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89)
을 위한 세계는 없다-589화(589/817)
EP.589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14)
* * *
***
전 대통령들이 있는 방에 도착한 여명을 반겨준 건, 예상외의 풍경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네티와 피범벅이 된 김만일 전 대통령, 그리고 피 웅덩이 위에서 좌절하고 있는 박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여명은 처제를 향해 대통령들을 챙기란 손짓을 보낸 뒤, 박철 기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박 기자님?”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박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여명이 억지로 어깨를 끌어당기자, 망가진 박 기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힘이 빠진 눈썹, 피가 튄 볼, 눈물이 메마른 눈가.
그건 무언가 중요한 걸 잃은 자의 얼굴이었다. 몇 번 더 박 기자의 이름을 부르며 멱살을 흔들던 여명은 손을 들었다.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때였다면 사제나 의사를 찾았겠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건 하나뿐. 여명은 손바닥을 들었다.
짝!
고개가 돌아가고 나서야, 박 기자의 눈에서 생기가 돌아왔다. 여명이 말했다.
“정신 차리십쇼.”
“아….”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일어나서….”
박 기자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게… 난 끝났으니….”
다음 순간, 짝! 여명은 박철 기자의 볼을 한 대 더 때렸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박철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여명은 그를 염동력으로 띄웠다. 네티가 대통령들과 정신줄 놓은 처녀들을 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철문을 나선 여명은 한 번 더 눈살을 찌푸렸다. 바깥 상황이 예상보다 더 처참한 까닭이었다.
“맙소사….”
기겁하는 네티의 시선 끝에는 시체들이 가득했다. 죽은 대통령 경비들과 군인들, 애국단, 심지어 두억시니들까지.
점액질이 넘실거리는 벙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묘지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살아 움직이는 게 있다면, KGB 요원들의 몸에서 자라난 촉수 정도일까.
여명은 재빨리 애국단과 KGB들이 나란히 쓰러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가까이서 그들을 본 순간,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살아있다.
몸이 반으로 잘린 KGB도, 복부에 구멍이 뚫린 애국단원도, 전부 살아있었다.
하지만 여명은 차마 그들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이게 뭐지?
더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눈에 마나를 모으자, 그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상처는 딱 천천히 죽을 정도로 ‘조율’되어 있었다.
끝까지 탈 수 있도록 심지를 늘린 촛불처럼, 최대한 고통스럽게, 생명력이 발악하며 천천히 죽을 수 있도록.
애국단과 KGB들이 전부 기절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정신이 깨어있는 채로 이딴 짓을 당했다면 절망 속에서 죽었을 테니까.
‘…허무의 짓인가.’
여명은 물약을 꺼내며 자신도 모르게 녀석의 수법을 기억했다. 나중에 원수들에게 써먹을 생각으로.
아무튼, 명치에 구멍이 뚫린 애국단의 상처에 물약을 흘리자 쿨럭! 애국단이 피를 토하며 깨어났다.
“여긴….”
“여전히 벙커다.”
“크흑… 우리는, 아야톨라에게… 당했다. 비밀 방, 파괴는, 어떻게… 됐지?”
“크흑… 우리는, 아야톨라에게… 당했다. 비밀 방, 파괴는, 어떻게… 됐지?”
운 좋게도, 가장 먼저 깨어난 건 ‘대장’이었다. 여명은 비밀 방에서 챙겨온 보랏빛 구슬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비밀방 파괴는 아야톨라들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내가 챙긴 건 이 구슬뿐이다.”
“제길… 그래도, 보석을 챙겨서, 다행….”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허무를 흘리는 자가 공희를 발동했다.”
“뭐? 공희…?”
애국단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여명은 시선을 내리깔며 물었다.
“공희가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애국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중얼거렸다.
“구슬 두 개가 부족한데 어떻게… 아니, 허무라면 소규모로… 얼마나 규모를 줄일 생각… 이건 미친 짓….”
잠시 그 꼴을 내려다보던 여명은, 치유 물약 뭉치를 꺼내며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알아먹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길 바란다.”
“내가 알아먹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길 바란다.”
“….”
