡아 그대로 꺾어버렸으니까.
“컹, 컹!”
비정상적인 위치로 돌아간 연골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는 가운데, 여명이 수인의 귀에 속삭였다.
“가서 너와 너희 비열한 씨족에게 전해라. 뒤에서 너희가 무슨 지랄을 하건, 난 승자의 제자로서 이 무술을 마음껏 사용할 거라고.”
“크, 크으윽…!”
여명은 그대로 팔을 뜯어내는 대신, 녀석의 머리를 쾅! 짓밟으며 말했다.
“아, 이것도 추가하지. 도전이라면 언제든 받아주마. 수인의 방식이건, 인간의 방식이건 상관하지 않고.”
재글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명이 그대로 녀석의 목을 밟아 기절시켰으므로.
***
재글랑의 정신줄이 끊어진 직후.
조용히 구경하고 있던 성녀가 박수를 쳤다.
“와,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여명은 연기를 참 잘하는 거 같아. 완전 나쁜 놈 같았다니까?”
“….”
“근데, 코르부스 허락도 없이 수인들과 엮여도 되는 거야?”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로프로 재글랑을 꽁꽁 포장하며 대답했다.
“스승님은 아카데미에 계시잖아. 괜찮아.”
“하긴… 코르부스가 갑자기 한국에 날아올 리도 없고, 문제는 안 되겠네.”
여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모낙랑을 묶은 줄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눈과 귀마저 전부 막힌 그녀는 생선처럼 바닥에서 펄떡이고 있었다.
“…장모님을 이렇게 만들다니. 여명은 진짜 나쁜 남자가 맞을지도.”
“네가 묶었잖아.”
“난 눈이랑 귀랑 입만 막자고 했는데? 아예 묶어버리자고 한 건 너야.”
“….”
그건 그랬다. 하지만 여명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사위에게 최음제를 먹이려는 장모를 어떻게 내버려 두겠는가?
여명은 오물을 만지는 심정으로 모낙랑을 숙소 구석으로 치운 뒤, 수인을 챙겨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적당한 염동력으로 녀석을 붙잡고, 그대로… 투척.
염동력과 밤의 어둠에 휩싸여 날아간 수인은 모두 느릿느릿하게 선수촌 수풀 사이에 추락했다.
곧 옆에서 구경하던 성녀가 말했다.
“저 녀석, 내가 성녀라는 건 눈치챘으려나?”
“…절대 아닐걸.”
“왜? 치유 기적 안 써서? 하지만 안대를 봤…”
“…밤 중에 남자 방에서 총질하는 여자가 성녀라고 하면 믿겠어?”
할 말이 없어진 성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사이 여명은 성녀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 가면서 이… 모낙랑도 숙소 주변에 버려두고.”
“응? 싫은데?”
“싫다고…? 왜?”
성녀는 대답 대신 은근슬쩍 그에게 다가와 가슴과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조금… 아쉬울 거 같아서.”
“…무슨 기회?”
“장모님이 계시는 숙소에서 할 기회. 이런 기회가 또 올까?”
“….”
“난 아니라고 보는데… 어때?”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는….”
“…뭐 어때, 방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명이 모낙랑을 바라보는 사이, 성녀의 손이 살금살금 그의 배꼽에 닿았다.
“그리고… 총 아직 안 돌려줬잖아?”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간질거리는 손가락.
여명은 입술을 꽉 깨물며 머릿속으로 애국가를 외웠다. 하지만 녹색 신께서 가호하시니, 결국, 그의 이성은 거기까지였다.
***
다음 날 새벽.
개성 공항 방향에서 내려온 두 마리의 새가 선수촌 하늘을 가로질렀다.
두 마리중 하나는 한국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거의 강아지만 한 까마귀였고.
또 한 마리는 무슨 시조새처럼 특이하게 생긴 연녹색 깃털의 새였다.
여러모로 눈길을 끄는 한 쌍이었으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선수촌의 새벽은 연한 어둠으로 두 새를 감춰주었다.
아무튼, 한동안 선수촌 하늘을 빙빙 돌던 두 새는 어느 순간 남성 초인 숙소로 날갯짓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새들은 이윽고 목적지를 찾은 듯, 커튼으로 가려진 한 숙소의 창문 위에 내려앉았다.
연녹색 시조새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여기 맞지? 맞아야 해. 나 더 굶으면 변신 풀리고 다 좆되는 거야.]“여기 맞소. 그리고 배고픈 건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그대 탓이니 징징거리지 마시오.”
버럭 대답한 까마귀는 능숙하게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걷었다가…
“오, 이런.”
뭔가를 보고 재빨리 커튼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 그래?]“…조금 있다가 와야겠소.”
[조금?? 대체 왜???]“음… 제자는 내 생각보다 훨씬 어른이었소.”
[뭔 개소리야? 원래 어른이잖아?]“아무튼, 그런 일이 있소. 좀 나중에 옵시다.”
[그 나중이 언젠데?!]“거, 모르겠구려. 나도 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까마귀가 창문을 떠나자, 시조새는 기진맥진하게 뒤를 따라갔다.
[아, 진짜… 나 변신 풀릴 거 같다고….]안타깝게도, 그녀의 배고픔이 해소되는 건 해가 뜨고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