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14)
을 위한 세계는 없다-614화(614/817)
EP.614 Out of Sight, Out of Mind (4)
참호 바깥 어딘가,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음의 소리였다.
폭발하는 화약 소리, 떨어지는 탄피 소리, 죽음에 맞서는 고함 소리, 그리고-
-아악!
누군가의 단말마.
-흐윽, 흑….
누군가의 길고 음울한 울음.
-죽여, 커흑, 죽이라고!!
-엄마….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 이름 거룩…
유언이 되지 못한 무수한 말들.
그 모든 죽음들 끝에, 프랑스군은 약간의 성과를 거뒀다.
변경백령 외곽의 작은 성곽 하나.
전선에 선 보병들이 보기엔 허망할 정도로 하찮은 곳에 불과했지만, 지도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이곳이 아주 중요한 요충지라고 주장했다.
수천 명의 아샤인들과 그에 맞먹는 양의 군인을 희생할 정도로, 가치 있는 곳.
대육군 12군단, 제16보병사단 소속의 한 청년은 지도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나치 쓰레기들을 무찌른 정부가 거짓말을 할 리 없잖는가.
그렇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탕!
청년의 총알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그가 노리고 있던 운 좋은 아샤인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비록 한 놈을 놓치긴 했지만, 성곽 내부 소탕 작전은 순조로웠다.
전투에서 패배한 찌꺼기들은 밀려드는 프랑스군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청년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성곽 내부로 돌진했다.
조금 전까지 성곽을 두들기던 죽음의 소리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아니, 누구보다 먼저 나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나치가 형을 죽인 순간부터, 그는 이런 날을 꿈꾸고 있었다. 눈물 젖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전쟁에 나설 만큼이나, 절실하게.
나치를 죽인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
덜그럭.
그때, 포격으로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총구를 돌리자, 조금 전 도망쳤던 녀석이 보였다.
-@#$%^&, ^&(#@%!
녀석은 힘껏 아샤어를 지껄였다. 청년은 아샤어를 전혀 몰랐지만, 녀석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며 지껄이는 말이야 뭐, 뻔했으니까.
-엎드려!
-@#$^-+… #(@!!!
-뒤지기 싫으면 엎드리라고!
청년이 총 끝으로 가슴을 몇 번 찌르고 나서야, 아샤인은 말뜻을 이해한 듯했다. 그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몸을 벌벌 떨었다.
-살려줄 테니까, 나치가 어딨는지 말해.
-%#@$??
-나치! 나치 새끼들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ㄴㅏㅇㅏㅉ1?
-그래, 나치! 너희가 이곳에 나치 전범을 숨겨 놓고 있는 걸 다 알고 왔으니까, 당장 안내해!
나치에게 안내하란 말을 몇 번 반복하자, 녀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은 앞장서라는 뜻으로 총구를 흔들었다.
곧, 아샤인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청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제 곧, 차원문 너머로 나치를 죽일 수 있다. 형의 복수를 할 수 있다.
훈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청년은 흥분 속에서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방아쇠는 당겨지지 못했다.
-@#$, @$%@!!!
-%^%@??
-지구인!
아샤인이 안내한 곳은 나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건 늙은이들과 어린이들이었다.
전투를 피해 도망친 민간인들…
-이 머저리 새끼가, 나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했잖아!!!
성난 청년은 개머리판으로 아샤인을 후려쳤다. 그러자 민간인들 사이에서 늙은 여인이 튀어나와 그와 남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 %#^#… %#^#.
여인은 무어라 지껄이며 양손을 싹싹 빌었다. 이번에도 청년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파리를 점령한 나치에게 자비를 구걸하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했으니까.
‘아들을 제발 살려주세요.’
총을 든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제기랄, 청년은 총구를 내리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나치가 어디 있는지만 말해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샤인은 계속 횡설수설했다.
설마, 나치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걸까?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일반인들이 뭘 알겠는가?
그는 ‘이곳에 꼼짝 말고 있어라’ 라는 제스처를 보여준 뒤, 밖으로 나가 아군을 불렀다.
-민간인 다수 발견! 지원 바랍니다!
한데, 그의 말을 듣고 찾아온 장교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잘했네. 병사. 이 전쟁을 끝낼 미끼가 하나 더 생겼군.
-미끼…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사항은 자네가 알 필요 없네. 자, 이제 이들을 끌고 나가지.
청년은 찝찝함 속에서 민간인들을 이동시켰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걸음마다 이어졌지만, 조국과 대육군이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 불길함을 밀어냈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온 그의 시야로, 무너진 성벽 너머 개활지에 모인 무수한 민간인들이 보였다.
