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13)
을 위한 세계는 없다-613화(613/817)
EP.613 Out of Sight, Out of Mind (3)
여명이 문을 연 순간.
화려한 빛이 그의 등 뒤에 있던 소녀들의 시야를 집어삼켰다. 세티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적, 청, 녹, 백의 색채를 피해 눈을 가렸다.
색채의 난무는 길지 않았다. 다시 어둠이 찾아온 걸 느낀 세티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경악했다.
여명이 연 방문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건지, 흉물스레 으깨진 벽과 문의 파편들이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이, 이게 시발 뭔 일이야?”
경악한 구더기 공주가 중얼거렸다. 설마 여명이 죽은 건가?
“니 남친한테 무슨 짓이 일어난….”
구더기 공주가 세티를 부르려는 찰나, 그녀는 성녀와 세티가 놀란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곧,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구더기 공주는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던 복도의 저편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었으니까.
어둠 사이로 잡초처럼 무수한 새싹들이 피어오르고, 자라며 단단한 나무 몸통이 되더니, 그 위로 꽃이 피었다.
마치 작은 나무의 성장을 몇만 배 압축한 것 같은 모습.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만큼이나, 나무는 특별한 모습으로 자라났다.
가지와 몸통들은 마치 사람의 뼈처럼 휘어지고, 돋아났다. 뒤늦게 자라난 녹색의 나뭇잎과 줄기들은 마치 피부처럼 그 사이를 채웠다.
마지막으로, 형형색색의 꽃과 열매가 마치 드레스처럼 기다랗게 피어나 나뭇잎 피부를 덮었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꽃을 입은 나무 인간? 아니면 식물 인간?
어느 쪽이건 간에,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구더기 공주는 허리춤에 걸고 있던 독액 포션을 뽑아 들고, 그대로 집어던졌다.
“잠ㄲ-!”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녀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전력으로 던진 병이 조금 더 빨랐다.
휘리릭-!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포션병은 그대로 허공에서 폭발했다. 라쉬크 특제 독액은 그대로 나무 인간을…
…덮치지 못했다. 나무 인간이 손을 뻗자마자, 넓게 퍼진 용액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춰버렸으니까.
마치, 영상을 일시 정지한 것 같은 모습.
“…???”
뭐야 시발 저게? 라쉬크가 눈을 크게 뜨는 가운데, 나무 인간이 손가락으로 푹- 용액을 찔렀다.
『강알칼리 용액에 불호박 꽃 암술, 화방화, 해 부리미 뿌리, 소금, 그리고… 세계수의 싹? 이 비싼 건 왜 넣었느냐?』
순식간에 용액의 정체를 파악한 나무 인간은 빤히 라쉬크를 바라보았다. 라쉬크는 당황과 황당 사이 어딘가에서 대답했다.
“어, 그게… 새로운 효과가 생기지 않을까 궁금해서….”
『그냥 비싼 재료 생긴 김에 여기저기 넣어본 건 아니고? 연금술사들은 곧잘 그러지 않느냐?』
낭비와 사치로 스트레스를 풀지. 나무 인간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 그래도 엄청 조금 넣었는데요.”
『그래, 조금이긴 하지. 하지만 너의 돈으로 샀으면 넣지 않았을 것 아니냐?』
“….”
라쉬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괜스레 억울해진 그녀가 댁은 누구시길래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고 소리치려는 찰나.
성녀가 앞서서 고개를 숙였다.
“녹색의 이사기녹이시여, 당신의 꽃이 찬미하옵니다. 생명과 사랑을 찬양하라.”
뭐 시발? 무슨 신? 라쉬크가 놀라 뒷걸음질 치건 말건, 나무 인간은 하얀 꽃으로 장식된 드레스를 펄럭이며 말했다.
『그래, 귀엽디귀여운 우리의 딸. 이리 보게 되어 나도 반갑구나. 그리고… 검은 양?』
신과 마주한 세티는 담담하게 허리를 숙였다.
“검은 양이 녹색 신을 뵙습니다. 생명과 사랑을 찬양하라.”
그렇게 세티까지 허리를 숙이자, 라쉬크 또한 은근슬쩍 고개를 숙였다.
