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84)
을 위한 세계는 없다-584화(584/817)
EP.584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9)
* *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
공기가 변했다.
어느 순간, 통로를 내달리던 여명은 터널 내부의 무언가가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보안 프로그램? 아니면 함정?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여명은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막으면 태우고, 부술 뿐.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가 두꺼운 철문을 열고 지하 벙커의 ‘중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 도착한 순간.
여명은 한국 정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꿈틀, 꿈틀, 두꺼운 벙커의 벽을 따라 검은 점액질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끈적하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그 점액질 사이로는 손가락과 발, 그리고 아직 녹지 않은 누군가가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카락과 뭉쳐있는 눈동자, 반쯤 녹아내린 갈비뼈, 길게 늘어진 창자, 군복 계급장과 엉켜있는 머리카락…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의 흔적.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보자마자 구토를 쏟아낼 광경이었다. 하지만 시체 청소 경험이 많던 여명은 토악질 대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그렇게 그가 한 걸음 내딛자마자, 발아래에 있던 점액질에서 푸후-뒤틀린 마나가 뿜어졌다.
마치 포자를 가득 내뿜는 버섯의 그것처럼.
뒤틀린 마나를 뒤집어쓴 여명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촤악!!
점액질 사이로 검은 촉수가 튀어나와 그의 얼굴을 노렸다. 여명은 놀라긴커녕 덤덤하게 그것을 붙잡았다.
점액질과 시체가 뒤섞인 촉수는 꿈틀거리며 고름처럼 진한 아지랑이를 토해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여명은 터스키기의 귀화를 일으켰다.
화르륵! 그의 손에서 시작된 푸른 귀화는 뒤틀린 마나를 연료 삼아 촉수, 촉수가 연결된 점액질로 번졌다. 마치 석유 위로 불길이 번지듯 통로 전체가 푸르게 물들었다.
땔감은 많았으나, 분노는 가시질 않았다.
불이 그렇듯, 더 많은 땔감을 집어삼켜도 감정은 커지기만 할 뿐.
새까맣게 타버린 촉수를 내던진 여명은 무겁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타오르는 점액질과 시체의 냄새를 짓밟았다. 그들이 만든 지옥의 냄새였다.
후우-몇 걸음 내디딘 여명은 그대로 다리에 힘을 실었다. 혈관을 따라 움직이던 마나가 감정을 따라 요동친 직후, 그의 몸이 주욱-늘어나며 가속했다.
그의 뒤로 푸른 불꽃이 이어지며 통로를 가득 채웠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뒤틀린 마나가 점점 더 짙어졌다. 눈과 코를 찌르는 악취는 덤이었다.
그가 가는 길 내내 군인도, 양치기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를 뒤덮은 점액질과 침묵만이 그의 걸음을 환영했다. 마치, 태풍이 불어오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이윽고, 여명이 중앙 깊숙한 곳에 도달했을 때.
통로 저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꿀, 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돼지의 울음소리. 여명은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목소리의 주인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벽에 가득한 점액질과 똑같은 점액질로 만들어진 비대한 덩어리.
꿈틀거리며 벙커 통로를 기어 오는 그것의 몸 이곳저곳에는 총을 든 사람의 손과 뼈, 그리고 양치기들의 머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시카고에서 싸웠던 괴수왕을 모방한 카피일까? 여명이 역겨운 괴물에게서 익숙함을 느낀 순간.
꿀꿀, 여명을 발견한 돼지머리가 울었다.
여명은 곧바로 검을 뽑았다. 그는 조용히 마나를 모아 화산쇄설을 준비했다.
철컥, 덩어리 속 총을 든 손들이 그를 겨눴다. 수십 개의 총구가 그를 겨눈 바로 다음 순간, 총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두두두두 – !!
여명은 주가시빌리를 휘감은 채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총알에 맞은 관자놀이, 허벅지, 가슴이 후끈거렸으나, 그를 멈출 순 없었다.
30m, 20m, 10m….
이윽고, 메에에-울음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온 순간. 여명은 불씨를 머금은 검을 내려쳤다.
!!!!!!
위력이 어찌나 큰지, 폭발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삐이-귀를 울리는 이명 속에서 점액질과 시체들이 흩뿌려졌다.
벙커가 흔들리고, 몸의 7할이 날아갈 충격이었음에도, 녀석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촉수를 휘둘렀다.
