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88)
을 위한 세계는 없다-588화(588/817)
EP.588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13)
* * *
***
종말 교단의 아야톨라들은 각자 두 개의 힘을 지니고 있다.
권능과 천벌.
이름을 버리고 종말을 퍼트리니 권능이요, 성씨를 버리고 종말을 휘두르기에 천벌이라.
사춘기 소년이 휘갈겨 쓴 것 같은 문구였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진짜였다.
실제로 꿈을 흘리는 자는 삼백만 명이 사는 시카고를 악몽 속으로 집어삼키려 했다.
피를 흘리는 자는 시드니의 오백만 시민을 고깃덩어리로 만들 뻔했다.
그래, 그들의 힘은 대량 학살과 혼란에 특화되어 있었다. 마치 현실과 사회에 흉터를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악의 가득한 힘.
그래서였을까?
벌써 세 명이나 되는 아야톨라의 권능과 천벌을 마주했음에도, 여명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는 자가 손아귀를 쥔 순간, 두꺼운 보호막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재빠른 반응이었다. 곧 눈물을 흘리는 자의 손아귀로 기이한 마나와 공기가 동시에 모여들었다.
직후.
꺄아아아아 – !!!
공기와 마나가 비명이 되어 터졌다. 귀를 찢어발기는 섬뜩한 비명이 방을 가득 메웠다. 충격이 어찌나 큰지, 여명의 보호막이 단번에 쩌저적-! 박살 날 정도였다.
‘음파 공격?’
여명은 바닥을 구르며 눈물의 천벌을 파악하려 애썼다. 뭔가 이상했다.
물론, 음파는 강력했다. 주가시빌리를 두른 여명조차 피부가 저릿하고, 고막에서 삐이이-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일반인이라면 삽시간에 몸이 터져 죽었겠지.
하지만 음파가 눈물과 무슨 상관이지?
다른 아야톨라들의 천벌과 권능은 최소한의 연결점이 있었다.
꿈을 흘리는 자는 꿈을 ‘뒤틀어’ 악몽으로 만들었고, 피는 무생물에게서 ‘피와 살’을 만들었으며, 진실은 무언가를 ‘거짓’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눈물과 음파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점도 없었다.
‘설마, 아프게 맞으면 눈물이 나니까 눈물인가?’
여명의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아야톨라가 두 번째 천벌을 펼치려고 해서?
아니면 그가 천벌을 막기 위해 퀴니 코완의 마총을 뽑아 들어서?
아니, 그의 눈앞에 갑자기 청소부가 나타났으므로.
가슴이 길게 베인 상처, 벌어진 상처에서 말라붙은 피, 부릅뜬 눈, 그건 플레이어에게 살해당했던 춘식이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여명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멍하니 춘식이 형을 바라봤다.
상처를 닦고 무덤에 고이 묻었던 형이 왜 여기에-? 라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춘식이 형이 그를 향해 손을 들더니, 그대로 손아귀를 쥐었다.
꺄아아아아 – !!!
아야톨라의 천벌이 코앞에서 폭발했다. 보호막이고 뭐고 정면에서 음파를 처맞은 여명은 그대로 철문 밖으로 날아가 반대편 복도 벽에 처박혔다.
쿨럭.
쩌적, 벽이 갈라질 정도로 깊숙이 처박힌 여명은 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를 삼켰다.
척추가 재생되는 고통에 머리가 아찔했지만,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몸을 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춘식이 형을 바라봤다.
‘…가짜.’
분신인가? 아니면 환상? 합리적으로 보자면 저게 진실을 흘리는 자의 천벌이겠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저게 무엇이건 간에, 진실은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었으니까.
터엉 – !!
퀴니의 마총에서 발사된 대구경 탄환이 죽은 춘식이 형의 상처를 관통했다.
철퍽! 바닥에 쌓인 점액질 위로 춘식이 형의 시체가 쓰러지기 무섭게, 새로운 춘식이 형이 나타났다.
그사이 벌써 재생을 끝낸 여명은 벌떡 일어나 다음 춘식의 형의 몸에 급속 냉각을 사용했다.
얼어붙은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자, 어느새 복도에도 피어난 작은 차원문 너머에서 조롱이 들려왔다.
“그리운 사람을 단번에 쏴 죽이다니. 역시 빨갱이들은 감정이 메말랐다니까.”
그리운 사람? 설마 마음 속의 이미지를 구체화 시키는 천벌인가? 여명은 고민 속에서 차원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터엉 – !!!
“차원문 뒤에 숨은 겁쟁이가 말이 많다.”
