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66)
을 위한 세계는 없다-566화(566/817)
EP.566 막간 – 잠든 까마귀의 초상
* * *
까마귀는 과거의 꿈을 꿨다. 악몽이었다. 행복한 악몽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마음은 상처받으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누가 했던 말이더라. 바기달 람파? 오스카 와일드? 아니면 황금 눈?
기억나지 않는다.
악몽은 장마처럼 차갑게 기억을 짓누르며 모든 걸 흐릿하게 만든다. 까마귀의 젖은 기억이 무겁게 깃털을 타고 흐른다.
***
‘우리는 짐승이오.’
예, 황금 눈. 당신이 옳았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도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예상보다 훨씬 멍청한 짐승이었습니다.
***
부리를 열어 숨을 헐떡인다. 찢어진 감정을 삼킨다. 수인에게는 옷이 없기에 나는 모자나 두건 속에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흑요석 같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뒀다.
‘참 먹음직스럽게도 우는구나.’
털 달린 녀석, 회색 털을 자랑하는 곰이 나의 눈을 보며 말했다. 녀석이 쪽쪽 빨고 있는 뼈에서는 부모님의 냄새가 났다.
‘어디, 맛 좀 볼까.’
녀석은 뼈로 된 감옥을 열어 나를 꺼냈다. 푸드득-날개를 흔들어 반항했으나, 무의미했다.
이빨 사이로 떨어지는 침, 무저갱처럼 어두운 녀석의 입.
처음으로 마주한 죽음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른 손에 막혀 다시 눈을 떴다.
‘이 까마귀는 내 몫이오.’
조심스레 눈을 뜨자, 황금색 눈과 마주했다. 제자를 닮은, 참으로 그리운 눈.
‘예? 저기, 가장 큰 놈을 드시지 않고 어찌….’
‘내가 뭘 먹건, 그대가 정할 일은 아니오. 아니면 나랑 먹이를 두고 겨루시겠소?’
그가 으르렁거리자, 곰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도망가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부모님의 집을 울리는 가운데, 젖은 추억 속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제자와는 다른, 지독할 정도로 뚜렷한 눈동자.
‘이름이 무엇이오?’
‘…검은 날개.’
‘맛없을 것 같은 이름이구려. 차라리 종으로 쓰는 게 낫겠소.’
‘….’
‘맛없는 아이여, 내 소개를 하겠소. 나는 위대한 황금 씨족의 일원이자, 이번 대 갈림길을 수호하는 황금 눈이오.’
추억은 썩은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
‘감히 깃털 달린 것을 제자로 삼겠다고!’
원로… 잡아 먹히기엔 너무 강하고, 젊은이라기엔 너무 늙어버린 늑대가 소리쳤다.
황금 눈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일족에서 갈림길의 재능을 가진 놈이 하나도 없소. 나보고 어쩌란 거요?’
‘깃털 달린 것들은 먹이다! 감히 먹이에게 우리의 유산을 물려주려 하다니!’
그러자 털 뭉치들이 이를 드러내며 호응했다. 전통보다 소금을 더 좋아하는 것들의 하울링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이어진 황금 눈의 말이 모든 하울링을 끊어버렸다.
‘배가 고프구려. 형제들이여, 누가 먼저 식탁에 오르시겠소?’
***
우리의 선조께서는 초대 용사의 으뜸가는 아내였소.
저 초원 밖의 인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용사에게 가장 사랑받은 아내의 후손이라고 자부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라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서 만든 거짓말.
물론, 우리의 조상께서 신이 직접 선택한 성녀보다 고귀하진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고귀함과 사랑은 다른 것 아니겠소?
명예, 열정, 활기, 욕망! 우리가 물려받은 그것들이 어디서 왔겠소?
그래서 초대 용사는 우리의 핏줄을 사랑하셨소. 그게 우리가 저 허접한 제국이나 산맥이 아닌 드넓은 초원을 물려받은 이유라오.
저기, 저 지평선에 깔린 초원을 보시오.
생명과 활기로 넘치는 땅… 참으로 사랑스럽지 않소?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땅 아니오? 나는 이곳을 볼 때마다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소.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 그런 사랑을 느끼는 건 나뿐이구려.
나도 알고 있소. 아주 잘 아오. 이게 참 오만한 말이라는 거.
하지만 못할 건 또 무엇이오? 검은 날개, 어차피 그대만 기억할 터인데.