어림잡아도 수천 명은 넘을 법한 숫자.
청년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소탕 작전에 뛰어든 다른 전우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자신들도 모른다는 답변뿐.
나치는 어딨지? 벌써 잡은 건가?
청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금 전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장교를 찾아갔다. 불행한 선택이었다.
그는 장교가 야전 통신기에 대고 하는 말을 듣고 말았으니까.
-OAS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준비한 대로 진행해라. 집결지를 조준하고, 아래 지뢰를 설치해. 최대한 녀석의 정신을 흔들 수 있도록! 민간인 피해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 녀석만 잡으면 전쟁은 끝….
철컥.
청년은 장교의 등에 총을 겨눴다. 장교는 통신기를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뭔가, 병사?
-학살… 대육군이 학살을 저지르려는 겁니까?
-아니, 이건 군사 작전일세.
-민간인을 터트리는 게 군사 작전입니까?
장교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안타깝게도 진결지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까지 그를 도와주러 올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곳으로, 변경백이 오고 있네.
-…변경백?
이 전쟁의 원흉이자,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는 아샤 최강의 초인.
그 이름을 들은 청년의 총구가 흔들리자, 장교가 덧붙였다.
-그를 죽이면 전쟁도 끝일세. 하지만 그 정신 나간 초인을 잡기 위해선, 화력만으로는 부족하지.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초인은 정신적인 공격에 취약하다네.
-…변경백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민간인들을 죽이겠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가 지키겠다 맹세한 영지민들이지.
-….
-미친 짓이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낼수록 피해자도 줄어드는 법. 병사. 고작 수천 명의 희생으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싼값 아닌가?
싼값.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그가 끌고 나온 어머니와 아들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우린 나치를 잡으러 온 겁니다. 나치가 되러 온 게 아니라.
-변경백은 히틀러야. 그것도 일본에 떨어진 핵무기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진 히틀러! 그를 죽이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면 안 된다는 걸 왜 모르는가?
-Merde! 지랄 말고, 당장 명령 취소하십시오! 제네바 협약 제 4협약에 의거해, 민간인을 향한 적대 행위는 전쟁 범죄입니다!
-아샤는 제네바 협약의 적용 대상이 아닐세.
-그들도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빤히 서로를 노려봤다. 팽팽하게 늘어난 긴장감 속에서, 청년의 이마에 땀방울이 흐르는 순간.
장교가 권총을 뽑았다.
탕!
두 개의 총성이 교차했다. 그러나 쓰러진 건 청년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너같이 나약한 것들 때문에 조국이 나치에게 유린당한 거다!
장교는 발목에 총을 맞은 청년과, 청년의 총에 맞아 파괴된 야전 통신기를 번갈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통신기야 다시 가져오면 그만인데, 고작 몇 분을 벌자고 목숨을 걸다니.
-멍청한 것.
장교는 성난 발걸음으로 쓰러진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권총으로 정확히 그의 미간을 겨눴다.
철컥. 권총의 총구가 번뜩이고, 청년의 머리통이 날아가기 직전.
-아악!
누군가 장교의 손아귀를 꽉 붙잡았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권총 그립과 손이 동시에 으스러질 정도였다.
-너, 너는…!
장교가 자신의 손을 붙잡은 자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이 장교의 턱을 후려쳤다.
장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청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을 살려준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진하디진한 황금색 눈동자.
너무나 유명한 그 눈동자 아래로, 청년이라기엔 너무 성숙하고, 중년이라기엔 아직 어린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변경백. 그가 왔다.
-고맙네. 덕분에 시간을 벌었군. 자네의 용기가 수많은 목숨을 살린 걸세.
-….
적 수뇌의 감사 인사는 기쁘지 않았다.
청년은 민간인들이 모인 방향으로 걸음을 돌린 변경백의 등을 보다가, 떨어트린 소총을 들어 올렸다.
-왜! 왜 당신 같은 사람이 히틀러와 손을 잡은 거지??
그러자 변경백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년은 더욱 크게 소리쳤다.
-당신이 나치 잔당을 숨겨주지만 않았어도…! 이 전쟁을 일어나지 않았어!
-….
변경백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곧,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치를 향한 복수심 때문에 참전한 거라면, 고향으로 돌아가게. 히틀러는 이미 내가 죽였으니.
-뭐…?
