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68)
을 위한 세계는 없다-568화(568/817)
EP.568 관심, 욕심, 복수심, 그리고 양심. (11)
* * *
***
조웅찬 장관에게는 숙소에 틀어박힐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여명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리다니.
물론, 라날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날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을 건드렸을 게 분명한 상황 아닌가.
여명은 참지 않았다. 여태껏 그가 힘을 키워온 건 인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이번의 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수인들.
아무리 동물로 변신하고 있어도 수인은 수인을 알아볼 수 있었고, 이쪽에는 코르부스가 있었다.
털 달린 것들과 달리 하늘과 빌딩 위를 날아다닐 수 있던 그녀는 서울 도심 사이를 돌아다니는 수인들을 찾아냈다.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던 황색 털 부족의 재글랑인가 뭔가 하는 놈부터, 사람으로 변장한 놈들, 심지어 길거리 들개로 변신한 녀석들까지.
한국 정부가 무슨 생각으로 녀석들이 그를 공격하도록 내버려 뒀는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진짜 각하가 왔어도 찢어 죽일 생각이 가득했는데, 일개 털 뭉치들이 감히.
여명은 곧바로 그물을 펼치고 수인들을 낚을 미끼를 펼쳤다.
원래는 그 스스로가 미끼가 되어 하나하나 주살할 생각이었지만, 주변의 조언이 계획을 바꿨다.
-형부, 저희가 미끼로 나설게요. 성녀님이나 살로메 언니는 아직 드러나면 안 되잖아요?
희생양 자매는 스스로 미끼를 자처했다.
여명은 반대했으나, 이어진 쇠미리의 제안에 마음을 바꿨다.
-플레이어가 남긴 마석. 이걸로 만드는 차원문은 여명과 자매들만 쓸 수 있어요. 나중에 남산 공략 때 써먹으려고 했는데… 이참에 미리 써보죠.
그렇게 계획이 무르익고, 수인들이 서서히 미끼로 다가올 때쯤.
마지막으로 코르부스가 그에게 부탁했다.
-제자여, 만에 하나 황금 씨족을 자신하는 자가 있다면… 죽이지 마시오. 이 은원을 내 대에서 끝낼 수 있도록.
***
그리고, 지금.
사아아 – 마나와 공기가 몰아치며 여명은 차원문을 넘었다. 살벌한 그의 금색 눈동자가 처제들 앞에 앉은 수인과 마주했다.
검은 늑대 수인.
녀석은 여명을 보자마자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질투가 뒤섞인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
“놀랍군. 차원문이라니.”
“….”
“이 나라에 수십 년을 봉사하는 동안, 우리는 기껏해야 사료나 받았는데… 이게 종족의 차이인가?”
차원문을 한국이 줬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지껄인 녀석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건,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우리가 역으로 낚였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수인은 챙-! 발톱을 뽑았다. 평범한 인간은 단번에 토막낼 수 있을 것처럼 기다란 발톱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대어를 잡기 위해선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 천여명. 지금이라도 너의 거짓 스승이 남긴 무술의 진의를 넘겨라. 그러면 이 소녀들과 너는 무사히 보내주지.”
불문곡직. 여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검을 겨눴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검은 늑대 수인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순간.
폐공장 내부의 네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가장 빠른 건 역시나 여명이었다. 번뜩이는 칼날이 수인의 목을 노렸고, 수인은 거기에 맞춰 발톱을 휘둘렀다.
그렇게 둘이 충돌하기 직전. 네티가 염동력으로 자신과 동생을 붙잡고 범위를 벗어났다.
쩌-엉- !!!
이어지는 묵직한 충격음.
마나가 대기를 밀어내며 여명의 검은 머리카락과 수인의 검은 털이 동시에 출렁거렸다.
그리고 떠오른 털이 가라앉기도 전에. 두 사람은 다음 수를 휘둘렀다.
번뜩이는 검과 발톱, 보이지 않는 주문.
