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00)
을 위한 세계는 없다-600화(600/817)
EP.600 어두운 진실, 화려한 거짓. (6)
성기사의 검은 아름다운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은과 석류석으로 장식된 손잡이는 장인이 일생에 한 번 만들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수준의 걸작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 길게 이어진 칼날에는 어떠한 기교나, 장식도 없었다.
그곳에서 번뜩이는 건 그 어떤 예술품도 보여줄 수 없는 무기만의 아름다움이었다.
적을 베고, 죽이기 위한 치명적인 실용성.
무수한 존재를 죽였을 그 칼날을 마주하고 나서야, 여명은 상대가 성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붉은 신 레독스의 성물.’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여명의 본능은 저게 성물이라고 확신했다.
그 또한 적색 신의 성물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 무기에서 느껴지는 격이 그랬다.
여명이 본 무기 중 저것보다 높은 격을 느낀 건 성검과 스탈린이 직접 휘두른 무장 혈청뿐.
“천여명… 내가 왜 검을 뽑았는지 너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사이 검을 뽑은 성기사가 한 걸음, 그에게 다가왔다. 여명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응시했다.
두 걸음,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햇빛이 부드럽게 두 사람 사이를 비췄다.
그것이 지구 신의 계시인지, 아니면 아샤 신의 관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명은 빛을 따라 성물을 뽑았다.
단죄의 빛.
성물지기가 그에게 준 백색 신의 성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 혈청이나, 산의 눈물을 꺼낼 수도 있었지만, 여명은 이걸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물 또한 그 생각에 호응하듯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빛이 몹시 날카롭게 번뜩였다.
세 걸음, 지르지스와 여명이 동시에 검을 꽉 쥐었다.
기겁한 살로메가 뒤로 물러나고, 발막이 시큰둥하게 주변의 시야를 차단하는 순간.
두 개의 검이 교차….
“어허, 이 사람들이 진짜 미쳤나.”
…하지 못했다. 갑자기 투명 망토를 벗은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 까닭이었다.
두 개의 성물을 맨손으로 붙잡아 막은 그는 회백색 수염과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어쩌면 호아나보다도 더 늙었을지 모를 노인은 지르지스와 여명은 번갈아 보며 훈계했다.
“지르지스 단장. 젊은이에게 대뜸 검부터 휘두르다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그것도 다른 종교의 신전에서… 노망났습니까?”
“그리고 천여명, 당신도 그렇습니다. 항변 한 번 하지 않고 검을 뽑다니. 정말로 성녀님께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최소한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식적인 말이었다. 지르지스가 검을 거둘 정도로 상식적인 말.
하지만 여명은 검을 거두지 못했다.
불과 몇십 초 전에 상식에게 배신당해서? 아니면 정말로 성녀에게 죄를 지어서? 아니, 아니었다.
그가 검을 움찔, 놀란 건 갑자기 나타난 대머리 노인이 누군지 아는 까닭이었다.
“…파롤 경?”
여명이 알던 얼굴보다 훨씬 더 늙긴 했지만, 그는 분명 파롤 경이었다.
꿈을 흘리는 자의 악몽 속에서 만난 전대 성녀님을 호위하던 바로 그 성기사.
딱히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그는 꿈속의 전대 성녀님을 중앙 신전 바깥으로 빼준 장본인이었다.
“절 알고 있습니까?”
차마 꿈속에서 봤다고 말할 수 없었던 여명은 성물을 다시 인벤토리로 회수하며 대답했다.
“…예전에, 경의 위명을 들은 적 있습니다.”
어색한 대답을 듣자마자, 파롤은 입가의 주름을 끌어 올려 미소를 만들었다.
“저처럼 별 볼 일 없는 성기사의 위명이 지구까지 알려졌을 줄이야, 감격스럽군요.”
정반대로 뒤에 서 있던 지르지스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으나, 그 모습을 본 건 살로메뿐이었다.
아무튼, 분위기가 좀 가라앉자 파롤은 자연스럽게 성당 의자에 앉았다. 그는 여명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우선, 단장이 검을 뽑은 걸 사죄드립니다. 평소에는 저런 사람이 아닌데, 당신과 성녀님에 관한 소문이 너무 자극적이다 보니 좀….”
“괜찮습니다. 이런 일은 익숙해서요. 아,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지르지스를 힐끗 바라본 뒤 자리에 앉았다. 파롤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성도에 퍼진 소문과 달리 예의 바른 젊은이로군. 좋아, 말을 놓겠네. 아, 그리고 혹시나 오해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자네를 만난 건 전적으로 우연일세.”
