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67)
을 위한 세계는 없다-567화(567/817)
EP.567 관심, 욕심, 복수심, 그리고 양심. (10)
* * *
***
드높은 개성 차원문 너머.
‘해리슨 특별 평화 자치구’라는 정식 명칭보다, ‘승만 시티’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도시.
번쩍이는 빌딩과 가로등으로 가득한 도시는 최근 밤을 집어삼킬 정도로 화려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차원문 너머에서 날아온 올림피아의 열기.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곱창 거리, 먹자골목, 심지어 포장마차들조차 인산인해를 이뤘다.
안주는 물론, 올림피아에서 활약하는 한국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여명.
황금색 눈동자의 청년이 멋들어지게 적을 상대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축제를 지피는 숯이요, 타오르는 불길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한민족이 꽃을 피웠다! 국난 앞에서 역사적 천재를 배출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특징 아니겠습니까?
어디서나 먹히는 달달한 국뽕부터.
-천여명 선수의 무술은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잘 맞습니다. 여기, 이렇게 보법을 펼치는 모습을 보시면….
진지한 전술 분석.
-10만원 지폐에 천여명을!
-천여명을 국회로 보내자!
그리고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린 주장들까지.
사람들은 노동의 피로를 잊으려는 듯 그렇게 올림피아에 열광했다.
며칠 전부터 주류 판매량은 최고점을 찍었고, 연이은 회식에 식당과 술집들은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그 열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승만 시티의 밑바닥을 차지하는 아샤인들조차 덕을 볼 정도였다.
제국이나 소왕국 출신 아샤인들이 지구인들의 잔치에 별 상관없었지만, 잔치는 잔치 아닌가.
그들은 쏟아지는 회식비에 만족했다. 식비를 아껴 가족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올림피아 경기 방영 시간마다 휴식 시간이 되는 것도 좋았고.
-근데, 천여명이라는 저 친구 머리랑 눈이 꼭… 전설 속 용사님 같지 않어? 혹시 용사 혈통 아녀?
TV를 보던 몇몇 아샤인들이 그런 의문을 표하기도 했지만, 유의미한 논의로 이어지진 못했다.
-지구인보고 용사는 닝기미. 황제 폐하 못 봤어? 진짜 용사 혈통은 저렇게 진한 노란 색이 아니라 살짝 연한 노란 색이여.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런 거여. 공장장 화낼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그렇게 또 한 병의 소주가 열렸다. 녹색의 한국식 소주 앞에서는 한국인도, 아샤인도 없었다. 인간들은 모두 평등하게 취했다.
물론, 종족의 차이는 있었다.
승만 시티로 출장 온 드워프 노동자들은 쏘맥과 오줌 맛 맥주를 저주했다.
그리고 도수 30 이하는 술 취급도 안 하는 오크들은 술 대신 안주에 집중했다.
한국은 스팸을 잘 만드는 나라였고, 대부분의 오크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인들은…
영문 모를 환대에 당황하고 있었다.
올림피아 특수를 노리고 승만 시티로 꼬인 짐승들은 한국인들이 음식을 나눠줄 때마다 흠칫, 흠칫 놀랐다.
-치킨 남은 거 싸 왔는데, 가서 친구들하고 먹어라.
-늑대 수인도 개고기 먹을 수 있냐?
-뽀삐야! 야근 그만하고 와서 라면에 소주 한잔해라!
수인 혐오가 가득한 미국과는 전혀 다른 대우.
뭐 대단한 인심이나, 한국인 특유의 정 덕분이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런 대우는 어디까지나 수인을 머슴으로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것도 최저임금 이하로 부려 먹을 수 있는 머슴.
화가 나면 언제든 주인을 죽일 수 있는 머슴이기도 했지만… 뭐, 한국인들의 안전불감증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애초에 공장 구역과 노동 구역을 제외한 일반 구역에는 출입조차 못 하는 게 수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은 대부분 축제가 끝난 후 남은 음식들에 불과했다.
눅눅해진 치킨, 식은 돼지갈비, 말라붙은 파전…
하지만 대부분의 수인 노동자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아예 대놓고 개 사료를 주는 곳도 있는 판에, 이건 적어도 사람이 먹는 음식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얻어 먹은 축제 음식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젊은 수인들은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제미니 시티로 돌아가지 말고 그냥 계속 여기서 살면 안 되나?’
‘내가 들어보니까, 이 나라 선조가 마늘 먹고 사람 된 곰 수인이래.’
‘나도 마늘 좋아하는데… 혹시 여기서 살면 시민권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비교적 사회 경험이 많은 수인들이 듣기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축제 열기 덕분에 수인 혐오가 살짝 약해졌을 뿐임을, 동시에 수인 노동자가 평균 임금을 낮추기 시작하면 수인들이 다시 공공의 적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법을 준수하고, 이제는 식인하지 않는다고 외쳐봤자… 그들은 결코 인간 사회에 섞일 수 없는 짐승이었다.
