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01)
을 위한 세계는 없다-601화(601/817)
EP.601 어두운 진실, 화려한 거짓. (7)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여명은 대련장으로 올라오는 지르지스를 보며 생각했다.
성녀와 인연을 맺은 후로, 만나는 거의 모든 성기사들이 그를 시험해 왔다.
다른 무엇도 아닌, 투쟁의 적색 신 레독스의 방식으로.
그리고 그때마다 피를 흘려야 했지만, 여명은 딱히 귀찮음이나 억울함은 느끼지 않았다.
성녀의 연정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이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아니면 그의 대외적인 평판이 워낙 쓰레기라서?
아니, 둘 다 아니었다. 여명이 성기사들의 주책에 어울려 주는 진짜 이유는, 그가 전대 성녀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단이 들으면 아마 화를 내겠지만, 여명은 그들의 눈 속에서 어머니가 그들에게 남긴 흉터를 봤다.
그들이 지키지 못한 성녀를 향한 죄책감을 봤고.
불의한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불타는 분노를 봤으며.
전대 성녀님의 마지막 유산인 현 성녀를 향한 집착을 봤다.
그래, 그 흉터를 본 여명은 그들의 시험을 기꺼이 감내하기로 했다. 비록 이것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순 없겠지만, 잠깐의 위로는 될 테니까.
“자세는 나쁘지 않군.”
지르지스는, 당연하게도 적당한 변장을 하고 있었다.
적당히 얼굴을 바꾼 그는 올림피아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하얀 바탕에 검은 선이 들어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 덕분에 진짜 올림피아 참가 선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목검을 들어올리기 무섭게, 여명은 그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지르지스는 어떠한 마나도 없이 그저 자세만으로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냈으니까.
분노와 폭력의 기세.
성스러운 성기사단의 단장이란 직위와 달리,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원초적이고 야만적이었다.
그에 맞서 검을 든 여명은 구경꾼이 없어서, 그리고 마나를 쓰지 않는 대련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저런 것과 진심으로 싸웠다면, 이 주변이 전부 박살 났을 게 분명했으니까.
“선공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지르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보란 듯 여명을 향해 한 걸음 거리를 좁혔다. 적의 어린 동의였다.
단 몇 미터 떨어진 거리.
여명은 후우- 길게 심호흡한 뒤, 숨을 들이키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지르지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명은 그에게서 무수한 약점과 빈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곳을 노리는 순간 반격당할 거라는 강한 확신을 느꼈다.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여명은 기꺼이 검을 휘둘렀다. 어디 반격해 보라는 듯, 노골적으로 목을 노린 일격.
다음 순간, 지르지스는 예상대로 움직였다. 여명의 검을 막는 대신, 역으로 여명의 목을 노렸다.
빠각 – !!
둘의 검은 동시에 서로의 목을 후려쳤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그 구성요소는 전혀 다른 여명의 목뼈가 출렁거릴 정도로 강렬한 일격.
“저, 저 미친놈들이-”
두 사람의 첫 격돌을 본 파롤 경이 경악하는 가운데, 두 개의 목검이 가속했다.
목표는 이번에도 목. 검과 검이 충돌하며 둘의 균형이 무너진다. 반동을 이용하며 머리. 다시 충돌.
그렇게 옆구리, 손목, 쇄골, 낭심, 머리, 틈을 노려 다시 목.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물어뜯는 맹수처럼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미 평범한 인간의 속도는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여명이 이길 거라 믿는 성녀조차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격한 공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쓰러져서? 아니, 그들이 휘두르는 목검이 버티지 못해서.
!
어느 순간, 검과 검이 충돌하는 소리 대신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훈련용 목검이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힘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였다.
박살 난 나무조각이 비산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지켜보던 호아나가 새로운 목검을 꺼내 두 사람에게 내던지려 했지만, 여명과 지르지스 모두 검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은 토막 난 목검을 들고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그걸 본 파롤이 말했다.
“저 친구도 레독스님의 신도인가?”
“어… 굳이 따지자면 녹색 신을 섬기고 있어요.”
성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어버린 호아나와 달리, 파롤 경은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지르지스를 걷어차는 여명을 보며 다른 말을 꺼냈다.
“단장이 저렇게 된 뒤로 마나를 쓰지 않는 싸움으론 적수가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저 친구는 대체 뭡니까? 그, 지구에서 만든다는 키메라 인간이라도 됩니까?”