멍청한 동족들은 처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 하질 않소. 명예는 흐려지고, 역사는 잊혔소….
그래도 좌절할 필요는 없소. 이제 곧 초원의 먹이가 줄어들 테고, 그때가 오면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부름이 아니라 명예라는 걸.
그때가 오면, 우리는 짐승에서 벗어나, 명예를 아는 후손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언젠가 돌아올 그분 앞에서… 여전히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
‘흠, 왜 그대를 선택했느냐고? 그야… 그대는 절대 족장이 되지 않을 것 아니오.’
황금 눈.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죽는다. 시간 앞에서 만물은 죽는다. 가장 강대한 수인, 이제는 희미해진 마지막 혈통의 증인이자 갈림길의 수호자조차 죽는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시체를 먹지는 못했다.
검은 날개, 그의 제자가 시체를 불태웠으므로.
누군가는 시체를 독점하기 위해서라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단순히 깃털 달린 놈의 복수라고 말했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
털, 깃털, 비늘, 맨 피부.
대초원에 네 개의 계급이 생기고 백여 년.
초원은 더 이상 모든 수인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곧 깃털 달린 것들과 비늘 달린 것들이 손을 잡았고, 털 달린 것들은 그들에게 전쟁을 선언했다.
내전이었다.
***
초원의 지평선 위, 수백여 구의 시체가 쌓여있다.
개중 몇몇은 잠든 것처럼 평안한 자세로, 또 몇몇은 끔찍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죽은 시체들 사이에는 어떠한 명예도, 존엄도 없었다.
오직 뼈가 녹고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뿐.
죽은 자들은 말이 없었고, 산 자들은 먹을 게 많아 행복했다.
***
저 머나먼 땅에서 키 작은 드워프들이 겨자 가스에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병신들은 겨자에 절인 드워프를 먹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
에이전트 레드, 흔히 고엽제라 불리는 독의 해독제를 찾기 위해 엘프들이 초원으로 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먹히기엔 너무나 깊은 증오를 품은 엘프가 있었다.
데메론드.
내전에 지친 우리는 그가 피로 덮인 치료제를 들고 초원을 떠날 때까지 건드리지 않았다.
멍청이들은 엘프를 먹지 못 했다며 아쉬워했다.
***
어느 날, 가장 멍청한 녀석조차 내전이 너무 길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
‘우리에게 남은 건 둘 중 하나다. 내전으로 몰락하던가, 하나가 되어 인간들을 몰아내던가!’
지능 떨어지는 털 뭉치들이 소리친다. 미래의 까마귀가 대답한다.
병신들아. 우리는 제네바 협약에 싸인한 적 없어.
헤이그 협약도, 제네바 의정서도 전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란 말이다.
까마귀의 외침은 허무하게 흩어진다. 역사에 파묻힌 모든 학살이 그러했던 것처럼.
***
초원의 누구도 지구가 얼마나 강한지 몰랐다. 오히려 너무 약하지 않길 바랐다.
강한 외부의 적이야말로, 내부를 하나로 만드는 법이었으니까.
***
가장 용맹하고, 가장 굶주린 것들이 차원문을 넘었다. 스스로 현명하다 자부하는 씨족들이 꾸민 짓이었다.
그들의 바람대로, 우리 씨족은 현장에서 329명을 잡아먹었다.
지구의 아인종 평등 운동이 무너지고, UN 인권 협정이 끝장났다. 우리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
‘식인을 저지른 짐승에게 줄 수 있는 건 살처분뿐이다.’
리처드 닉슨의 연설과 함께 첫 번째 군대가 차원문을 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전차는 맛있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
위대한 거인의 천막은 무수한 늑대 수인들의 성지다.
마왕의 뼈라 불리는 거대한 뼈를 기둥 삼아 온갖 가죽들을 덮어 만든 이곳은 한때 모든 수인들이 순례를 오던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곳에 들린 건 털 달린 자들 중에서도 소수에 불과했고, 깃털을 가진 수인이 들어온 건 거의 수백 년만이었다.
‘검은 날개, 때가 왔다. 깃털 달린 것들에게 동맹을 제안해라.’
‘이 미친 짓에 내가 찬성하리라 생각하시오?’
‘적어도 반대할 수도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이미 시작된 일이다. 모든 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너의 스승이 그리 바라던 일 아니더냐?’
‘….’
‘가라. 너를 일족으로 받아 준 그분의 이름으로.’
