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77)
을 위한 세계는 없다-577화(577/817)
EP.577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2)
* * *
***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 그러하듯, 모낙랑은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었다.
사위에게 미약을 먹이고 한밤중에 사위를 찾아간 것 정도야,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관대한 사람.
동시에, 그녀는 남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감히 그녀를 무시하다 못해 밤새 묶어놓고 딴 여자랑 놀아난(아마도) 사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위에 대한 정보를 좀 팔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글쎄 저희 사위가 말이죠….
그렇게 이름 모를 기자에게 정보 하나를 넘기기 무섭게, 그녀는 온갖 곳에서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삼류 스포츠 신문의 기자, 유명 촬영팀 감독, 심지어 그녀에게 줄을 대보려는 돈 많은 멍청이들이 우르르 그녀를 찾아왔다.
-아, 정말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건데….
-개인적인 이야기라서요….
-이런 이야기는 맨입으로 하기 좀 그런데….
멍청한 세티의 생물학적 애비가 찾아와 제발 함부로 입을 털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지도 사위 팔아서 대통령 해먹을 생각이면서.
홍용완이 장인이라면, 그녀는 천여명의 장모였다. 그리고 관대한 그녀가 생각하기에, 장모는 곧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엄마가 자식 자랑 좀 할 수도 있지.
-저희 딸이 절 닮아서요, 남자를 편하게 하는 법을 알아요.
-다른 자매들이요? 당연히 첩도 못 되죠? 성녀? 평생 다리 사이에 거미줄이나 칠 여자 아닌가요?
-후훗, 여자는 선물에 약하답니다. 저희 딸도, 저도 그렇죠.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았다.
‘작작해.’
효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딸년이 그녀에게 항의했지만, 제까짓 게 뭐 어쩔 텐가?
그녀는 김관형 장관과 아야톨라가 직접 보낸 연락책이었다. 밤새 묶어놓고 괴롭힐 순 있어도, 쫓아내거나 죽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무튼, 그렇게 사위를 팔아 호의호식하던 그녀는 ‘우연히’ 재밌는 정보를 손에 넣었다.
아침부터 사위가 옷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숙소로 돌아왔단 정보.
김관형 장관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 그녀는 곧장 쓸만한 사람들에게 미끼를 흘렸다.
-하아, 아침부터 걱정이네요….
-그렇게 대단한 사위를 두신 분께서 걱정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저는 장모인걸요.
-고민이 많으시겠군요. 괜찮다면, 제가 위로를 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수작질은 뻔했지만 뻔한 만큼 허점도 없었다. 원래 사교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파는 년도, 사는 놈도 다 알고 있었다.
문제는 가격이었지만, 뭐, 천여명의 정보를 파는데 가격을 아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침부터 호텔 뷔페로 찾아온 의원님에게.
최고급 반지를 선물해 준 일본 부자에게.
아직도 대통령을 꿈꾸는 멍청한 남편에게 정보를 팔아넘겼다.
-사위가 많이 다쳤어요.
그녀가 푼 정보는 짧기에 더 많은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었다. 곧 사람들은 ‘이건 비밀인데…’ 라는 마법의 단어와 함께 그 정보를 퍼다 날랐다.
그리고 기어코 외교부에서 아가리 작작 놀리란 경고가 왔으나, 이미 부와 영향력을 거머쥔 모낙랑은 행복했다.
그녀에게 돈을 퍼부은 자들도 행복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할 수 있어서.
다른 정보 조직들도 행복했다. 드디어 한국 정부가 꽁꽁 싸매던 천여명의 정보에 구멍이 생긴 것 같아서.
삼류 기자들, 도박사들, 심지어 소수나마 천여명을 미워하는 자들도 행복했다.
그리고 의외로, 그녀의 딸인 홍세티도 행복했다.
평생 원수나 다름없던 친모가 드디어 도움이 되었으므로.
***
코르부스가 없는 아침, 올림피아 선수 식당.
