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76)
을 위한 세계는 없다-576화(576/817)
EP.576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 * *
열렬히 믿거나, 격렬히 부정하거나. 혹은…
신이 되려 하거나.
[실존하는 신을 마주한 지구인의 반응에 관해 묻자, 지르지스 라크티가.]***
황금 꼬리의 시체가 먼지로 돌아가는 걸 끝으로, 타락석의 결계가 무너졌다.
피부를 찌르던 뒤틀린 마나가 힘없이 분해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길 잠시.
추악한 동시에 아름다웠던 초원의 지평선은 도시 외곽 지역의 쓸쓸함으로 바뀌었고.
눈이 부실 정도로 드높았던 하늘은 어둑어둑한 새벽의 빛으로 물들었다.
밤을 가르고 파랗게 물드는 하늘 아래, 여명은 결계 속에서 있던 일을 되새겼다.
스승과 만박, 이복순과 황금 꼬리,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잔해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았다. 거기에 선악은 없었다. 이건 그것보다 훨씬 단순한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승리와 패배.
만박불통보다 여명이 조금 더 강했고, 황금 꼬리보다 코르부스가 더 강했다.
누군가는 어차피 똑같은 패배라고 말하겠지만, 여명은 동의하지 않았다.
황금 꼬리는 추했다. 그녀는 초원에서 동족을 잡아먹던 짐승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짐승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짐승으로 죽었다.
그에 비해 만박의 패배에는 격식이 있었다.
그래, 둘의 패배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가족들이 직접 장례를 치러준 시체와 아무 연고도 없이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만큼이나 큰 차이가.
그리고 똑같은 의미에서, 그의 승리와 코르부스의 승리도 차이가 있었다.
여명은 자신이 10강의 수준에 올랐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르부스는 이번 승리를 통해 뭔가를 새로 짊어진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성녀와의 인연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그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스승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겁해서 깃털을 부풀리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진정이 됐는지, 어느새 평범한 까마귀로 돌아와 지평선을 보고 있었다.
짧은 침묵.
그리고 새벽 사이로 피어난 햇빛이 까마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일 때쯤.
“형부!”
결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처제들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문제는, 그녀들의 뒤편으로 백 마리가 넘는 수인들이 질질 끌려오고 있단 점일까.
“…처제, 그것들은 다 뭐야?”
네티는 수인들을 묶은 로프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결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길래, 전부 잡아 놨어요!”
“억울하다! 우리는 그냥… 헙!”
수인들의 대표라도 되는지, 맨 앞에 묶여 있던 양 수인은 코르부스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다른 수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털 달린 것들은 하나 같이 웅성거리며 코르부스를 곁눈질했다.
“…제자여, 잠깐.”
보다 못한 여명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코르부스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이 모든 건 본인의 은원이오.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반쯤 기절한 만박불통의 곁으로 물러났다.
코르부스는 희생양 자매에게 잡혀 온 수인들과 결계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수인들, 그리고 그들의 족장인 이복순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움찔, 조금 전 코르부스의 전투력을 직접 본 이복순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코르부스가 계속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이복순은 이내 어깨에 힘을 주고 코르부스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코르부스가 부리를 열었다.
“몇 살이시오?”
“…예?”
“몇 살이냐고 물었소. 본인이 보기엔 성인식을 끝낸 지 몇 년 안 된 것처럼 보이오만.”
“예, 맞습니다.”
“젊구려. 본인이 미군과 싸울 때보다도 더.”
거기까지 말한 코르부스는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도시… 아니, 이 나라에 있는 동포의 수가 몇 명이나 되오?”
“…이곳에 모인 게 삼백, 승만 시티 전역에 있는 수를 다 합치면 천 이백 명 정도 됩니다.”
“이 나라를 벗어나, 제미니 시티나 다른 지역에 있는 자들까지 합치면?”
“오만… 이 조금 안 됩니다.”
“적구려. 게토에서 사는 드워프들보다도 더.”
“….”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설마 다 죽이려고?
이복순은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정작 코르부스가 꺼낸 이야기는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 중 단순노동 외의 일을 해본 자는 몇 명이오?”
“…?”
“장사해 본 자는 있소? 농사를 짓거나, 빵을 구워본 자는? 치료나 회계 같은 전문 지식을 익힌 자는?”
“어… 그게… 저희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뭘 말이오?”
“이 세상 누구도, 수인을 그런 일에 써주지 않습니다. 단순노동이나 범죄가 아니고서야….”
“….”
코르부스는, 너희가 사회에 녹아들 노력을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딱! 부리를 다물고 뭔가를 고민하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부리를 열었다.
