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17)
을 위한 세계는 없다-617화(617/817)
EP.617 Coram Deo (수정)
모든 빨갱이는 무신론자인 동시에 광신도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기념관 앞에서 열린 리처드 닉슨의 재선 연설 중 발췌]“세티, 설마… 임신했어?”
현실로 돌아온 여명이 처음 들은 말은 그것이었다.
뭐? 임신? 이건 무슨 개소리야.
놀란 그는 아직 뻑뻑한 눈을 억지로 비벼 떴다.
흐릿한 시야로, 정색한 세티와 그런 세티의 배를 만지작거리는 성녀가 보였다.
“아… 임신이 아니라 잉태의 축복이구나. 원래 이런 축복 잘 안 주시는 분인데, 우리 세티 완전 땡잡아… 으악!”
여명과 세티는 거의 동시에 성녀의 볼기짝을 때렸다. 짜악! 다분히 감정이 실린 일격이었고, 성녀는 비명과 함께 넘어졌다.
성녀가 바닥에서 팔딱거리건 말건, 뒤에 있던 라쉬크가 말했다.
“…뭐야, 언제 왔어?”
“방금요.”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한 번 더 눈을 비빈 뒤, 세티와 성녀를 번갈아 봤다.
“임신은 또 뭐고, 잉태의 축복은 또 뭐야?”
세티는 슬쩍 배를 숨기며 대답했다.
“어… 녹색 신께서 우릴 찾아오셨어. 여명, 너는?”
“검은 신과 만났어.”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쉬크는 뒤통수를 긁었다.
무슨 소개팅 다녀온 것도 아니고, 신을 만났단 이야기를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진짜로 신을 보지 못했다면… 아니, 신을 봤음에도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 도망가고 싶다.’
그런 구더기 공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티와 여명은 조금 전에 있던 일을 주고받았다.
세티가 말했다.
“전대 성녀님은?”
“그게… 아마 내가 신과 만날 수 있도록 고의로 이 장소에 묻히신 거 같아. 다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
“…마왕.”
“….”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자.”
짤막하게 대화를 끝낸 두 사람은 아직도 엉덩이를 붙잡고 있는 성녀를 챙긴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구더기 공주는 부랴부랴 두 사람을 따라가다가, 운명의 구슬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에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얘들아?”
“…라쉬크, 왜 그래요?”
“그런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나 없을 때 하면 안 될까? 응? 난 그냥 얌전히 포션이나 만들고 있을 테니까, 신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너희끼리 해주라….”
아, 그건 여명이 미처 배려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한 팀이긴 해도 구더기 공주는 이런 일과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으니… 여명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세티가 한발 앞서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 볼 거 다 봤잖아요. 그냥 받아들여요.”
“…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속담도 있잖아? 아직 안 늦은 거 아닐까?”
세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구더기 공주는 울상이 되었다.
“나, 나는 그냥 호문쿨루스가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런 일을….”
그 질문의 답은 성녀에게서 나왔다.
“그러게 누가 여명이랑 엮이래요?”
“야 이, 내가 엮였냐?! 니들이 나 찾아온 거잖아!”
“그랬나?”
“그랬어! 이제는 기억도 못 하냐?!”
그렇게 구더기 공주가 성난 목소리로 억울함을 토로하는 가운데, 여명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도착한 검은 집 1층에서 그를 반겨주는 건 어둠뿐이었다.
검은 신께 무슨 언질이라도 들은 걸까, 그들을 안내했던 우시안 사제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명은 굳이 그를 찾지 않고 그대로 검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네 사람은 빠르게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펑, 펑!
저 멀리, 중앙 신전 앞에서 터지는 폭죽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덕분.
“총대주교가 드디어 미쳤나 봐. 이 시간에 무슨 폭죽이야?”
“나, 난 순례자용 호텔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 되도록 부르지 말고. 알겠지?”