이제 슬슬 ‘한국 음식은 정말 맛있어요’ 같은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 각국의 선수와 코치들은 아침부터 소문을 쑥덕거리고 있었다.
-천여명이 다쳤다는 거, 진짜일까?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발보다 느린 소문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그게 경쟁자의 소문이라면야.
-당연히 헛소문이지. 그만한 초인이 올림피아 중에 나가서 다치게 말이 되냐?
-수련하는 건 아닐 테고.
-근데, 숙소 들어온 뒤에 천여명 본 사람 있어? 경기 뛰는 거 말고는 아무도 못 봤잖아.
-밥 50인분 먹는 건 봤는데.
사람들의 숙덕거림이 길어지는 가운데, 30인분에 가까운 포장 식사가 식당을 떠나는 게 보였다.
아침부터 갈비찜과 전복, 해삼초 같은 고급 한식을 바리바리 옮기는 걸 보니, 이번에도 천여명의 개인 식사가 틀림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먹지? 강함의 비결이 폭식이었냐?
-개인 경호원들하고 나눠 먹나 보지.
-천여명은 개인 경호원 없는데?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무는 그 순간. 예상외의 소문이 추가되었다.
-야, 그거 들었냐? 한국 정부가 성녀한테 천여명의 치료를 부탁했다 ‘카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를? 식당에서 숙덕거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소문의 당사자를 바라봤다.
햇볕이 비추는 창가 앞에서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있던 성녀.
신비한 안대 때문일까, 신성함을 물씬 풍기던 그녀는 고급스럽게 남은 차를 비우고 호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30인분짜리 밥차의 뒤를 따랐다. 마치, 조금 전 소문이 진짜라는 듯이.
-진짜로 다쳤나 본데?
-다음 대진표가 어떻게 되더라?
-일단 소문 진원지부터 찾아!
성녀의 뒤로 식당의 분위기가 바뀌건 말건,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호위는 신경 썼다.
“그렇게 웃으시면 안 됩니다.”
“호아나, 이젠 웃는 거 가지고도 뭐라고 하는 거예요?”
“당연히 뭐라고 해야지요. 아무리 봐도 치료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남자 만나러 가는 웃음으로 보입니다.”
성녀는 움찔, 재빨리 미소를 숨겼다. 남자 만나러 가는 웃음이 뭔지 모르겠지만, 연기는 중요했다.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어차피 자주 만나시면서.”
“이건 공식적인 만남이잖아요. 비공식으로 만나는 거하곤 또 다른 맛이 있다구요.”
“….”
호아나는 그게 대체 무슨 맛이냐고 묻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성녀님께서 행복하시다면야.’
늙은 성기사가 그렇게 속으로 되뇌길 잠시.
끼익.
30인분의 식사가 담긴 밥차와 성녀는 천여명의 숙소에 도착했다.
식당 직원들과 경비들이 밥차를 세팅하고 떠난 직후, 숙소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을 환영….
…하지 않았다.
“탈락! 다음!”
[풍선을 아무리 키워봤자 풍선 아니냐?]“역시 춤을 춰야 하는 걸지도.”
“포기하지 마!”
“….”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사람이 온 것도 모른담. 성녀와 호아나는 문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녀는 당황 속에서 리볼버를 뽑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티와 시스가 동시에 여명의 몸에 식칼을 들이대고 있었으니까.
성녀가 총을 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네티 때문이었다.
“…뭐해?”
“아, 성녀님 오셨네. 벌써 밥시간이에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네티.
성녀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막내의 칼이 여명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이런 맙소사-성녀와 호아나가 동시에 기겁하는 찰나.
펑!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여명이 사라졌다. 성녀가 이게 뭔가 싶어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는데, 호아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천지불인?”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짧게 고민한 성녀가 그게 만박불통이 쓰는 무술의 이름이라는 걸 떠올릴 때쯤.