“….”
우연? 살로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파롤이 덧붙였다.
“비록 다른 종교의 신전이긴 하지만, 전대 성녀님이 들른 적이 있는 곳일세. 그래서 현 성녀님을 만나기 전에 이곳을 들리기로 했지.”
전대 성녀님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살로메는 여명을 바라봤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여명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파롤은 계속 말을 이었다.
“원래는 투명 망토를 쓴 채 짧게 기도만 하고 갈 생각이었네. 근데 이 신전에 들어오자마자… 변장한 채 고통의 눈을 만지작거리는 자네가 보이더군.”
“고통의 눈?”
“자네가 발막에게 보여주던 그 구슬말일세. 자기가 뭘 가졌는지 몰랐나 보군?”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파롤이 수염을 쓸었다.
“그건 영혼을 고문하고 뒤틀린 마나를 증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주받을 물건일세. 자칫 잘못 사용하면 거대한 악을 만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물건이기도 하고… 대체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도 되겠나?”
여명은 한국과 남산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대신, 짧게 요약해서 말했다.
“아야톨라에게서 빼앗았습니다.”
“…?”
몇 시간 뒤.
성녀는 투명 망토를 쓰고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여명…! 은 아니네. 오랜만이에요. 파롤, 그리고 단장님.”
노골적인 실망을 마주한 두 성기사의 반응은 두 개로 갈렸다.
“예,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파롤은 아직 어린 손녀를 보는 것처럼 웃었고, 지르지스는 정색했다.
“놈이 이 방까지 찾아옵니까?”
“놈? 누구요?”
“천여명 말입니다.”
“아뇨? 안 찾아오는데요?”
“….”
뻔뻔하게 대답한 성녀는 곧장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보다, 엄청 빨리 오셨네요? 아직 출발도 알리지 않으셔서, 성도에 갈 때나 오실 줄 알았는데.”
파롤은 그녀의 뻔뻔함이 익숙한 듯, 팔짱을 끼는 단장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오, 지구 신도들이 선물한 물건을 드디어 쓰신 거예요? 어때요? 비행기를 타본 감상은?”
“아주 편했습니다. 돈이 많이 드는 게 흠이긴 합니다만, 밤새 말을 몰거나, 열차를 타는 것보다 훨씬 낫더군요.”
“지구 문명과 자본주의의 힘이죠. 아, 근데 저는 비행기보단 바이크가 더 좋더라구요.”
“모두 성도에서는 타기 어려운 것들이군요. 지구에 있는 동안 여러 경험을 하셨나 봅니다.”
그렇게 잡담이 길어지려는 찰나, 단장이 끼어들었다.
“성녀님. 천여명과 무슨 관계입니까?”
“….”
이런 눈치 없는 노인네 같으니라고. 애써 분위기를 풀던 파롤은 후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성녀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천여명이요? 그냥 친구인데요.”
파롤이 한 번 더 한숨을 쉬는 사이, 지르지스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섯 신께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아뇨?”
“….”
즉답. 그리고 동시에 자백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지르지스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거짓말은 죄악이며, 진실은 미덕입니다. 성녀님, 숨거나 피하실 생각이라면 포기하십시오. 그동안 호아나가 누구에게 보고를 올렸겠습니까?”
“그야, 단장과 총대주교에게 올렸겠죠. 근데 뭐, 보고서에 뭐 대단한 말이 적혀 있던가요? 기껏해야 얼레리꼴레리….”
성녀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지르지스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성녀님께서 욕망에 휘둘리실까 두렵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뭐? 이런 씨- 호아나!!!”
성녀가 버럭 소리 지르자, 숙소 베란다 밖에서 무언가 부스스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외부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호아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성녀님, 부르셨… 아니, 이 양반들은 왜 이리 빨리 왔어?”
“그래, 나도 반갑다. 호아나.”
인사를 건네는 파롤과 달리, 지르지스는 호아나를 다그쳤다.
“아무리 투명 망토를 썼다지만 침입자를 알아채지 못하다니. 실망이다. 호아나.”
호아나는 평소에 투명 망토를 쓰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침입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직후, 성녀가 호아나에게 따졌다.
“호아나, 보고서에 내가 욕망에 휘둘린다고 썼어?”
“…음, 단장님께서 고자질하실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적었을 겁니다.”
“호아나!!”
성녀가 무어라 화를 내건, 호아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최소한 성녀가 애인과 친구를 동시에 호텔로 끌고 갔다든가 하는 내용은 적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지르지스 단장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님, 사랑은 녹색 신께서 내려주신 축복이지만, 그 책임은 오롯이 신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천여명, 그는 못 믿을 자입니다.”