‘수인은 오직 수인만이 도울 수 있다.’
‘인간을 믿지 마! 수인을 믿어!’
‘우린 미국과도 싸운 종족이다. 배신자만 없었다면 이길 수도 있었지. 우리는 뭉쳐야 한다.’
그렇게 수인들의 의견이 갈라지고, 축제가 이어지길 한참.
축제가 한창 무르익은, 그러니까 여명이 3차전에서 승리한 바로 그날.
승만 시티의 모든 수인들을 하나로 만들 명령이 내려왔다.
‘황금 씨족의 명이다. 사냥을 준비하라.’
***
희생양 자매의 푸른 양, 박네티는 눈치가 좋았다.
적의를 쉽게 알아채는 세티 언니나, 아예 용의 감각을 가진 막내 같은 종류의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눈치는, 인간 사이의 미묘한 무언가를 낚아채는 쪽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그녀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 묘한 눈빛 같은 것.
‘이년, 중등부 때 날 비난하는 기사를 쓴 년이구나.’
‘이놈은 16강에도 못 든 실패작이라고 지껄인 놈이고.’
‘저놈은 내가 전윤성한테 나라 정보를 팔았다는 헛소리를 쓴 놈이네.’
그녀는 묘한 눈치를 보내는 기자들을 거르고 걸러 아주 극소수의 기자들하고만 인터뷰했다.
소박맞은 기자들이 또 언제 뒤를 찌를지 몰랐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들러붙는 기자들의 목표는 그녀가 아니라 형부였으니까.
-천여명 선수는 평소에 어떤 사람인가요?
-최근 실력 향상에 형부의 도움이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자매들이 모두 한방을 쓴다는데, 이유가 뭐죠?
네티는 언니의 명령대로 적당한 대답으로 기자들과 그 너머에 있을 한국인들을 만족시켰다.
그녀가 한국 정부를 증오하는 것과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엿을 먹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인터뷰를 끝낸 네티는 곧장 선수용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남자 초인 숙소로 가주세요.”
“남성 숙소요? 여성 숙소 말고요?”
“네. 형부한테 갈 거라서요.”
운전기사의 눈길이 묘해졌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당당하게 기사의 눈길을 즐겼다. 무슨 이유로 한방에서 지내는지 설명할 수도 없으니, 그냥 즐길 수밖에.
그리고 그렇게 선수촌을 향해 차가 출발한 순간.
네티가 운전기사를 향해 물었다.
“근데, 자매 중에서 저만 잡아가는 건가요?”
“…뭐?”
“아니, 궁금하잖아요. 대낮에, 그것도 대놓고 경비들이 가득한 곳에서 납치당하고 있는데. 다른 자매들은 무사해요?”
그러자 운전기사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요원이 뒤 트렁크에서 널 조준하는 중이다. 이게 장난 같나?”
“아뇨? 이렇게 대놓고 저지르는 걸 보면 한국 정부 내부에 조력자가 있다는 거고, 굳이 절 인질로 잡은 걸 보면… 형부가 목적이란 뜻이죠. 흐흐, 이런 계획이 장난일 리가.”
“….”
네티는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올림피아 중에 올림피아 선수를 납치하다니.”
“닥쳐.”
“한국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뮌헨 올림피아 이후에 중동이 어떻게 됐는지 잊었나.”
네티의 이죽거림을 참지 못한 걸까, 운전기사는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차량은 선수촌을 벗어나 금세 개성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네티는 여유롭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제 몸에 신호기라도 있으면 어쩌시려고.”
다 대책이 있는 걸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개성 외곽에 있는 한 무덤 앞에서 멈췄다.
왕건릉.
저 역사 유적 아래 차원문이 있다는 걸 언니에게 들은 네티는 킥, 웃어 버렸다. 아주 제대로네.
물론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다른 차량이 도착해 그녀의 자매를 토해냈으므로.
“시리. 너도 잡혔니? 역시 막내는 안 잡힐 줄 알았어.”
“…하아.”
그녀의 여동생은 한숨과 함께 붉은 단발을 뒤로 넘겼다. 무장한 운전기사와 그의 동료들이 두 사람에게 총구를 겨눌 때까지도, 계속.
“무덤으로 간다. 멀쩡한 다리에 구멍 나기 싫으면 저항은 하지 말도록.”
“거, 도망 안 갈 테니 살살해요.”
두 자매는 납치범들이 이끄는 대로 왕건릉 지하로 향했다. 무덤 깊숙한 곳에는 세티 언니의 말처럼 차원문이 열려있었는데, 좌표가 바뀐 듯 위치가 약간 비스듬했다.
“목적지라도 알려주면 안 돼요?”
네티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총구와 경고뿐이었다.
“닥치고 들어가라.”
“인심하고는.”
네티는 투덜거리면서도 먼저 차원문에 몸을 던졌다. 나쁜 건 언니가 먼저 하는 법.
그렇게 넘어간 차원문 너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버려진 공장이었다.