파스스! 두 사람은 공격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거의 동시에 얼음송곳을 만들어 상대의 눈을 노렸다.
“갈림길! 역시 그녀의 제자로군!”
얼음송곳이 아슬아슬하게 눈꺼풀을 스친 수인이 소리쳤다. 당황하지 않고 미소 짓는 게 짐짓 여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나 볼까.
여명은 묵묵히 얼음송곳과 검술로 녀석을 압박했다. 그리고 채 30초가 지나기도 전에.
푸확! 여명의 칼이 녀석의 손가락 두 개를 베었다.
기다란 발톱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걸 본 녀석은 황급히 몸을 점프했다.
쿵! 장경근이란 이름이 적힌 쇳덩어리 위에 착지한 녀석은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이 떨어진 왼손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과연, 미래의 10강. 예상보다 강하군. 프랑스 10강의 어쩌고 외즈까지 쓰면 귀찮아지겠어.”
그렇게 지껄인 녀석은 여명이 달려오건 말건 그대로 흐읍-!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주둥이를 쩍 벌려 소리쳤다.
아-우우우우우 – !!
짐승 특유의 길고 불길한 하울링. 여명이 던진 검이 녀석의 어깨에 처박힌 덕분에 하울링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형부! 이 공장 주변에 수인들이 적어도 수십 마리는 더 있어요!”
네티의 외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공장 바깥에서 기다란 하울링이 돌아왔다.
아우우우우우 – !!!!
적어도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내뿜는 듯한 소리. 여명은 네티에게 마총을 쥐여주며 말했다.
“멀쩡한 철판 하나 챙겨서 뒤에 숨어있어.”
“네? 하지만 형부, 저희도 도움이-.”
그렇게 항변하던 네티는, 폐공장 창문으로 보이는 수인들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고 시리와 함께 철판을 찾으러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공장 너머, 수인들은 모두 총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니까.
녀석의 무장 대부분은 흔히 자동 샷건이라 불리는 전자동 산탄총이었다.
인간이 들기엔 너무 무거워서 현대전에서 도태된 무기였지만, 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양손에 샷건을 들고 내부로 진입했다.
“쏴!”
여명이 던진 검을 뽑아낸 녀석의 외침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자동 샷건이 불을 뿜었다.
텅, 텅, 텅, 텅 – !!
묵직한 납탄이 허공을 까맣게 메우며 여명을 덮쳤다. 그가 재빨리 보호막을 펼쳤지만, 어마어마한 물량에 순식간에 보호막이 깨지며 마나 가루가 튀었다.
“멈추지 마! 탄 떨어질 때까지 계속 쏴!”
녀석들의 사격이 어찌나 막무가내였는지, 벽과 바닥에 튄 납탄에 맞아 다친 녀석들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샷건이라는 게 원래 근거리 사격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만큼, 여유롭게 반동을 제어할 수 있는 수인들의 납탄 대부분은 여명에게 명중했다.
납탄의 연기가 공장을 채우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탄창을 비운 수인 중 하나가 검은 늑대 수인에게 물었다.
“족장님, 이거,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살아서 무술은 빼앗았어야….”
안타깝게도, 녀석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연기 너머에서 날아온 얼음창이 녀석의 배를 꿰뚫었으므로.
“어?”
자신의 배에 박힌 얼음창을 내려다보던 녀석이 그대로 쓰러진 직후. 검은 늑대 수인이 소리쳤다.
“살아있다! 총알 남은 놈은 계속 쏴!! 나머지는 재장전을-이런 씨발.”
녀석의 외침을 따라 총을 드는 것보다, 여명의 마법이 한 발 더 빨랐다.
허공에 피어나는 전격과 화염, 그리고 서늘한 얼음들.
마치 용의 마법처럼 폐공장을 채운 마법들은 하나하나가 마탑주의 심득이 담긴 전투용 개량 마법이었다.
“시발, 저게 무슨-”
“피해!”
다음 순간, 놀란 수인들의 머리 위로 온갖 마법들이 쏟아졌다. 그들이 발사한 납탄만큼이나 빠르고, 강하게.