-복수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돌아가게. 이 추악한 전쟁에 참여하기엔, 자네는 너무나 정의로운 사람 같으니… 부디, 정의 때문에 죽지 말게.
청년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지만, 변경백은 이미 그의 목소리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 있었다.
그는 변경백을 따라갔다.
총에 맞은 종아리 때문에 거의 기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방향을 틀릴 일은 없었다.
폭발하는 화약 소리, 떨어지는 탄피 소리, 죽음에 맞서는 고함 소리 덕분에.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민간인들이 모인 집결지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순간.
청년은 보았다.
주먹질 한 방에 탱크를 막아서고, 검으로 총알을 막아내는 초인을.
그래, 장교의 말이 맞았다. 변경백은 정말로 핵무기에 비견되는 강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조국의 말은 틀렸다. 변경백은 나치와 손을 잡지 않았다. 저런 고귀한 사람이 히틀러와 손을 잡을 리 없었다.
총알에 맞아가며 민간인들을 지켜내고, 총을 쏜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이라니.
총알과 폭발이 이어지는 전투 속에서, 사망자는 거의 없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활동이 저랬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압도적인 힘이 선한 방향으로 쓰이면 저런 정신 나간 일도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청년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대로 탈영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조국으로 돌아가, 변경백과 전쟁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자.
2차대전 이후 성숙해진 시민 의식에 호소한다면, 이 전쟁을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
청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장을 떠났다.
어쩌면 그의 행동은 역사를 바꿨을지도 몰랐다.
프랑스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게 하고, 알제리와 베트남, 그리고 변경백령에 평화로운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원문을 넘기 직전, 그는 살해당했다.
술에 취한 외인부대가 ‘실수로’ 쏜 눈먼 총알에 맞아서.
우습게도, 그들은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죽은 청년이 탈영병이며, 살인에 고의가 없었단 사실이 합쳐진 결과였다.
낄낄 웃으며 군사 법원을 벗어난 그들의 군번줄에는 [OAS]란 단어가 적혀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까.
[준비되었습니다. 명령을.]지도를 내려다보던 내게 통신이 들어온 직후, 나는 포격을 지시했다.
초인과 기마 기사들에게 효율적인 전술 포격이 대지에 화염의 낙인을 새기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요새의 벽면을 두들겼다.
요새는 아샤의 기술력으로 지어졌음에도 잘 버텨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마법 덕분이었다.
그건 콘크리트나 철근과 달리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강도를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얼마나 더 포격을 퍼부어야 요새를 함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협곡으로 병력을 보내고 싶었지만, 야반 협곡 참사의 교훈은 나를 망설이게 했다.
두메아 가주 한 명이 전차 부대 하나를 모조리 깡통으로 만든 참사.
병사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장교인 나는 달랐다. 나는 초인들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잘 알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요새 때문이 아니라, 이 요새 바로 뒤에 있는 변경백의 본성 때문이었다.
무리해서 요새를 뚫다가 변경백 본인이 내려온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독가스를 사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는 부하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 전쟁은 이미 승리에 가까워져 있었다. 더러운 방식은 지양할 때였다.
지금은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서 한걸음 떨어져, 어떻게 이길 거냐는 고민을 해야 했다.
물론, 가장 좋은 그림은 변경백이 직접 항복하는 거였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지구는 대 초인 전략을 수립했고, 개개인의 영웅적 활약으로 전장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변경백은 거듭되는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있었다. 아마 자존심 때문이겠지.
정부는 소련을 통해 황제를 닦달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이 미적거리는 탓에 발만 구르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괜한 기대를 접고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포격이 끝나자마자, 애국 마법사들을 불러 요새를 탐지했다.
-별 피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녹아내리고 부서진 요새 벽 너머에는 아직도 병력이 남아있었다. 왜 저렇게까지 버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너희를 지켜야 할 변경백은 전선이 아닌 본성에 처박혀 있거늘.
사회계약설을 배우고, 공화국을 지지하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무를 방기한 귀족을 왜 아직도 지지하는가?
왕의 목을 자른 국가의 장교인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독가스를 쓰자고 주장하는 멍청한 장교를 내버려 둔 채, 전선으로 향했다.
다른 장교와 부하들이 기겁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조국에는 자신을 대체할 인재가 많았다.
자신의 행동으로 아샤인의 습성에 대해 알면 좋은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는 직접 요새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군용 차량 위에서 가까워지는 협곡 요새를 바라보길 잠시.
