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85)
을 위한 세계는 없다-585화(585/817)
EP.585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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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 물건은 모두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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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자의 장점은, 어디를 방어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안전기획부의 부장이었던 전 부장은 남은 병력을 모두 VIP룸 앞으로 끌어모았다.
코드 0000에서 살아남은 군인들과 양치기, 전원 초인으로 구성된 12명의 대통령 경호병과 안기부 요원, 그리고-
“…두억시니는 얼마나 남았지?”
전 부장이 질문을 꺼내기 무섭게,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구원이 말했다.
“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건 여섯 마리입니다.”
“그 사이에 일곱 마리가 잡혔다고?”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연구원이 헐레벌떡 변명을 내놨다.
“이, 이건 단순 신호 오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0강이 직접 온 게 아니고서야, 두억시니를 이렇듯 단시간에 처리할 수는….”
“그럼 10강이 왔나 보군.”
“…예?”
“씁, 과학자가 현실을 부정해서 어쩌잔 거냐. 현재 가장 가능성 높은 건 10강급 적이 기습했다는 거 아닌가?”
“….”
“이상한 헛소리 말고, 살고 싶으면 가서 작업이나 완성 시켜.”
“예, 옙!”
그가 그렇게 쏘아주자, 연구원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전 부장은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우-입에서 흘러나온 옅은 담배 연기를 따라, 질문이 떠올랐다.
누가, 왜, 하필 이 시점에 남산을 공격했는가?
한때 정보 조직의 수장이었던 사람답게 그는 최근 일련의 사건을 하나로 연결했다.
애국자 회의 습격, 비밀 기지 테러, 개성 테러… 어쩌면 일본에서 있던 테러까지.
담배가 짧아질수록 질문의 답도 명확해졌다. 내부자다. 그것도 특급 정보를 만지작거릴 수 있는 고위 인사.
‘누구냐…?’
그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담배를 필터 끝까지 빤 순간.
터벅, 터벅.
벙커 입구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었다. 문제는, 그 발소리가…
‘…한 명?’
정말 10강이라도 되나? 긴장한 채 허리춤의 총을 만지작거리던 전 부장은, 벙커의 어둠 너머에서 등장한 녀석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눈코입도 없는 태극기 가면을 쓰고, 피와 오물이 잔뜩 묻은 전투복을 입은 남자.
“애국단?”
“알아봐 주니 고맙군. 전 부장.”
전 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탁! 남은 꽁초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철컥! 미리 준비하고 있던 병력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애국단원을 겨눴다.
전 부장이 말했다.
“애국은 무슨… 매국노 새끼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뭐?”
“너야말로 부끄러운 줄 알아라. 매국노.”
전 부장의 눈이 사나워졌다. 애국단원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 나라는 국민의 자유를 되찾겠다는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세워졌다. 부패한 전제 정부의 노예도, 이민족의 노예도 아닌, 떳떳한 국가의 자유 시민!”
태극기가 새겨진 가면이 이곳에 모인 모두를 훑었다. 애국단원은 씹어뱉듯 말했다.
“한데, 지금 이 나라는 어떻지? 국민에게 약속한 자유도, 하다못해 국가가 제시할 이상조차 없다. 나라 꼴이 이렇게 됐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너희야말로 매국노다.”
짧은 침묵.
총구를 겨눈 군인들의 숨소리가 짧게 이어지는 가운데, 전 부장이 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새낀가 했더니, 미친놈이었나.”
그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탁탁, 연기가 총구 위로 흔들렸다.
“꼭 너 같은 놈들이 있지. 먹여주고, 재워주면 주제도 모르고 자유니 뭐니 지껄이는 놈들.”
“….”
“풀죽도 없어서 미군과 소련군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본 적도 있나? 지금 한국을 봐라. 우린 민족이 꿈꾸던 만주를 탈환했고, 한반도에 나라가 세워진 이래 가장 부강한 나라를 세웠다! 태평성대! 씨팔, 같잖은 새끼가 감히, 우리가 어렵게 세운 나라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전 부장의 말꼬리가 길어지는 만큼, 태극기 가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어졌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길고, 어둡게.
“이 나라가 희생시킨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뭐?”
“인체실험을 위해 낭비된 목숨들, 교단과 네크로맨서에게 넘긴 우리 국민들… 그리고 각하를 위해 희생된 수많은 정치인과 민간인들!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나?”
‘각하’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전 부장은 들고 있던 담배를 구겼다. 역시, 이 새끼는 내부자다.
그는 조금 더 정보를 뽑아낼 요량으로 대답했다.
“떡고물을 묻히지 않고서 어떻게 떡을 만들겠나? 소수의 희생 없는 대의란 없다. 죽은 자들도 그들도 현재의 한국을 보면 기쁘게 눈물을 흘릴 거다.”
태극기 가면은 후우-기다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대의라도 안 먹힐 소리를, 아주 뻔뻔하게 지껄이는구나. 개자식아. 그 모든 희생은 대의가 아니라 각하를 위한 일이었다.”
