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1)
을 위한 세계는 없다-61화(61/817)
〈 61화 〉 복수는 복수를 원하는 자에게… (5)
* * *
***
별빛이 날개를 베고 지나가는 순간, 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땅으로 추락하는 공포 때문에? 아니, 아니다. 그러면 흉터를 쑤시는 고통 때문에? 그 또한 아니었다.
자괴감. 그래, 자괴감 때문이었다. 땅으로 추락하는 감각은 오르세 타불로 하여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상기시켰다.
수십 년 전, 그는 고결한 왕을 태우고 호기롭게 소련의 방공망으로 돌진했었다.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려 평화를 되찾았다는, 옛 전설을 재현하려는 한심한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었으나, 고결한 왕은 그와 함께 개성 차원문을 넘었다.
낙후된 한국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모스크바로 향하는 동안, 용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공포는 그의 비늘을 뚫지 못했고, MIG라 불리는 전투기들을 그의 브레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옛 용사가 그러했듯, 지구인들이 크렘린이라 부르는 마왕성을 불태우고, 스탈린이란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련의 방공망은 중국이나 한국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지구를 양분하는 강대국에게 용 한 마리는 최신예 무기와 새로운 방공망을 실험하기 위한 과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음속으로 날아다니는 전투기들과 하늘을 메우는 대공미사일.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뿐이었다.
강대한 용의 마법도, 왕의 마도구도 빗발치는 포화를 전부 막아낼 수 없었다.
오르세 타불과 왕은 모스크바의 하늘을 보지도 못한 채, 미사일에 직격당했다.
끔찍한 파편 탄두가 보호막을 박살 냈고, 폭약의 화염이 그의 오른 날개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날개를 잃은 용과 고결한 왕은 그대로…
추락했다.
쿠우웅!!
거대한 몸체가 떨어지자, 계곡 전체가 흔들렸다.
잿가루가 흩날리는 바닥에 추락한 용의척추를 타고 찌르르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그는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 뒤편을 보호했다.
[안 돼! 다시는 그럴 순 없다!!]본래라면 왕이 타고 있었을 자리.
지켜야 할 왕은 이미 무덤 속에 있건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머나먼 과거에 있었다.
용은 발작적으로 마법을 쏟아냈다.
전투기와 미사일이 다가올 수 없도록 불의 장벽을 펼치고, 그 아래로 보호막을 겹쳤다.
머릿속으로 수백 번은 반복한 방어.
미사일을 막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적은 소련군도, 전투기도 아니었다.
불의 장벽을 맨몸으로 통과할 수 있는 초인.
탁.
용의 날개를 잘라낸 녀석은 절벽에서 뛰어내린 뒤, 보호막 위로 착지했다.
마나와 축복을 가득 머금은 발걸음이 보호막 위를 내달리는 게 느껴졌다. 목표는 용의 머리와 목.
날개를 잘라낸 검기를 떠올린 용은 즉시 보호막을 해제하고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육체가 움직이자마자, 계곡 전체가 흔들렸다.
세로로 갈라진 용의 동공으로, 땅에 착지하는 여명이 비췄다. 그 직후, 용의 입가로 열기가 고였다.
콰아아!!
아까보다 훨씬 약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쏘아진 브레스. 붉은 화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계곡을 덮쳤다.
다음 순간, 여명은 양손을 동시에 휘둘렀다.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번쩍이고, 새파란 검광이 일직선으로 날아가 브레스와 충돌했다.
화아아악 !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일대의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가늘게 뜬 용의 눈동자가 충격파에 맞서고 있는 여명을 노려봤다.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신의 축복, 지구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검기.
믿기 어려웠지만, 눈앞에 있는 모든 증거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신께서… 내 복수를 부정하시는군. 다른 누구도 아닌, 지구인의 손으로.]여명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서, 자세를 다잡는 용을 응시했다.
[하찮은 벌레, 도둑놈,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은 지구인아.]용의 앞으로 마나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주문이 동시에 엮이며 불타는 계곡을 빽빽하게 채웠다.
[네놈도 나의 복수를 부정하느냐?]딱히 대답을 바라는 질문은 아니었다. 자기합리화를 위한, 그런 뻔하디뻔한 질문.
