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
을 위한 세계는 없다-6화(6/817)
〈 6화 〉 주인공을 위한 우연 (2)
* * *
***
인천의 새벽은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슬슬 문을 닫기 시작하는 유흥가와 도박장에선 삶과 술에 찌든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었고, 밤새 쌓인 온갖 쓰레기들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그들의 귀가를 축복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건 시장 상인들과 노점상, 그리고 청소부들뿐.
쇠똥구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새벽 거리로 녹아들었다.
그가 가장 먼저 걸음을 옮긴 곳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골목 너머, 더러운 쓰레기통과 의류 수거함 앞이었다.
피와 흙이 가득 묻은 작업복을 벗어 쓰레기통에 처넣고, 의료 수거함에서 손에 잡히는 옷을 아무렇게나 꺼내입었다.
축 늘어진 터틀넥에 기장이 짧은 청바지.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에 적절한 복장은 아니었지만, 시선을 끄는 복장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옷을 갈아입은 쇠똥구리는 다시 거리로 나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는 걷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금색 눈동자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인천 사람들의 냉담함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긴커녕,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니까.
‘…예상보다 빨리 왔군.’
쇠똥구리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목적지를 바라봤다.
인천 시장, 혹은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맥아더 동상의 이름을 따 맥아더 시장이라 불리는 곳.
쇠똥구리는 시장에 들어서는 다른 상인들과 걸음을 맞춰 자연스럽게 시장에 들어섰다.
코를 찌르는 생선 냄새와 음식 냄새가 그를 반겨줬지만, 그의 목적지는 식당과는 정반대에 있었다.
시장의 깊은 곳, 상인들조차 찾지 않는 뒷골목의 작은 술집.
쇠똥구리가 구불구불한 시장 골목을 건너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주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오늘 장사 끝났습니다.”
“장만 어르신.”
쇠똥구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주인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쇠똥구리?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술집 주인, 장만은 뱃사람 특유의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늙은이였다.
인천항이 남아있던 시절에는 주변을 주름잡던 뱃사람이었다던데, 그의 건장한 몸을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작업반장 양반이 술 심부름이라도 시킨 게냐?”
“…반장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뭐?”
쇠똥구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장만은 테이블을 닦던 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며칠 전에 술 사간 양반이 왜 죽어?”
“…밀수꾼들과 요정들이 접선 장소에서 전부 살해당한 사건, 아십니까?”
“그래, 알다마다. 겨우 이틀 전에 벌어진 일 아니냐? 아직도 그 이야기가 파다하다.”
이틀이라. 시체가 되고 나서 하루 만에 부활한 건가? 쇠똥구리는 자신이 죽어있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을 벌인 당사자가 청소를 요청했고, 저희 팀이 청소를 맡았습니다.”
“당사자? 설마 살인마가 직접?”
“예, 청소가 모두 끝나자마자, 저희 팀에게 칼을 휘두르더군요.”
“…청소부 길드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 대책도 없이 너희를 보냈단 말이냐?”
“저희를 살인마에게 팔아넘긴 게 청소부 길드였습니다.”
“…허.”
장만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작업반장이 청소부 길드에서 일한 게 이십 년이 넘는다. 그런 사람을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처리하다니…“
그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가, 쇠똥구리를 바라봤다.
“살아남은 팀원은 더 있느냐?”
“아뇨, 살아남은 건… 저뿐입니다.”
장만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뒤편 진열장에서 술을 꺼냈다.
“너라도 목숨을 구해 다행이구나. 적어도 장례를 치러줄 사람은 남겼으니.”
“…어르신.”
“내가 외국에 살 곳을 한 번 알아보마. 호주나 태국으로 가서 새 출발…”
“…어르신.”
쇠똥구리는 장만과 술병을 번갈아 바라봤다. 금색 눈동자 속에서 어떤 결심을 읽은 장만은 한숨을 쉬며 병을 열었다.
“복수할 생각일랑 집어치워라, 살인마를 잡는 건 경찰이 할 일이지, 네가 할 일이 아니야.”
“그놈, 마나를 다루는 초인입니다. 경찰은 못 잡습니다.”
“그럼 너는 잡을 수 있고? 청소부 길드도 똑같다. 정부 단체에 어떻게 복수하려고? 테러리스트라도 될 생각이냐?”
장만은 거칠게 술을 들이켠 뒤, 뚱한 표정으로 쇠똥구리를 바라봤다.
“난 못 도와준다. 개죽음당할 게 뻔한 곳에 널 밀어 넣으라고? 죽어서 작업반장 그 친구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이냐?”
그는 한 번 더 술을 들이켰다. 아니, 들이켜려 했다.
