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02)
을 위한 세계는 없다-602화(602/817)
EP.602 어두운 진실, 화려한 거짓. (8)
올림피아 선수촌 밖, 관광객용 숙소.
“어떻습니까?”
짐을 푼 파롤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두서없는 질문이었지만, 지르지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천여명?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그는 보란 듯 팔을 들어 보였다. 깔끔하게 절단됐다가 다시 붙인 팔에는 아직도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싸웠다면 10강이라고 해도 믿었을걸.”
“오, 그 정도였습니까?”
“그래, 그 정도였어. 나이를 속인 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실력이지. 대체 어떤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온 건지 궁금할 정도야… 그 시절 변경백처럼 마왕을 잡은 것도 아닐 텐데.”
거기까지 말한 지르지스는 허공을, 아니, 먼 과거를 바라봤다.
그렇게 늙은이가 추억 속으로 빠지기 전에, 파롤이 그를 현실로 다시 불러냈다.
“그 말대로라면 진정 신의 사랑을 받는 청년이로군요.”
“…신께선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예, 하지만 조금 더 사랑받는 자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 부모님도 저희 삼 형제를 모두 사랑하긴 했지만, 재산은 동생에게 전부 물려주셨습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지르지스의 반응을 끌어내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왜냐면…
“…동생? 지구인이랑 결혼하겠다며 차원문을 넘은 그놈?”
파롤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 그놈이요. 그놈이 낳은 조카가 미국에서 정치인이 됐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뭐, 어쨌거나 제가 여쭤본 건 천여명의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뭐?”
“글쎄, 사람 그 자체요? 간단하게는 됨됨이, 인간성… 멀게는 성녀님의 배필로 어울리느냐,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러자 지르지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난 그 녀석과 만난 지 반나절밖에 안 됐다만.”
“예, 근데 잘도 칼부림을 하셨군요.”
“….”
나잇값 못 하고 잘하는 짓이다- 지르지스는 그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 입을 꾹 다물었다.
파롤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주먹은 종종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알게 해주더군요. 단장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지르지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여명과의 싸움을 복기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파롤이 차를 따라올 때쯤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변경백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외모는 닮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가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그러자 지르지스가 질색했다.
“그거야 금색 눈깔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고. 가족은 무슨 가족이야? 고자가 이제와서 아이를 가졌을 리도 없는데,”
“….”
“아무튼, 난 그리 나쁘지 않았… 그 표정은 또 뭐야?”
지르지스는 반월을 그리는 파롤의 입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파롤이 대답했다.
“아니, 설마 호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련이 끝난 뒤에 말 한마디 안 나누셨잖습니까.”
“그야… 주먹은 때때로 백 마디 말보다 많은 걸 알려주니까.”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로 반박하는 단장. 파롤은 조금 전에 따라온 차를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 겁니까?”
사실, 파롤은 천여명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바라나는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종말 교단은 어쩌다 만난 건지, 그리고… 주가시빌리는 또 어떻게 익힌 건지.
하지만 정작 질문의 주체인 단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호위 대상을 추가해달라는 바라나의 가당찮은 부탁을 들은 직후, 곧장 선수촌을 떠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아는 지르지스 단장은 성녀님 곁에 저런 것(?)들을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이어진 지르지스의 말은 그를 놀라게 했다.
“천여명도 안 물어봤다.”
“…흐음?”
“왜 내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성도의 뜻은 어떤지, 성물지기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말끝을 흐린 지르지스는 단번에 차를 들이켰다. 뜨거울 만도 하건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탁! 찻잔을 상 위에 내려놨다.
“그래서 나도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
파롤은 차를 홀짝이며 단장의 말을 곱씹었다.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단장은 지금 천여명과 자신을 대등한 존재로 보고 있었다.
늙은 성기사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주먹질하는 동안 무슨 교감을 나눴길래 이렇게나 호평이란 말인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찻잔을 따라 의문이 이어지고, 따스해지는 위장을 따라 잡념이 쌓이길 잠시.
딱히 답을 찾지 못한 파롤은 괜히 심술궂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웃는 게, 전대 성녀님과 좀 닮지 않았습니까?”