“여, 연지벌레의 주인 라쉬크가 녹색 신을 뵙습니다. 생명과, 그, 뭐시냐, 사랑을 찬양하라.”
『감히 인공 생명체를 만들겠다는 연금술사의 찬양이라. 오랜만에 재밌는 경험을 하는구나.』
호문쿨루스를 제작하려는 꿈을 지적당한 라쉬크는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가 어버버 몸을 떨자, 녹색 신은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휘리릭-! 허공에 떠 있던 산성 용액들이 다시 병으로 되돌아갔다. 병 또한 그대로 라쉬크의 허리춤으로 돌아갔다.
마치 시간을 뒤로 돌린 듯한 모습이었으나, 녹색 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려무나. 어떻게 태어난다 해도 생명은 생명. 네 창조의 책임을 진다면,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하지만 앞선 연금술사들처럼 책임을 회피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라쉬크는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 신은 얼굴에 고인 잎사귀가 마치 웃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녀가 물었다.
“녹색 신이시여, 갑자기 무슨 일로 나오셨나이까?”
『이곳은 세상에서 몇 없는, 너와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이란다. 네가 이곳에 있는데, 내가 어찌 뒤에 있겠느냐?』
그렇게 말한 녹색 신은 성큼, 성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꽈악, 끌어안았다.
『귀엽디귀여운 우리의 딸. 네가 잔혹한 운명에서 벗어나다니.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단다.』
“헤헤.”
성녀 또한 녹색 신을 마주 안았다. 신성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두 사람의 포옹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윽고, 포옹이 끝난 직후.
녹색 신은 나뭇잎과 풀들로 이루어진 얼굴을 돌려 세티를 바라봤다.
『검은 양. 홍세티.』
“….”
『너 자신은 모르겠지만, 이번 시간의 너에겐 정말이지 큰 은혜를 입었다. 정말 고맙구나.』
녹색 신은 세티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의 애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이렇게 나온 건 우리의 딸을 만나려는 의도도 있지만, 너에게 고마움의 선물을 주려는 의도도 있단다.』
“…선물이요?”
녹색 신은 대답 대신 사람으로 치면 가슴쯤 되는 풀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잠시 이어진 뒤, 녹색 신은 가슴팍에서 주사위를 꺼내 들었다. 드문드문 모래가 묻어 있는, 청금석 주사위였다.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비록 우리의 주사위는 이미 써버렸지만, 다른 자의 주사위를 굴리는 건 가능하단다.』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여명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녹색 신께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흑색과 만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여명은 무사하단 말.
세티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소원을 빌진 않았다. 그녀는 입을 막고 뭔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잠시 후, 세티는 입을 열었다.
“힘… 저는 여명에게 짐이 되지 않을 힘을 원합니다.”
그러자 녹색 신의 얼굴 속에 있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났다. 사람으로 치면 흐뭇한 미소에 가까운 변화였다.
『이번 시간의 너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구나. 아, 사랑이란 어찌나 멋진 일인지!』
즐겁게 웃은 녹색 신은 그대로 주사위를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청금석 주사위는 느긋하게, 혹은 여유롭게 바닥을 굴렀다.
데구르르- 탁! 바닥을 구른 청금석 주사위의 눈은 4이었다.
좋은 숫자인가? 세티가 슬쩍 신을 바라보자, 녹색 신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성공은 성공인데… 흠, 이상하구나. 이건… 아, 그런 건가. 지금 너는…』
그때, 어둠 속에서 붉은빛과 청색빛이 번쩍였다. 마치 성난 경고등처럼 강렬하게.
적색과 청색… 다른 신들도 보고 있는 건가?
담담하게 상황을 보는 세티와 달리, 녹색 신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진짜 경고등이었구만.’
라쉬크의 생각과 상관없이, 녹색 신은 새로운 주사위를 하나 더 꺼냈다.
이번에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주사위였는데, 위에는 눈금 대신 검은 외눈이 그려져 있었다.
눈썹이 그려진 타원형 눈.
뭔가 특별한 의미가 담긴 듯, 눈에는 특이한 선 세 개가 그려져 있었다. 옆으로 하나, 아래로 각각 길고 짧은 선이 두 개.
