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590)
을 위한 세계는 없다-590화(590/817)
EP.590 목멱에는 바다가 없다. (15)
* * *
***
일 초를 수십 번 나눈 찰나의 순간 속에서, 여명은 보았다.
손아귀를 쥔 허무의 손끝에서 시작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검기와 충돌하는 광경을.
!
순간, 무언가와 닿은 검기가 뭉텅 줄어들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그 뒤에 있던 공기 속 마나가, 점액질 속 뒤틀린 마나가, 이윽고 여명 본인의 몸속 무언가가 줄어들었다.
딱 절반.
여명은 자신의 넘치던 체력과 마나가 뭉텅이로 사라지는 걸 느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힘을 잃고, 마나가 맥동하던 혈관이 늘어지는 감각.
‘이게 허무의 천벌인가.’
한 번의 손짓으로 체력과 마나의 절반을 날려버리다니.
공간을 비틀고, 무생물에서 살을 만드는 것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능력이었다.
한 번 더 맞으면 어떻게 될까? 절반의 절반이 사라질까, 아니면 남은 절반이 사라질까.
둘 중 어느 쪽이 정답이건 간에, 여명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실험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허무가 한 번 더 손을 쥐기 전에 절반 남은 마나를 끌어모아 한 번 더 용사의 무술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1초가 지난 직후.
콰아아아 – !!!
첫 번째 검기가 작은 차원문과 충돌했다. 줄어든 위력 탓인지, 검기는 진실과 눈물이 숨은 차원문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검기는 달랐다.
한 발 더 날아오는 걸 본 눈물이 곧바로 천벌을 사용했지만, 검기에 담긴 어마어마한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허무! 이 정신병자 새끼, 지금 뭐 하고 있-!”
진실을 흘리는 자의 경악과 동시에, 검기가 차원문과 충돌했다. 주가시빌리와 똑같이 검붉은색으로 물든 검기가 번뜩이며 그대로 세 명의 아야톨라를 베…
…지 못했다.
용사 무술의 검기가 베어낸 건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아야톨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던 작디작은 차원문.
당연히 차원문 속으로 파고들어 속의 아야톨라들을 베어낼 거란 여명의 예상과 달리, 용사의 검기는 차원문 그 자체를 ‘베어’서 없애버렸다.
뭐지 이거?
당황한 여명은 고개를 돌려 전 부장이 연 차원문을 확인해 봤다.
네티가 나왔던, 그리고 지금은 점액질이 줄줄 흘러내리는 차원문은 파괴되긴커녕, 검기를 통과시켰다. 차원문 너머 박살 난 풍경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그렇다는 건, 아야톨라들이 연 작은 차원문만 베였다는 소리인데… 어째서?
그 의문이 길어지기 전에, 옆에 있던 작은 차원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놀랍군. 우리를 파괴하는 힘… 진짜 용사의 무술이었군.”
여자인지 남자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오직 보랏빛 눈동자만이 번들거리는 허무가 여명을 똑바로 바라봤다.
여명이 한 번 더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여명의 뒤통수에 있는 차원문에서 진실이 투덜거렸다.
“혈통은 다 끊겼는데 정작 무술은 개나 소나 다 쓰고 있으니… 정말 쓰레기 같은 시대라니까. 야, 빨갱아! 너, 누구한테 그 무술을 배웠냐?”
또다시 발동되는 진실의 권능. 여명은 녀석이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보고 훔쳤다.”
“…???”
진실의 노란 눈동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구겨졌다.
“그게 뭔 씨-”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짧은 순간, 여명이 다른 계획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행동은 빨랐고, 검에서 터져 나온 검기는 그보다 더 빨랐다.
!!!!
용사의 무술이 지나간 자리로, 아야톨라들의 차원문이 사라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마어마한 마나와 함께 용사의 무술을 쏘아내는 여명은 거침이 없었다.
주가시빌리의 무한한 마나 덕분이기도 했지만, 허무의 천벌에 맞으면 날아가 버릴 마나 아닌가.
“저 새끼 막아!”
여명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지 깨달은 진실이 소리쳤지만, 녀석의 목소리는 복도 저편에서 들려왔다.