역시 괴수왕처럼 핵을 뽑아야 하나.
여명은 검을 회수하고 아직 폭발하지 않은 점액질의 잔해로 손을 뻗었다. 핵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제야 괴물은 여명이 뭘 노리는 건지 눈치챘다. 녀석은 아직 날아가지 않은 시체들과 촉수를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
캬-아악!!!
말, 소, 돼지가 동시에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여명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서 알파 빔을 발사해 녀석의 뱃속과 비쭉 솟아난 머리들을 절단했다.
치이익 – !! 10강의 무술이 살덩이와 점액질을 넘어 벙커벽에도 커다란 흉터를 남기는 사이.
여명은 점액질 바닥에 처박힌 검은 살덩이를 발견했다. 마왕의 심장과 닮았으나, 어딘가 조잡한 살덩어리였다.
그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쥐고, 뽑아냈다.
꺄-아- 아-악!!!
다음 순간, 끔찍한 소리와 함께 괴수의 몸이 무너졌다. 여명은 퍽! 녀석을 발로 밀어내고 바닥에 착지했다.
손아귀에서 두근거리는 살덩이에서는 피 대신 아지랑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심장의 모방품의 소유권을 빼앗고 인벤토리로 회수해 봤다.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는 진짜 마왕의 심장과 달리,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역시 유사품이었다.
‘괴수와 인체 실험, 교단, 유사 마왕의 심장….’
여명은 남은 점액질들을 태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국은 정말로 마왕을 꿈꾸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의 시대는 끝났다. 혁명의 불길조차 사그라든 시대였다. 새로운 왕은 없다.
만약 왕이 탄생한다 해도, 프롤레타리아… 아니, 자신이 직접 배에 죽창을 꽂아주리라.
그렇게 다짐한 여명이 다시 걸음을 옮긴 직후, 저편에서 또 다시 무언가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꿀꿀, 음메, 히히힝, 꼬꼬곡, 메에에—
브레맨 음악대가 떠오르는 다양한 짐승들의 소리.
터스키기의 귀화가 복도 너머를 비추자, 조금 전에 죽였던 녀석과 비슷한 점액질들이 복도 천장과 바닥, 벽을 가득 채우며 몰려오고 있었다.
죽은 녀석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건가.
검을 든 여명은 퉤-입에 고인 역겨움을 내뱉었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번뜩이는 가운데, 그는 몰려드는 괴물들의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
같은 시각, 벙커 저편.
다섯 명의 애국단은 점액질로 뒤덮인 철문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두꺼워지는 점액질, 들끓는 뒤틀린 마나, 거기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촉수까지.
얼굴을 노리고 날아온 촉수를 베어낸 애국단원이 말했다.
“코드 0000이 벌써 발동되다니, 쓰읍,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소.”
그러자 끼릭, 끼긱-문의 잠금을 풀던 단원이 대답했다.
“붉은 별이 그만큼 빨랐단 이야기겠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동맹이 강할수록 우리 부담도 주는 거니까.”
처음 말을 꺼낸 애국단은 칼에 묻은 점액질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에 쫓긴다는 이야기 아뇨. 거, 이곳을 지키는 두억시니가 13마리요. 한두 마리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전부 몰려오면 대장 빼고 싹 다 죽을 거라고 장담하오.”
“….”
문을 여는 애국단은 반박하지 않고 더욱 잠금장치에 집중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 말에 반응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입구에서 여명과 대화했던 애국단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적어도 절반은 붉은 별 쪽으로 갈 테니까.”
“그거야 대장의 희망 사항 아뇨. 우리한테 전부 몰려올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소?”
“반대로 붉은 별에게 전부 몰려갈 수도 있지. 두억시니는 이곳보다 우선 중앙을 지킬 테니.”
“….”
처음 말을 꺼낸 애국단원은 팔짱을 끼고 ‘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째, 대장이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로 들리오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말한 거다.”
“대장, 비열함과 거짓말이 단기적인 이득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론 언제나 손해였소.”
“…새겨듣지.”
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철컥! 잠금이 풀렸다. 끼기긱-톱니와 철봉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문에서 점액질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돌입 준비.”
대장의 낮은 목소리를 따라, 다섯 명의 애국단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아니, 딱 한 명은 다른 걸 꺼냈다. 조금 전에 비열함을 운운했던 애국단원, 그는 커다란 섬광탄을 꺼냈다.