뭔지 몰라도 1달러 뒷면에 그려진 눈동자와 비슷해 보였다. 종교적인 상징일까?
아무튼, 녹색 신은 성녀에게 물었다.
『우리의 딸아, 너의 소원은 무엇이니?』
“어… 제 소원이요? 저는….”
성녀는 은근슬쩍 세티를 바라봤다.
안대로 얼굴이 가려졌음에도, 성녀의 속마음을 읽은 세티는 ‘3p 어쩌고 하면 죽인다.’ 라는 표정과 손짓을 보냈다.
제길, 성녀는 다시 녹색 신을 보며 말했다.
“꼭 저를 위한 소원만 빌어야 하나요?”
『아니, 남을 위해서도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건 한 번뿐인 선물이란다. 이 기회를 남을 위해 사용할 거니?』
“예, 전 이미 원하는 건 하나 빼고 다 이뤘… 크흠, 예. 남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찌릿. 세티가 노려보자마자 성녀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녹색 신이 주사위를 드는 가운데, 성녀가 말했다.
“여명이 복수를 이룰… 아니, 아니지. 여명이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녹색 신은 정말로 그런 걸 원하냐 거나, 더 좋은 소원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주사위를 던졌다.
데구르르- 탁! 이번에는 6이었다.
도박으로 치면 대성공에 가까운 수. 어째서일까, 세티는 녹색 신이 소리 없이 웃고 있다고 느꼈다.
『내 예상보다 더 훌륭한 만남이 되었구나. 너희 둘 모두에게 고맙구나.』
“평소에 도와주실 걸 생각하면 고마워할 쪽은 저희인걸요.”
평소와 달리 예의가 가득한 성녀의 대답. 기쁜 말이었던 걸까? 녹색 신의 머리 위로 꽃이 피었다.
아무튼, 녹색 신이 성녀를 한 번 더 끌어 안아준 뒤, 그대로 떠나려는 찰나.
“저, 저는 뭐 없나요?”
주눅 들어있던 라쉬크가 물었다. 어둠 속으로 반쯤 몸을 집어넣은 녹색 신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에게 필요한 건 이미 그가… 이런, 이것도 안 되느냐? 이래서 운명이란.』
녹색 신은 다시 한번 번쩍이는 붉은 빛을 보며 투덜거린 뒤,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너는 네가 맹세한 신에게 빌거라. 뭐어… 만나서 오줌이나 안 싸면 다행이겠지만.』
“예?”
맹세한 신? 난 그런 신 없는데? 라쉬크가 당황하는 사이, 녹색 신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
…지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신은 뭔가를 잊어먹은 듯 다시 어둠을 가르고 튀어나왔으니까.
설마? 라쉬크가 마지막 희망을 품었으나, 녹색 신은 대뜸 세티에게 다가갔다.
『아, 그리고. 검은 양아, 나는 네 가족계획에 찬성한단다. 아무렴, 용사 혈통을 되살리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가족… 뭐요? 성녀와 라쉬크가 동시에 세티를 바라봤다. 그녀는 표정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청색의 조언은 무시하렴. 지혜보다 사랑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 법이니! 암, 한 명씩만 낳아도 축구팀을 만들 정도는 되어야지!』
“아니, 저, 그게….”
청색 신께서 무슨 조언을 했길래, 세티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거지?
성녀가 나중에 기도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어둠 너머에서 청색과 붉은색의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런, 진짜로 시간이 다 되었구나. 아쉽지만 나는 이만 가보마.』
“….”
『아, 맞다. 축복, 축복! 검은 개야, 내 너를 축복하니, 너는 마땅히 장자를 낳을 것이다!』
녹색 신은 그렇게 끌려가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은 세 명의 여자는 조용히 신이 사라진 구멍을 바라봤다.
짧은 침묵.
어둠 속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세티가 애써 말을 돌렸다.
“아무 위압감도 느끼지 못한 걸 보면, 신께서 특별히 신경 써주신 모양이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건 팔짱 낀 성녀의 헛기침과 라쉬크의 뚱한 눈빛 뿐.