멀쩡한 여명이 숙소 입구로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안녕 성녀. 호아나 어르신도 잘 오셨습니다. 혹시 따라온 사람이나 감시자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 둘뿐이란다. 감시자는 저기, 저 빌딩에서 장거리 카메라를 들고 있을 기자 정도가 전부일 테고… 그래서, 대체 지금 안에서 뭘 하는 거니?”
여명은 밥차를 챙기며 대답했다.
“분신 수련이요.”
“분신…?!”
순간, 호아나는 성녀님의 눈빛이 안대를 뚫고 튀어나온 게 아닐까 의심했다. 타당한 의심이었다.
아무튼, 세 사람이 밥차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숙소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각자 인사를 건넸다.
[밥이다!]포크를 들고 식탁에 앉아 있는 시조새 한 마리.
“성녀님도 식사 안 하셨죠? 젓가락이랑 수저 가져올게요.”
“언니, 난 콜라.”
“니가 직접 꺼내 먹어 이년아.”
식사 준비를 위해 일어나는 네티와 분신을 찌른 식칼을 휘휘 흔드는 막내.
그리고-
“왔어?”
노트북으로 뭔가와 씨름하고 있는 세티까지.
거기에 호아나와 성녀까지 추가되니, 특별히 넓은 숙소를 배정받은 여명의 숙소가 꽉 찬 것 같았다.
“성녀님, 저는 문 앞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같이 말을 나눌 코르부스가 없다는 걸 확인한 호아나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다.
그리고 그렇게 젊은이들만 남게 되자마자, 성녀가 물었다.
“분신은 무슨 이야기야? 여명이 분신도 쓸 수 있게 됐어?”
“어, 응. 만박불통에게 배웠어.”
“만박불통… 아카데미 하수도에서 봤던 그만한 분신을 쓸 수 있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는 좀 질이 떨어지는 분신인데….”
“그래도 여명이 여럿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여럿은 아니고, 하나가 한계야.”
기껏해야 분신 하나.
여명이 굳이 ‘나중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성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뼉을 짝! 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명이 둘…? 딱 좋네!”
딱 좋기는 뭐가 딱 좋다는 거야. 여명은 한 손으로 밥차를 세팅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성녀의 볼을 꼬집었다.
성녀는 에베베-여명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식사 준비를 끝마친 여명이 분신을 배우기 위해 저지른 짓을 나열하자, 곧바로 정색했다.
“뭐? 만박불통하고 싸웠다고? 미쳤어?”
“….”
“이겼으니 망정이지, 복수고 뭐고 죽으면 어쩌려고! 다음부터 비슷한 일이 생기면 싸우지 말고 도망갈 궁리부터 해. 알겠어?”
정론이었다. 여명은 부랴부랴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성녀의 손짓을 음미하다가, 라날이 찐 전복의 껍찔을 씹을 때쯤 대답했다.
“응, 그럴게.”
“말은 잘해요, 말은.”
“….”
“미리 말하는데, 10강 말고 다른 강자하고도 함부로 싸우지 마. 가장 중요한 건 네 목숨이니까.”
10강 말고 다른 강자라. 여명은 카를로스와 아야톨라를 떠올렸다.
그가 죽인 꿈과 피가 아닌, 아직 살아있는 진실, 눈물, 그리고 허무를 흘리는 자를.
복수의 길에서 그들과 마주할까?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여명은 성녀에게 확답하지 않았다.
성녀 또한 그것을 눈치챈 건지, 그 이상 여명을 타박하지 않고 분신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래서, 어디까지 구현돼?”
의외로, 그녀 대답을 받은 건 네티였다.
“그럭저럭 원본하고 똑같아요.”
“그럭저럭?”
“다른 곳은 다 확인 했는데, 제가 못 본 곳이 있어서….”
“아.”
못 본 곳? 젓가락을 들던 여명의 눈이 가늘어지건 말건, 네티와 성녀, 그리고 막내까지 합세해 분신 이야기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내구도가 너무 낮아요. 계속 수련해서 이 정도지. 처음에는 손톱만 찔러도 사라졌다니까요.’