핀을 뽑고, 열린 문 사이로 투척.
퍼엉!
섬광탄의 폭발을 신호 삼아 다섯 명이 문 안으로 돌입하자, 기다렸다는 듯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두두두두 – !!!
애국단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것처럼 투명해지더니, 그대로 다섯 갈래로 흩어졌다.
-스텔스 아머?!
-쏴! 한 발만 맞춰도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쏴!!
-괴수군은 앞으로! 냄새를 쫓아! 지정 사수는 뒤…
-씨발, 폭탄이다! 엎드려!
대기하고 있던 장교의 말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순간, 예상치 못한 허공에서 폭탄 뭉치가 튀어나왔다.
콰아아앙 – !!
조금 전 섬광탄과 비교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파편 수류탄의 폭음.
총을 든 군인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가운데, 폭탄의 후폭풍에 실린 검은 가루가 괴수 군인들의 콧구멍으로 침투했다.
“케흑, 켁!”
가루가 무슨 극독이라도 되는 듯, 수류탄도 버텨냈던 괴수 군인들이 목을 잡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꼴을 본 장교는 생각했다.
전열이 무너졌다.
흔들린 전열 속에서 남는 건 난전뿐. 스텔스 슈트를 입은 적과 난전을 벌이는 건 미친 짓이었다. 당장 전열을 재정비-장교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환도가 그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버렸으므로.
그렇게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진 직후, 학살이 시작되었다.
아니, 학살은 아니었다. 애국단원들의 환도는 정교한 동시에 자비로웠다.
그들은 정확하게 군인들의 목만을 베었다. 마치, 사형수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주려는 사형 집행인의 그것처럼, 이윽고, 모든 군인들이 바닥에 쓰러진 직후.
애국단원들은 동시에 투명화를 풀고 검을 회수했다. 대화는 없었다. 무거운 군화 소리만이 그들의 뒤로 이어졌다.
‘대장’은 묵묵히 그들을 이끌었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저지선 너머로 들어가자, 온갖 인체실험이 자행됐던 실험실이 늘어선 복도가 보였다.
하지만 남은 증거는 많지 않았다. 급하게 실험실을 정리한 듯, 실험실 대부분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으니까.
“새끼들, 찔리는 건 많아서… ‘머리’와 ‘몸통’은 이미 다 챙겨서 경무대로 옮겼겠지요?”
애국단원 중 하나가 [하얀 양]이라 쓰인 실험실을 지나며 묻자, 대장이 대답했다.
“경보가 울린 순간 옮겼을 거다. 각하가 특별히 관리하는 물건들이니까. 어차피 막지 못했을 일이니, 아쉬워 말고 지금은 우리 할 일부터 한다.”
대장의 대답을 신호 삼아, 애국단의 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그들이 목표로 했던 방은 아직 ‘폐기’ 되지 않았다.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방. 애국단은 단단한 잠금장치를 통째로 베어낸 뒤, 안으로 들어섰다.
방 내부는 실험실보다는 시체안치소에 가까웠다.
실험 도구 대신, 커다란 시체용 냉장고가 벽을 채운 방.
애국단원들은 조용히 냉장고를 뒤졌다. 어떤 흔적, 어떤 표기도 없었지만, 그들은 냉장고 안에서 네 개의 백골을 찾아냈다.
묘지에서 파낸 듯 드문드문 흙이 묻은 성인 남성의 백골.
조용히 백골들을 내려다보던 ‘대장’은 주먹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나무 상자를 꺼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아공간 마도구였다.
달깍-마도구가 열리자, 애국단원들이 조심스레 아공간에 백골을 담았다. 한 구, 두 구, 세 구… 이윽고 마지막 백골을 담는 시점에서, 한 애국단원이 중얼거렸다.
검색
“이거야 원, ‘원본’을 직접 옮기다니… 기분이 이상하군.”
“난 좆 같소. 이게 이 나라의 현실이라니.”
“둘 다 그만, 조심스레 담아라. 이런 곳에서, 이런 대우를 받을 분들이 아니시다.”
대장이 단원들을 중재하고, 백골을 아공간에 담길 잠시.
쿠구궁…! 벙커 저편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군.”
천장을 바라본 대장은 조심스레 마도구를 챙겼다.
“아야톨라가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한다. 다음 이동 방향은….”
대장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왔던 방향이 아닌, 벙커 중앙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앙. 붉은 별에게 합류해 그를 돕는다.”