성녀의 짧은 투덜거림과 구더기 공주의 작별 인사를 끝으로, 여명은 숙소에 마련된 성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
그녀의 방은 여성용 숙소 내부에서도 유난히 큼지막하고 고급스러웠다.
특히 다양한 성물들이 그려진 천장이 어찌나 화려한지, 천장을 올려다본 여명이 살짝 기가 질릴 정도였다.
뭐, 아무튼.
여명이 검은 신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전에, 세티가 나머지 일행을 불렀다.
쇠미리, 살로메, 그리고 처제들.
-불렀어요? 전 꿈으로 알려주셔도 되는데.
-구더기 공주 말고 날 데려가지….
-안녕, 형부?
그렇게 일행이 다 모인 후에야, 여명은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세세하게 설명하자면 길고, 겪은 것만 설명하자면 짧은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는 용사 파티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OAS? 육군비밀조직? 그거 드골이 죽은 뒤에 해체된 거 아니었어요?
다큐멘터리에선 모르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내뱉는 쇠미리.
-뇌관을 먼저 터트리면 안 터지는 핵… 옛날식이네요. 요즘은 다탄두라 그런 거 안 먹혀요.
핵무기에 대해 중얼거리는 살로메.
그리고…
“아, 맞다. 아빠. 감옥에 있지.”
아버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던 성녀까지.
“….”
이 불효녀를 어찌해야 하나 여명이 한탄하는 가운데, 녹색 양, 시스가 한술 더 떴다.
“성물의 방은 성녀님도 들어갈 수 있다면서요. 그러면 성물지기님은 굳이 안 구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
“아이, 그런 눈으로 보시면 부끄러워요.”
여명은 막내의 이마에 꿀밤을 때려야 할지, 그건 그렇네- 라고 맞장구치는 성녀를 때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둘 다 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세티가 말했다.
“아니, 성물지기를 구하자. 신께서 직접 한 조언이잖아.”
여명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들도 군말하지 않았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래서, 성물지기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시리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성녀에게로 쏠렸다. 유일하게 성도의 상황을 아는 사람.
성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응? 나도 몰라.”
“….”
일행들이 거의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자마자, 성녀가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있을 만한 곳은 알아. 성도에서 사람을 가둬 둘만 한 곳은 많지 않으니까. 검은 법원의 감옥, 붉은 병영의 취조실, 그리고….”
한 번 뜸을 들인 성녀는 여명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중앙 신전 깊숙한 곳, 억류의 방.”
억류의 방. 그곳은 전대 성녀님이 평생 갇혀 있던 곳이었다.
시이나.
성녀님의 아카데미 비밀 호위이자, 총대주교가 성기사단에 심어놓은 심복.
여명에게 패배해 척추가 끊어진 뒤… 아니, 데스나이트 선배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그녀는 깨달았다.
성녀님을 옳은 길로 되돌리겠다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일개 성기사가 올바른 삶을 운운하는 것도 오만이라 할만한데, 하물며 그 상대가 성녀님이라니.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말없이 호위에 전념했다.
호아나와 바라나 같은 걸출한 성기사들, 심지어 단장까지 중간부터 호위에 참여한 만큼 그녀는 보조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배울 게 많았다.
작게는 전투기술부터, 크게는 삶에 대한 관점까지.
성녀님이 국밥에 직접 깍두기 국물을 부어주시는 소소한 행복은 덤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이 어엿한 한 명의 성기사가 됐다고 느꼈다.
하지만 성도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
[시이나 경. 총대주교께서 부르셨소.]시이나는 총대주교의 부름을 받아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생각을 바꾼들, 총대주교의 충견으로 지냈던 시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제를 따라나섰다.
지르지스 단장이나 성녀님쯤 되면 모를까, 총대주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길 잠시.
목적지인 중앙 신전 쪽에서 퍼엉! 폭죽이 터졌다. 시이나가 화들짝 놀라건 말건, 사제는 시큰둥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쇠똥구리라는 이상한 이름의 올림피아 참가자가 중앙 신전 주변에서 폭죽을 발사하고 있었다.