당연하게도, 녀석은 맞지 않았다. 차원문 뒤에 숨은 녀석은 노골적으로 이죽거렸다.
“너야말로 우리가 팔 하나만 내밀 수 있는 걸 고맙게 알아. 본체로 왔으면 너 같은 건 순식간에 토막 났을-”
녀석의 말이 다 이어지기 전에, 눈물이 끼어들었다.
“진실, 너는 말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벌. 이번에도 허공에서 춘식이 형이 나타나 비명 같은 음파를 터트렸다. 하지만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할 여명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가 겪어온 수라장이 너무 많았다.
터엉 – !!
오른손에는 총, 왼손에는 마법.
샤프슈터가 걸린 총알은 정확히 차원문 너머의 진실을 노렸고, 왼손에서 시작된 염동력은 그대로 가짜 춘식이 형을 짓눌렀다.
“어딜.”
눈물은 총알을 피하지 않았다. 진실의 천벌이 자연스럽게 녀석을 지켜준 덕분이었다.
바닥에 처박힌 가짜 춘식이 형과 달리, 코끼리 사냥용 대구경 총알은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여명은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총알도, 마법도 모두 다음 수를 위한 페이크였다.
붉게 달아오르는 여명의 오른쪽 눈.
다음 순간, 어떠한 전조도 없는 얇은 광선이 눈물을 흘리는 자를 향해 날아갔다.
삐이이 – !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붉은 광선이 충돌하며 고주파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알파 빔이 흩어지는 소리였다.
‘연속 공격으로도 못 뚫는 건가.’
처형관들이 팔을 자른 걸 보면 분명 뚫는 방법이 있을 텐데.
여명의 그런 고민과 함께 얼음벽을 세우자, 그 위로 눈물이 반격으로 날린 천벌이 날아왔다.
얼음벽이 파삭! 박살 나며 바닥의 점액질로 떨어지는 가운데, 진실이 소리쳤다.
“알파 빔?! 아니, 빨갱이가 무슨 미국 대표 무술을 써?!”
“반쪽짜리다.”
“반쪽이건 양쪽이건 간에! 소련 대통령이야?”
“가능성은 둘이지. 미국이 만든 가짜 빨갱이거나, 혹은, 운명의 구슬을 지닌 바깥에서 온 자거나.”
상황을 파악하듯 침착하게 말한 눈물은 여명을 향해 연달아 천벌을 쏘아냈다.
꺄아아아 – !!
복도가 흔들리고 바닥에 고인 점액질들이 출렁거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음파의 파도.
작은 엄폐물도 없는 복도에서 가까스로 펼친 얼음벽과 보호막은 다섯 번째 음파를 막은 시점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맨몸으로 음파와 마주한 여명은 어쩔 수 없이 공격으로, 그러니까 알파 빔과 사격으로 대응했다.
빌어먹을 진실의 권능이 두 개를 모두 무로 돌렸지만… 개중 몇몇 공격은 무효화시키는 대신 피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
귀에서 피가 흐르는 여명의 머릿속으로 연달아 어떤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사격과 알파 빔의 페이크를 막자마자 천벌을 연발하는 눈물.
무적에 가까운 천벌을 가지고도 처형관들에게 팔이 잘린 진실.
그리고 다른 두 아야톨라와 싸우며 쌓아온 경험까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여명은 총을 집어넣고 음파를 향해 정면으로 내달렸다.
철퍽, 철퍽! 그가 점액질을 몇 번 밟기도 전에, 춘식이 형이 나타나 그의 앞길을 막았다.
음파를 수십 번 얻어맞은 탓일까? 녀석은 조금 전 맥없이 죽어간 춘식이 형과는 기세부터 달랐다.
“그는 네 형제인가? 아니면 동료? 그러나 누구건 간에, 너의 마음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 싸울 필요 없다. 고통은 짧고, 인연은 길다. 그와 함께하라.”
진실의 권능이 그의 마음속 감정을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여명은 무장 혈청을 뽑았다.
“마음껏 지껄여라.”
곧 춘식이 형이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이름 모를 상위 무술의 이치가 담긴 주먹이었다.
여명은 피하지 않고 인민의 낫을 내려쳤다.
쩌엉 – !!!
마나의 충돌음이 울리며 둘은 다음 공격을 펼쳤다.
주먹과 망치, 발과 낫.
두 사람은 마치 액션 만화를 보고 따라 하던 그 시절처럼, 손발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공방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앞의 춘식이 형은 진짜가 아니었고, 여명은 더 이상 액션 만화를 따라 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미안, 형.”
여명은 춘식이 형의 주먹을 피한 뒤, 그의 얼굴에 인민의 망치를 내리꽂았다.