“괜찮겠소?”
“비열함이 장기적으로 손해라고 한 건 너다.”
그러자 애국단원의 가면 뒤에서 픽, 웃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머지 애국단원들 또한 별말 없이 ‘대장’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점액질로 뒤덮인 통로로 들어서자마자, 상상도 못 한 광경이 그들을 반겨줬으니까.
콰아앙!!!
벙커 통로가 박살 나며 구멍이 뚫리고, 그 사이로 거대한 점액질 덩어리와 인간이 튀어나오는 광경.
점액질을 불태우는 푸른 화염과 붉은 아지랑이가 어찌나 살벌한지, 가면 속 눈이 아플 정도였다.
“붉은 별?! 역시 두억시니들은 저쪽으로-”
애국단원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억시니의 몸에 달린 닭 머리가 입을 쩍-벌리고 광선을 쏴댔다.
악의와 뒤틀린 마나가 가득 뭉친 저주 광선.
“대장, 도와줍시다!”
붉은 별이 광선에 맞은 걸 본 애국단은 그대로 검을 뽑고 붉은 별에게 달려… 가지 못했다.
저주 광선이 몸을 태우건 말건, 붉은 별은 역으로 손을 뻗어 닭 머리의 목을 붙잡았으니까.
꼬, 꼬고곡-! 곧 닭의 목이 비틀리는 소리가 이어진 찰나, 붉은 별의 손아귀가 폭발했다.
콰아아앙!!!
화산쇄설의 폭발은 벙커를 가득 채우다 못해 애국단원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애국단원들이 폭발의 후폭풍에서 시선을 되찾을 때쯤.
#%@#$^ – !!!
비명인지 울부짖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두억시니의 심장이 뽑히는 소리였다.
애국단원들은 멍하니 붉은 별을 바라봤다. 그는 녹아내리는 두억시니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터프하구만.”
단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붉은 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날 미끼로 썼나?”
대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네가 두억시니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길 바랐다. 두억시니는 몇 마리나 잡았지?”
“일곱.”
혼자서 절반 넘게 잡았다? 주가시빌리의 특징을 생각하면 체력도 거의 쓰지 않았을 터. 애국단원들은 붉은 별의 강함이 상상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대 이상이군.”
“감사는 필요 없다. 대가만 치르면 되니까.”
그렇게 말한 붉은 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살기를 감지한 애국단원들이 움찔했다.
그리고 붉은 별과 그들의 사이로 묵직한 긴장감이 내려앉는 순간.
“대장, 거, 그러게 내가 말했잖소. 이런 일일수록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거요.”
단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대장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가면을 벗고 양손을 크게 벌렸다.
광대뼈와 미소가 인상적인 남자. 효창 공원에서 얼굴을 감추고 여명과 접선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이보게, 빨갱이 양반. 덕분에 우리 쪽 일은 무사히 끝냈소. 고맙소.”
남자는 멋들어지게 허리를 숙였다. 붉은 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다시 허리를 편 그가 계속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그쪽을 도우러 가고 있었소. 겸사겸사 중앙에서 해결할 일이 하나 더 있기도 하고… 그러니 딱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되겠소?”
그게 무슨 말장난이냐는 듯, 붉은 별의 눈이 싸늘해졌다. 애국단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실리적인 입장에서도 우리와 같이 가는 편이 좋소. 지금 이 벙커는 코드 0000이라 불리는 파괴 시스템이 가동하는 중이오만… 그, 타락석의 결계라고 아시오?”
“…안다.”
“저 점액질이 벙커를 다 뒤덮으면, 그 결계랑 비슷하게 공간을 비틀어 멋대로 구조를 바꿀 거요. 그럼 우리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힌 채 달려오는 지원군에 눌려 죽을 거요.”
“….”
“뭐, 우리 대장이 씹새끼라는 건 인정하오. 이런 썩은 정부와 싸우다 보니 본인 성격도 썩어버려서… 크흠, 아무튼, 서로 사정이 촉박하니 함께 갑시다.”
붉은 별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당신, 이름은?”
“이름… 이름은 없소. 그저 마미라고만 불러주면 족하오. 아, 참고로 엄마라는 뜻은 아니오.”
“….”
마미의 미소가 먹힌 것일까? 붉은 별은 살기를 지우고 조용히 애국단원들을 훑었다. 그는 검을 아래로 내리고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앞장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