이미 여명 주변의 차원문은 전부 파괴되었으므로.
남은 건 복도에 남은 세 개와, 처음 마법진의 방에 열었던 여섯 개가 전부.
설명도, 대화도 필요 없었다. 여명은 복도에 남은 세 개의 차원문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혹시 허무가 천벌로 막아낼까, 한 번 더 휘두를 준비를 했지만, 허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원문이 파괴될 때까지 특유의 보랏빛 눈이 반월로 휘어지며 미소를 그렸을 뿐.
복도에 남은 마지막 차원문이 파괴된 걸 확인한 여명은 그대로 바람을 일으키며 마법진과 애국단이 있는 방으로 달렸다.
철퍽, 철퍽! 복도 바닥을 가득 채운 점액질 위를 날아가듯 내달린 여명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소리쳤다.
“전부 엎드려!”
애국단들은 멍청하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마법진을 파괴하고 있던 그들은 거의 동시에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여명의 검이 횡을 그린 순간.
“그만.”
눈물의 권능이 그의 속을 흔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실의 천벌이 이어진 검기를 무효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콰아아 – !!!
터져 나오는 검붉은 검기가 마법진의 보라색을 뒤덮었으나, 진실의 천벌 앞에서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저 빌어먹을 무적기.
그렇게 인상을 찌푸린 여명은 인상을 펴긴커녕 한 번 더 이를 악물어야 했다.
허무가 한 번 더 손을 내밀었으므로.
“맞서 싸워라. 용기를 보여라.”
눈물의 권능이 또 한 번 거리를 벌리려던 여명을 붙잡았다. 도망가지 말라가 아니라, 용기를 보이라니.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고, 여명과 애국단은 그대로 허무의 천벌을 뒤집어썼다.
!!!
만물의 색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체력과 마나를 절반 사라지게 만드는 천벌.
정면에서 휩쓸린 애국단원 중에서는 쿨럭! 피를 토하는 자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절대치가 아니라 현재 가진 체력의 절반을 날리는 점일까.
주가시빌리로 순식간에 체력과 마나를 회복한 여명이 다시 자세를 잡자, 진실이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지아산 인간 백정이 만든 신성모독… 볼 때마다 아주 징글징글해. 아무래도 넌 반드시 죽여야겠다. 허무! 그만 구경하고 마무리해!”
허무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한 번 더 천벌을 사용해서? 아니, 그는 차원문 바깥으로 내민 손을 다시 쥐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여명을 겨눴다.
“내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건 천벌도, 권능도 아니었다. 마나를 실처럼 엮어 수식과 계산으로 완성하는 주문… 마법이었다.
번쩍!
녀석의 손끝에서 보랏빛 섬광이 터져 나오기 무섭게, 여명이 용사의 무술을 휘둘렀다.
마법과 검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를 노리고 충돌했다. 주가시빌리를 두른 용사와 종말 교단 최강의 아야톨라의 격돌이었다.
!!!!!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앞에서 폭발하는 천둥.
바닥에 고인 점액질이 파도를 치다 못해 쓰나미처럼 뒤로 밀려났다. 중심을 잡지 못한 애국단들의 몸과 옷깃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와중에, 여명은 보았다.
저 보랏빛 섬광이 그의 검기를 밀어내는 장면을.
힘에서 밀렸다. 역시, 녀석은 천벌과 권능이 없어도 10강급 강자가 틀림없었다.
짧은 깨달음을 뒤로 한 여명은 우악스레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검기와 보랏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
또다시 울리는 천둥. 하지만 이번 천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벼락을 머금은 태풍처럼 쉴 새 없이 자신들의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아야톨라와 애국단이 싸움에 참여했다.
“아오, 이 성녀 같은 새끼! 이제 좀 죽어라!”
“인내하라. 참는 자에게 죽음이 오니, 그대는 부디 인내하라.”
공격을 무효화하는 진실과, 속을 뒤집고 행동을 강제하는 눈물을 흘리는 자.
“쏴! 마탄을 아끼지 마!”
“수류탄 던져봤자 충격파에 밀려서 이쪽으로 떨어진다! 유탄! 저 꼬맹이 새끼한테 유탄을 쏴!”