퍼억! 안면이 으깨진 그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여명이 최후의 일격을 내려치려는 순간, 그의 얼굴이 변했다.
노란 단발머리를 가진, 이제는 좀 여자 같은 얼굴로.
“내가 널 얼마나 도와줬는데! 날 죽일 거냐?”
시체였던 춘식이 형과 달리, 파순으로 변신한 그것은 생생한 파순의 목소리로 지껄였다. 여명은 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난 얘 그리워한 적 없는데.”
그리고 그대로, 강타.
퍼억!!
얼굴이 박살 난 파순은 그대로 쓰러졌다.
직후, ‘친구를 죽이다니’ 라는 진실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눈물의 천벌이 쏟아졌으나, 여명은 개의치 않고 화산쇄설과 마탑주의 벼락을 일으켰다.
작은 차원문을 향해 흩날리는 불씨와 번쩍이는 전기들.
그렇게 점액질을 불태우며 다가오는 여명을 본 진실이 정색했다.
“빨갱이 주제에 그 정도 마법이라고? 너는 대체 누구냐?”
진실의 권능이 발동해 여명의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는 쇠똥구리였고, 세티의 연인이자, 천여명이었으며, 케프리, 전대 성녀의 아들, 용의 해방자, 황금 옥새의 주인, 플레이어를 죽인 자, 마탑의 구원자, 현시대의 용사, 붉은 별, 성물지기와 데메론드의 사위, 적기 훈장 수여자, 그리고-
“유니콘의 주인.”
“…뭐?”
진실이 당황하는 순간, 여명은 두 개의 차원문을 향해 화산쇄설을 터트렸다.
콰아아아앙 – !!! 평소보다 길게 이어지는 폭발음.
복도를 채운 폭발은 점액질은 물론이고 아야톨라가 숨어 있던 두 개의 차원문을 동시에 뒤덮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진실은 손아귀를 쥐어 그의 공격을 무효화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명은 폭발이 끝나자마자 파지직!! 차원문으로 마탑주의 심득이 담긴 벼락을 쏟아냈다.
1초, 3초, 5초, 7초….
뒤늦게 그를 밀어내려는 듯 바로 옆에서 눈물의 손아귀가 그를 노렸지만, 여명은 벼락으로 녀석이 손을 내밀지 못하게 막았다.
아야톨라를 상대로는 기껏해야 몇 초 정도밖에 막지 못하는 공격이었지만, 그 몇 초가 중요했다.
그리고 10초가 되기 직전, 그는 눈을 붉게 물들이고 알파 빔을 차원문 안으로 쏟아냈다.
!!!
무언가 닿았다. 여명은 차원문 내부에서 천과 살이 타오르는 냄새를 맡으며 확신했다.
하지만 진실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눈물의 천벌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묵직한 음파를 맞은 그의 몸은 벽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또다시 벽에 충돌한 여명이 고개를 들어 보니, 차원문 너머에서 진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흘러내린 안대 아래, 이마와 눈 아래까지 길게 흉터가 이어진 소년.
어딘가… 아니, 확실히 성녀를 닮은 노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담아 말했다.
“감히…!”
시간 계산을 잘 못 했네. 아쉬움을 삼킨 여명은 몸에 묻은 콘크리트 조각과 점액질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검색
“상처를 보아하니, 천벌이 유지되는 건 대충 13초 정도인가… 의외로 지속시간이 길지 않았군. 충전까지 얼마나 걸리지? 3초? 5초? 몇 초든 간에, 다음에는 머리통을 날려주마.”
“….”
진실을 흘리는 자의 눈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부들거리는 눈동자가 얼마나 섬뜩한지, 이대로 조금만 더 도발하면 더 좁은 차원문을 억지로 넘어올 기세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물이 그를 막아 세웠다.
“그만.”
감정을 조종하는 권능이 담긴 말.
여명이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고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그만이라고? 아니, 이 싸움은 너희 둘과 나,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 의지를 증명하듯, 인민의 낫 위로 불씨가 피어났다.
천벌의 공략법을 발견한 이상, 지금 죽일 생각이었다. 이런 녀석들은 살려두면 더 큰 골칫거리로 돌아오는 놈들이었으니까.
“오늘, 여기서 죽어라. 종말의 버러지들아.”
그렇게 여명이 녀석들이 숨은 차원문으로 뛰어든 그때.
복도 저편에서 쿠구궁…!!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가던 여명은 물론이고, 아야톨라들조차 흠칫하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벙커가 있는 방향이었다.
뭐지? KGB나 애국단이 폭탄이라도 터트렸나?