“키메라는 무슨, 여명 혈통이 얼마나 좋은데. 저건 그냥 환골탈태해서… 아니, 어딜 노리는 거야! 미쳤나 봐!”
파롤에게 대답하던 성녀는 지르지스가 여명의 낭심을 노리는 걸 보고 빼액 소리 질렀다.
호아나가 슬그머니 그녀의 리볼버를 빼앗은 가운데, 파롤이 중얼거렸다.
“환골탈태… 저 나이에…?”
다행히 주변에는 구경꾼이 거의 없었고,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건 바로 옆의 성기사들과 대련장 위의 지르지스뿐이었다.
환골탈태라.
지르지스는 여명의 목검을 피하며 생각했다. 녀석이 뭔가 비범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성녀님이 평범한 남자를 선택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변경백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비범했다.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용사였고, 강대한 초인이었으며, 지구인들조차 인정한 인격자였다.
그리고 그런 변경백조차 성녀님을 구하지 못했다. 혹은 구하지 않았거나.
순간의 생각 후 그는 여명의 검을 막았다.
빠각!! 검에 실린 위력이 어찌나 큰지, 반밖에 안 남아 있던 목검이 한 번 더 부러졌다.
균형을 잃고 밀려난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손잡이만 남은 목검을 내던진 뒤,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이 없으면 주먹.
꽉 다문 주먹이 서로의 얼굴을 노리고, 천둥이 울렸다.
!
턱이 돌아가고, 뇌가 흔들릴 때만 들리는 천둥소리.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지르지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
뇌를 다친 건 아니었다. 그저,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천여명 또한 천둥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고.
과연, 그의 예상대로였다. 한 걸음 물러난 천여명은 머리가 울리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지르지스는 코에서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으며 물었다.
“마나를 쓰지 않는 대련에 익숙해 보이는군.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맞나?”
“네, 예전에 등신 같은 녀석하고 비슷한 걸 한 적 있습니다.”
등신 같은 녀석?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르지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성기사들이 왜 이런 대련을 하는지도 알고 있나?”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마 무술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는 중입니다.”
정답이었다. 쉽게 맞추기 어려운 일이거늘.
“눈치가 좋군. 이 대련의 시작은 마나를 쓰지 않는 순수한 육체 대련을 통해 무의 이치를 탐구하는 행위였다. 지금은 그냥 안 다치고 대련하는 게 목적이 됐지만… 그래서, 뭔가 깨달은 게 있나?”
“없습니다. 아직은.”
“그러면 뭐 하나 배워가면 좋겠군. 연인을 잃는데 배운 것도 없으면 꽤 비참할 테니.”
전형적인 도발이었다. 치졸한 공격이었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도발. 지르지스는 당연히 여명이 도발로 반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할 말 없나?”
“어르신한테는 되도록 말조심하는 편이라서요.”
“….”
“아, 그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혹시 바라나와 단장님 중 누가 더 기수가 높습니까?”
이건 또 뭐 하는 질문이람. 지르지스는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내가 세 기수 위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지르지스는 다시 여명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은 거의 총알처럼 빠르게 여명의 머리를 노렸다.
여명은 구경꾼이 적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올림피아 경기를 보러 갔고, 대련장 주변의 사람들조차 마나를 쓰지 않는 두 사람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는 덕분이었다.
아무튼,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구경꾼이 없는 건 다행이었다. 이런 대련이 알려지면 괜히 귀찮아질 테니까.
!!!
맨주먹으로 대기를 찢고, 발걸음을 따라 대련장 바닥에 금이 갈 정도의 격전.
그건 단순히 강자와 싸운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르지스는 그동안 여명이 봐온 그 어떤 강자들보다 ‘폭력적이었다’.
살인이나, 살기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여명을 두들겨 팰 생각으로 가득했다.
서로 턱주가리를 후려쳐 시야가 반짝거리건 말건.
복부를 걷어차고, 눈을 찌르고, 코를 내려찍는 와중에도 지르지스는 절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여명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는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지르지스를 두들겨 팼다.
저릿저릿한 주먹, 거칠어진 숨소리, 시퍼렇게 멍드는 얼굴.
그렇게 난타전이 이어지길 잠시.
승기를 잡은 건 여명 쪽이었다.