꽤 예전에 버려진 듯, 공장 자재는 물론이고 천장 곳곳에 녹이 슨 공장.
그나마 벽에 희미하게 ‘장경근과 이익흥이 기부한…’라고 한글이 적혀있는 걸 보면 다행히 한국을 벗어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여긴 또 뭐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네티는 대충 녹슨 기계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시리 또한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았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동생에게 속삭였다.
‘공장 밖에 50명 정도 있네. 무장은 모르겠어.’
‘생각보다 적네?’
‘그래, 한 백 명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미끼치곤 약했나?’
‘….’
그때, 네티가 동생 얼굴에 깃든 고민을 읽어냈다. 그녀는 눈치 좋은(?) 언니답게 물었다.
“괜찮아? 뭐 다른 고민 있어? 계획에는 찬성했잖아.”
“아니, 아무 고민도 없….”
“에이, 뭔가 있구만. 그러지 말고 말해. 괜히 고민하다가 일을 그르치면 안 되니까.”
그러자 시리가 푸욱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에 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용이 납치당할 뻔한 이야기나, 각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건 이미 해줬으니까.
그녀가 이번에 꺼낸 말은…
“언니한테 허락받으라고? 형부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
“…응.”
네티는 입술이 씰룩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허락이라니!
하긴, 눈치 좋은 형부가 처제들의 눈길을 모를 리 없었다. 당장 막내만 해도 형부만 보면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지 않나.
“흐히히.”
기쁨에 취한 네티가 성녀처럼 웃자, 시리가 짜증을 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언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게.”
“이젠 웃는다고 지랄이네. 야, 언니한테 그걸 왜 말하냐?”
“응? 당연히 허락받아야….”
네티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동생의 말을 끊었다.
“아니, 아니지. 허락보단 용서가 쉬운 거 몰라?”
“….”
시리가 미친년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고, 네티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동의한다.”
폐공장 구석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두 자매는 흠칫 긴장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용서는 쉽지. 허락은 물론이고, 복수보다도.”
저벅, 저벅. 먼지 쌓인 공장 컨베이어 벨트를 밟으며 다가오는 건 수인이었다.
기다란 주둥이, 가지런한 이빨, 금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털, 그리고 유달리 쫑긋 솟아오른 귀까지.
키가 거의 3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늑대 수인은 두 자매의 코앞까지 다가온 뒤 말했다.
“날 보고도 긴장하지 않는구나. 왜지?”
네티는 슬그머니 마나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그쪽도 한국 정부의 끄나풀일 테니까. 다른 시기도 아니고 올림피아 중에 우릴 죽일 리 없잖아?”
“…똑똑하군.”
“기왕 대화하는 거, 배후가 누군지도 알려줄래? 조웅찬 장관님이 그렇게 날이 서 있는데, 이런 일을 벌일 정도면 국방부 장관쯤 되시나?”
네티가 웃으며 이야기하자, 수인 또한 피식 웃었다.
“양 주제에 혀가 많이 길구나.”
“개새끼 앞이라 그런가 봐.”
“용기도 있고.”
“메에, 메에-”
곧 혀를 삐쭉 내밀어 양 소리를 낸 네티의 손아귀에서 염동력이 일렁거렸고, 시리의 어깨 위로 슬금슬금 화염이 피어났다.
그동안의 수련이 헛일은 아니었는지, 거대한 수인 앞에서도 그녀들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늑대 수인은 그 꼴을 잠시 바라보다가, 털석 그녀들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지 말고, 대화를 좀 하지. 천여명이란 놈에 대해서.”
“…형부 이야기는 할 거 없는데.”
“그래도 꼭 듣고 싶군.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서.”
“….”
“그는 수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왜 인간 주제에 수인을 스승으로 삼았는지 알고 있나?”
이 새끼 뭐지. 수인의 눈에서 간절함을 읽어낸 네티는 뭔가 계획이 꼬이는 걸 느끼며 말했다.
“대답하기 싫다면?”
“네 허벅지를 요리한 뒤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보겠다.”
“…그러면 형부가 널 가만두지 않을걸.”
“상관없다. 그 잘난 형부가 이곳을 찾아오려면 내일 오후는 되어야 할 테니까.”
네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뭔 대화를 해주고 있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 시리의 표정을 확인한 뒤, 손가락을 접으며 뭔가를 세기 시작했다.
잠시 그녀의 손을 보던 수인이 물었다.
“뭐 하는 거냐?”
“보면 몰라? 시간 계산하잖아.”
“그러니까 무슨 시간 말이냐?”
수인이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네티가 꽉 쥐며 대답했다.
“형부가 너흴 낚을 시간.”
곧, 그녀의 등 뒤의 공간이 반으로 갈라지며 황금빛 장막이 펼쳐졌다.
플레이어를 죽이고 얻은 마석으로 만든 차원문이자, 그녀를 드레이테리얼로 보냈던 바로 그 차원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