“아아악! 족장님!”
“쏴! 쏴! 계속 쏘라고!!”
족장이라 불렸던 검은 늑대 수인은 수적 우위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다행히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가까운 수인을 덮치는 불덩이를 발톱으로 베어 넘긴 족장은 소리쳤다.
“다들 물러나라! 마나를 쓸 줄… 아니, 모두 마법 범위를 벗어나!!!”
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공장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퇴는 생각보다 빠르지 못했다. 상처 입은 동포를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총을 버리고 몸이 반쯤 타버린 전우를 등에 업고 도망치는 놈, 양 옆구리에 부상자를 끼고 도망치는 놈 등…
이대로는 피해가 커질 뿐이란 걸 깨달은 족장은 조금 전 여명이 있던 자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노옴!!”
그렇게 연기를 헤치고 달려든 녀석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이런, 씹.”
염동력으로 수백 발의 납탄을 붙잡아 둔 천여명.
모든 납탄을 잡을 수는 없었는지, 몸에서 드문드문 피를 흘리고 있던 여명의 시야가 천천히 족장을 향했다.
그리고 그가 족장과 눈을 마주친 순간.
“이건 돌려주마.”
천여명이 손을 튕겼다. 마나가 뒤틀리고, 곧 허공에 있던 납탄이 사방을 향해 폭발했다.
***
천여명은 얼마나 강한가?
호사가들, 도박꾼들, 그리고 올림피아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고는 했다.
처음 두각을 드러낸 만주에서, 그는 용을 쓰러트렸다. 그러면 용을 쓰러트릴 정도로 강한 걸까?
아니, 그땐 옆에 성녀님과 용병단이 있었다. 모든 게 온전히 그의 공이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그러면 아카데미 테러 사건은 어떤가?
그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을 마무리한 건 성검 아니던가.
하지만 바로 그 성검이 은근슬쩍 제자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이 걸렸다.
성검의 제자란 다음 대 성검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
현 성기사단 단장조차 제자로 삼길 거부한 프레아 칸이 그에게 침을 발라놨다는 건 많은 걸 시사했다.
재능은 진짜다.
아카데미에서 여자에 빠지고, 양아치 짓을 반복하긴 했지만… 그 무시무시한 오귀스트조차 그에게 무술을 넘겨주지 않았나.
10강 중 둘… 아니, 만박불통의 장난 같은 인터뷰까지 합치면 셋이 인정한 재능.
그 재능의 고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당장 2학년 성기사의 척추를 부수고, 전윤성의 팔을 자를 정도였다.
방심하지만 않으면 올림피아 우승은 따놓은 거나 다름없는 수준.
이것만으로도 세계적인 초인 순위 100위권 안에 들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사람들은 더 자세한 정보를 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궁금증 중 하나가 ‘누가 더 강한가’ 였으니까.
아무튼.
올림피아 경기가 무르익고, 여명의 경기가 방송될수록 사람들의 궁금증과 토론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런 쓸모없는 토론이 반복되면 늘 그렇듯, 적당한 결론이 나오는 법이었다.
-이미 학생 수준은 아니죠.
-용병 출신이니까, 싸우는 법도 알 테고.
-이상한 필살기도 있고, 웬만한 초인 군인이나 용병 단장보다는 더 강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10강이나 바로 아래 강자들만큼은 못 하겠지.
그렇게 사람들의 입과 입을 오고 가며 결론 난 천여명의 강함이란, ‘지금은 압도적으로 강하진 않지만, 언젠가 10강이 될’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이미 10강급이니, 만박불통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다느니 하는 광신도들의 의견도 있었지만, 그 말을 주워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강이 무슨 개 이름도 아니고. 아직 서른도 안 된 애송이가.’
황금 씨족의 족장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문제는, 천여명의 존재 자체가 상식이란 단어 밖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수인들을 몰아붙이는 모습부터가 그랬다.
“벌써 밑천이 드러났나?”