세티는 침묵 속에서 속마음을 까발린 신을 미워해야 할지, 아니면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축복에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소리치고 있었다.
-제푼! 좌익으로 가라! 기관총 포대가 설치되면 끝장이다! 가서 막아!
검은 말 위에 탄 그는 묵직한 검과 방패로 무장한 채, 총과 포탄이 오가는 전장에서 끝없이 소리쳤다.
-단장은 정면으로 가십시오! 어서요!
-나머지 부대는 전부 우익으로 달려! 민병대를 지원 한다! 지금 당장!!!
-산초! 제길, 너밖에 없나? 당장 깃발을 들고 날 따라와라!
마나가 담긴 남자의 목소리를 따라, 제국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전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나가 뒤섞인 외침보다, 무전기가 더 효율적이라서? 전선을 압박하는 프랑스의 전차 때문에?
아니, 애초에 전력 차가 너무 컸다.
전차와 외인부대, 심지어 주변 보병을 전부 끌고 온 적과 달리, 이곳은 제국기사단과 민병대가 전부였다.
덤으로, 민병 중 절반은 총소리만 들어도 겁에 질려 쓰러질 초짜에 불과했다.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초인의 기적이라 불러야 할 상황.
하지만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모두 버텨라! 제국의 지원군이 올 거다! 모두 버텨!!
그가 희망을 내뱉고, 단장이 버티고 있기에. 두 사람이 누구보다 앞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전선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영웅도 영원히 싸울 수는 없는 법.
텅! 어디선가 날아온 눈먼 총알이 그의 애마를 관통했다. 흑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부단장!!
깃발을 든 산초가 그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남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의 말은 그렇지 못했지만.
푹!
남자가 말의 목을 찔러 안락사 시키는 사이, 산초가 물었다.
-부단장, 후퇴해야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빌어먹을 황제는 이 전쟁을 빨리 끝낼 생각밖에 없습니다. 지원군을 얻으러 간 전 단장은… 이미 돌아가셨을 겁니다.
산초의 말은 지극히 이성적인 동시에 옳았다. 하지만 기사란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 법.
-그렇다면 더더욱 후퇴할 수 없지. 산초. 새로운 기사단장의 첫 전투를 패배로 장식할 거냐?
-부단장!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야. 이길 수 있다. 저기 참호 바깥 보이냐? 녀석들은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너무 오만해졌다. 지휘부가 너무 앞으로 왔다고. 우리가 가서 저놈들만 처리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
-그리고 이 전투만 이기면,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있어. 우리의 승리를 본다면, 분명 다른 왕국과 귀족들도 호응하지 않을 수 없겠지… 어떠냐? 목숨을 걸기에 충분하지?
산초는 입술을 꾹 다물면서도,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남자는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자.
-아, 시발, 예, 갑시다. 부단장, 가서 뒤집시다!
두 사람은 그대로 다음 참호를 향해 달렸다. 저 멀리서 외인부대와 교전 중인 단장 또한 호응하며 프랑스군을 뚫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남자는 승리를 확신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그의 시야에는 혼비백산한 적군 수뇌부가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검을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쉬며 팔에 힘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검을 적의 피를 마시지 못했다.
-산초! 깃발을 높이 들- 엎드려!
어디선가 무언가가 날아와, 그의 팔을 꿰뚫었으므로.
콰앙!
그의 팔이 갑옷 채로 폭발하며 동강 났다. 고통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속에서, 남자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이건 포탄이다. 누구지? 어떻게 이런 각도에서 포탄을 저격할 수 있는 거지?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그는 조금 전 포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방패를 들었다.
콰앙!!
포탄과 충돌한 방패가 찌그러진다. 방패를 든 그의 팔뼈도 함께 부러졌다.
양팔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참호로 들어갈 틈은 벌 수 있었다.
-부단장!!
산초는 깃발을 내던지고 그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승리 어쩌고 한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산초를 향해 말했다.
-산초, 당장 단장을 모시고 후퇴해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승리할 수 있다고 한 건 부단장 아니었-
남자는 산초의 말을 끊었다.
-이곳에 미군이 있다.