“…뭐?”
전대 성녀님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지르지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가 아는 단장다운 반응이었다.
파롤은 만족감을 느끼며 말했다.
“거, 눈웃음이 묘하게….”
“안 닮았으니까, 닥쳐.”
올림피아 선수촌의 한 개인 웨이트 트레이닝실.
흑인 소년 한 명이 무지막지한 원판을 단 역기를 짊어진 채 운동하고 있었다.
끼익- 끼익-
역기에 달린 원판이 어찌나 무거운지,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봉이 비명을 지를 정도.
자칫하면 역기 봉이 두 동강 나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역기가 초인 전용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역기라서? 아니, 불청객이 소년의 트레이닝실을 찾아왔으므로.
“웨슬리.”
흑인 소년, 웨슬리는 역기를 내려놓고 불청객을 바라봤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중년인이 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미소였다.
“아침부터 그렇게 몸을 혹사해도 되는 건가? 오늘이 경기 날인데.”
웨슬리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대답했다.
“혹사는 일반인들 이야기고, 이게 내 경기 전 루틴입니다. 뭐, 아무튼… 뉘슈?”
“누구인 것 같나?”
“처맞을 걱정 없이 아가리를 터는 걸 보면 미국인이실 테고, 코치를 거치지 않고 내 트레이닝실에 멋대로 들어올 수 있는 걸 보면 높은 곳에서 오신 분이겠지.”
“….”
“거, 잘나신 분인 거 알겠으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할 말부터 꺼냅시다.”
그러자 양복쟁이는 대뜸 서류 가방을 열었다. 달깍- 작은 잠금장치가 풀리며 안에서 드러난 건…
작은 물약이었다. 그것도 불길한 붉은 빛을 머금은 물약.
웨슬리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영양제는 아닐 테고. 뭡니까, 씨발?”
“선택권을 주려는 걸세.”
“선택권?”
“자네 오늘 경기 상대가 천여명의 처제였지? 박네티. 최근 엄청나게 빠르게 강해졌더군.”
“…그래서? 내가 걔한테 질 거 같으니 약 처먹으라 이거요?”
“아니, 자네 실력을 생각하면 그녀는 당연히 이기겠지. 하지만 그다음에 만나는 상대는 어떤가?”
다음 상대… 웨슬리는 곧장 다음 상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올림피아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학생은 그를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천여명.
웨슬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양복쟁이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가 처제를 떨어트린 자네를 가만히 두겠는가?”
가만히 둘 거 같은데. 웨슬리는 대답을 삼키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래서, 그걸 빨아라?”
“도핑 검사에서 걸릴 일 없는, 완벽한 보조제일세. 물론, 기능만큼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중화제를 투여하면 금세 사라질 부작용이지.”
“….”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겠지만, 효과만 들어보면 전장에서 초인들이 마시는 군용 도핑 물약의 상위호환이었다.
‘단순한 장난이나 약팔이는 아니란 소리인데….’
웨슬리는 잠시 물약을 바라보다가, 다시 남자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품에서 작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그곳에는 ‘FBI’라 적힌 신분증이 떡 하니 박혀있었다.
“국외 업무는 CIA 소관 아닙니까?”
“이건 국내 업무일세.”
“….”
웨슬리는 엿같은 일에 엮였다는 걸 확신했다. 그는 애꿎은 수건으로 머리를 박박 긁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이렇게 물었다.
“그거, 나 말고 다른 놈들한테도 제안했습니까?”
“다른 놈들?”
“거, 데릭이나 믹처럼 먼저 천여명과 싸웠던 놈들 말입니다.”
“그 사실이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하죠. 그놈들은 안 빨았는데, 나만 빨면 쪽팔리니까.”
그의 말이 우스웠던 걸까, FBI 요원의 미소가 삐딱하게 일그러졌다.
“고작 그런 감정 때문에 패배하겠단 건가?”
“패배라니. 거, 내가 그거 안 빨고도 천여명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
FBI 요원은 대답이 아닌 묘한 침묵으로 화답했다. 웨슬리는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푹 한숨을 쉬었다.