얼마 남지 않은 탄환과 폭발물로 보조하는 애국단.
여명은 애를 썼다. 마나가 차오르는 족족 검기를 쏘아내는 근육과 심장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하지만 보조하는 자들의 격이 너무 차이가 컸다.
애국단에게 공격 헬기나 탱크가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야톨라의 천벌과 권능은 고작 소총으로 맞설 힘이 아니었다.
게다가 허무는 아직 권능을 보여주지도 않은 상황.
흔들리는 호흡을 삼킨 여명은 조금 전보다 훨씬 크게 검기를 토해냈다.
콰아아 – !!!
히틀러에게 휘둘렀던 용사의 무술만큼이나 강렬한 검기가 강렬한 빛과 함께 허무의 공격을 밀어낸 순간.
여명은 염동력으로 애국단원 다섯 명을 동시에 붙잡고 방 밖으로 뛰었다. 빠르게 물러나는 그의 발끝에서 강렬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가 물러난 자리로 허무를 흘리는 자의 보랏빛 섬광이 휘몰아쳤다.
사아아 – !
섬광에 닿은 벽과 바닥, 심지어 철문까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위력이 어찌나 절륜한지, 여명이 서 있는 자리에서 네티가 숨어있는 벙커가 보일 정도였다.
이딴 마법이 다 있지?
혹시라도 맞아서 저 마법을 훔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던 여명은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뻥 뚫린 벽 너머에서, 진실이 이죽거렸다.
“이제와서 도망치는 거냐? 빨갱아?”
진실의 권능이 담긴 말. 여명은 애국단원들을 점액질 위로 내던지며 대답했다.
“아니, 도망가지 않는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냐?”
저 엿 같은 권능. 여명은 너덜너덜해진 애국단원들에게 가만히 있으란 수신호를 보낸 뒤 뻥 뚫린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첫째, 허무의 마법으로 방이 파괴되면 공희가 멈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바보로 보이냐? 이 방의 마법진을 다 지워도 이미 시작된 공희는 멈출 수 없어. 다음은?”
“조금 전 싸움에서, 나머지 차원문 세 개를 파괴했다. 즉, 너희가 고개를 내밀 수 있는 차원문이 지금 그 세 개가 전부란 거지.”
“…뭐?”
여명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진실을 흘리는 자는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깨닫고 숨을 삼켰다.
진실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아이러니 속에서, 여명이 방문 앞에 서서 계획의 마지막을 말했다.
“이제 너희 모두, 다른 차원문으로는 이동할 수 없다.”
“이동하지 않아서 뭐 어쩌란 거냐,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버티는 이상 공희는 막을 수 없어.”
“공희는 다음이다.”
“뭐?”
“움직이지 못하는 진실, 너를 죽인다. 그게 내 계획의 최종 목표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오며 여명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나부끼는 살벌함 앞에서, 진실은 여명의 오만함을 비웃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은 몰래 기습하거나, 차원문을 모두 닫아버리는 것뿐이었거늘.
자신의 권능 앞에 모든 계획을 유출한 녀석에겐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그때, 여명의 몸에서 번쩍!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둠을 가르는 여명이 떠오르는 강렬한 빛.
빛을 마주한 눈물을 흘리는 자조차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진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시, 신성? 빨갱이가 어떻게 신성을-”
“빨갱이가 아니니까.”
진실이었다. 진실을 흘리는 자조차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진실.
허무는 잠시 상체를 잃은 소년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아직 남아있는 하체가 아니라,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체를 본다는 점일까.
곧, 그는 어둠 속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부위를 찾아냈다.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노란 눈동자…
허무는 그 눈동자를 챙긴 뒤, 눈물에게 물었다.
“피가 남긴 여우, 지금 어딨지?”
“히라리아.”
“찾아와야겠군. 꿈을 시작으로 죽는 순서가 이미 꼬이긴 했지만, 주인공이 발견된 이상 진실과 성녀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시나리오가 우리에게 강제한 계획과 다르게.”