‘호세도 아니고, 분신이 다 그렇지 뭐. 쓰는 게 어디야?’
‘그건 그런데, 말도 잘 못해요. 형부의 그 느끼한 목소리를 전혀 못 따라 하더라구요. 멀티태스킹이 힘들다나.’
‘하긴, 여명 목소리가 느끼하긴 하지.’
‘그리고 이게 춤을 추는 무술의 부산물인데요. 형부는 진의가 달라서 춤을 안 추는 쪽으로 개량 중이에요.’
‘형부, 그냥 춤추기 싫어하는 거 같던데.’
‘왜? 여명 춤 못 춰?’
‘네. 아저씨 막춤밖에 못 추시더라구요.’
‘아저씨 막춤? 나도 보고 싶다.’
여명은 애써 자신에게 꽂히는 눈빛을 외면했다. 이러려고 만박불통에게 분신을 배운 게 아닌… 아니, 이러려고 배운 게 맞지.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한 여명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또 다른 욕망의 근원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노트북 앞에 있는 세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세티? 일은 잠깐 멈추고 밥부터 먹어. 이러다가 라날이 다 먹겠다.”
“응, 잠깐 이것만 끝내고 갈게.”
그러자 라날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막내가 들고 있던 식칼로 갈비찜을 보호하는 찰나.
세티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드디어 끝났다.”
성녀가 뭐가 끝났냐고 묻기도 전에, 세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앞 성녀와 여명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그녀는 젓가락을 들자마자 라날과 비슷한 속도로 밥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세티가 대식가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먹을 게 줄어드는 라날을 제외한 모두가 세티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안 돼! 내 갈비찜! 그만 먹어 이 돼지야!]이윽고, 라날이 빈 갈비찜을 보며 한탄할 때쯤.
젓가락을 내려놓은 세티가 모두에게 말했다.
“어제 새벽에 장만 어르신이 서울 방위군이 빠진 걸 확인했어. 서울 방위에 구멍이 뚫렸다는 소리지. 그러니 이제… 남산을 칠 거야.”
“….”
남산, 대한민국 최대 비밀 연구소이자, 각하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
“침투 계획보단 목표 탐색을 위한 정보부터 모았어. 아무래도 임기응변이 더 중요할 테니까.”
그때, 성녀가 끼어들었다.
“난 뭘 하면 될까?”
“아무것도.”
“또? 또 나만 빠져?”
살로메도 빠지게 되겠지만, 성녀는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나치는 원래 빠지는 게 맞으니까.
아무튼, 세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모두 빠질 거야.”
“모두?”
이번에는 자매들이 눈썹을 씰룩거릴 차례였다. 세티는 방에 있는 모두를 둘러본 뒤, 여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나와 여명을 포함한 모두.”
“…?”
여명도 빠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소뼈를 씹어먹던 라날이 눈을 깜빡였으나, 성녀를 비롯한 자매들은 그 말속에 숨겨진 뜻을 깨달았다.
모낙랑을 이용해 여명이 다쳤다는 거짓 소문을 낸 것부터, 성녀를 부른 것까지. 모두 한 가지를 뜻하고 있었으니까.
“아쉽지만, 우리는 모두 여명의 알리바이가 될 거야. 남산에 가는 건 한 명뿐이야. 붉은 별.”
“…붉은 별.”
“작전 결행은 다음 올림피아 경기 날, 자정이야. 그게 장만 어르신과 미리,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이야.”
여명은 어떠한 반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주먹을 쥐어 결의를 다졌다.
그는 세티를 비롯한 일행들의 계획을 믿었다. 전 국토를 테러한다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미끼와 준비를 거친 계획 아닌가.
어떤 이변이 일어나도, 계획은 성공하리라.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렸다.
***
연지벌레의 주인, 구더기 공주, 그리고 터스키기 연구소가 키워낸 암살자.
