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82)
을 위한 세계는 없다-582화(582/817)
EP.582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7) (수정)
* * *
***
먼저 입을 연 건 애국단이었다.
“생각보다 고전적인 방법을 쓰는군.”
여명은 처제의 재치를 운운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쪽도.”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뒤에 있던 애국단 중 한 명이 웃는 소리를 냈다.
“하, 빨갱이치곤 유머가 있는걸? 이봐, 우리도 경품을 받을 수 있나?”
여명은 대답 대신 무장 혈청으로 인민의 낫을 만들었다.
“원한다면야.”
“사양하지.”
인사 겸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가장 앞에 있던 애국단 녀석이 주제를 바꾼 까닭이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시간이 많지 않다. 360초마다 초소에서 신호가 오지 않으면 강제로 경보가 발동된다.”
“…그쪽이 준 지도에 그런 내용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도로 전할 수 없는 정보도 있는 법이지.”
모든 걸 알려주지 않았다는 뜻이 담긴 대답이었다. 여명이 팔짱을 끼는 사이, 녀석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지하 외곽, 생물 연구소다. 그쪽은?”
“중앙 기록보관소.”
“역시 목표가 다르군… 혹, 우리와 함께 가겠나?”
“아니.”
여명은 딱 잘라 거절했다. 맨 앞에 있던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들어 나머지 애국단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무운을 빌지.”
그것이 끝이었다. 다섯 명의 애국단은 그대로 여명을 지나쳐 남산의 지하 벙커를 향해 내달렸다.
여명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초소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나아가는 대신, 터스키기의 귀화를 일으켜 초소와 격벽을 통째로 불태워 벽을 막았다.
누구도 이곳으로 나갈 수 없도록.
화재경보기는 울리지 않았다. 여명은 녹아내린 철문과 기관포, 그리고 콘크리트가 단단하게 굳은 걸 확인한 뒤 천천히 통로로 내려갔다.
저벅.
6·25 이후에 지어진 듯한 원형 콘크리트 통로는 지도에서 보던 것보다 넓고, 밝았다.
피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이곳이 지옥 입구라는 걸 알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이곳의 진실을 알고 있는 여명은 기억 속에서 천천히 지도를 끄집어냈다.
이 구멍에서 중앙 기록보관소까지 일직선. 지옥의 길이 그려진 지도였다.
구형 전구 아래에 선 그의 등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늘어지길 잠시.
거리 계산을 끝낸 여명은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파양결과 합쳐진 비각술. 가속하는 자동차만큼이나 빠르게 내달린 여명을 처음 반겨준 건 벌집이 된 양치기들이었다.
먼저 나아간 애국단의 솜씨였다. 여명은 핏물을 밟으며 시체를 지나쳤다.
그리고 고작 일 분이 지나기 전에, 경보가 울렸다.
위이이이잉 – ! 위이이잉 – !
흡사, 공습경보를 떠올리게 하는 불쾌한 사이렌 소리.
예상보다 조금 빠르긴 했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섯 갈림길이 나누어진 공동에서 맨 오른쪽 길을 선택하고, 기울어진 통로 아래로 속도를 높였다.
이윽고, 두꺼운 철문과 마주한 순간.
번쩍! 그의 품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황금 옥새의 마법진이 터져 나왔다. 곧 찬란한 금빛으로 물든 벙커의 철문이 스스로 잠금을 풀었다.
-뭐야, 누가 잠금 풀…!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당황한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철문을 넘은 여명의 검이 그의 목을 베었으므로.
푸확! 피와 함께 허공으로 치솟은 머리는 군복을 입은 군인의 것이었다.
“대위님!”
“침입자다!!!”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 건 아닌지, 철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의 반응은 신속했다.
앞에 있던 녀석들은 총구를 들었고, 뒤에 있는 놈들은 괴수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아홉.’
여명이 적의 숫자를 확인한 순간, 두두두 -! 소총이 불을 뿜었다.
아무리 초인이라도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총알은 피할 수 없는 법. 물론, 총알에 맞아 죽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
여명의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터져 나왔다.
주가시빌리. 소련이 남긴 최강 최흉의 유산은 공포에 질린 시선과 총구의 화염, 그리고 군인들의 비명을 동시에 집어삼켰다.
“쏴! 쏘라고!”
운 좋은 몇몇 총알이 여명의 몸을 관통했지만, 그뿐이었다. 여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지랑이 속으로 돌진해 가까운 군인의 목을 베었다.
“커헉!!”
아지랑이 사이로 비명과 총성이 오가는 가운데, 놀랍게도 머리 없는 시체들이 벌떡 일어났다.
“재생 괴물이다! 하체부터 쏴! 기동력을 끊어야-아악!!”
“시야에 의지하지 마라!! 냄새! 냄새를 쫓아라!!”