그는 언제나 지르지스보다 한발 앞섰고, 어느 순간 기어코 팔꿈치로 지르지스의 광대뼈를 강타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지르지스의 다리가 꼬였다.
그가 흔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균형을 잡는 사이, 여명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내려찍었다.
지르지스의 입 사이로 단단한 송곳니와 어금니가 후두둑 튀어나왔다.
‘끝났나?’
여명은 어른을 걱정하는 와중에도 한 번 더 주먹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마법의 주문을 외운 게 문제였던 걸까?
여명의 주먹이 마무리하기 직전, 지르지스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피해 여명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품으로 파고든 그는 곧바로 양손으로 여명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샤의 무술도 뭣도 아닌, 지구의 레슬링 자세.
여명은 반격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무릎으로 그의 낭심을 후려쳤다.
후려쳤는데…
…반응이 없었다. 비명을 지르긴커녕,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이거 설마? 의문이 이어지기 무섭게, 지르지스가 여명의 몸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내 나이쯤 되면 그런 약점은 다 극복하는 법이지!”
“그게 무슨 개소-”
다음 순간, 여명의 몸이 붕 떠올랐다. 아치형을 그린 그의 몸은 그대로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쾅!!!
그림 같은, 아니, 올림픽 메달리스트 뺨치는 완벽한 레슬링 기술.
그걸 처맞은 결과는 아찔했다. 천둥이 아니라 눈앞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성기사가 저먼 수플렉스라니. 번쩍거리는 황당함이 여명의 머리를 울리는 와중에- 지르지스는 한 번 더 여명을 들어 올렸다.
“이제 끝내도록 하지.”
그리고 그가 승리를 확신하며 여명을 바닥에 내리꽂으려는 순간.
강렬한 살기가 지르지스의 피부를 찔렀다.
마나 없인 만들 수 없는 짙은 살기.
‘이겼군.’
지르지스는 재빨리 여명을 집어던지고, 신성을 끌어 올렸다.
레독스시여.
그의 신은 곧바로 응답하셨다. 투쟁의 신께서 내려주신 신성을 따라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피부 위로 남은 상처들이 재생되었다.
지르지스는 그대로 승리를 선언하는 대신, 여명에게 다가갔다. 감히 대련 중 마나를 쓴 어린놈을 훈계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명에게 다가간 그가 신성이 담긴 주먹을 뻗는 찰나.
여명 또한 마나를 끌어 올리고 반격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와 힘이 담긴 공격이었다.
이번에 이걸 맞으면 천둥소리로 끝나지 않으리라.
그런 확신 속에서, 두 사람 손이 교차했다. 이번에는 조금 전 같은 공방은 없었다.
검술의 이치가 담긴 손날과 신의 분노가 담긴 주먹.
두부처럼 잘려 나가는 어깨와 터져 나오는 피.
박살 나는 턱과 일그러진 표정.
단 한 번의 일격을 교환한 두 사람은 동시에 주춤, 물러났다. 승자와 패자는 명확했다.
퉤- 핏물 섞인 이빨을 내뱉는 여명과 달리…
푸확-! 지르지스는 오른팔이 절단되었으니까.
대련장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본 지르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통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고환을 정통으로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건, 이어진 여명의 말 때문이었다.
“제가 이겼군요.”
“….”
“고생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은 바라나 어르신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지르지스는 잘린 팔을 주워 들며 말했다.
“무슨 개소리지? 네가 이겼다니?”
그러자 여명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가 이긴 게 아니면 뭡니까?”
“조금 전 격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련의 룰을 정확히 알아야지. 천여명, 너는 마나를 쓰면 안 된다는 룰을 어겼다.”
“….”
여명은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르지스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연기가 확실한 표정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지르지스가 뭔 개수작이냐고 묻기 전에, 여명이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 혹시 제가 뿌린 살기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뭐?”
직후, 여명은 보란 듯 몸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강렬한 살기였다.
“마나를 쓰지 말라고 했지, 살기를 뿜어내지 말라고는 안 하셨잖습니까.”
지르지스는 ‘마나 없이 저만한 살기를 쓰는 게 말이 되느냐’ 라고 말하지 못했다.
짧은 순간, 여명의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으므로.
“…주가시빌리?”