거기까지 말한 허무는 쓰러진 눈물과 진실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검기의 여파가 아직도 남은 건지, 눈물을 아직도 상처를 재생하지 못했….
그때, 허무가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벙커에 여자가 있었지.”
“….”
“애국단이 데려온 여자는 아닐 테고, 히로인인가? 아니, 분명 히로인이겠지.”
허무는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는, 대뜸 손날로 눈물의 어깨를 베었다. 철퍽! 몸과 분리된 왼손이 펄떡거렸다.
갑자기 왼팔을 잃은 눈물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꼭, 내 껄 써야겠나?”
허무는 잘린 왼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가져다 붙이며 대답했다.
“내 껀 오늘 너무 많이 썼다. 천벌도, 마법도… 괜히 그의 관심을 끌 필요는 없지. 히로인을 죽이는 건 자네 걸로 충분해.”
“….”
눈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허무는 온릉 지하에 남은 마지막 차원문을 열었다.
여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가 벙커의 KGB와 애국단을 습격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차원문이었다.
***
끝났나?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로 섬뜩한 아야톨라의 마나가 사라진 직후, 네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벙커는 폐쇄되지 않았고, 아야톨라들은 패퇴했다.
형부의 승리였다. 저 공희인가 뭔가가 남아있긴 했지만, 형부가 있는 한 저것도 금세 끝나리라.
다행이다. 발목을 잡지 않아서.
네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써 발목 위로 차오른 끈적한 점액질이 계속 그녀와 박철을 노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었다.
“기자님, 일어나세요. 끝났어요. 이제 형부한테 가요.”
“아가씨, 나는….”
“힘든 일은 일단 나간 뒤에 푸세요. 여기 기자님 원수인 전 대통령도 잡았잖아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복수는 천천히 음미할수록 좋은 와인 같은 거라구요.”
“…와인이라니.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나? 소설?”
“아뇨, 그냥 제가 방금 생각한 건데요?”
깊은 한숨을 내쉰 박철은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형부가 오자마자 잽싸게 벙커를 벗어나면 끝나는-
그때, 뭔가를 느낀 네티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 위로, 작디작은 차원문과 그 사이로 내밀어진 왼손이 보였다.
아야톨라.
네티를 향해 똑바로 손아귀를 겨눈 녀석은 이렇게 지껄였다.
“네 애인에게 전해라. 전장에는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고.”
시발, 네티는 반사적으로 바닥에 있는 콘크리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뒤에 박 기자와 전 대통령들을 욱여넣은 뒤, 염동력과 보호막을 최대한 두껍게 쌓았다.
3초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대응이었지만, 상대의 공격은 그 이상이었다.
꺄아아아아 – !!!!
콘크리트와 보호막을 동시에 후려치는 음파.
‘처녀여!’
주머니 속 유니콘의 뿔까지 합세했지만, 음파는 콘크리트를 뚫고 기어코 네티의 몸을 후려쳤다.
그대로 날아간 네티는 철퍽! 점액질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음파를 맞은 부위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죽을 상처는 아니었다.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마총을 뽑았다. 한데, 그녀를 공격했던 아야톨라는 이미 차원문을 닫고 내뺀 뒤였다.
뭐지? 고작 그거 한 번 쏘자고, 형부에게 공격 받을 위험을 감수했다고?
아야톨라가 원래 다 그렇지만, 진짜 이상한 새끼네… 네티는 총구를 내리고 박철 기자를 찾았다.
그는 전 대통령과 처녀들을 내버려 둔 채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봐, 괜찮나?!”
“예, 아프긴 한데, 별거 아니었어요. 그러니 오지 마시고, 거기 계세요. 제가 그쪽으로 갈-.”
다음 순간, 살기가 뒤통수를 찔렀다. 네티는 본능적으로 총구를 뒤로 향했다. 하지만 방아쇠는 당기지 못했다.
섬뜩한 검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드는 적은…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새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눈처럼 긴 속눈썹 아래 숨겨진 붉은 눈동자까지.
“…큰 언니?”
아니, 저렇게 깨끗한 큰 언니가 여기 있을 리 없어- 네티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가짜의 검이 그녀의 복부를 찌른 뒤였다.
푹!