이미 반쯤 괴수가 된 녀석들은 어떤 특수한 향이라도 맡는 건지, 여명을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심지어 몇 놈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수류탄 핀을 뽑은 채로 몸을 던졌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여명은 녀석들을 보지도 않고, 뒤틀린 마나를 끌어 올려 터스키기의 귀화를 시전했다.
화르륵! 섬뜩한 푸른 불길이 그의 몸을 뒤덮고, 그대로 아지랑이 주변으로 번졌다.
아악! 안 돼! 뜨거워, 살려줘-비명인지 애원인지 모를 목소리가 잠시 이어졌다.
그리고 타오르는 불씨 소리만이 남은 순간.
불길이 지나간 자리 위로 타죽은 시체들이 일어섰다.
텅 빈 푸른 불길을 머금은 좀비들.
여명은 그들의 섬뜩한 모습을 구경할 틈도, 생각도 없었다.
그는 걸을 수 있는 시체들에게 한껏 불꽃을 집어넣은 뒤, 통로 너머로 보냈다. 시체들은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착실하게 적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통로 저 멀리서 두두두두 – ! 소총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귀화에 휩싸인 좀비들이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좀비들에게 바란 건 전투가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마지막 좀비가 쓰러지는 걸 느낄 때쯤.
여명은 두 손을 합장하고 주문을 외웠다.
“시체 폭발.”
곧이어, 통로가 뒤흔들렸다. 터스키기의 귀화를 잔뜩 머금은 좀비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
넓게 퍼트린 마나로 느껴지는 거친 진동과 비명들.
터스키기의 귀화가 다른 시체들로 번지고 있는지, 새로운 좀비의 조종권이 느껴졌다. 숫자가 많지 않았다. 아마 폭발이 너무 강했던 것이리라.
‘다음에는 범위를 좀 줄여야겠군.’
섬뜩한 생각을 떠올린 여명은 그대로 새로운 좀비를 움직이며 통로를 내달렸다.
그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저 앞에서 폭발이 이어졌다.
!!!!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좀비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조금 전보다는 많은 숫자였다. 지도를 떠올린 여명은 좀비들에게 최대한 넓게 퍼지란 명령을 내렸다.
여명은 경비들과 하나하나 싸우며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았을 뿐, 그는 이미 대량 학살 개인이란 이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쾅, 쾅, 콰아아앙 – !!!
통로 너머로 계속 폭발이 이어진다. 섬뜩한 귀화가 통로를 뒤덮고, 그 사이로 죽은 자들이 일어나며, 내달렸다.
달린다. 한국이 숨겨놓은 악의 심장을 향해서.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라면 탈진하고도 남을 미친 짓이었으나, 타락한 용의 심장을 가진 여명은 오히려 점점 더 범위를 넓혔다.
괴수 군인과 양치기, 그리고 이름 모를 부역자들이 죽었다. 해골용이 지구인들을 향해 저질렀던 악의가 그의 손에서 재현된다. 생존자는 없었다.
이곳은 남산의 지옥.
이곳에 있는 누구도 무고하지 않으니, 모두 죽으리라.
***
같은 시각, 남산 지하의 중앙통제실.
남산의 보안 책임자, 호랑이 가면은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며 경악했다.
-11번 라인 붕괴.
-12번 라인 붕…
-13번 라인…
-14번…
그가 마주한 복잡한 화면 위에는 벙커의 보안 시설들이 표시되고 있었는데, 청색으로 번쩍이던 시설 표시가 적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빠르게.
“당장 침입자 파악해! CCTV 돌리라고!”
대응이고 뭐고, 일단은 적을 알아야 할 수 있는 법이었다. 호랑이 가면이 버럭 소리 지르자, CCTV 디스플레이 앞에 있던 양치기 하나가 빠르게 대답했다.
“폭발 때문에 화면이 잡히지 않습니다! 확인된 건 좀비와 푸른 불꽃뿐입니다!”
좀비와 푸른 불꽃? 호랑이 가면은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해골용을 떠올렸다.
이건 브라질 국경 수비대 전체와 함께 아마존 남부를 불태워 버린 용의 수작질과 너무나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카할 마그두는 죽었다. 오르세 타불과 함께 그를 죽인 누군가에 의해 심장도, 뼈도 사라졌을 텐데-그때, 다른 곳을 감시하던 양치기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생물 연구소 방향, 31번 라인에서 신호가 끊겼습니다!”
“뭐라?”
설마, 양동 공격? 그의 머리로 최악의 가능성이 떠오르는 가운데, 31번과 32번 라인 사이 CCTV가 적을 확인했다.
태극기 가면을 쓴, 다섯 명의 침입자.
“…애국단.”
상황 파악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호랑이 가면은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향해 지원을 요청했다.