소련에서 만들어진, 살기를 수족처럼 다루는 무술.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가시빌리를 알고 계신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이 무술의 특성상, 전 딱히 마나를 쓰지 않고도 어느 정도 살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
“제가 주가시빌리를 익히고 있다는 걸 모르고, 오해하신 거겠죠. 하지만 오해라도 룰은 룰. 먼저 마나를 쓰신 건 제가 아니라 단장님이십니다.”
지르지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여명이 고의적으로 살기를 뿌려 자신을 낚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걸릴 수밖에 없는 함정이었다.
한국처럼 철저한 반공 국가의 초인이 주가시빌리를, 그것도 저렇게 능숙한 경지로 쓸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영악함과 비겁함은 한 끗 차이지. 이런 결말을 내가 인정할 것 같나?”
“단장님의 인정은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겼고, 단장님보다 계급이 높은 성기사가 없는 이상, 앞으로 그 어떤 성기사도 저와 성녀 사이를 방해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
그렇게 말한 여명은 너무 말을 심하게 했나 싶어 지르지스를 바라봤다. 그는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성녀와 바라나가 대련장으로 달려올 때쯤, 지르지스가 입을 열었다.
“…감히, 성녀님을 위해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는 거냐?”
“속임수가 아니라, 실수라니까요.”
“….”
“뭐, 아무튼, 저는 앞으로도 성녀를 위해선 실수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제 대답입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답을 들은 지르지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는 잠시 변경백과 닮은 여명의 황금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잘린 팔을 어깨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 대답, 꼭 지키길 바란다.”
어째서일까, 여명은 그 말속에서 조금 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옅은 호감을 느꼈다.
같은 시각.
한 슬라브인이 서울의 뒷골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찌나 다급한지, 그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을 겨를도 없이 계속 발을 움직였다.
고깃집 뒤편에 쌓인 소주 박스를 뛰어넘고, 일반 주택가의 가스 배관을 타고 올라 초록색 방수제에 덮인 주택 옥상을 가로지르길 한참.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따라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추적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소리 없는 총알이 그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옥상과 옥상 사이를 뛰어넘고 있던 남자는 그대로 주택 뒷골목으로 추락했다.
“커헉!”
그가 죽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그의 몸에 박힌 인공 성물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성물이라도 머리부터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상처를 곧바로 재생하진 못했고, 추격자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그를 둘러쌌다.
“디미트리.”
그게 도망자의 이름이었다. 디미트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추격자들을 바라봤다. 바로 얼마 전까진 그의 동료였던 자들을.
“왜 배신했나?”
추적자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디미트리는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나는, 배신, 한 적 없다….”
“넌 우리의 정보를 다른 조직에게 넘기려 했다. 다시 묻겠다. 왜 배신했나?”
“난… 배신하지 않았다. 원래,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을… 섬겼을 뿐.”
그러자 추적자가 흐음- 숨을 삼켰다.
“세뇌라도 당한 건가.”
“세뇌가… 아니다… 너희 또한, 우리의, 피가 붉은 이유를… 잊지 않았다면… 나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
추적자는 디미트리의 말에서 어떠한 세뇌의 기미도 느끼지 못했다. 죽어가는 KGB 요원의 성대에서 나오는 건, 진실한 신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숙련된 KGB요원답게 금세 자신의 감상을 지웠다.
그분께서는 디미트리를 배신자로 지목하셨고,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철컥.
그는 권총을 뽑아 디미트리에게 겨눴다.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재생 억제탄이 장전된 권총이었다.
“유언은?”
“부디, 우리들의 경애하는 아버지께서 너희를 용서하시길.”
“그래, 부디 그분께서 너도 용서하길.”
그렇게 추적자가 착잡한 표정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지이잉 – !
디미트리의 바로 뒤 허공이 붉게 물들더니, 공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붉은 차원문?”
놀란 추적자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수많은 총구가 일제히 차원문을 겨눴다.
정작 차원문에서는 웅웅 거리는 소음 외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지? KGB의 추적자들이 조심스레 차원문을 확인하려는 순간.
휘릭! 차원문 너머에서 촉수가 날아와 디미트리를 붙잡았다. 추적자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쏴! 살려 보내선 안 돼!”
곧바로 수많은 총구가 불을 뿜었다. 하지만 디미트리는 이미 차원문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목표물을 놓친 KGB 요원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차원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건 디미트리를 놓쳤다는 걱정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디미트리가 옳았다면?
KGB 요원은 스탈린의 실종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지독한 추위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