“…단장이 여명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요? 만나본 적은 있어요?”
“예, 여기에 오기 전, 명동 성당에서 그와 만났습니다.”
“…으, 응?”
“마법사들과 남 몰래 접선해 사악한 물건을 연구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내뱉는… 아주 파렴치한 놈이었습니다.”
만났다고? 성녀는 당황하며 파롤을 바라봤다. 파롤 경은 사실이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이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자기가 아야톨라와 싸우고, 그들의 물건까지 빼앗았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때, 파롤이 한마디 보탰다.
“저건 단장 개인의 의견입니다. 저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라면 순순히 이걸 넘겨주지 않았을 테니.”
그렇게 말한 파롤은 주머니에서 보라색 구슬을 꺼냈다. 성녀는 그게 여명이 남산에서 가져온 물건이라는 걸 눈치챘다.
“…뭐라고 했길래 여명이 그걸 덥썩 줬어요?”
“저희가 아는 물건과 똑같은 물건이 맞는지 확인한 뒤에 돌려주겠다고 하니 바로 넘겨주더군요. 어른을 신뢰하는 건지, 아니면 성기사를 신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친구 같았습니다.”
“….”
여명의 칭찬을 들은 성녀는 살짝 우쭐해진 얼굴로 지르지스 단장을 바라봤다. 단장은 살짝 발끈하며 대답했다.
“녀석은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파롤을 한눈에 알아보곤, 위명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파롤의 위명이라니. 하! 거짓말에 그렇게나 재주가 없어서야.”
“….”
이번에는 파롤도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파롤은 전대 성녀의 호위에 평생을 바친 성기사였다. 위명을 떨치긴커녕, 교단 내부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손에 꼽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성녀는 조금 당황한 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여명이 파롤을 어떻게 알지? 내가 말해준 적이 있던가? 아니, 그런 적 없는데-
그때 문뜩, 성녀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대 성녀님.
그분이라면 여명에게 파롤에 대해 말해줬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게 맞다면, 여명이 어쭙잖은 거짓말로 상황을 넘긴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이 전대 성녀의 아들이고, 전대 성녀에게 직접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성녀는 손가락을 떼고,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알려줬다고 하면… 안 믿을 거죠?”
“다시 말하지만, 거짓말은 죄악입니다.”
지르지스 단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성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어떻게 한다?
다행히 그녀의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뜻밖의 지원군이 대화에 끼어든 덕분이었다.
-여전히 앞뒤가 꽉 막혔군. 지르지스 라크티.
“….”
-겉모습이 늙지 않으면 무엇하나. 속은 이미 충분히 늙었거늘.
성녀의 숙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변장한 데스나이트, 바라나 카시였다.
지르지스와 파롤은 그가 변장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변장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순간, 어느 누가 수십 년 전에 죽은 전우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직접 변장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도 믿지 못하는 판이거늘.
“…바라나? 레독스의 주먹?”
-오랜만이네. 지르지스. 파롤.
“자네는 분명 전쟁에서 죽었… 데스나이트???”
두 성기사는 경악하며 무기에 손을 올렸다. 만약 바라나가 은은한 신성력을 내뿜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렀으리라.
“어떻게?”
-많은 일이 있었네.
바라나는 터벅터벅, 그에게 다가가며 덧붙였다.
-자네와 마찬가지로.
그의 차가운 손길이 지르지스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단장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다섯 신께서 자네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내렸군.”
-거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는 일이지. 나는 괘념치 않네. 살아서 평생을 그분들의 검으로 살았으니, 죽어서도 봉사할 수 있단 사실에 감사할 뿐.
“….”
바라나는 단장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뒤, 성녀님의 옆에 앉았다. 성녀님을 지지한다는 뜻이 담긴 자리 선정이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분위기가 무거운가?
“천여명.”
-아, 그는 그럴 만하지. 지르지스, 그를 규탄하고 있었나?
“규탄이라니, 그저 의심 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을 뿐이네.”
-정말로 그게 자네의 진심이라고 맹세할 수 있나?
“뭐?”
바라나는 지르지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현 성녀님에게 전대 성녀님을 대입하지 말게. 우리 시대의 실패는 오롯이 우리 시대에 남겨두세나.
“….”
지르지스의 미간이 난폭하게 구겨졌다.
“누구한테 그런 말을… 아.”
지르지스가 주변을 둘러보기 무섭게, 호아나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고자질쟁이가 한 명에게만 고자질했을 리 없지.