“드레이테리얼이란 도시를 아시오?”
“…쓰레기의 도시요?”
“최근 일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할 것이오. 마침 초원과도 가깝고… 동족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보면 어떻겠소?”
“….”
“가서 도시 재건을 돕고, 일도 배우는 것이오. 건축 기술을 배워도 좋고, 아예 수인들만의 회사를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이복순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범죄조직으로 자리를 잡은 제미니 시티나, 한국에서 떠나 새로운 도시로 가라니.
죽고 싶지 않으면 눈앞에서 꺼지란 이야기일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코르부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드레이테리얼의 새로운 지배자가 저희를 써줄 이유가 없잖…”
그때, 만박불통을 괴롭히던 여명이 끼어들었다.
“써줄걸.”
“…?”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 도시의 새로운 지배자랑 내가 인연이 좀 있어서.”
그렇게 말한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던졌다.
“이 동전을 가지고 가서 이렇게 말해. 인신매매범도 기회를 받았는데, 수인이라고 못 받을 게 있냐고.”
인신매매범? 이복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코르부스가 헛기침했다.
“제자여, 이건 본인의 은원이라고 하지 않았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이 정도도 못 도와드리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저한테도 필요한 일입니다.”
가볍게 대꾸한 여명이 추가로 인벤토리에서 통장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모아놓은 온갖 수입들, 특히 더러운 돈을 세탁, 분산해 놓은 비밀 통장 중 하나였다.
“야, 이건 여비로 써.”
여비라니. 슬쩍 통장을 주워 확인한 이복순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무슨….”
“놀라기는, 어차피 수인들 처먹는 거 생각하면 그 돈도 얼마 못 갈 텐데.”
“….”
이복순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여전히 동전과 통장을 챙기지 못한 채로 물었다.
“왜 이런 호의를…? 뭐, 뭘 원하는 거지?”
코르부스도 비슷한 의문을 떠올린 건지, 여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나라를 떠나. 지금 당장.”
“….”
“오늘 이곳에 있는 수인들, 그리고 아직 한국에 남은 수인들도… 전부.”
떠나지 않겠다면 어쩔 거냐? 이복순은 굳이 멍청한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남으면 죽는다. 여명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복순은 타락석을 쓰지 않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상기하며 대답했다.
“승만 시티에 모인 동포들은… 따라올 거다. 하지만 차원문 너머, 교단과 한국 정부에 너무 물든 놈들은 내가 어쩔 수 없다.”
“그건 몇 놈이나 되는데?”
“대충 백 명 정도….”
적지 않은 숫자였다. 게다가 더러운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녀석들이다 보니 하나 같이 전투력이 뛰어나거나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놈들뿐.
하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고 마음속 살생부에 백 명의 수인들을 올렸다.
“명심해. 오늘 이 나라를 떠나지 않는 놈들은 모두 죽을 거야.”
“….”
살인 선언에 놀랄 법도 하건만, 이복순은 역으로 물었다.
“왜, 이런 호의를 우리에게 주는 거냐? 우린 너를….”
“너희를 향한 호의가 아니야.”
여명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코르부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자여….”
“가셔도 됩니다. 아니, 가셔야 합니다. 수인들이 약속을 지키는지 감시할 사람은 스승님뿐입니다.”
“제자의 일에… 본인이 필요하지 않겠소?”
필요합니다. 여명은 속으로 그 말을 삼킨 뒤, 미소 지었다.
“황금 꼬리 앞에서 맹세하셨잖습니까. 저 때문에 그 맹세를 포기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잠시 제자를 바라보던 스승은 말없이 날개를 벌려 제자를 끌어안았다.
아침 여명이 비추는, 따스한 포옹.
잠시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곧 코르부스는 가슴 깃털 중 가장 뻣뻣하고 깊은 깃털 하나를 뽑아 여명에게 내밀었다.
“결승전까진 돌아오겠소.”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코르부스는 등을 돌려 이복순에게 다가갔다.
“씨족의 말예여, 떠날 시간이오. 동포들을 모으시오. 내 제자와의 약속을 어기는 자는 내가 직접 죽여줄 터이니, 도망갈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이복순은 멍하니 코르부스를 바라보다가, 통장을 챙기고 뒤돌아 소리쳤다.
아-우우우우- !!
아마 후퇴를 뜻하는 하울링이 울리고, 네티가 붙잡고 있던 로브를 풀자 수백 명의 수인이 우르르 멀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명과 함께 수인들의 뒷모습을 보던 만박불통이 말했다.