“후… 농담은 됐고, 내가 그걸 마시길 원한다면, 군의 명령서를 가져와야 할 겁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군이 미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에 정식 명령서를 만들 리 없으니까.
FBI 요원도 그걸 눈치챘는지, 군말 없이 탁! 가방을 닫았다.
“…시간은 아직 남아 있으니, 이건 두고 가지. 코치에게 말해둘 테니, 원하면 언제든 가져가게.”
좆이나 까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웨슬리는 트레이닝실을 나선 요원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역기를 잡았다.
몇 시간 뒤, 올림피아 경기장 내부 대기실.
[곧 경기가 시작되오니 관객 여러분은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곧 경기가 시작되오니 관객 여러분은….]바깥에서 울리는 안내 방송을 듣던 웨슬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묘하게 몸이 찌푸듯했다.
아침에 루틴이 깨진 탓인지, 아니면 그냥 엿 같아서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이 어느 쪽이건 간에, 경기 직전 컨디션을 망친 건 확실했다. 좆같은 FBI 때문에 이게 뭐야.
욕지거리를 삼킨 웨슬리는 애꿎은 대기실 문을 노려봤다.
그리고 얼마나 문을 노려봤을까, 이제 슬슬 경기장으로 가려는 그때.
끼익- 문이 열리며 트레이닝복을 입은 흑인 중년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웨슬리가 말했다.
“코치,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아니, 아직 몇 분 남았다. 조금 더 쉬어.”
코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웨슬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뒤, 조심스레 그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본 코치의 표정에는 조그마한 걱정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코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웨슬리였다.
“코치, 오늘 누구한테 돈 걸었어요?”
“코치가 돈 거는 건 불법… 씁,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당연히 너한테 걸었으니까.”
“그러면… 오늘 제가 이기고, 다음에 천여명이랑 저랑 싸우면 누구한테 걸 겁니까?”
“당연히 천여명한테 걸겠지.”
“….”
웨슬리는 빈말도 못 해주나- 라는 뜻이 담긴 눈으로 코치를 바라봤다.
코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 좀 해줘라. 나도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몸인데.”
“…이혼하셨잖아요.”
“이혼해도 양육비 꼬박꼬박 보내야 해, 안 그러면 감옥 가거든. 몰랐냐?”
“….”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 웨슬리는 코치가 왜 이런 말까지 꺼내가며 분위기를 풀려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말을 꺼냈다.
“아침에 온 사람, 누군지 아시죠?”
“대충은.”
“그 사람이 준 물약, 아직도 가지고 있으시죠?”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그거 안 먹이면 영원히 실업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못 버렸다.”
“…먹이면 뭐 준다는 말은 안 했고요?”
“안 했다.”
“진짜 좆 같은 새끼네.”
웨슬리가 픽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코치 또한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천만 달러쯤 준다고 했으면 바로 먹였을 텐데.”
“…천만 달러? 저하고 반반으로 나누는 거죠?”
“뭐? 그건 안 되지. 재산 반띵은 이혼이면 충분해.”
킥. 웨슬리는 웃었다. 코치도 웃었다. 영혼 없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음 경기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안내 방송이 둘의 웃음을 끊었다. 웨슬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무섭게, 코치가 말했다.
“오늘 지면 안 먹어도 된다.”
웨슬리는 코치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일부러 지나, 경기 전에 약 먹으나, 그게 그거죠.”
“…웨슬리.”
“뭐, 전력으로 부딪혀 보고 안 되면 그때 생각해 보자고요.”
그렇게 말한 웨슬리는 코치와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관계자와 기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웨슬리는 후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번쩍이는 카메라 셔터, 의미심장한 관계자의 눈빛, 마나가 흐르는 혈관.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그를 압박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걸음 내내 승리와 패배를 향한 압박이 끝없이 달라붙었다.
[올림피아 본선…! 로드 하우 아카… 한국의, 박네티… 상대는… 같은 로드 하우 아카데미…! 미국의…!]이윽고, 해설가의 목소리가 울리는 경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 복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수한 눈빛이 그와 상대에게 꽂힌다.