요새에 도착한 나는 조금 이상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생명 반응이… 너무 많습니다. 반대편에서 공격받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면 처음 생명 반응 감지가 틀렸거나. 나는 마법사들을 불신하는 대신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공중 정찰을 끝낸 아군이 대답했다.
[괴수입니다! 접근도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괴수? 변경백령의 가장 핵심 장소에서 웬 괴수?
나는 부대로 돌아가지 않고, 운전병에게 이대로 협곡 위로 갈 것을 명령했다.
정신 나간 짓이었다. 변경백을 비롯한 몇몇 초인들은 차량보다도 빨랐다.
만약 아샤인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애써 쌓은 커리어를 깡그리 날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변경백의 본성으로 향했다.
커리어는 이미 2차 대전 때 망쳐서였을 수도 있고, 요새 병력이 왜 이제야 후퇴했는지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아무튼.
마침내 도착한 협곡 위에서 내가 마주한 건…
-시발, 대체 저게 뭡니까?
운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역으로 묻고 싶은 건 나였다.
대체 왜 변경백 본성 지역에 괴수가 넘쳐나는 거지?
밀랍 산맥을 넘어오는 괴수를 백 배쯤 늘리면 저 정도일까? 협곡 위에서 확인한 숫자는 공중 정찰병이 말한 것 이상이었다.
요새 주변에 모여있는 놈들만 봐도 족히 수만 마리가 넘어 보였다.
조국이 벌인 짓일까? 그럴 리 없었다. 그의 조국은 저런 짓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럼 우연인가?
하지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리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뜩, 변경백이 전장에 자주 나오지 못한 이유가 저 괴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변경백이 거의 전장에 나오지 못하고, 두메아 가주와 기사단들이 꾸준히 후방으로 빠졌던 게, 휴식이 아니라 괴수를 막기 위해서라면?
나는 침을 삼켰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조국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뒤집어쓸 테니까.
전쟁의 명분인 ‘나치 잔당’ 소리는 이제 군인들조차 믿지 않고 있는 판이었다.
거기다 괴수와 싸우는 변경백의 뒤를 쳤다고?
변경백의 아들이 히틀러와 떡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최초이자 최악의 침략 전쟁이란 꼬리표를 지울 수 없으리라.
아샤인들은 용사의 뒤통수를 친 우리를 두고두고 저주할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틈을 영국과 다른 국가들이 파고들겠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통신병에게 말했다.
-통신병, 사령부와 연결해라.
-네, 알겠습니다.
-연결되는 대로, 우리가 변경백의 괴수 처치를 지원할 수 있는지 물어봐라. 답변이 오는 대로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해.
변경백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국이 괴수를 이용해 변경백을 쓰러트렸다는 소문이 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판단을 끝낸 나는 사령부의 답변이 돌아오기 전까지 괴수와 싸우는 요새를 관찰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콰아앙 – !!!
황금빛 벼락이 괴수 떼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건 검을 든 사람이었다.
변경백.
갑자기 등장한 그는 그대로 주변의 괴수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검 한 번에 수백 마리의 괴수가 일제히 쓸려나가는 모습이라니!
나는 잘 몰랐지만, ‘나’의 속에서 이 순간을 경험하는 천여명은 달랐다.
그는 변경백이 사용하는 무술이 용사의 무술이라는 걸 알았다.
1초식, 횡베기.
2초식, 찌르기.
황금빛으로 물든 검기는 천여명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끔찍한 대량 학살기였다.
괴수에게 써서 망정이지, 만약 사람에게 썼다면?
그가 깨달음에 전율하는 가운데, 통신병이 사령부의 대답을 전했다.
-후퇴 명령입니다. 사령부가 변경백 본성에 폭격을 날리겠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변경백이 괴수를 잡는 와중에 본성에 폭격을 날리자고? 여론을 어떻게 하려고? 절대 안 된다고 전해!
-사령부의 명령입니다.
-전선 책임자는 나다! 사령부에게 똑바로 전해, 일단 괴수부터 처리-
그때, 통신병이 권총을 뽑아 그와 운전병을 쐈다.
탕, 탕- !
군용 차량 유리가 붉게 물들었다. 운전병과 달리 즉사하지 못한 나는 고통 속에서 물었다.
-이건, 사령부의… 지시인가?
-그보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 장군님은 변경백에게 살해당한 걸로 알려질 겁니다.
-미친, 새끼들…! 조국의 명예를… 쓰레기통에…!
-명예? 뭘 모르시는군요. 명예는 승자의 것입니다.
탕! 한 발 더 발사된 총알이 나의 이마를 꿰뚫었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통신병의 목걸이에 적힌 [OAS]란 단어였다.