-그게, 무슨… 미국은 중립 아니었습니까?
-정확한 건 모른다. 하지만 이 포탄 저격이 있는 한 승리는 불가능해.
-….
-가라, 내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 산 사람은 살려라.
-팔 병신이 돼서 무슨 소립니까? 제가 남겠습니다. 부단장께서는…!
퍽! 부단장은 성을 내는 산초를 걷어찼다. 마치, 다리만 남은 상태로도 싸울 수 있다는 듯이.
-다음 부단장은 너다.
-부단장…!
-내가 모시던 전 단장은 자신이 모시던 황제의 손에 뒤졌다. 새 단장은 네가 모시는 게 낫겠지.
-그런… 그런 좆같은 유언이 어딨습니까?
-약속이 있으니, 유언은 좆 같아도 돼.
약속. 첫째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는 그 하찮은 약속.
산초가 성을 내려는데, 부단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명령이다. 가라. 가서 네 단장을 구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 물러나라.
남자의 말이 끝나고 얼마 동안, 산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콰앙!!! 저편에서 포탄이 터진 직후, 그는 등을 돌렸다.
-먼저 가십시오. 언젠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늦게 와라.
남자는 멀어지는 산초의 등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방패를 들고 있던 손으로 깃발을 잡았다.
부러진 팔뼈에서 고통이 올라왔지만, 초인의 육체는 깃발을 들어 올렸다.
말은 필요 없었다. 남자는 깃발을 든 채 참호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달렸다. 이미 도망친 적의 수뇌부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참호를 향해서.
그리고, 쾅!
포탄이 그의 가슴 갑옷을 후려쳤다. 맥없이 바닥을 구른 그의 시야로, 멀어지는 산초가 보였다.
다행이란 생각과 동시에, 한가지 깨달음이 떠올랐다.
나를 노리고 있었군.
‘왜’냐는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구멍 난 가슴에서 쏟아지는 피가 너무 많았으므로.
전장에 쓰러진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적어도 포탄이 산초와 새 단장을 노리진 않을 테니까.
그것을 끝으로,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군가 그의 시체를 네크로맨서들에게 넘길 때까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우웨엑-!
여명은 시체와 흙이 뒤섞인 참호 위에서 속을 게워 냈다.
썩은 내와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 때문은 아니었다.
고작 그런 것에 토하기엔 그가 너무 오랫동안 청소부로 살아왔다.
그가 속을 게워 내는 건, 죽음의 경험 때문이었다.
『첫 번째 전쟁은 어떠한가?』
검은 신은 이곳으로 그를 끌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했다. 여명은 퉤- 입 안에 남은 위산을 뱉으며 말했다.
“…최악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각으로 직접 경험하는 전쟁이라니.”
『죽음과 최악. 그것은 모든 전쟁의 공통점이노라.』
“단순히 제게 최악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광경을 보여주신 건 아닐 텐데요.”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뭔가를 찾는 건 전적으로 너에게 달린 일이노라. 진의, 무술, 그리고 진실… 그 무엇이건, 네가 부디 이곳에서 배워가는 것이 있기를.』
뭔가를 찾는다… 조금 전까지 제국기사단의 전 부단장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던 여명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리며 쓰러진 전 부단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죽인 데스나이트이자, 처음으로 성불시켜 준 데스나이트.
“…빈손으로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좋은 시작이로다. 아직 기회가 더 남아 있으니… 이제, 다음 전쟁으로 가겠노라.』
검은 신이 손을 휘젓기 시작하는데, 여명이 손을 들었다.
“잠시, 모르닥이시여. 이분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저승으로 가서… 안식을 찾으셨습니까?”
『제국기사단 전 부단장, 사아베. 그는 죽음 속에서 안식을 찾았…. 아, 딱 하나 걱정이 있노라.』
“하나?”
『산초, 그 쑥맥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느냐고,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노라.』
여명은 입가에 남아있던 슬픔을 덜어내고 작게 미소 지었다.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검은 신은 아무런 평가도, 감상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손을 휘저어 여명을 다음 전쟁으로 이끌었다.
이번에는, 변경백이 직접 검을 휘두른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