“둘이 뭐가 다르지?”
“….”
“이 국가가 곧 각하다! 그분이 이 나라를 세웠고, 이 나라를 이끄셨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전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직도 담배 연기가 아른거리는 입으로 지껄였다.
“누가 미국의 압박에서 개성 차원문을 지켜냈지? 누가 두 차례의 경제 공황을 버텨냈지? 누가 이 코딱지만 한 땅을 세계 10위권으로 올려놓았지?”
“….”
“전부! 전부 각하시다. 너 같은 반역자들은 모르겠지만, 그분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 그분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민족이 나아갈 길을 찾아내셨다. 그분이 곧 국가고, 그분을 지키는 게 곧 애국이야!”
그가 일장 연설을 쏟아냈으나, 돌아온 반응은 크지 않았다. 전 부장에겐 가면 아래 숨겨진 표정을 읽는 재주가 없는 까닭이었다.
태극기는 어떠한 감정도 없이 대답했다.
“천만 명도… 그분을 위해 감내할 수 있는 희생인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들과 달리 전 부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애써 동요를 숨기며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자 애국단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그는 떨리는, 동시에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땅에는… 진정한 의미의 나라도, 국민도 없는 거로군.”
“….”
“그저 각하를 위해 통통하게 살찌운 가축들만이 우글거리는… 그런 땅.”
전 부장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애국단원이 왜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걸까 고민했다.
뭘 노리는 거지?
하지만 다행히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전 부장은 시간을 끄는 의미에서 몹시 원색적인 단어로 반박하려 했다.
그러니까, 애미, 애비 등 부모님에 대한 심도 있는 단어로 적의 속을 긁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방어자에게 장점이 있다면, 공격자에게도 장점이 있었다.
공격의 순간을 본인이 정할 수 있다는 것.
전 부장의 입에서 ‘니 애미가…’ 라는 말이 나온 순간.
애국단원의 등 뒤에 있던 어둠 속에서 뭔가가 후후욱-! 터져 나왔다.
피처럼 검붉은 아지랑이.
그것도 방어선을 전부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많은 양의 아지랑이였다.
“주가시빌리?”
그제야 애국단원 새끼가 왜 시간을 끌었는지 깨달은 전 부장은 욕을 삼키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애국단의 모습이 투명해지며 아지랑이 속으로 녹아들었다.
스텔스 슈트와 주가시빌리의 조합. 난전에 최적화된 조합이었다. 시팔, 전 부장은 총과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전투 준비!! 모두 흩어지지 말고 등을 맞대라!!”
***
애국단 ‘대장’이 계획한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에 휩싸인 수비군은 혼란에 빠진 채 무차별적으로 총알을 난사했고, 뒤늦게 냄새를 맡던 괴수 군인들은 애국단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복을 입은 초인들이 양손으로 들고 있는 기관총을 봉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분당 수백 발을 토해내는 50구경 기관총 12자루.
주가시빌리를 다루는 여명이면 모를까, 애국단원들은 뭐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벌집이 될 화력이었다.
하지만 주가시빌리로 시야가 막히고, 앞에 아군이 있는 이상 기관총은 쉽사리 불을 뿜지 못하…
투투투투투투 – !!!
…지 않았다. 녀석들은 아군이 있건 말건 방아쇠를 당겼고, 주가시빌리의 붉은 안개 속으로 방어군의 피가 튀었다.
그래, 너희가 그렇지 뭐.
여명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아지랑이 속을 걸었다. 걷는 사이 총알이 날아와 어깨를 관통하고 종아리를 터트렸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한 그는 혼자 고립된 군인 앞에 섰다.
“누, 누구냐!”
여명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잡아 꺾었다. 우드득! 고통 없는 최후를 본 여명은 군인의 모습을 그대로 베껴 피눈물의 환상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군인이 떨어트린 총을 주운 직후, 여명은 달렸다.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얼마나 뛰었을까? 아지랑이 너머에서 기관총의 총구가 그를 겨눴다.
여명은 기관총을 든 양복쟁이가 대통령 경호원이란 사실을 몰랐으나, 준비한 말부터 꺼냈다.
“자, 잠깐! 저는 김파순 상사입니다!”
“왜 이곳으로 왔지? 감히, 이 상황에 도주하는 거냐?”
“아닙니다! 지원요청을 위해 왔습니다! 현재 전 부장님께서 애국단 셋과 교전 중이십니다! 지원 바랍니다!”
그러자 기관총을 든 초인이 슬쩍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언의 눈빛이 오간 직후, 그가 김파순… 아니, 여명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이지?”
“여기서 3시 방향입니다! 빠른 지원 부탁드립니다! 벌써 괴수군 여섯이 당했습니다!”
곧 기관총을 든 초인 여섯이 여명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나머지 초인 여섯은 그들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듯 더 넓게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여명이 빈자리 사이로 숨어드는 찰나.