간과 신장 등 주요 장기가 잘리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기 무섭게, 가짜 큰 언니는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복부를 헤집었다.
가축우리에서 배웠던, 재생력이 강한 초인을 죽이는 살인법 중 하나.
하지만 네티는 그보다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터엉 – !!!
마총이 불을 뿜고, 코끼리 사냥용 대구경 탄환이 그대로 큰 언니의 몸을 날려 버렸다. 칼을 쥔 손이 풀리기 무섭게, 네티는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텅, 텅, 텅! 가짜 큰 언니가 점액질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
이윽고 언니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배에서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가, 갑자기 배에 구멍이 나다니!”
큰 언니를 보지 못한 걸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게나 눈에 띄는 사람을 못 볼 리 없었다. 조금 전 그녀만 음파를 맞은 걸 떠올려보면, 아마 음파를 맞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환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마지막 등불에 가까운 네티의 판단과 상관 없이, 박 기자는 당황하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네티는 풀썩, 뒤로 쓰러졌다.
척추도 끊어졌나?
고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죽는다.
지금 바로 옆에 성녀님이 있다면 모를까,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확신했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나, 나한테 포션이 있어!”
하지만 그걸 모르는 박철 기자는 애꿎은 포션을 따서 그녀의 상처에 부었다. 낭비였다. 그래봤자 일, 이분 정도밖에 더 못 살 텐데.
피가 역류하며 숨이 막혔다. 혈액이 막힌 손과 발끝이 차가워지고, 감각이 사라졌다.
주마등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어차피 좋은 기억은 대부분 형부와 만난 뒤에 생긴 것들뿐이니까.
후회는 없었다. 굳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형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일까.
아, 하나 더.
‘기어코 처녀로 죽네.’
그녀는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킥킥 웃었다. 물론, 그리 길게 웃지는 못했다.
그새 뛰어온 여명이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으니까.
“네티? 네티!”
여명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물약을 여는 소리, 혈관을 타고 마나를 불어넣는 감각이 연이어 들려왔다.
네티는 흐릿한 눈으로 형부를 올려다봤다. 피눈물의 환상으로 가려진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뒤늦게 박철 기자에게 감사했다.
그가 물약을 부어준 덕분에 형부의 얼굴을 보며 죽을 수 있으니까.
“형부.”
네티는 손을 들어 형부의 볼을 쓸었다. 그러자 여명은 그녀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말했다.
“조금만 참아. 미리에게 연락해서 차원문을 열 테니까, 당장 성녀에게 가서 치유하면….”
형부, 미리 언니와 연락하시려면 주무셔야 하잖아요. 전 그전에 죽을 텐데요.
네티의 생각은 언어가 되지 못했다. 혀가 움직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죽음을 앞둔 자의 처연한 미소. 그 속에는 백 마디 말보다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미소를 마주한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남은 물약을 부어 재생력을 돕거나, 무장 혈청으로 장기를 대체해 보는 등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한 손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는 법.
모든 시도는 그저 네티를 몇 초 더 살려놓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
여명은 자신을 원망했다. 어째서 케프리는 치유 축복을 쓸 수 없는가, 왜 이곳에 차원문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는가.
모두 그의 탓이었다. 처제는 자신 때문에 죽는다. 아주 조그마한 방심과 무능. 고작 그것 때문에.
여명은 네티를 끌어안았다. 이반 뇌제가 살해한 아들을 끌어안을 때처럼,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한 손길로 끌어안았다.
옅어지는 숨결, 차갑게 식어가는 피부.
여명의 손이 떨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미그니움의 이름을 되뇌던 바로 그 순간.
“그 여자를 살릴 방법이 있다면 어쩌실 겁니까?”
군화 소리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슬라브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미트리. 여명에게 속아 그가 스탈린의 손이라 믿고 있는 KGB의 빨갱이.
여명은 당장 답을 말하라는 듯 그를 노려봤다. 디미트리는 기꺼이 대답했다. 여명은 미처 상상도 못 한 내용이었다.
“죽는 것보다 미친 살인귀가 되는 게 낫다면… 지금 당장, 그 여자에게 주가시빌리를 가르치십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