긴장 때문인지 목덜미가 뻐근했다. 웨슬리는 목을 스트레칭하며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오늘 지면 안 먹어도 된다.
경기장에 올라서자마자, 조금 전 코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씨발. 경기 조졌네.
웨슬리는 주먹을 꽉 쥐며 생각했다. 상대를 향한 투쟁심을 품어야 할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마음이 흔들린다는 증거였으므로.
와아아아아 – !!!!
다음 순간, 상대가 경기장으로 올라온다. 고향의 어마어마한 환호와 함께.
박네티. 자신의 머리색과 똑같은 하늘색 전투용 장갑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는 웨슬리를 똑바로 노려봤다.
마치,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듯이.
멋진 눈빛이었다. 잡념을 모조리 씻어낼 만큼 멋진 눈빛. 웨슬리는 씨익 웃으며 똑같이 그녀를 노려봤다.
해설의 요란한 목소리와 동시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박네티를 보며 생각했다.
‘재밌는 승부가 되겠네.’
안타깝게도, 그의 예상은 틀렸다.
독재자가 되면서 자신의 성씨를 버린 남자가 있었다.
냉전이 정점에 달하던 시절, 그는 어째서인지 버린 자신의 성씨를 한 무술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주가시빌리.
한 시대를 악몽으로 물들인 그 무술의 시작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그 무술을 마주한 사람은 대부분 죽었고, 살아남은 극소수의 증언 또한 기밀로 치부되었으니까.
그러나 성씨를 버린 독재자도, 그 독재자가 지배하던 국가도 몰락한 현대에 이르러, 몇몇 정보들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광전사와도 같은 살기, 그리고 그 살기를 구체화하는 붉은 아지랑이였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기밀들이 늘 그러하듯, 대중들에게 공개된 정보는 약간의 편견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주가시빌리들이 붉은 아지랑이를 피워낼 거란 편견이 대표적이었다.
그만큼 눈에 확 띄는 특징이기에 그렇게 알려졌지만, 정작 아지랑이를 풍길 수 있는 주가시빌리는 소련이 세계의 정점을 찍던 시절에도 많지 않았다.
그보다 흔한, 그러니까 우리가 평균이라 부를 수 있는 주가시빌리의 증상은 훨씬 간단했다.
충동 장애, 공격성 증가 등을 비롯한 정신 문제들.
그건 청소부가 아카데미 교장 앞에서 선배의 팔을 자르게 하고, 성녀의 엉덩이를 때리게 할 정도로 무서운 증상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명에게서 주가시빌리를 익힌 네티 또한 비슷한 충동을 느꼈다.
아니, 어떤 면에서 그녀의 충동은 더 질이 나빴다.
아카데미란 든든한 울타리 속에서 몰래몰래 살기를 키워나간 여명과 달리,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올림피아 경기장에서 자신의 충동을 조절해야 했으므로.
물론, 네티와 일행들 또한 그 사실을 염두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명은 아예 기권하라고 조언했지만, 세티는 아무 이유도 없이 막무가내로 기권하는 건 의심을 살 수 있다며 반대했다.
결국, 일행은 네티가 경기 중에 기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그녀의 상대는 로드 하우에서도 강자로 분류되는 웨슬리였다.
네티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기권할 수 있겠다며 안도했다.
하지만 어떤 복싱 선수의 말마따나, 그럴싸한 계획은 처맞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웨슬리의 주먹을 맞은 순간, 네티는 곧바로 이성의 끈을 놔버렸다.
그녀는 웨슬리를 미친 듯 몰아쳤다. 그녀에게 별 기대가 없던 한국인들조차 감탄할 정도로 강렬하게.
[오오! 네티 선수! 반격! 반격합니다!]노골적으로 희생양 자매를 무시하던 해설자가 소리를 내지를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나마 다행인 건, 네티가 모든 힘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이 남아있었다는 점, 그리고 웨슬리가 나름 상위권 강자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둘의 싸움은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네티의 살기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네티의 살기는 임계점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네티의 주가시빌리가 들키거나, 네티의 손에 웨슬리가 죽거나, 혹은 둘 다 이뤄지는 미래밖에 없었다.