천여명은 기절한 수인의 팔에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전 그가 터트린 납탄에 휘말린 수인들 대부분이 정신을 잃었으므로.
“고작 이딴 힘으로, 내 사람들을 위협한 거냐?”
서걱, 말을 끝낸 천여명은 기절한 수인의 팔을 잘랐다. 피가 튄다. 기절한 녀석의 몸이 활어처럼 펄떡였다.
“이, 씨발, 새끼가!”
족장, 천여명이 폭발시킨 수백 개의 납탄을 정면에서 얻어맞은 검은 늑대 수인이 으르렁거렸다.
천여명은 그녀가 보란 듯 염동력을 펼치더니, 다른 수인의 팔을 꺾었다.
“그만해, 이 개새끼야!”
족장은 재생을 포기하고 여명에게 달려들었다. 일반적인 초인은 반응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도.
하지만 여명은 화르륵! 주와이외즈를 두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접근을 차단했다.
족장은 여명이 토막 내던 수인을 챙긴 채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벌겋게 달궈진 발톱이 주와이외즈의 열기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직 전력을 낸 것도 아닌데.’
다친 동포를 그나마 멀쩡한 동포에게 맡긴 족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쉽게 생각한 건가? 아직 10강도 아닌 꼬맹이라고 방심한 건가?
둘 다였다. 설마 마법만으로 수십 개의 샷건을 버텨낼 수 있을 괴물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대구경 기관포, 하다못해 수류탄이라도 잔뜩 챙겨올 걸 하는 후회가 녀석의 목깃을 스쳤다.
하지만 족장은 금방 후회를 삼켰다. 지구의 카이사르나 초대 용사께서 그러했듯, 강을 넘은 순간 후회는 필요하지 않았다.
선택, 오직 선택뿐.
족장은 천천히 다가오는 천여명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돌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엔간한 인간 남성의 손바닥만큼이나 큰 타락석.
이거라면 천여명과 할 만했다. 이 물건을 준 장관의 설명에 의하면 10강 바로 아래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 눈앞의 천여명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족장의 본능이 경고했다. 천여명, 저 자식은 자신이 다음 수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자만심? 자신감?
아니, 아니었다. 이건 선포였다. 내가 이만큼 강하니 어중이떠중이는 덤비지 말라는 선포.
그리고 족장과 동포들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그 선포를 증명할 깃발로 쓰이리라.
“….”
잠시 고민을 이어간 족장은 주머니 속 타락석을 내려놨다. 그리고 사거리에 들어온 천여명을 향해 말했다.
“졌다.”
“처음부터 그랬지. 너만 몰랐을 뿐.”
여명은 족장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족장은 칼을 피하는 대신,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금 씨족의 말예, 이복순 골드 티스가 검은 날개의 후계자 천여명에게 항복한다.”
“…?”
“같은 한국 정부의 부하로서, 선처를 바란다.”
족장이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던 수인들이 비통한 목소리로 안 됩니다! 족장님! 같은 말을 지껄여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명은 검을 내려놓지 않고 물었다.
“잠깐, 이름이 왜 이복순이야? 한국인도 아닌데….”
“난 대구 태생이다.”
“….”
“그리고 내 이름은… 꽤 최근에 생긴 전통이다. 당장 너의 스승 또한 지구의 이름과 수인 이름을 동시에 쓰고 있지 않나?”
그녀의 말마따나, 코르부스란 단어는 까마귀의 학명이었다. 어쩐지 까마귀 이름치곤 이상하다 했더니. 그딴 전통이 있었나.
아무튼, 여명은 검에 힘을 실어 이복순… 아니, 족장의 어깨를 내려쳤다.
푸확! 오른 어깨가 날아간 족장을 보고 도망치던 수인들이 화들짝 놀랐으나, 여명은 그대로 검을 회수했다.
“이 팔 하나면, 항복 비용으로 충분한가?”
“아니. 이건 내 숙소를 뒤지고, 처제들을 납치한 대가다.”
“….”