***
울부짖는다. 털 달린 것도, 비늘 달린 것도 평등하게 울부짖고 있다.
그 누구도 헬기 프로펠러 소리와 총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가운데, 도망치는 모두가 울부짖는다.
도망쳐라. 도망쳐.
그들의 머리 위로 헬기의 기관포가 쏟아진다. 오직 살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금속이 뼈와 살을 터트린다.
대량 학살을 위해 고안된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다. 한때 아름다웠던 초원 위에 남는 건 거대한 성조기뿐이었다.
***
위대한 붉은 상아와 그의 부족들이 전멸했다. 탈출도, 협상도 거부한 채 조상이 남긴 요새에 몸을 숨긴 대가였다.
전투기 편대가 그들을 찾아갔고, 생존자는 없었다.
폐허를 확인한 모두가 폐허 위에 남은 성조기를 보며 공포를 느꼈다.
***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황금 씨족이 죽은 짐승처럼 머리를 축 늘어트린 전차 위에서 소리쳤다. 수인들의 환호가 벼락처럼 이어졌다.
‘모든 아이와 일족들을 모두 동굴로 후퇴시켜라! 좁은 곳에서 싸운다면 우리는 결코 지지 않는다!’
후퇴를 전략처럼 말하는 법. 멋진 화법이었다.
털, 깃털, 비늘, 심지어 맨 피부의 수인들조차 황금 씨족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고엽제와 겨자 가스가 뭔지 배운 검은 날개는 알았다. 저건 거짓 희망이라는 걸.
***
‘항복해야 하오.’
‘이 패배주의자. 그러고도 네가 그분의 제자냐?’
‘이대로 가면 다 죽소.’
‘동굴에서 승전보가 오고 있다. 우린 아직 지지 않았어!’
그날, 까마귀는 설득을 포기했다.
***
지구인들은 번역 마법까지 써가며 항복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동족들은 그것을 나약함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거절했다. 그리고 지구인들은 동굴 속에서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온갖 무기를 실험했다.
폭발, 화염, 독가스.
안전한 동굴은 지옥이 되었다. 아이도, 전사도, 먹이도 모두 평등하게 목숨을 잃었다.
***
미군이 한 종족을 토벌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가?
정답은 일 년이었다.
첫 탱크가 차원문을 넘고 고작 일 년 만에.
초원 중심부의 대 동굴을 제외한 모든 동굴에서 연락이 끊겼다. 눈과 귀가 막힌 우리는 누가 항복했고, 누가 전멸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대 동굴에 모여든 수많은 일족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비록 승리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위안이었지만.
황금 씨족들은 그 사실에 사죄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동굴 밖으로 나가 전투를 벌였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그래, 나의 일족은, 나의 스승이 사랑하던 종족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 슬퍼하지 않았다. 약자는 죽고, 강자는 사는 것이 수인이란 종족의 뜻 아닌가.
그 뜻을 섬긴 나는 기꺼이 동족과 죽으려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
‘싸우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
씨족은 그렇게 말했다. 함께 동굴 밖으로 나갔던 비늘 달린 동포의 내장을 파먹으며 말했다.
‘우린 지지 않았다. 먹이가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지 않았나?’
씨족을 믿고 모인 깃털 달린 것들과 비늘 달린 것들.
나는 씨족이 뜯어먹는 어린 깃털을 보며 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마, 스승님께서 남겨주신 무언가였으리라.
‘아니, 우린 졌소.’
‘패배주의자, 그만 헛소리하고 먹어라. 내일 미 주둔지를 습격할-’
‘우린 졌소.’
검은 날개는 그날 처음으로 동족을 죽였다. 하나의 씨족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계속.
***
그녀가 손에 들고 옮길 수 있는 머리는 19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다행히, 미군은 19개의 머리로도 만족했다.
그들은 스탈린과 중국이 멀쩡한 상황에서 이런 ‘쓰레기 종족’을 처리하는데 귀한 미군을 소비하는 걸 꺼리고 있었다.
‘국내 여론과 백악관은 핵무기 사용을 염두하고 있었다. 딱 좋은 타이밍에 그만둬서 다행이군. 넌 너희 종족을 살렸다.’
미군은 그녀의 배신을 기꺼워하며 학살을 멈추고, 죽은 자들을 ‘전범’으로 만들었다.