저건 또 뭐 하는 새끼야.
시이나는 당황 속에서 검을 뽑았다. 본인의 기분이 어떻건, 성기사로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 성기사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만! 이제 그만해 새끼야!”
지르지스 단장이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그는 폭죽을 터트리려는 쇠똥구리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값비싼 폭죽통을 짓밟아 버렸다.
“아오, 진짜 올림피아만 아니었어도 대가리를 콱….”
단장은 그제야 사제와 시이나를 발견했다. 시이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나쁜 어른을 쫓아가다가 들킨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 단장님. 저는….”
“어, 총대주교께서 부르셨냐?”
“네? 네, 그렇습니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보고 잘해라.”
그녀가 총대주교에게 성녀님의 일을 밀고하는 걸 빤히 알고 있을 텐데. 단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줬다.
뭐지? 이렇게 친절하신 분이 아닌데? 저번에 여명과 싸운 뒤로 뭔가 바뀌신 건가??
시이나가 당황하건 말건, 지르지스 단장은 쇠똥구리를 질질 끌고 떠났다.
멍하니 그의 뒤를 보던 시이나는 크흠! 사제가 내뱉은 헛기침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총대주교님을 기다리게 하실 참이오?”
“아… 아닙니다.”
시이나는 곧바로 사제를 뒤따랐다. 신전에 도착한 빠른 걸음으로 높은 연단과 계단을 올랐다.
한데, 신전 내부에 들어선 그는 이상한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총대주교님이 계시는 방향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이윽고, 사제와 시이나는 어딘지 모를 외딴 방에 도착했다. 그녀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외진 곳이었다.
“도착했소. 총대주교께서는 이 땅의 성자이시니, 부디 그분의 명을 잘 이행하길 바라오.”
그런 격려를 끝으로, 사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시이나는 조용히 방문을 바라보다가, 사제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거라.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부를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철창이 세워진 방에는, 시뻘건 피가 가득했으므로.
피의 주인은 총대주교가 아니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의 주인은 그녀도 잘 아는…
“…성물지기님?”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총대주교가 고개를 저었다.
“성물지기가 아니다. 지금은… 성물 도둑이지.”
“….”
“와서 앉거라. 시이나. 너에게 줄 임무가 있다.”
그렇게 중얼거린 총대주교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거대한 책을 집어 들었다. 제국 황가의 족보였다.
황가의 족보가 왜 이곳에?
의문을 삼킨 시이나가 앞에 앉기 무섭게, 총대주교가 쫘악-! 족보의 빈 종이를 찢었다.
그는 마법이 걸린 게 분명한 은은한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이 종이를 들고 숙소로 돌아가라. 그리고 천여명의 피를 묻혀오거라.”
“피요?”
“그래, 피. 마르기 전의 신선한 피여야 한다. 알겠느냐?”
“….”
시이나는 종이를 슬쩍 바라본 뒤,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임무를 내리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
“하지만 이건 알려주마. 곧 황태자가 성도에 도착할 것이다. 그 전에 피를 묻혀 오거라. 아주 중요한 일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거라.”
황태자가 온다고? 시이나는 살짝 겁에 질린 채 종이를 받았다.
총대주교는 턱! 다시 책을 덮으며 덧붙였다.
“너는 그와 원한이 있으니, 갑자기 습격해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너는 피만 묻혀오면 된다. 알겠느냐?”
“받들겠나이다.”
진심이 어떻건 간에, 시이나는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총대주교는 예법을 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일방적인 축객령. 시이나는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탁!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린 직후.
총대주교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채찍을 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성물지기의 등에서 흠뻑 피를 뽑아냈던 채찍이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군. 미안하네. 요즘 여러모로 바쁘다 보니.”
“….”
“자, 그럼… 각설하고.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지.”
총대주교는 손을 들었다. 한때, 흡혈귀들을 잡아먹었던 채찍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시카고에서 활약한 성녀의 호위, 그들은 대체 누군가?”