“다 죽이는 게 훨씬 더 편했을 터인데… 정녕 스승 때문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이게 제 선택입니다.”
만박불통은 피식 웃었다.
“죽고 사는 건 승자의 손에 달렸다…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군. 이 나이에도 새로운 경험을 할 줄이야.”
그러자 여명은 뭘 남 말하냐는 듯 뚱한 표정으로 만박불통을 내려다봤다.
“만박불통께서도 따라가셔야 합니다.”
검색
“…뭐? 내가 왜?”
“스승님 혼자 만 단위의 수인을 어찌 다 컨트롤하시겠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또 어떻게 보고요?”
“아, 과연, 10강이 직접 관리한다고 하면 조금 나아지긴 하겠군… 하지만 나는 근무지에서 무단으로 탈영한 상태라네. 호주로 돌아가야 해.”
“그건 호주 사정이죠. 에뮤는 나중에 잡으셔도 됩니다. 뭐, 에뮤보다 수인이 위험한 건 상식 아닙니까.”
“….”
이놈 보게? 만박은 조금 심술을 부렸다.
“내가 싫다면?”
“억지 쓰지 마십쇼. 제가 이기고, 목숨까지 살려드렸는데 이 정도 부탁도 못 들어주십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박불통은 노련한 늙은이답게 여명의 언어 뒤에 숨은 뭔가를 읽어냈다.
“…내가 떠나면,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을 전부 내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군.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한국 정부를 속이고 있구만?”
만박불통은 타락석의 결계가 사라진 폐공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명은 살짝 놀랐으나, 부정하지 않았다.
“전부 맞추신 건 아니지만, 예. 그런 의도도 있습니다.”
조국과 대립하는 젊은이라.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걷는 젊은이를 본 노인이 언제나 그러하듯, 만박불통은 그를 도와줄 생각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끄응, 아직 회복이… 부려 먹을 거면 물약 한 병 더 주게.”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만박은 섬뜩할 정도로 진한 딸기향이 풍기는 물약을 마시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왜 저 친구들과 같이 안 보낸 건가?”
“가기 전에 분신술 알려주셔야죠.”
“….”
그놈의 분신술이 뭐라고 이리도 절박하게 따진단 말인가. 만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분신은 천지불인으로 흡수한 마나로 만드는 걸세. 그리고 직접 보았듯 그 무술은 당에 의해 오염됐지. 무슨 용도로 쓰려는 건지 몰라도, 그냥 분신은 포기….”
“천도무친의 분신이어도 됩니다.”
“천도무친의 분신?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싸울 상대가 있으면 필요 없네. 괜히 분신을 만들면 태풍을 만들 마나만 낭비하지.”
“….”
“설마 춤 때문인가? 괜찮네. 나에게 있어 춤이었을 뿐, 주가시빌리를 익힌 자네라면 다른 방법으로 마나의 태풍을 만들 수 있을 걸세. 그러니 괜한 낭비하지 말고….”
그때, 여명이 칼같이 말을 끊었다.
“낭비해도 됩니다.”
“…내구성도 약하네만.”
“손톱에 긁힌 상처를 버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제야, 만박불통은 뭔가를 눈치채고 눈썹을 들썩였다.
“…사거리도 짧네. 내 기억으로는 5m가 한계일세.”
“그 정도면 차고 넘칩니다.”
“차고 넘친다라… 혹시, 가로 1.6미터, 세로 2미터면 충분한가?”
“…?”
묘하게 정확한 숫자를 듣고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만박불통은 곧바로 무슨 뜻인지 설명했다.
“킹사이즈 침대 안에만 들어가면 되냐는 뜻일세.”
“….”
여명이 정곡을 찔린 것처럼 시선을 돌린 사이, 만박불통은 다가오는 희생양 자매와 여명을 번갈아 보며 픽 웃었다.
“뭐, 다 좋네만, 부디 내 조언은 잊지 말게.”
성녀랑 엘프는 절대 건드리지 마라.
여명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남산.
예전에는 목멱산이라고도 불렸던 서울의 작은 산은 점심부터 시끌벅적했다.
매일 열리는 사물놀이패의 무대 소리와 옅은 바람 소리, 그리고 올림피아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산기슭을 타고 번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이쁜지, 드높은 남산 타워 앞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 나라의 역사를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면 소리보다 더 진한 무언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억울한 피와 눈물의 냄새.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이 흘리고.
군부 독재 시절, 국정원과 안기부에 고문 당한 반체제인사들이 흘렸던, 바로 그 냄새.