그건 수인이 멸종해야 할 종족에서 조금 ‘교화’가 필요한 종족으로 격상되었단 뜻이기도 했다.
그래, 그녀의 종족은 살아남은 것이다. 같은 종족을 배신한 배신자에 의해서.
***
수치스러운 패배에는 책임자가 필요했다. 털 달린 것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게 그녀의 탓이라며 그녀를 저주했다.
‘배신자. 너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더 좋은 조건에서 평화 협상할 수 있었어.’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멍청이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믿는 걸 바꾸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향을 떠났다. 멍청이들 때문에 가족을 잃은 종족들이 그렇게 믿고 위안을 얻기를 바라면서.
***
하얀 비늘 일족의 돌 투르는 부서진 돌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지평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낡은 나무집 창문 너머에서 책을 읽는 까마귀가 보였다.
목표물을 확인한 그는 떨리는 호흡을 삼켰다. 어째서일까, 공장에서 과로로 죽은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뿔이 아름다웠던 그녀는 무려 고등학교까지 나온 엘리트 수인이었다.
수인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하다못해 드워프만 되었어도 공장에서 죽을 필요가 없는 엘리트.
그녀를 죽인 개좆 같은 공장주를 씹어먹은 뒤, 그는 그녀가 종종 해주던 말을 떠올렸다.
어떤 배신자 때문에 수인들이 이렇게 된 거라고.
배신자가 멋대로 항복하지만 않았어도, 수인도 어엿한 종족으로 취급될 수 있었을 거란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배신자 또한 그녀를 죽인 원흉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배신자를 찾아 세계를 떠돌았고, 드디어 찾아냈다.
‘저주받을 까마귀 년….’
그는 소총을 겨눴다.
단 한 발이면 충분했다. 옛 초원의 일족들이 증명한 것처럼, 아무리 대단한 수인이라도 머리에 코끼리 사냥용 대구경 탄환이 박히면 뒤지는 법이었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
‘거, 치료해 준다고 해도 지랄하는 건 처음 보네요.’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저 친구도 살리지 마요?’
그녀를 쏜 비늘 덮인 동족은 그녀가 쓰러지는 걸 보자마자 자신의 가슴을 쐈다. 멍청한 짓이었다. 자살할 거면 머리를 쐈어야지.
‘저 친구는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그쪽도 살아요. 아니면 나는 총만 챙겨서 갈래요.’
‘….’
‘지금 속으로 잡종 년이라고 생각했죠.’
‘…아?’
‘….’
‘잡종이십니까?’
‘아, 진짜. 됐어요. 그냥 둘 다 살아요. 장례 의식이 얼마나 귀찮은데… 쯧, 우리 인생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살아봐야 아는 거라구요.’
그때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대답할 수 있었다.
예, 성녀님. 살아야겠습니다.
성인에게도 과거가 있고, 범죄자에게도 미래가 있는 것처럼, 저도 살겠습니다.
***
‘제 딸은 이 깃털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맹세는 맹세죠.’
‘내 맹세는 성녀님을 향한 것이오. 딱히 댁을 도울 생각은 없소만.’
‘전 필요 없어요. 대신… 제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깃털을 건네죠. 은혜는 그에게 갚으세요. 어때요?’
‘…참 알뜰하게도 써먹는구려.’
‘전 좋은 엄마니까요.’
‘그렇소? 좋은 장모가 되긴 글렀구려.’
***
까마귀는 서서히 꿈에서 깨어났다. 지루한 악몽이 그녀를 밀어냈다. 불쾌한 현실을 마주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음은 상처받으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누가 했던 말이더라. 바기달 람파? 오스카 와일드? 아니면 황금 눈?
기억나지 않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군요. 상처받아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라는 뜻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
까마귀는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빌딩 옥상까지 무슨 일이오?”
“하도 안 오셔서, 따로 찾으러 왔습니다.”
“그렇소? 미안하오. 동족을 찾으려고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소.”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제자가 물었다.
“그래서, 좋은 꿈 꾸셨습니까?”
“잘 기억나지 않소만… 지금 제자 얼굴을 보니 좋은 꿈이었던 거 같구려.”
제자는 픽 웃었다. 그 미소를 본 까마귀는 자신이 꽤 부끄러운 이야기를 했다는 걸 깨닫고 딱! 부리를 다물었다.
“뭘 웃고 있소? 빨리 움직이지 않고.”
예, 예-그녀는 제자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서울을 향해 날갯짓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꿈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