다행히 여명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진 눈물의 목소리 덕분에.
“허무가 너무 흥을 내는군. 아직 벙커를 무너트리면 안 되는데.”
“…허무?”
허무를 흘리는 자?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아야톨라 셋이 전부 한국에 있다는 정보를 떠올렸다.
그리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이 그의 목덜미를 훑은 순간.
그의 뒤통수에 열린 작은 차원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들, 재밌게 놀고 있나?”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진실이 버럭 소리 지르건 말건, 여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차원문 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한 그는 확신했다.
이 녀석이, 아야톨라 중 최강이다.
기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10강급 강자에게서만 느껴지는 기세.
꿈속의 꿈을 흘리는 자조차 이만한 기세를 뿜어내지는 못했다.
권능과 천벌을 가지고, 본신의 무력까지 10강급 강자라니. 여명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전투 욕구를 억눌렀다.
둘은 몰라도, 셋은 코드 0000이 발동하기 전에 처리할 수 없다.
그는 계획의 목적을 혼동하지 않았다. 제1 목적은 아야톨라 토벌이 아닌 기록보관소 탈취와 처제의 안전이었다.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하지만 그건 여명의 생각일 뿐. 허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빨갱이 주제에… 감히 내 형제들을 다치게 해?”
“….”
꼴에 형제애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여명의 오해였다. 이놈들은 정신 나간 종말 교단이었다.
“대단하군! 그렇지만 아예 죽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고작 상처라니… 괜히 고통만 늘렸어.”
“….”
저, 저 미친 새끼… 진실을 흘리는 자의 중얼거림을 들은 여명은 설마 자신이 녀석의 말에 동의할 줄 몰랐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무는 껄껄 웃으며 제멋대로 지껄였다.
“이거, 이거, 벌을 줘야 할지, 상을 줘야 할지 모르겠네. 눈물, 자네가 말 해봐. 내가 이 빨갱이 친구에게 뭘 주면 되겠나?”
“다친 건 난데, 왜 눈물한테 물어보냐?”
진실이 투덜거리자, 허무가 대답했다.
“그거야, 각하한테 혼나는 건 네가 아니라 눈물일 테니까.”
“….”
“아! 그래, 기왕 혼나는 거, 크게 혼나는 건 어떤가? 자네도 그편이 좋겠지?”
“…싫다.”
“싫어도 상관없어.”
이딴 게 아야톨라의 대화…? 잠시 눈살을 찌푸린 여명은 누구를 먼저 공격하고 후퇴할까 고민했다.
별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이어진 허무의 행동은 모든 가능성을 망가트렸으니까.
“발동.”
차원문 너머의 허무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마법진이 있던 방에서 지이잉 – ! 기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진을… 발동했어?’
여명이 재빨리 방으로 뛰어가 확인하자, 방 중앙에서 오염된 세계수의 결정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어느새? 어금니를 꽉 깨문 여명은 염동력으로 세계수의 결정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세계수의 결정은 홈과 하나가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시작된 공희(供犧)는 희생 없이 멈출 수 없다.”
“…공희?”
“아하, 이게 뭔지도 모르고 막으러 온 건가?”
허무는 그것도 좋지-라며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 공희는 시작되었고, 벙커를 봉쇄하는 코드 0000이 완성되기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넌 무엇을 막을 테냐?”
벙커 봉쇄. 여명은 코드 0000이 완성되는 시간을 가늠해 봤다. 확실히, 얼마 남지 않았다.
곧이어 허무가 덧붙였다.
“이 공희를 막건, 벙커 밖으로 도망치건 상관하지 않겠다. 마음껏 선택해라. 삶은 선택이고, 모든 선택은 고통으로 이어지니. 잠시의 위안은 있을지언정 차이는 없으리라.”
“….”
이 새낀 대체 뭐지? 여명이 한 번 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가운데, 진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엿 같은 빨갱아. 벙커에서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10분! 10분 뒤에 도착해서 널 갈가리 찢어줄 테니까.”
“그래, 그래, 나도 다음에는 이쁘게 머리를 반으로 잘라주마.”
“…말하는 꼬락서니 좀 보게. 대체 어디 출신 빨갱이야?”
진실의 권능이 입을 간질였다. 여명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전제가 틀렸다. 난 빨갱이가 아니다.”
“…???”
진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권능으로 대답을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아니, 그럼 대체 어디서 온-.”
여명은 녀석이 다음 질문을 꺼내는 걸 내버려 두지 않았다. 탕! 진실이 총알을 피하기 위해 물러선 사이, 여명은 애국단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공희가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
어디까지나, 그들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