그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남산 타워 앞에 앉은 중년인은 코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코를 도려내고 싶은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지만, 다행히 그가 칼을 꺼내기 전에 약속한 사람이 나타났다.
평범한 관광객처럼 가벼운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
잠시 카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그는 ‘시크릿 소사이어티’ 출신만 알 수 있는 표식을 남기고 산길로 향했다.
표식을 확인한 중년인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내려갔다.
이윽고, 두 사람이 자연스레 어깨를 나란히 한 시점에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 10강 대비책 중 하나가 사용되었습니다. 상대는 만박불통.”
“…만박불통이라.”
어딘가 나른한 목소리. 중년인은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공이 남겨놓은 세뇌는 예상외의 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만박불통은 대비책을 극복했습니다.”
“…흠.”
“전투는 한국에 충성하는 수인의 패배. 현재는 승만 시티에 있던 모든 수인들이 그를 따라 남하하는 중입니다.”
“수인? 에뮤도 아니고 어째서 수인을?”
“아직 원인을 다 파악하진 못했지만, 역시나 예상외의 개입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갈림길의 수호자… 그녀의 참전이 큰 변화를 만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그를 이상하게 볼 사람이 있을까, 중년인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저희 능력으로는 이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큰 정보지요. 뭐, 중요한 건 10강 중 하나가 한국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단 거 아니겠습니까.”
“….”
“다른 소식은?”
중년인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전투 과정에서… 천여명이 좀 다쳤습니다.”
“그만한 꼬맹이도 10강급 강자 앞에선 약자일 뿐인가, 죽지 않았으면 좋은 경험을 했을 텐데… 얼마나 다쳤습니까?”
“보고에 따르면 다음 경기가 빠듯할 정도라고 합니다.”
남자는 어떠한 평도 내놓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중년인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국방부 쪽 자료인데… 남북의 테러 모두 제압에 실패했습니다. 김강혁 장관은 곧 군을, 특히 서울 방위군을 움직일 생각이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축제 중이지만, 내부에서는 테러가 들끓고, 작전은 계속 실패하는 중이라… 혼란하군. 나라가 아주 혼란해.”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주변을 확인한 뒤, 슬그머니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선명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위로, 중년인의 얼굴이 반사됐다.
“그런데 말이지, 이런 정보들은 어디서 얻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규정상 정보의 출처는 말씀드릴 수 없습-”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말을 끊었다.
“출처를 말해.”
미행이 붙었다고? 중년인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을 느꼈다.
인적이 드문 나무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소년.
안대를 찬 외팔이 소년의 정체는… 아야톨라였으니까.
“…진실을 흘리는 자?”
그의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출처는… 자유당 박 의원의 사위와 국방부 김 중장의 첩, 그, 그리고 애국단입니다….”
“애국단? 그건 또 뭐야?”
“누, 누군지 저희 쪽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공짜로 한국의 정보를 넘겨주는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년인이 멋대로 진실을 내뱉는 자신의 입에 경악하는 사이,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애국이란 단어를 붙인 놈들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니, 각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참 슬퍼하시겠어.”
“슬픈 건 그놈이 아니라 우리지. 시발… 괜히 시간 낭비했잖아. 이래서 시크릿 소사이어티 놈들은 안 돼. 뭐 하나 주도적으로 하는 게 없잖아.”
진실을 흘리는 자가 투덜거리자, 선글라스의 남자는 한 번 더 웃었다.
“못 본 사이에 입이 참 거칠어졌어. 성녀 때문인가?”
“성녀는 지랄, 억울하게 팔 잘리면 너도 이렇게 될걸? 그리고 빨리 끝내. 이제 빨갱이 찾기 해야 하니까.”
그렇게 진실을 흘리는 자가 등을 돌린 직후, 중년인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선글라스의 남자를 바라봤다.
아야톨라가 이렇게나 친숙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니.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그가 부르르 몸을 떨건 말건, 선글라스의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엄지에 중지를 걸어 딱밤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
“그래도 두려워하지 마. 약속하지. 고통은 없을 거야.”
중년인의 이마 앞에 딱밤이 겨눠진 그 순간, 저편에서 진실을 흘리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무! 놀지 말고 빨리 오라고!
‘허무? 설마, 허무를 흘리는 자?’
최강의 아야톨라를 떠올린 중년인의 눈이 공포로 물든 찰나.
엄지에서 풀려난 중지가 그의 이마를 강타했다.
퍽-!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와 무언가 바닥에 넘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인적 드문 산기슭에 울렸다.
약속대로, 고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