“하필 서울 방위군이 자리를 비웠을 때를 노리다니… 군, 교단, 올림피아 수비대까지 전부 불러라. 특수 상황이다. 예외는 없다.”
즉시 모든 곳으로 긴급 암호문이 퍼졌다. 이승만 기념관에 앉아 있는 소녀가 그 암호문 중 하나를 가로챘다는 사실도 모른 채, 호랑이 가면은 다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생물 연구소에 있는 모든 표본을 폐기하고, ‘휴식’ 중인 VIP분들을 모셔라. A-1과 A-2의 정보는 최우선으로 삭제하도록.”
“그럼 중앙 기록보관소 쪽은….”
“내가 직접 가겠다. 말 이상 양치기를 모두 19… 아니, 24번 라인으로 소집하도록.”
호랑이 가면은 으르렁거리듯 말한 뒤, 그대로 중앙 통제실을 벗어났다.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제3의 침공이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76번 라인. 정체불명 침입자들의 침입을 확인. 괴수에 가까운 촉수를 확인했습니다.”
한 놈도 아니고 셋이란 말인가. 조국이 우습게 보였다고 느낀 호랑이 가면은 섬뜩한 이를 드러냈다.
“내 생명 반응이 끊어지면 곧바로 비상 대응 코드 0000을 발동하도록.”
“그건….”
“모든 목숨을 조국에.”
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말. 통제실은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랑이 가면은 신경 쓰지 않고 등을 돌렸다.
이곳은 애국자의 산실.
애국자의 목숨은 국가를 위한 것이니, 오늘 이곳에 있는 모두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리라.
***
여명의 돌진이 멈춘 건 23번째 시체 폭발을 사용한 직후였다.
좀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폭발이 너무 강해서 좀비를 만들만한 시체가 남지 않았거나, 폭발에 버틸 정도로 강자들만 있었다는 뜻.
여명은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한국의 기밀이 모인 곳.
아무리 기습 공격이라고 해도, 슬슬 제대로 된 저항이 돌아올 때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 시체 폭발을 일으킨 장소로 도착한 직후, 여명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말 머리 열다섯, 닭 머리 열, 그리고 처음 보는 호랑이 머리 하나.
깔끔한 검은 양복을 입은 양치기들 또한 각자 무기를 든 채로 여명을 확인했다.
가장 덩치가 큰 호랑이 얼굴이 흠칫, 어깨를 떨며 말했다.
“붉은 별…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
“존경하는 의원님들을 죽인 대가를 치르게 해주-!”
여명은 녀석이 지껄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흐릿해지며 인민의 망치가 호랑이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쩌-엉 -!!!
놀랍게도, 호랑이 얼굴은 망치를 막았다. 적어도 여명과 칼부림을 할 정도의 강자라는 뜻.
여명의 눈썹이 휘어지는 가운데, 모든 양치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여- 라-!”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닭 머리의 포효를 시작으로 양치기들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공기를 더럽히는 뒤틀린 마나, 끓어오르는 적의, 그리고 폭발하듯 번지는 주가시빌리.
여명이 무장 혈청으로 만든 인민의 낫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닭 머리들이 쩌억-입을 벌리고 광선을 쏘아냈다.
콰아아아 – !!
저주가 듬뿍 담긴 광선은 그대로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를 꿰뚫고 여명을 덮쳤다.
여명은 피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정면으로 광선을 쳐냈다. 저건 맞추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달려드는 말머리들을 보조하기 위한 공격이었으니까.
“조국을 위하여!!!”
어느새 전투형으로 변신한 말 머리 하나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핏줄이 돋아난 녀석의 눈동자에는 분노를 넘어선 뭔가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목을 자르고 나서야, 여명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광기로 더럽혀진 애국심.
머리가 잘린 말머리는 곧바로 죽지 않고 양손을 넓게 펼치더니, 여명의 몸을 꽈악-끌어안은 채 죽었다.
여명이 빠르게 녀석의 몸을 떨어냈지만, 다른 말머리들이 재빨리 그 자리를 채웠다.
두 마리, 세 마리, 넷, 다섯…
그렇게 열 마리가 넘는 말머리의 시체가 여명을 붙잡은 순간.
호랑이 가면의 검이 여명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흔히 환두대도라 불리는, 한국 전통의 직선형 외날 검.
마나 메탈을 머금은 듯 붉게 일렁이는 검은 그대로 여명의 목을-치지 못했다.
퍼어엉 – !!!!
여명이 자신을 붙잡고 있던 말머리의 시체들을 일제히 폭파해 버린 덕분이었다.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호랑이 머리는 물론이고 여명의 몸조차 날아가 벽에 처박힐 정도.
일반적인 초인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지만, 붉은 아지랑이에 휩싸인 여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벽에서 걸어 나왔다.