하지만 여명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용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내가 생각하기엔…당신의 복수는 정당하다.”
[…뭐라?]여명은 마법에 맞서 검을 들었다. 혜성검의 비전유물과 달리, 용병단의 철검은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양손으로 혜성검을 쓸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두 번 정도인가.
여명이 남은 수를 헤아리는 사이, 용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막는 것이냐?]“대상이 틀려먹었으니까.”
[…]“만약 당신이 모스크바로 날아갔다면, 난 구경만 했을 거야. 살아남은 소련인들을 죽이겠다고 난리 쳤다면, 응원이라도 했겠지.”
기이한 표정을 짓는 용의 뒤통수로, 파순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작전대로였다. 아직까지는.
여명은 마나를 끌어 올리고, 마지막으로 용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애꿎은 사람까지 쓸어버리는 건… 동의할 수 없어. 그뿐이야.”
[…그런가, 그뿐인가.]그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용은 손을 휘둘러 준비한 마법을 쏟아냈다.
온갖 화염이 여명의 머리 위를 덮치는 그 순간.
파순과 성녀, 그리고 용병들이 일제히 용의 뒤를 노렸다.
***
화르륵!!
불벼락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살이 타는 고통까진 어쩔 수 없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명을 삼키면서, 여명은 계속 달렸다.
이곳에서 용의 비늘을 갈라, 용을 쓰러트릴 수 있는 건 그가 유일했으므로.
들숨에 고통을 삼키고, 날숨에 마나를 폭발시켰다. 불타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그와 용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고오오
용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려 여명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파순이 떨어져 용의 콧등을 후려쳤다.
“이제 좀 뒤져라!”
가속도가 더해진 주먹이 용의 입을 강제로 다물게 했다. 용의 이빨 사이로 미처 완성되지 못한 브레스가 흘러나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파순은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용의 머리를 후려쳤다. 여명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무술이 연달아 펼쳐지며 용의 정신을 빼앗았다.
용이라고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몸을 휘청거리던 용은 조금 전처럼 약한 브레스를 뿜어냈다.
콰아아!
갑작스러운 불길에 파순이 균형을 잃었다. 하필이면 코를 후려치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 직후, 두꺼운 용의 꼬리가 파리를 쫓아내듯 파순을 후려쳤다.
“컥!”
녀석은 그대로 계곡 너머로 날아갔다. 마나를 보아 죽지는 않았겠지만, 당장 싸움에 복귀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용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날아가는 파순을 확인하지도 않고 여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번 브레스가 모인다. 검기의 사거리까지 접근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쩍 벌어진 용의 입이 보였지만, 여명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도 도와줄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탕!
축복을 받아 빛나는 총알이 용의 입을 노렸다. 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브레스를 끌어올렸지만, 뒤이어 이어진 공격까지 무시하진 못했다.
두두두두두!!!
성녀의 그것보다는 부족했지만, 축복을 받아 빛나는 총알들이 우수수 용의 머리를 향해 쏟아졌다.
눈을 노린 총알이 쏟아지자, 용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는 총알이 쏟아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반대편 절벽 위, 권 단장을 비롯한 선죽 용병단원들이 축복받은 소총을 쏟아내고 있었다.
“쏴! 눈을 노리고 쏘라고! 브레스를 막아!”
김만수 부단장은 그렇게 소리치며 손도끼를 집어던졌다. 축복을 받아 반짝이는 손도끼는 그대로 날아가 용의 비늘을 꿰뚫고 코에 쑤셔박혔다.
크아아악!
결국, 용은 참지 못하고 브레스를 거둬들였다.
여명을 향해 쏟아지던 화염 마법들이 방향을 바꿔 용병들에게 향했으나, 권 단장이 손에서 불꽃을 내뿜어 마법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사이, 여명은 검기 사거리까지 용에게 접근했다. 용도 그것을 확인하고 후읍, 숨을 들이쉬었다.
둘의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여명의 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용의 오른 다리가 길게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뒤이어 붉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비늘들이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거대한 용조차 고통을 느낄 상처였으나, 치명상은 되지 못했다. 그저 용의 한쪽 무릎을 꿇게 하는 게 전부였다.