애국단 대장은 잠시 뜸을 들인 뒤, 한숨과 함께 여명이 내민 물약을 받아들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마법진이 발동되면 하루아침에 광역시 하나가 사라질 거다.”
“광역시?”
“인구 백만.”
“….”
“공희란 제물을 바치는 일을 뜻하는 단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제물은… 한국인이지. 저 마법진이 발동하면 백만 명의 한국인이 영문도 모르고 증발할 거다.”
물약 한 병을 더 들이켠 애국단 대장은 네티와 여명 뒤편에 있는 전 대통령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나머지 애국단과 KGB들에게 물약을 뿌리기 시작했다.
곧, 정신을 차린 KGB 요원 하나가 말했다.
“우린 여기까지다. 아야톨라와 싸우는 건 계약에 없었으니까.”
살아나자마자 한 말이 저건가. 여명은 킴 필비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익숙한 팔다리를 한 짝을 발견했다.
킴 필비의 팔다리… 이번에도 도망친 건가.
도망치는 실력 하나는 대단한 양반이었다. 여명이 쓴웃음을 삼키는 사이, 애국단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KGB와 달리, 그들은 어떤 불평도 내놓지 않았다. 공희가 시작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즉시 무기를 들었다.
탄이 절반도 안 남은 소총, 부러진 환도, 그리고 수류탄 뭉치.
아야톨라에게는 닿을 수 없는 무기였음에도, 그들은 싸움을 준비했다. 죽음을 향한 고요한 결의 속에서, 대장이 여명을 향해 다가왔다.
여명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태극기 가면을 바라봤다.
그는 어떻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까?
정의에 호소할까? 아니면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할까.
정답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뜸 작은 마도구를 꺼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묻지. 네가 이 벙커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개인적인 복수.”
가면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명은 상대가 쓰게 웃었다고 느꼈다. 대장은 여명에게 마도구를 내밀며 말했다.
“부탁 하나 하지. 이 마도구는 아공간 마도구고, 안에는 백골 네 구가 잠들어 있다. 그들 모두를… 처음 만났던 효창 공원에 묻어줄 수 있겠나?”
“…?”
“값은 이 상자로 치르겠다. 꽤 비싼 아공간 마도구니, 품삯은 충분할 거다.”
“값은 이 상자로 치르겠다. 꽤 비싼 아공간 마도구니, 품삯은 충분할 거다.”
뒤에 있던 네티는 물론이고, 여명 또한 마도구와 애국단 대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백골 때문에 연구실을 다녀온 건가?
잠시 후, 여명이 물었다.
“…누구의 백골이지?”
“안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진짜 애국자들.”
“….”
묘한 대답이었다. 여명이 마도구를 받아 들자, 대장은 담담히 마법진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여명은 혹시나 싶어 풀 죽어있는 박철에게 속삭였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여명은 혹시나 싶어 풀 죽어있는 박철에게 속삭였다.
“기자님, 성물로 저 사람들의 가면 좀 찍어주시죠.”
박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피범벅이 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성물 렌즈가 장착된 최신 카메라 위로 가면 아래 숨겨진 애국단원들의 진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본 박철은 물론이고, 네티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저 사람…?”
네티는 자신이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애국단의 등을 바라봤다.
확실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성물이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여명 또한 말없이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네티에게 마총을 건네며 말했다.
“처제, 잠깐만 버티고 있어.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네티는 잠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여명이 괜찮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네티가 갑자기 까치발을 들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래도 입술에는 안 했잖아요.”
당돌한 처제의 말을 들은 여명은 애써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처녀여!!!’라고 소리치는 유니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
“하! 저거 봐, 내가 돌아올 거라고 했지?”
진실을 흘리는 자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기 무섭게, 앞서가던 애국단이 뒤를 돌아봤다.
붉은 별로 변장한 여명이 그곳에 있었다.
“…왜?”
수류탄을 든 애국단원, 마미의 질문에 대답하듯 여명이 훌쩍 뛰어 그의 앞에 착지했다.
“그냥 돌아가기엔 내 검이 아쉬워해서.”
철퍽! 여명의 대답을 들은 애국단들은 살짝 당황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명은 개의치 않고 무장 혈청을 뽑아 들며 말했다.