장만이 술병을 든 순간, 쇠똥구리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장만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황당한 눈으로 쇠똥구리를 바라봤다. 쇠똥구리는 대답 대신,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까드득.
병이 처참하게 부서지며 내용물을 쏟아냈다. 장만은 바닥에 쏟아지는 술과 병 조각, 그리고 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쯧, 젊음이란…’
하지만 다음 순간.
쇠똥구리가 쥐었던 손을 활짝 펼치자, 그는 다른 의미로 눈살을 찌푸렸다.
“전 개죽음당할 생각 없습니다.”
쇠똥구리의 손은 실시간으로 아물고 있었다. 피가 멈추고,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재생? 너, 설마…? 마나를?”
마나.
나치가 차원문을 열고 넘어간 그 순간부터, 지구 인류가 꿈꾸던 힘.
짧은 전쟁 두 번, 그리고 기나긴 침탈이 끝난 현대에 이르러서야, 지구 인류는 그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마법사, 초인, 히어로, 헌터, 축복받은 자…
부르는 명칭은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질투와 기대만큼이나 다양했지만, 결국 의미하는 바는 똑같았다.
기계나 도구가 아닌, 순수한 육체와 정신으로 마나를 다루는 자.
장만은 눈앞의 청소부가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어떻… 아니, 방법은 너도 모르겠지.”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마나 사용 방법은 타고난 재능과 특수한 혈통, 신의 축복과 특정한 약을 먹는 것. 단 네 가지 뿐이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느 쪽이건 일개 청소부가 쓸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기적인가?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한 장만은 바닥에 뿌려진 술병을 발로 대충 밀어내고, 새 술병을 꺼냈다.
“그래, 네가 단순히 개죽음당하러 가는 게 아닌 건 알겠다. 하지만 내가 뭘 도와줄 수 있겠느냐?”
“어르신, 직접적인 도움을 부탁드리진 않겠습니다. 그저 옛정을 봐서 사람 하나 소개시켜주시면 족합니다.”
“사람? 내가 발이 넓은 건 사실이다만, 술집 주인 인맥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냐?”
장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새 술병을 따고, 테이블 아래에서 술잔을 꺼내 술을 따랐다. 진한 럼주의 향기가 두 사람 사이로 퍼졌다.
“밀수꾼. 그 분야에서 최고였다고 들었습니다.”
술잔을 들던 장만의 몸이 움찔, 멈췄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쇠똥구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 작업반장… 그 양반이 참 많은 걸 말해줬군. 입이 싼 양반은 아니었는데.”
그는 자신이 밀수꾼이었단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밀수꾼을 만나서 뭘 살 생각인 게냐?”
“…무기를 살 겁니다.”
“쇠똥구리, 네가 이 늙은이의 조언을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말해야겠구나.”
장만은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실제 무기는 액션 영화 속 장난감과 다르다. 마나 또한 마찬가지지. 강대국들이 아카데미를 세워가며 초인들을 기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냐?”
단순한 젊은이의 객기로 넘어가기엔 사안이 너무 컸다. 장만은 그를 설득할 요량으로 잔 하나를 더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넌 지금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초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복수는커녕 뒷세계 녀석들이 널 잡으려고 혈안이 될 게야.”
“….”
“잡힌 뒤에는? 뻔하지. 몸은 토막 나서 이곳저곳 연구소에 팔려 가고, 간은 부자들 식탁에 올라갈 게다.”
장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자주 들을 수 있는 도시괴담 중 하나였다.
마나 사용자의 간을 먹으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
미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정된 헛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진짜로 시도한 놈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살벌한 경고에도 쇠똥구리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처음부터 각오했습니다.”
“각오? 각오라… 죽고 사는 문제를 너무 쉽게 입에 담는구나.”
“죽고 사는 문제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요.”
“…하.”
장만은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젊은이의 패기는 객기와 다를 게 없었으나, 각오는 달랐다.
늙은이에게나, 젊은이에게나. 각오는 언제나 각오였다. 목숨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하나뿐이니까.
“죽느냐, 사느냐. 햄릿이 따로 없구나.”
그는 술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새벽이 지나 해가 떠오를 정도로 시간이 지나고, 잔에 고인 럼주가 잔잔하게 파동을 그리던 순간.
장만은 여전히 결연한 쇠똥구리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이가 각오했다면, 늙은이는 어쩔 수 없지.”
장만은 설득하기 위해 꺼냈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뒤, 쇠똥구리에게 건넸다.
싸구려 럼주 특유의 진한 갈색빛 위로, 쇠똥구리의 무표정한 얼굴이 반사됐다.
“좋다, 내가 직접 쓸만한 놈에게 다리를 놓아주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