결국, 여명은 결단을 내렸다.
[응? 기권? 기권이라고? 아니, 이렇게 팽팽한 싸움을 왜?]해설자와 구경꾼들이 황당해하건 말건, 여명은 기권 선언이 내려지자마자 경기장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심판들보다 먼저, 날뛰는 네티에게 다가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곧 여명이 남들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살기를 흡수하자, 네티는 기절하듯 쓰러졌다.
멋진 승부를 기대하던 웨슬리로서는 허무한 최후였다. 관객들의 환호도, 해설자의 승리 선언도 없는 허무한 승리.
하지만 웨슬리는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네티가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해서? 아니면 기권이 나오자마자 픽 쓰러져서?
아니, 모든 게 합쳐진 사소한 오해 때문에.
“…윗놈들은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란 말이지. 안 그러냐?”
“뭐?”
“모른 척할 필요 없어 인마. 나도 비슷한 일을 당하는 중이니까.”
여명은 몰래 기절시킨 네티를 챙기며 그를 올려다봤다. 웨슬리는 그 눈빛마저도 오해했다.
“국제 경기고 뭐고, 고작 애들 싸움인데… 이게 뭔 좆같은 꼴인지. 야, 걔 잘 챙겨줘라. 깨어나면 잘 싸웠다고 전해주고.”
“….”
“다음 경기에서 보자. 정정당당하게.”
그렇게 웨슬리는 등을 돌려 경기장에서 내려갔다. 당황한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명은 네티를 안고 링 아래로 내려갔다.
몇십 분 뒤, 올림피아 경기장 내부 선수용 휴게실.
텅 빈 침대에 네티를 눕힌 여명은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경기장의 소란스러움은 금세 사라졌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살로메의 경기가 시작된 덕분이었다.
눈요기만 따지면 초인의 섬세함과 신성의 고결함도 마법의 화려함에는 이길 수 없다나 뭐라나.
아무튼, 네티의 기권은 의외로 큰 파장을 남기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강한 실력을 보여주다가 픽 쓰러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도핑’의 후유증으로 보였으니까.
주최 측인 한국은 굳이 도핑 문제를 밝힐 필요가 없었다.
조웅찬 장관이 막내에게 연락해 ‘너희 병신 자매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며 노발대발하고, 세티가 모낙랑에게 호출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상대편인 미국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들은 도핑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승자의 아량일 테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미국도 남몰래 도핑하고 있다거나, 뭐 그런 것이리라.
정답이 어느 쪽이건, 여명은 네티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다행이야.”
여명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제를 보며 중얼거렸다. 진심이었다. 그의 가슴 한켠에는 아직도 남산에서 그녀를 잃을 뻔한 충격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이번에도 그는 처제를 지켜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짧은 다짐, 그보다 더 짧은 안도감.
잠시 네티를 바라보던 여명이 물수건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뭔가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형부….”
드디어 깨어났나. 여명은 놀란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제, 괜찮아? 몸은 어때?”
“몸은, 괜찮은데… 요.”
말끝을 흐리는 네티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 주가시빌리의 살기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기다려, 금방 편해질 거야.”
여명은 한 번 더 그녀의 살기를 흡수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살기는 끝이 없었다. 작은 옹달샘 구멍에서 졸졸 물이 흐르듯, 적지만 끝없이 살기가 흘러나왔다.
“처제?”
왜 이러지? 주가시빌리의 중간 과정을 전부 넘겨버렸던 여명은 그저 부작용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네티의 부작용은 그 이상이었다.
“혀, 형부….”
“응, 그래,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아, 안 괜찮아요.”
“어디가 문제야? 몸에 통증이 있어? 아니면 감정 조절이 힘들어?”
“후자요….”
살기 조절이 안 되는 건가. 여명은 괜찮다는 듯 살기를 흡수하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뻗은 순간, 네티가 몸을 일으켜 와락, 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형부, 저, 저… 못 참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