변경백은 분노 속에서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건 분노였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분노.
머리가 아플 정도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분노를 연료 삼아, 그의 힘은 정점에 이르렀다. 하늘이 전율할 만큼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 힘 앞에서, 프랑스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차와 보병, 포병으로 이루어진 촘촘한 포위망을 준비했음에도, 변경백은 포위를 박살 내며 내달렸다.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이제 곧 프로방스 자치령이라 불리게 될 땅이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는 너무 강했다. 강함이란 표현이 부족할 만큼 강했다.
대체 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는지 모를 만큼.
아니,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변경백이 살아있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변경백령이 전부 잿더미가 된다고 해도, 변경백이 살아 있는 한 지구는 공포에 떨어야 하리라.
프랑스는 그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강한 줄 알았다면, 이런 전쟁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 되돌릴 길은 없다. 독가스를 쓴 시점에서 정의는 죽었고, 괴수를 끌어온 시점에서 평화 또한 죽었다.
남은 건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 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죽는 건 프랑스군뿐이었다. 변경백의 손아귀에서 용사의 무술이 펼쳐질 때마다, 죽음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1초식. 무수한 이치가 담긴 횡 베기를 따라 전차들이 울부짖는다.
콰아앙- !! 폭발한 엔진과 포탄의 비명이 땅을 불태웠다.
-사, 살려줘!
-아악! 뜨거워!
-의무병!!
운 좋게 살아남은 ‘나’는 불이 붙은 채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변경백은 황금빛 벼락이었고 지상에 강림한 하늘의 천벌이었다.
2초식. 살의로 가득한 찌르기가 지나간 자리로, 전투기와 장거리 포대들이 사라졌다.
전투기 조종석에서 2초식에 맞은 ‘나’는 1초식에 맞아 죽은 자들에 비해 운이 좋았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죽었으니.
-1차 포위망이 뚫렸다! 2군 투입해!! 당장!!!
변경백은 폭발한 탱크 무전기에서 울리는 다급한 통신보다도 빨랐다.
하지만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가득 쌓인 시체들과 그 위에서 꿈틀거리는 심장 하나.
수천구에 가까운 시체를 집어삼킨 심장은 검은 액체를 한껏 뽑아내 커다란 거인의 형상으로 자라났다.
마왕.
아샤인들이 두려움 속에서 부르는 존재, ‘나’는 조용히 변경백을 내려다봤다.
검게 물든 시야 너머로 그는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었다.
아니, 별은 아니다. 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긴 했지만- 그는 아직 인간이었다.
태어나고, 늙고, 끝끝내 죽어버리는 인간.
그러니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함정이란 걸 알면서도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 얼마나 불쌍한 자란 말인가.
자신들이 마왕을 조종한다고 믿는 프랑스군만큼은 아니지만, 마왕이 생각하기에 변경백 또한 불쌍한 자였다.
너의 동료는 성녀는 어디 있는가? 탐험가는? 마법사는?
모두 흩어졌다. 돌아올 수 없고,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너는 혼자다.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다.
그것이 시나리오의 의지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끔찍한 악의가 너에게 원하는 바이다.
마왕은 구슬픈 시를 읊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검은 점액질로 만들어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섬뜩한 비명뿐이었다.
-꺄아아아악!!!
마왕은 움직였다.
다음 세계에서 자신에게 빙의할 누군가에게 방법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섬세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가까운 프랑스군의 전차를 들어 변경백에게 집어 던졌다.
콰아앙 – !! 전차의 폭발 사이로 변경백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마왕은 기다렸다는 듯 다른 전차를 잡고 휘둘렀다. 거대한 손에 들린 프랑스 전차는 15톤짜리 망치나 다름없었다.
후우우웅 – !
공기와 땅이 놀라 몸을 떨 정도였으나, 마왕의 공격은 어느 것 하나 변경백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분노한 상태였다. 공방을 주고받는 탐색전 따윈 없었다.
변경백은 번쩍, 검을 쥔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검기가 검을 따라 치솟았다. 검기는 마치 하늘을 꿰뚫는 거대한 섬광처럼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뭐지?
‘나’, 마왕은 그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천여명은 겁을 먹긴커녕, 변경백의 검에 깃든 섬광의 정체를 깨달았다.
용사의 무술 3초식.
드디어 훔칠 무술을 마주한 여명은 집중해서 검기의 움직임을 쫓았다.
4분 뒤, 머리 위로 핵미사일이 떨어질 거란 사실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