“항복은 내가 아닌 스승님에게 청해라.”
결국, 동족의 배신자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가. 족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래도 타락석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그때, 폐공장 밖 저편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은 거대한 트럭 소리… 마나를 넓게 펼친 여명은 조금 전 수인의 곱절은 많은 수인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항복하는 척, 시간을 끈 거냐?”
이복순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나? 애초에 인질을 잡은 것도 최대한 조용히 끝내기 위해였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런 털 뭉치들이 천 단위로 와도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여명은 제대로 된 검, ‘시리’를 뽑아 들며 말했다.
“주머니에 있는 건 안 쓰는 게 좋을 거다.”
“….”
움찔, 이복순이 몸을 떠는 사이, 끼이익-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거대한 트럭들이 폐공장을 둘러쌌다.
그리고 곧, 여명을 피해 도망치던 수인들이 트럭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우리 부품 공장 트럭이잖아… 누구냐? 누가 회사 물건을 끌고 왔어? 동포들이 다 잘리는 꼴 보고 싶어?!”
그 외침에 대답한 건 가장 큰 트럭이었다. 그러니까, 트럭의 컨테이너가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나온 늙은 수인이 대답했다.
[그깟 노예 자리, 잘리건 말건 상관없다.]휠체어 위에 앉은 채, 복잡한 의료 기계에 연결된 늙은 수인.
입도 못 쓰는 듯 산소 마스크에 연결된 기계로 말하는 그녀는 여명과 그 앞에 무릎 꿇은 복순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한심하구나, 황금 이빨…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다니.]이복순은 늙은 수인을 노려봤다.
“그만하시지요. 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이미 항복했습니다.”
[배신자와 그 제자에게?]“어차피 같이 한국 정부 아래에서 일하는 사이입니다. 여기서 더 피를 흘리는 건 무의미합니다. 일단 원한은 잊어두고….”
[그걸 왜 네가 정하느냐!]늙은 수인의 기계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고 있으면서! 잘도! 항복을 논하는구나! 그러고도 네가 족장이라 자신할 수 있더냐?]옳소, 옳소! 트럭에 타고 있는 몇몇 수인들이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여명은 호응하는 수인들의 얼굴을 훑다가,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재글랑. 모낙랑을 따라 그의 방에 왔던 간 큰 황색털 부족… 아니, 검은 털 수인.
녀석은 호응은커녕 뭔가 겁먹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이복순이 말했다.
“전 이미 족장의 권한으로 항복했습니다.”
늙은 수인은 빼빼 마른 손으로 휠체어를 쾅! 내려쳤다.
[나 또한 족장이다! 나는 이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결국 수인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겠구만.
상황 돌아가는 걸 본 여명이 검을 들어 올리고, 이복순이 잠깐-! 이라고 소리치는 순간.
늙은 수인이 자신의 휠체어를 끌던 젊은 도마뱀 수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어-? 도마뱀 수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뼈와 살이 늙은 수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쭈와아압-! 문자 그대로 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도마뱀 수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그가 입고 있던 노동복만이 남았다.
-뭐, 뭐야?
-족장님?
웅성거리는 수인들 사이로, 조금 전보다 상태가 좋아진 늙은 수인은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검은 날개, 그 배신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지. 사랑하는 걸 잃는 슬픔을 다시는 느끼지 않도록.]“….”
[하지만 누구도 외로움을 이길 수 없는 법. 결국 제 스승과 닮은…] “…금색 눈동자의 제자를 찾았구나.”그녀는 암사자와 닮은 얼굴로 천여명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산소호흡기를 벗었다.
삐쩍 마른 주둥이 안, 혓바닥 위에는 검은 돌이 들려 있었다.
“복수의 시간이 왔… 커헉!”
그녀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타락석을 씹으려는 그 순간.
탕!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그녀의 혓바닥을 쏴버렸다.
“거, 진짜 말 존나 많네.”
조금 전까지 철판 뒤에 숨어있던 소녀, 네티가 쏜 마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