“너희는 마법진으로 가서 공희를 멈춰라. 아야톨라는 나 혼자 처리할 테니.”
“…백만 국민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마.”
애국단의 대장이 어딘가 뜨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직후, 여명은 천천히 아야톨라들이 숨어 있는 작은 차원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애국단이 복도 바닥에 고인 점액질을 밟으며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진실을 흘리는 자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벙커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온 용기는 가상하다만…”
“….”
“전력을 다해도 우리 둘을 못 이겼는데, 셋에게 혼자 덤비겠다고? 그냥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마지막 유언이나 쓰지?”
“전력? 조금 전 그게 전력이라고 누가 그랬지?”
짧게 되받아친 여명은 곧바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시작은 역시나 주가시빌리였다.
곧이어 주가시빌리를 따라 여러 무술들이 동시에 피어났다.
흑익류, 마리지천신공, 혈류가속, 파양결… 평소에는 주가시빌리 속에 뒤섞여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술들.
그 모든 게 휘몰아치는 아지랑이와 합쳐지며 검붉은 아지랑이를 더욱더 진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섞인 피처럼 검붉은, 여명만의 주가시빌리.
아지랑이에 휩싸인 여명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잠시 머리를 채웠다.
10강에 오른 이후… 아니, 아카데미에 숨어든 이후 그는 언제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상대에게 더 많이 배우고, 훔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벙커를 습격한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국자 천여명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주와이외즈와 혜성검, 위선과 오만은 철저하게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녀석들이 춘식이 형의 환영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허무를 흘리는 자가 백만 명의 목숨을 가지고 자신을 희롱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애국단 ‘대장’의 정체를 보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러했으리라.
“오.”
무언가 느낀 허무의 감탄과 동시에, 여명의 마나가 움직였다. 곧, 아지랑이 사이로 반투명한 얼음송곳이 피어났다.
아니, 그건 송곳이라기엔 너무나 커다랬다. 차라리 기둥이란 말이 어울렸다. 복도 전체를 채울 정도로 거대한 얼음 기둥.
날카롭게 튀어나온 꼭짓점이 번뜩이고, 마탑주의 심득이 담긴 거대 기둥 서늘한 냉기와 마나를 머금은 채로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같잖은 짓을.”
기둥을 본 눈물을 흘리는 자가 손을 내민 순간.
여명이 기둥을 발사했다. 각도나 명중률 따윈 생각할 필요 없었다. 어차피 복도를 가득 채우는 크기 아닌가, 중요한 건 기둥을 밀어내는 힘뿐.
특수능력이라면 모를까, 여명은 힘에서 밀릴 생각이 없었다.
까그그극 – !!! 얼음 기둥이 콘크리트 벽과 마찰하며 차원문으로 돌격했다. 마치 산을 파내는 중장비처럼 살벌한 모습.
눈물은 그대로 차원문 너머로 손아귀를 쥐었다.
꺄아아아 – !!!
비명과도 같은 음파가 얼음 기둥과 충돌했다. 날카로운 끝을 시작으로 쩌적- 기둥에 금이 가더니, 차원문 코앞에서 반으로 갈라졌다.
아야톨라에게 있어선 문자 그대로 같잖은 공격.
하지만 얼음의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여명이 안전하게 접근하기 위해 바리케이드.
콰아아 – !
곧, 용도를 다한 얼음이 폭발했다. 그리고 흩날리는 얼음 사이로, 아지랑이에 휩싸인 여명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조금 전 차원문밖으로 나온 눈물을 흘리는 자의 손.
!!!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검기를 머금은 검이 아야톨라의 팔뚝을 내려쳤지만, 당연하게도 팔은 잘리지 않았다.
공격을 무효로 만드는 진실의 천벌.
‘13초.’
여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속으로 지속 시간을 재며 자신이 가진 모든 공격을 차원문 너머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터스카기의 귀화, 알파 빔, 화산쇄설, 급속 냉각, 하다못해 수류탄까지.
그리고 그 와중에 여명이 가장 신경 쓴 건 진실이나 눈물이 아닌, 허무였다.
천벌은커녕, 권능마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놈.