라쉬크는 숨을 길게 늘어트렸다.
중요한 순간에 숨을 참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훌륭한 암살자는 결코 호흡을 끊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암살자가 아니었다.
사이비 교단의 교회로 변장한 한국 정부의 비밀 기지 담장을 넘고, 벌레로 기지 내부를 탐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절대, 결단코 암살자가 아니었다. 그저 물주의 부탁을 거부하지 못한 불쌍한 연금술사일 뿐.
‘천여명, 이 나쁜 자식… 난 연금술사라고.’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벌레를 조종했다. 심지어 도중에 히죽 웃기까지 했다.
바로 오늘 아침, 여명이 보내준 돈 덕분이었다.
통장 뒤에 붙은 0이 대체 몇 개인지, 암시장에서 이름을 날릴 때도 만져보지 못한 액수.
거기다 장만 어르신을 통해 알게 된 은밀한 인맥들까지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나왔다.
‘진짜 돈과 돈 주고도 못 사는 인맥….’
그렇게 가슴 가득 차오르는 풍족함을 만끽하던 그녀는 문뜩, 자신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네크로맨서를 바라봤다.
딜라 카탁포이어.
작전을 위해 전신을 가린 검은 옷을 입은 그녀는 조용히 라쉬크의 탐지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얘는 왜 이러고 있지?’
라쉬크는 문뜩 궁금해졌다. 이만한 실력의 네크로맨서가 왜 여명을 돕고 있는 걸까?
그녀처럼 뭔가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닌데.
진짜 샌드위치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여명을 사랑해서?
‘…지랄.’
라쉬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여명이 꽤 괜찮은 남자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따라다니는 건 다른 문제였다.
당장 경쟁자가 성녀나 엘프 공주 아닌가. 여명이 먼저 구애하는 것도 아닌 이상 사랑은 헛소리였다.
그럼 진짜 뭐지.
짧게 고민하던 라쉬크는 그냥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딜라.”
“네.”
“넌 왜 여명을 돕고 있는 거야? 뭔가 따로 원하는 게 있어?”
그러자 딜라는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냐’ 고 묻는 꼬맹이를 마주한 어른과 비슷한 미소였다.
“저는 당연히 샌드위치 때문에….”
“아이는 황새가 물어준다는 식의 헛소리는 됐고, 진짜 이유가 뭐야?”
“….”
“말 못 하는 이유면 말하지 않아도 돼.”
라쉬크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딜라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행복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들 하죠. 그럼 공포는 어떨까요?”
“…뭐?”
“정답은, 공포를 나누면 계속 늘어난다… 입니다. 그래서 장군과 정치인은 공포를 무기 삼고, 옛 현자들은 공포를 입에 담지 않았죠.”
“….”
“지금 제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말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라쉬크, 저는 미스터 샌드위치가 없었다면 지금쯤 미쳐버렸을지도 몰라요.”
네크로맨서라 그런가, 멀쩡한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내뱉는 재주가 있었다.
“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
라쉬크는 짧게 사과하고 다시 벌레 조종에 정신을 돌렸다. 덕분에 그녀는 딜라의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라쉬크가 조종하던 벌레가 두 가지 신호를 보내왔다.
첫 번째는 물에 빠졌을 때 보내오는 신호였는데,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벌레가 몰래 들어간 곳은 비밀 기지 지하였고, 한국은 생각보다 지하수가 풍부한 나라였다. 어디 물웅덩이에라도 빠진 거겠지.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신호였다.
‘피를 발견했다는 신호.’
물에 빠졌는데, 피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피 웅덩이.
불길함을 느낀 라쉬크는 딜라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조용히 일어난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벌레가 정찰한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비밀 기지 지하는 마치 동물의 내장처럼 비비 꼬여 있었다.
그래도 꼼꼼히 콘크리트 마감을 해놓은 게, 진짜 사이비 교단의 비밀 기지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어느 순간부터 진한 피 냄새가 두 사람의 복면을 뚫고 들어왔다. 라쉬크는 걸음을 멈추고 수신호를 보냈다.