[그깟 검으로 용을 죽이고 싶다면, 성검이라도 가져와라!!]용은 고통을 분노로 바꿔 앞발을 휘둘렀다. 여명은 깃걸음을 펼쳐 녀석의 팔을 요리조리 피하며, 다음 혜성검을 준비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검을.
쿵, 쿵, 쿵!
용은 앞발로도 모자라 꼬리를 휘두르고, 멀쩡한 왼쪽 날개를 퍼덕였다.
뼈만 남아있던 카할 마그두와 달리, 육중한 질량 그 자체를 무기로 이용하는 공격.
땅이 흔들렸다. 용의 거대한 육체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휘몰아쳤고, 산불에 달아오른 공기가 쉴새 없이 폐를 덥혔다.
‘아직, 아직이야.’
여명은 용의 공격을 계속 피하며 최선의 순간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혈류가속으로 증폭된 피와 마나가 뇌를 자극하고, 넘쳐흐르는 아드레날린이 정신을 또렷하게 붙잡았다.
곧이어, 가속된 생각들과 냉철한 이성이 하나의 검로를 만들어냈다.
…후우.
여명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태껏 아껴뒀던 마나를 아낌없이 검에 퍼부었다.
번쩍!
검에서 별빛이 터져 나왔다. 프레아 칸을 호주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던 바로 그 혜성검.
심혈을 기울인 일격이었으나, 그 검기를 마주한 용은 승리를 확신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저 검기는 자신을 죽이지 못할 테니까.
혜성검의 검기는 용의 가슴이나 목이 아닌, 왼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거대한 육체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지만, 이 또한 치명상은 아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검기를 쓴다면 모르겠으나…
[안타깝구나!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놓치다니!]여명의 철검은 스스로 쏘아낸 검기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여전히 푸른 단검이 남아있었지만, 단검 하나로 펼치는 검기가 조금 전 검기와 같을까?
[나의 승리다. 지구인이여.]붉은 용, 오르세 타불은 땅을 짚으며 승리를 선언했다. 날개는 잘렸고, 양다리로 걸을 수도 없었지만, 상대는 모든 수를 다 쓰고도 자신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이제 미사일이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용의 비늘을 뚫는 건 불가능…
[…포기를 모르는군.]여명은 부러진 검을 집어던지고, 오르세 타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용은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자세를 높이 샀다.
그러니까, 여명에게 온갖 마법을 퍼부었다는 뜻이었다.
화르륵!!
불벼락이 몸을 불태웠다. 화염구가 팔을 날리고, 화염의 창이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래도 여명은 멈추지 않았다. 악착같이 상처를 재생하며 용에게 접근했다.
설마, 가까운 거리에서 반쪽짜리 검기를 뿜어내려는 건가? 안타까울 정도로 처절한 발악이었다.
[무의미한 짓을.]용의 입가로 어마어마한 열기가 모여들었다. 그의 마지막 적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담은 브레스.
그렇게 용의 입이 쩍 벌어진 순간.
절벽 위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여명을 향해 날아왔다.
“여명! 받아!”
래밍턴 MH750. 장만이 여명을 위해 준비한 그 총은 신의 축복을 머금은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끝내버려!”
성녀의 외침이 계곡을 울리고, 여명은 총을 붙잡았다.
그리고 지체 없이, 발사.
터엉!!
브레스가 발사되기 직전, 간발의 차로 발사된 산탄이 용의 입 안을 강타했다.
단순한 쇠 구슬이 아니었다. 특수한 마법 처리된 탄환 위로, 온갖 축복이 걸린 특제탄.
[크아아아!!]입속 점막이 그대로 찢어진 용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브레스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흔들리는 용의 콧등 위로, 여명이 뛰어올랐다.
용은 필사적으로 여명을 떨쳐내려 했다. 고개를 흔들고,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빨리, 여명의 샷건이 불을 뿜었다.
터엉! 터엉!!
산탄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용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날개와 다리, 그리고 눈을 잃은 용의 비명이 계곡을 가득 울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