하지만 어째서일까?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랏빛 눈동자로 여명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유? 아니면 정신병자 특유의 허세?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게 할 테니까.
11초.
여명은 귀화를 차원문 너머로 밀어 넣는 와중에 산의 눈물을 꺼내 양손으로 쥐었다.
스탈린을 향한 증오로 빚어진 검은 아이러니하게도 붉은 검기를 머금은 채, 횡으로 비스듬히 늘어졌다.
용사의 무술, 1초식.
마탑 이후 꽁꽁 숨겨 왔던 무술의 기수식이 드러난 순간, 아야톨라들이 여명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지 깨달았다.
“저, 저거! 눈물! 밀어내!!”
진실의 고함. 12초.
눈물이 손아귀를 뻗는다.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더 빠르다.
이윽고, 여명의 검이 횡으로 복도를 베어낸 순간.
허무가 손을 뻗었다.
***
!!!!!!
방 바깥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애국단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먼지를 토해낼 정도로 아찔한 충격.
잠시 문밖을 보던 마미가 마법진 사이에 칼을 박아넣으며 말했다.
“정말로 아야톨라 셋과 싸우고 있나 보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벼운 분위기로 입을 열기엔, 눈앞의 마법진이 너무나 추악했으니까.
남과 북, 한반도의 국토를 뒤덮은 거대 마법진의 마나와 제물이 모이는 핵심 마법진.
그나마 입을 연 건 대장이었다.
“칼이 남은 자는 8번 선을 망가트려라. 총이건 뭐건 좋으니 33번 선과 97번 선을 막아. 그리고 마나가 남은 사람은 나와 함께 이 오염된 결정을-”
그때, 결정에서 울컥-! 뒤틀린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공희의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젠장.”
이대로라면 늦는다. 대장이 그렇게 느낀 순간, 묵직한 목소리의 애국단원이 말했다.
“대장, 혼자만이라도 후퇴하십쇼.”
“…뭐?”
“성공이 불확실할 때 장군은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우리는 남겠습니다. 대장은 가십시오.”
“….”
대장은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 검을 들어 결정을 내려쳤다. 쩡! 검기가 깃든 검이 내려쳤음에도, 결정에는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그냥 도망가란 소리가 아닙니다. 최소한 바깥에 있는 붉은 별의 동료를 챙겨 가십시오. 그러면 최소한의 면목은 챙길 수 있습니다.”
“그만!”
“아니, 그만하지 않겠습니다. 우린 이미 충분히 비열하게 살았습니다. 미래를 위해 그 비열함을 하루 더 연장하는 건 죄가 아닙니다. 대장, 대장만 있으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대장이 침묵하자, 마미가 끼어들었다.
“저 친구 말이 맞소. 대장, 우리에겐 아직 구하지 못한 국민과… 그 아이들이 있소. 넷이나 다섯이나, 큰 차이 없으니. 그냥 가시오.”
그의 말마따나, 애국단원들은 최선을 다해 방의 마법진을 해제하고 있었다. 대장은 대답할 말이 없는 듯 푹 숙였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싫다.”
“아니, 지금이 고집부릴 땝니까?”
“거절한다! 바깥에서 빨갱이가 저렇게 싸우는데, 내가 도망가야겠느냐?”
“…수치심도 살아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날처럼 도망치진 않겠다. 차라리 촛불이 되겠다. 동방의 밝은 빛은 될 수 없겠지만, 백만 명을 두고 도망친 병신은 되지 않겠지!”
그렇게 소리친 대장은 다시 검을 들어 결정을 내려쳤다. 쩡!!
도망치란 말은 결단코 무시하겠다는 태도. 애국단원들, 특히 마미는 그런 대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예, 좋소. 그럼 죽읍시다.”
“….”
“하지만 마지막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소. 아시겠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뭔가를 남길 수 있는 대상은….”
말꼬리를 흐린 마미는 붉은 별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뭘 말하는지 명확했고, 대장은 그것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무언의 각오를 삼킨 직후.
애국단원들은 다시 마법진을 향해 총 칼을 휘둘렀다. 부디 자신들이 백만 명의 한국인들 구할 수 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