“…주가시빌리, 저주 받을 빨갱이의 유산이여.”
“그래, 그래, 너희는 좋은 놈이고, 빨갱이는 나쁜 놈이지.”
살벌하게 이죽거린 여명은 터스키기의 귀화를 몸에 둘렀다.
푸른 불꽃을 본 호랑이 머리는 닭 머리들에게 눈짓했다. 희생 작전이 실패했으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뜻이 담긴 눈짓.
버텨야 한다.
아무리 강대한 초인이라도 이런 좁은 곳에서 지원군이 몰려들면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양치기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양치기들은 기꺼이 목숨을 내놨다.
“죽어라!!”
가장 먼저 달려든 닭 머리는 인민의 낫에 베여 허리가 반으로 잘렸다. 다음으로 달려든 말 머리는 인민의 망치에 맞아 머리가 터졌다.
죽는다. 애국자가 죽는다. 빨갱이의 상징이 휘둘러 질 때마다, 한 명씩.
그들의 값어치를 아는 호랑이 머리는 극한의 분노를 느끼며 환두대도를 휘둘렀다.
쩌엉 – !! 검과 검이 충돌하며 칼날에 불씨가 튀었다.
여명과 시선을 맞춘 호랑이 머리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각종 비의를 쏟아부은 양치기의 육체로도 밀어낼 수 없다니, 대체 이 녀석의 몸은 뭐란 말인가?
궁금증은 길지 않았다. 붉은 별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니, 어떻게든 다른 양치기들이 공격할 틈을 만들어야 했다. 호랑이 머리는 춤을 추듯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저주 광선이 시야를 채우고, 칼날이 쉼 없이 오가길 잠시.
호랑이 머리는 환두대도를 타고 흐르는 충격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혈액 무기의 강도가 생각보다 약하다.’
의외의 약점이었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상식적으로, 저렇게 유연한 무기가 강도까지 강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호랑이 머리는 즉시 몸속의 모든 마나를 쥐어짰다. 설사 그것이 작은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돌파구를 찾은 이상 망설일 필요 없었다.
“빨갱이에게 어울리는 지옥으로 가라!”
진짜 호랑이처럼 쩌렁쩌렁한 외침을 따라, 환두대도가 여명이 아닌 인민의 낫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놀란 여명이 뒤늦게 낫을 뒤로 뺐지만-
!!!
무장 혈청이 깨지며 굳은 핏물이 흩날렸다. 성공이었다.
“죽여!”
호랑이 머리는 그대로 여명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닭 머리들의 저주 광선이 축포처럼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여명의 가슴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돌진했다.
무기를 잃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거리가 좁혀졌다는 건 여명 또한 그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호랑이 머리는 여명의 표정을 확인했다. 녀석의 얼굴에는 무기를 잃은 당황도, 반격의 긴장도 없었다.
비웃음.
호랑이 머리가 뒤늦게 소름을 느끼고 방어 자세를 취하려는 순간, 여명은 무장 혈청을 잃은 손을 ‘쥐었다.’
인벤토리 속에 잠들어 있던 산의 눈물이 그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푸확!
호랑이 머리의 목젖을 베었다.
목뼈를 베기엔 아주 조금 부족한 깊이.
그럼에도 목은 인체의 약점 중 하나였고, 호랑이 머리는 피가 쏟아지는 목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
“안 돼! 호환을 지켜라!”
공세를 위해 달려들던 양치기들은 곧바로 자세를 바꿔 여명을 향해 뛰어들었다. 실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고, 그들은 그 대가로 죽었다.
‘안 돼.’
바닥에 쓰러진 호랑이 머리는 여명을 올려다보며 절망했다. 그의 강함이 상상 이상이라서?
아니, 온몸이 푸른 불길에 휩싸인 채 위로 붉은 아지랑이를 뿜어내는 여명의 모습이 흡사 태극기처럼 보였으므로.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탓인가, 그는 붉은 별이 무언가를 대신해 그들을 벌하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냐,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애국자다. 우리만이 애국자야.’
그가 간신히 상념을 떨쳐냈을 땐, 인민의 낫이 이미 그의 머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뇌의 중요 부분이 토막 나면 아무리 재생 괴물이라도 살아날 수 없는 법.
호랑이 머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국이여! 여기 너를 위해 또 한 명의 애국자가 죽노라…
‘….’
어째서일까. 그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죽음은 다가오지 않았다. 이미 죽어서 아무 고통도 못 느끼는 건 아니었다. 목이 재생되는 통증이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기적인가? 호랑이 머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곧 섬뜩한 그의 눈동자 위로, 일그러진 붉은 별의 얼굴과 그의 검을 막아선 양치기의 뒷모습이 비쳤다.
“…양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