‘후퇴?’
‘아직은. 일단은 상태부터 확인.’
‘알겠음.’
다시 지하로 향하길 잠시. 두 사람은 시체를 발견하고 발을 멈췄다.
하반신이 없는 시체는 상반신만 기어 온 듯, 뒤로 기다란 핏줄기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테러할 곳에 선객이 있었네.”
좋지 않은데. 라쉬크는 벌레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손목에 찬 독 분사기에 테러용 수면제 대신 극악한 염소 화학물을 채워 넣었다.
늘어지는 호흡. 더욱 조용해진 발걸음.
라쉬크는 천천히 핏줄기를 따라갔다.
잠시 후, 그녀는 지하 공동, 혹은 기도장인 듯한 곳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공동에 가득 쌓인 시체 때문에?
아니, 시체를 의자 삼아 앉아있는 정체불명의 괴한 때문에.
피로 젖어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눈코입도 없이 덜렁 태극기만 그려진 가면을 쓴 남자.
조선 특유의 기다란 환도와 소총으로 무장한 그는 라쉬크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왔군.”
“….”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라쉬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내가 올 줄 알았나?”
우리가 아닌 나. 딜라는 입구 옆에서 더욱더 자신을 숨겼다. 혹시라도 싸움이 시작되면, 기습 한 번이 승패를 가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싸울 생각이 없는듯했다.
“경계할 필요 없다. 난 적이 아니니.”
“시체 앞에 있는 남자를 경계하지 않으면 누굴 경계해?”
“옳은 말이다. 하지만 네가 죽였어야 할 인간들이라면 말이 다르지.”
그녀가 이곳을 습격할 걸 예상했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라쉬크는 명령을 듣고 몰려오는 무수한 벌레들을 느끼며 대답했다.
“난 죽인 적 없어. 제압했지.”
“지금까지는 그랬을 거다. 하지만 여긴 다 죽여야 했을 거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시체 하나를 툭-칼로 밀어냈다. 시체는 익숙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종말 교단?”
“그래, 이곳은 정부와 교단이 비밀리에 세운 보급기지다. 무엇을 보급하는지는 말할 필요 없겠지.”
이 새끼 진짜 뭐지? 뭔데 이렇게 다 말해줘?
라쉬크가 복면 위로 녀석을 노려보자,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너희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적이란 걸 알고 있다.”
“….”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적의 적은 친구란 격언이 있지.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참 인상적인 동맹 제안이네, 하지만 이 나라를 흔드는데 굳이 친구는 필요 없-”
그때, 남자가 말을 끊었다.
“너희도 남산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안다. 우리도 예전부터 남산을 노리고 있었다. 어떤가? 모쪼록 함께하는 게.”
“….”
라쉬크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년 간 암살자로 살아온 경험 덕분이었다.
‘여명과 세티의 계획이 새어 나갔어. 어떻게?’
이대로 후퇴하느냐, 아니면 조금의 힌트라도 찾아보느냐… 두 선택지 앞에서, 라쉬크는 선택했다.
“우리가 그쪽을 어떻게 믿지? 가면부터가 한국 정부 끄나풀처럼 보이는데.”
라쉬크가 변조한 목소리로 묻자, 남자가 대답했다.
“현재, 한국에는 남은 아야톨라가 모두 모여있다. 진실, 눈물, 허무… 아야톨라와 싸우고 싶지 않다면 테러 중인 너희 쪽 인물들을 전부 후퇴시켜라.”
“…?”
뭐라고 시발? 라쉬크가 턱 끝까지 올라온 욕을 간신히 참건 말건, 남자는 덤덤하게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게, 우리가 주는 믿음의 증거다. 이 증거로 우리를 믿을 수 있게 된다면… 서울 효창 공원 가묘 앞으로 와라. 기다리고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