그는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우리의 실패라는 말에 동의하네. 하지만 실패를 반복할 필요 또한 없지 않나?”
-글쎄, 그걸 정하는 것 또한 젊은이들의 몫일세.
“동의할 수 없네.”
-못 본 사이 고집이 늘었군.
“자네는 전대 성녀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으니 그리 말할 수 있는 걸세.”
거기까지 말한 지르지스는 단장은 방에 모인 사람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이윽고, 성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님, 저는 총대주교처럼 성녀님을 강제로 귀환시켜야 한다거나, 신전에서 독수공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원하신다면 연인을 만드십시오. 그를 성기사로 삼아 함께 사시는 일을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여명, 녀석은 안 됩니다.”
이 순간, 성녀는 여명을 옹호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라나가 성녀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왜요? 그녀가 무언의 질문을 날렸지만, 바라나는 성녀가 아닌 지르지스를 향해 말했다.
-역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혓바닥이 많이 길어졌군. 지르지스.
“…뭐라?”
-대체 언제부터 레독스의 검이 말로 사람을 평가했단 말인가? 붉은 신께서 가장 좋아하는 대화 수단은 입이 아닌 무기일진대.
“….”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가서 천여명과 칼을 맞대보게.
기껏 싸움을 말렸던 파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지만, 지르지스는 기다렸다는 듯 성녀를 향해 말했다.
“바라나가 저리 말하는군요. 성녀님, 제가 어찌해야겠습니까?”
그는 당연히 성녀가 이 싸움을 말리고 한발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녀는 잘 됐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어… 좋은데요?”
“…?”
“이건 제 경험인데, 팔 하나쯤 잘리면 대화가 통하더라고요. 당장 여명 부를까요?”
“…??”
“…???”
갑자기 선수용 대련장으로 불려 나온 여명은 조금 전 지르지스 단장과 똑같은 표정으로 성녀와 바라나를 바라봤다.
“뭘… 하라고?”
“저기 저, 성기사단 단장 팔 하나만 잘라봐.”
“어… 혹시 라쉬크가 준 이상한 약 먹은 건 아니지?”
“그건 따로 쓸 때가 있어서 아직 안 먹었어.”
“….”
여명이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어느새 다시 변장한 바라나가 부연 설명을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성기사란 족속들은 본질이 붉은 신의 신도들이라, 말보다는 주먹을 더 선호한다네.
여명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가 겪어온 경험이 딱 그랬으니까.
-저 친구가 자네에게 오해가 좀 있으니, 한 번만 손속을 나눠주게나. 함께 성도까지 갈 텐데, 오해는 풀어야지.
“무슨 오해 말입니까?”
-글쎄, 저 친구 눈에는 자네가 제2의 변경백으로 보이는 것 같군.
“….”
제2의 변경백이라니. 무슨 소리지? 여명이 고개를 기울였으나, 바라나는 바로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일단, 레독스의 이름으로 내기 대련을 할 걸세.
“내기 대련이라니, 그건 불법….”
-현금이 안 걸렸으니 불법은 아닐세. 아무튼, 저 친구가 패배하면 성녀님을 비롯한 자네 파티 전체의 호위를 부탁할 걸세.
“….”
-저번에 대놓고 찾아온 아야톨라도 그렇고… 언젠가 자네의 약점을 노리는 자들이 나타날 때, 저 친구와 파롤이 큰 도움이 될 걸세.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만약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여명은 좋은 점만 보는 낙천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만한 대가라면 지르지스 단장님이 거는 조건도 대단하겠군요.”
-아니, 저 친구의 요구 조건은 평범하다네. 자네가 성녀님과 연을 끊는 걸세.
“….”
성기사들이란. 황당함을 삼킨 여명은 지르지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이상할 정도로 어린 외모 탓일까? 살짝 변장한 그는 성기사보다는 올림피아에 참가하는 선수처럼 보였다.
여명은 다시 바라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대련을 하는 겁니까?”
-성기사 대련. 서로 마나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오직 육체의 기술만으로 겨루는 대련법일세. 물론, 검도 목검을 쓰네.
환골탈태한 육체를 가진 여명으로서는 꽤 괜찮은 조건의 대련이었다.
문제는, 단장의 실력이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경우였다.
“제가 지면 어쩌시려고….”
-괜찮네. 해가 떠있을 때라면 자네가 무조건 이길 테니까.
“….”
의미심장하게 단언하는 바라나를 뒤로한 채, 여명은 목검을 들고 대련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