“잠깐.”
기관총대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남자가 여명의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후방에 숨어있던 안기부 요원. 그는 여명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김파순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 없-”
다음 순간, 여명은 염동력으로 녀석의 입을 막고, 그대로 얼음 송곳을 만들어 목을 찔렀다.
“끄으윽.”
푹! 목젖에 얼음이 박히는 감각이 생생했다. 하지만 소리는 기관총 소리에 묻혔고, 목격자는 없었다.
여명은 시체를 인벤토리에 넣은 뒤, 그대로 아지랑이 속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던 초인 여섯이 사라진 덕분에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탁. 그는 거대한 문 앞에 멈췄다.
기록보관소를 비롯해 중요시설이 준비된 마지막 방의 문.
합금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철문과 복잡한 기계식 봉인, 세 개의 첨단 자물쇠, 그리고 홍채인식 기능을 가진 문이었지만…
여명에겐 쓰레기통 뚜껑보다도 쉽게 열 수 있는 문에 불과했다. 그는 황금 옥새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번쩍-!
검붉은 아지랑이 속 난전 때문에 누구도 보지 못한 황금색 마법진이 문을 두들긴 직후.
철컥, 덜컹, 끼기긱-! 잠금이 일시에 풀리며 문이 열렸다.
-속았다! 문을 막아!!!
그제야 여명에게 속은 걸 깨달은 대통령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아지랑이를 뚫고 날아왔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여명은 천천히 철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편안히 소파에 앉아있는 노인들과 마주했다.
젊은 여성과 연결된 파이프를 등에 주렁주렁 단 채, 여유롭게 뭔가를 홀짝이는 노인들.
개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어찌 모르겠나? 뉴스에서, 교과서에서, 그리고 지폐 속에서 보던 얼굴들인데.
“드디어 침입자들을 끝냈나?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이승백 전 대통령…?”
노인의 얼굴을 본 여명이 중얼거리자, 이승백과 연결된 파이프를 관리하던 의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일개 군바리 새끼가 대통령님 이름을 막 부르다니. 이 새끼, 너 이름 뭐야?”
“….”
“이 새끼가… 대답 안 해?”
여명은 물끄러미 의사를 바라보다가, 대통령들과 연결된 여성들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뭐? 야 이 새끼야,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라고 니 애비가-”
탕!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총을 뽑아 의사의 종아리를 쐈다. 의사는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고, 대통령들도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질문은 내가 한다.”
“아으, 으아아아….”
“저건 뭐냐.”
“아으, 어, 이, 씨발, 개새….”
탕!
성녀에게 전염된 걸까, 여명은 이번에는 손바닥에 총을 쐈다. 한 번 더 비명을 지른 의사는 몸을 덜덜 떨었다.
“뭐냐.”
“저, 젊음의 비약입니다.”
“그게 뭐지?”
“에, 엘릭서의 모방 물약과 교단의 인신 공양을 합쳐서… 저, 젊은 처녀의 피를 통째로 물약으로 만드는-”
탕.
그 이상 들을 필요 없었다. 의사의 머리를 쏴버린 여명은 자신을 바라보는 전 대통령들과, 아마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노인들을 노려봤다.
이승백 대통령이 버럭 소리쳤다.
“이놈! 무엄하다!!”
“….”
“당장 담당자를 불러라!! 내가 친히 문책하겠다!!”
수비군으로 변장한 탓인가. 그는 의사가 죽었는데도 자신만만했다.
이런 새끼가 지폐에 새겨져 있는 건가? 여명은 뒤틀린 미소를 참지 않았다.
“담당자는 죽었다. 살아있어도 곧 죽을 거다.”
“뭐라?”
“그리고… 너희도 죽는다. 내가 약속하지. 가능한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안다.”
여명은 무장 혈청을 뽑아 들었다. 망치로 변한 무장 혈청은 인민의 분노 그 자체를 상징하듯 섬뜩한 붉은 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여명이 한걸음, 전 대통령에게 다가간 순간.
열린 철문 밖에서 기묘한 고함이 들려왔다.
-이 촉수는 뭐야?!
-끄아아악!!
-빨갱이다! 빨갱이!!
익숙한 감각, 익숙한 마나. 여명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철문 밖 기관총 소리 사이로 러시아어가 들렸다.
고려인들을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 태극기 가면은 아군이다-여명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꼴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뜬 순간.
그의 인벤토리 속 적기 훈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자신과 비슷한 격을 가진 훈장을 마주한 까닭이었다.
설마?
여명이 그게 뭘 뜻하는지 깨닫는 순간, 철문 너머에서 그가 등장했다.
베리야의 뒤를 이어 KGB의 망령들을 이끄는 자, 자유 진영에 가장 큰 상처를 낸 스파이, 그리고 스탈린이 직접 레닌 훈장을 수여한 자.
“…킴 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